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불교를 말한다 !

제행무상.... 그리고 불성

작성자은하의 돛|작성시간15.07.23|조회수300 목록 댓글 0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고 ...불교의 근본가르침인 삼법인이다. 혹은 여기에 열반적정을 더해 사법인으로 설하기도 한다. 또는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고에서 일체개고 대신 열반적정을 넣어  그것을 삼법인이라고 바꿔 말하기도 한다.

삼법인에서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은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유독 일체개고만이 열반적정으로 바꾸기도 하고, 또는  일체개고와 열반적정을 모두 넣어서 사법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체개고와 열반적정은 그 의미가 구만리는 떨어져 있을 듯 한데... 삼법인에서 왜 그렇게 바꾸기도 하고,  사법인으로 설명하며 평등하게 나란히 넣기도 하는 것일까?  

 

제법무아에 있어서의 제법은 법일체를 의미한다.

법이란 이것과 저것이 연기한 것을  말하는데.. 이것과 저것이 함께하여 <조건지어진 것>으로 드러나는 법이 있는가하면,   이것이 없기에 저것도 없다고 할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으로서의 법도 있어서  제법을 <조건지어진 것>과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라는 두가지로 분별하여 설명한다.

그러니까 제법이란 '법 일체'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유위법으로서의 <조건지어진 것>과  무위법으로서의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일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 일체 유위법 무위법 모두에 '나'라고 할 자성이 없기에 제법무아라고 한다.  

 

삼법인의 하나인 제행무상은 무엇을 의미하나?

우리는 제행무상이라는 말에서 제행의  '행'을 의도, 마음일으킴, 혹은 업이라고 말한다.  제행과 무상이라는 단어들의 조합에서 무상은 그대로 두고 제행만을 떼어 살펴보자면  <조건지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제행은 이것과 저것이 함께하는 유위법이다.

그런데 그 유위법인 "제행"이 "무상하다" 고 말한다.    '제행'은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지를 못하고 스스로에게서 벗어나기에 무상하다고 한다.  그렇게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지 못한 것의 이유가 외부의 무엇,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제행 스스로가 스스로를 존속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연기의 이치상 그렇다.

  '행'이 ' 행에서 벗어나며',  '마음일으킴'이 '마음일으킴에서 벗어나며',  '조건지어진 것'이 '조건지어진 것에서 벗어난다.' 이러함이 제행의 무상이고 무상은 바로 제행의 소멸이다.  그 소멸을 일컬어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생각나는 유명한 경의 구절이 있다..

 바로 우다나의 그 유명한 경구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조건지어진 것이 스스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다나의 언명에서 의미하듯... 조건지어진 것이 스스로에게서 벗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조건지어진 것이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과 함께하고 있기에 스스로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즉 <조건지어진 것>은  이미 그 성품에 있어서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을 함유>하고 있기에... 조건지어진 것은 스스로에게서 벗어나기 마련이라는 제행무상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제행을 유위법이라 말하나 그 제행은 그것의 성품에 있어서  조건지어지지 않음이라는 무위를 함유하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언어의 개념으로 설명하기를 ..조건지어진 것을 연기의 생상이라 말하고,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은 연기의 멸상이라고 말한다.

제행은 생했으면 반드시 멸하고야 마는데... 제행의 생함에  이미 멸이라는 성품을 담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행이 멸하고 무상할 수 있었겠는가? .... 즉 제행무상은 일체 유위법이 무상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 깊은 속내를 한발짝 더 들어가 보면...유위법의 무상은  무위법을 함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위법인 조건지어진 것은 가립된 것일 뿐 그것의 근저에는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 즉 무위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위법이 무위법의 성품을 함유하고 있다면, 유위법은 무위법과 다른 것이기만 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유위법과 무위법은 하나의 마음인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우리는 일심이라 부른다.

그래서 이와같은 말이 있다. 중생 즉 부처, 번뇌 즉 보리, 세속 즉 열반... 중생과 부처가 일심이며, 번뇌와 보리가 일심이며, 세속과 열반이 일심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위의 삼법인의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삼법인에서 일체개고를 열반적정으로 바꾸기도 하고  혹은 일체개고와 열반적정을 나란히 평등하게 배치하기도 하는 까닭은 바로 제행무상을 풀어 살펴본 의미에서 드러난다.

제행무상은  조건지어진 것(세속)과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열반)이 함께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세속엔 이미 열반의 성품이 들어있으니... 세속이 세속이기만 하지는 않은 것이다. 제행무상에 조건지어진 것과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 함께하고 있다면... 일체개고는  열반적정과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중생은 대상에 갈애를 일으키기에 모든 것이 일체개고로 드러나지만   일체개고에는 알든 모르든 열반적정의 성품이 감춰져 있기에 그러한 갈애에 무애해지기만 한다면 그대로 열반적정하게 될 것이다. 즉 중생의 무지에 의한 갈애가 일체개고와 열반적정을 갈라놓았을 뿐... 일체개고든 열반적정이든 이 둘은 하나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중생의 마음에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 바로 제행무상의 이치에 따라 추론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던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