CAFE

불교를 말한다 !

1.내가 이해한 유식으로서의 마음구조

작성자은하의 돛|작성시간14.11.15|조회수453 목록 댓글 3

우리의 마음은 두가지 차원으로 되어있는데 그 하나가 심층에서 일체의 업종자들을 함장하고 있는 아뢰야식이고,  다른 하나는 표층에서 차별하고 분석하며 개념화 해내는 말나식과 의식이다. 

이 두 마음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순환하면서 지탱해 나가는 관계이다.

 

   아뢰야식은 말나식과 의식에 의해 분별되어진 업종자를 함장하고, 말나식과 의식은 아뢰야식에 함장되어 있던 업종자를 새롭게 분별해낸다.  

이렇게 상호의존적인 두 마음간에 절대적 선후는 없다. ..<아뢰야식>-<말나식 의식>- <아뢰야식>.. 이라는 무시무종의 순환성이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 의지하는 동시성이 있을 뿐이다.

어제의 <아뢰야식>이 오늘의 <말라식과 의식>의 대상이 되는 관계로 본다면 순환성이고,

지금 일어나는 이 마음이 <아뢰야식>과 <말라식 의식>이 함께 한다는 의미로 보면 동시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후가 없고, 동시적으로 드러난다고 하니... 그 무엇이 보다 본질이고 그 무엇이 보다 근원적이겠는가?

 

   그런데  불법에서 아뢰야식을 모든 종자를 함장하고 있는 장식이라고도  하지만 또한 모든 식의 근본이 된다는 의미에서 본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말나식이나 의식보다는 主가되는 식이라는 뜻인데.. 어찌하여 아뢰야식에 본식이라는 개념성을 부여했을까?

 

   위에 잠시 설명했듯이 유식에서는 우리마음을 심층의 아뢰야식과 표층의 말나식 의식이라는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여기서 아뢰야식은 의타기성으로서의 활동성을 의미하며 그러한 의타기성으로서의 활동성 자체는 망념에 물들지 않은것이기에 아뢰야식을 청정한 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표층식인 말나식과 의식은 그렇게 청정한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망분별을 일으켜   아뢰야식이 의타기로서 식전변하여 드러낸 현상계를 상주불변하는 영속성을 가진 대상으로

그리고 그 대상과 代하는 관계로서의 자아를 상정하는  허망분별을 일으키니 그것을   염오의 식이라고 말한다.

 

   좀더 설명하자면.. 말나식이라는 것은 이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아집 법집의 망념을 일으키는 관계이므로  아뢰야식이 말나식의 본이 된다는 것인즉  말라식의 망념은 아뢰야식에 연한 마음작용이라는 뜻이된다는 것이며,  

또한 의식이라는 것은 말나식이 일으켜놓은 아집 법집의 망념을 사실로 착각하여 아뢰야식을 자성적 자아로 오해함으로써 

스스로를  아뢰야식 자체로 간주하며  그러한 자아관념으로 일체를 분별하여 아상과 법상을 더욱 강화해나가는 식이므로 이 또한 아뢰야식이 보다 본이되는 식이라 하는 것이다. 

 

   설명에서 보듯.. 아뢰야식은 의타기성으로서 청정한 식이고, 말라식은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망념을 짓고, 

의식은 말나식에 힘입어 자신을 주관적 식이라 착각하며 일체를 차별분별하는 허망분별 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청정한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말나식과 의식이 오염시키니 청정한 식인 아뢰야식을 근본이 되는 본식이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아뢰야식에 대해  이르기를  의타기로서의 성품인 아뢰야식의 활동성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 의타기의 성품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아뢰야식은 업종자를 함장한 식이다. 그  업종자에 인연이 성숙하여 새로운 중연이 화합하면  아뢰야식은 그 심층에서 표층의 현상세계로 스스로를 변현하여 드러내게된다. 

그렇게 아뢰야식이 중연과 화합하여 분연히 이 현상계로 나투게 되는 그  활동성을 이름하여 아뢰야식의 의타기성이라고 한다.

즉 아뢰야식의 이러한 의타기로서의 활동성은 스스로를 변현하여 드러냄에 자기 자체를  상분과 견분으로 이원화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이원화하는 과정을 바로 의타기성이라고 하며 이러한 의타기성이 일체 존재의 조건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중연과 화합함으로써.. 아뢰야식을 의타기의 성품으로 드러날 수 있게 할 기반으로서의 종자식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무명으로서의 식이라고 할 수 있는   <말나식과 의식>의 분별속에 성립된 언어적 이름, 개념, 관념의 종자들인 것이다.

(cf.유식은 마음을을 떠나 있는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색경을 부정한다. )

즉 말나식과 의식의 분별에 의해 형성된 개념(이름, 명언종자)으로서의 업력들이  현상계를 유지하다가

그 업력이 무상에 의해 소멸하면  그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아뢰야식에 잔재세력으로 남겨지는 업종자인 것이다.

그렇게 아뢰야식에 남겨지는 잔재세력이란  다름아닌 <말나식 의식>의 분별 속에 성립된 언어적 개념과 관념의 잔재들이었다.

 

 

   이러한 설명에서 보듯이  아뢰야식을 본식이라 했으나 ,아뢰야식과 말나식 의식의 순환성과 동시성에서 살펴보았듯...

그 아뢰야식은 말나식 의식에서 일으킨 업종자들을 함장하고 있기에 아뢰야식으로 성립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같다면 아뢰야식을 본식이라 하여 모든 식의 근본이 된다 했으나... 아뢰야식 또한 스스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여타의 식들을 주관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본식이라 이름하지만   스스로 자성을 가진 독자적 식인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불법에 있어서 연기를 떠나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할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은하의 돛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1.15 내가 화엄행자인가? 대승인가? 소승인가?... 이런 것을 가리기엔 아직 그 각각이 내세우는 불법적 견해를 온전히 모르기에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심론을 따른다든지, 중관을 따른다든지 혹은 화엄을 따른다든지 하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제게 완벽하게 불교의 이론들과 신심이 정립된 후에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구요.
    다행인 것은.. 제가 교학 공부하는 것을 굉장히 즐거워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닥치는대로 이것저것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심을 접하고 중관을 다시 접하게 되었을 때.. 그 중관에서 말하고 있는 <개념, 논리, 추론의 혁파>는 바로 유심의 논리를 벗어나 있지 않더라는
  • 작성자은하의 돛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1.15 중관을 읽으며 유식을 떠올렸어요. 그말이 그말이더라구요.
    그런데 화엄관련 글을 읽으면서는... 중관에서 개념의 구조, 그리고 논리의 구조상에서 보이는 상대성과 즉의성으로의 의미가 오버랩되더라구요.
    불법이라는 것이 .. 어느 것은 옳고 어느것은 그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한맛이라는 것이 느껴지더라구요.
    ==
    제가 적는 유심관련 글들이 모두 그게 그거이긴한데요..
    위 글은 우리 마음의 구조를 큰 틀로 조망해서 적어봤어요.

    중관이 개념과 논리와 추론(판단)을 그 언어상의 맥락에서 파하고 있다면
    유식은 그러한 개념과 논리와 추론의 허망성을 .. 우리들 마음이 만들어내는 구조로 파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 작성자은하의 돛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1.15 같은 의미의 연기론을 어떤 관점에서 파악하는가의 문제가 있을 뿐... 똑같은 말을 하고 있지요.
    다만 중관은 모두를 해체해서 귀결을 공으로 끌어낸다면, 신유식의 유상유식학파는 일체가 공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공의 의미에서 '식'의 실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약간 다른 관점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유상유식학파가 '식'을 실성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사실 중관의 '공'의 논리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