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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뉴스

아름다운 방황도 있다 [도은교 아마6단]

작성자관리자|작성시간10.04.07|조회수622 목록 댓글 0



S#1. 두 갈래 길에 서서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 프로스트(Robert Frost)


두 갈래 길에 서서 명쾌하게 한 길을 택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선택의 연속인 인생에서 성공을 거둔 이들은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잘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리라.
우리들의 2월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피겨 퀸 김연아는 마지막 프리 연기를 완벽하게 끝마치고 북받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토록 냉정하고 당차던 은반의 요정도 사실은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사실.
그녀는 올림픽 이후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잦은 실수를 범한 뒤 라이벌 아사다 마오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올림픽 때보다 훨씬 후련합니다!"



김연아의 고백에서 그 간의 부담이 얼마나 컸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연아의 위대한 성취는 우리 국민의 자부심으로 이어질 만큼 대단한 것이지만 그녀는 명쾌하게 '두 갈래 길'의 득실을 털어놓는다.

"얻은 것은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 잃은 것은 학창시절과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보지 못한 것입니다."

전자의 선택으로 그녀는 피겨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었지만 후자를 선택해 좋은 친구들과 아름다운 추억을 쌓으며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해도 결코 나쁘지 않았으리라.
성공이란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믿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1997년 아마바둑계에 도은교란 혜성이 광채를 발했다.
대한생명배 세계여자 아마바둑선수권전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1998년 바둑문화상 아마추어 기사상을 최초로 수상하면서 바둑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유망주였다.

그리고 2000년 아마 여류국수에 오르며 한껏 물오른 기재를 떨치던 소녀 도은교의 이름이 어느 순간 짧은 여운을 남기며 바둑계에서 사라져버렸다.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에 많은 이들이 도은교의 출현을 기다렸지만 이후 10년 동안 그녀는 완벽하게 잠수해버렸다. 바둑계에서.




S#2. 후회하진 않아요. 또 시작하면 되니까요.


"충암중 3학년 때 진로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이대부고로 진학했지요. 그때부터 바둑을 잊고 뒤떨어진 학습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도은교는 그렇게 공부를 택했고 연세대 수학과에 합격했다.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수학, 그 중에서 미지수에 관해 탐구하는 대수 분야를 전공했다.
그것이 바둑과 바꾼 선택이었다.
바둑 팬들은 탄식할 대목이나 도은교 자신은 의외로 덤덤하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좀 늦게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어요. 뒤돌아 볼 겨를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 바둑이 어른거리지 않던가요?
"왜 어른거리지 않았겠어요? 심야에 타이젬에 들어와 과거 도장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과 바둑을 두곤 했지요. 바둑을 두면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그런데요. 그렇게 부담 없이 두는 바둑이 참 좋았어요. 과거에 프로 입단을 목표로 둘 때는 공부할수록 난해하고 갑갑했거든요."

- 스타일인가요?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제 또래 연구생 친구들은 무서울 정도로 승부 앞에서 냉정하고 안정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때 아주 내성적이었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 패배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쪽이었거든요. 승부사 체질은 아닌 거죠."


▲ 2008년 한상수배 대학생 바둑대회에서.

대국에서 패배했을 때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이 그렇게 싫었다는 그녀.
"언제나 질 수 있는 것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진다는 것이 싫었는지 몰라요. 하늘이 노랗고 삶 자체가 암흑 속에 갇힌 느낌이랄까요? 저 뿐만 아니고 연구생 출신들이라면 아마 그 기분 모두 공감할 거예요."

1985년생으로 초등학생 때 바둑을 배워 목동 임항제 사범의 성광바둑교실에서 본격적으로 바둑을 수련했다.
박영훈, 박지은, 이민진, 이재웅 등과 함께 돌을 만지던 시절이 즐거웠다고 했다. 산에도 가고 공원으로 나가 놀고 맛있는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고 했다.

역시 바둑보다는 어떤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기억이 우선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녀의 성향이 비친다.
"솔직히 바둑 자체에 푹 빠져보질 못했어요. 또 긴장을 많이 성격이라 결정적일 때 수가 안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입단 직전 결정국에서 번번히 밀리고 말았다.
"아무 것도 모르고 바둑만 보았을 때가 중3때였어요. 그때 성적이 가장 좋았었죠. 그렇지만 연구생 친구들과 달리 제 머릿속에는 항상 학창생활에 대한 동경이 가득했어요. 그래서 대학에 진학했고 그 뒤로 한 동안 바둑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 2008년 졸업식에서 아빠, 엄마와 함께.

바둑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날.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 친구들과 어울려서 떡볶이도 먹고 마음대로 놀아라."
그러나 도은교는 짧게 머리를 잘랐다. 헤어스타일에 신경 쓰지 않고 독하게 공부를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 전공인 수학도 바둑과 연관있는 건 아닌가요?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딱 부러지게 답이 나오는 수학이 적성에 맞더군요."

-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바둑계로 돌아왔습니다. 너무 멀리 우회한 느낌도 있는데요?
"그런가요? 다시 돌아오니 바둑계는 한결같았습니다. 그래서 마치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더라고요. 캠퍼스에서 나오니 시간적 여유도 생기고 해서 어렸을 때 이루지 못한 숙제를 해결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습니다.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입단에 대한 미련이 항상 마음속에 고여 있었거든요. 청춘을 다 바쳐도 이루기 힘든 과제지만 학업을 마치고 나서도 과연 가능할까 궁금했습니다. 7개월 동안 허장회 도장을 다니면서 모처럼 바둑에 빠져 봤습니다."

- 몰입하기 어려웠을 텐데요?
"네, 맞아요. 확실히 어렵더군요. 바둑 연령도 낮아졌고 층도 두터워서 경쟁력에서 자신이 없었습니다."


           ▲ 2008년 9월, 해설자로 데뷔한 도은교. 이현욱 7단과 처음 호
           흡을 맞췄다. 


S#3. 바둑의 또 다른 얼굴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바둑도장을 다니던 도은교는 어느 날 바둑TV 해설자 공개모집 오디션에 지원해 합격하게 된다.
BC카드 배를 진행하면서 차분한 해설로 인정을 받은 그녀를 타이젬에서 초빙했다.
타이젬에서 마련한 2010아마바둑 올스타전 해설을 맡긴 것.

10년의 공백이 있어도 아직 많은 바둑 팬들이 그녀를 기억하지만 생소한 이름이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팬들을 위해 인물포커스로 소개해드린다.
기재가 출중한 재원으로 각광을 받다가 학업 때문에 입단을 포기했지만 그 선택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므로 호오(好惡)를 어찌 논할까?
그러나 먼 길을 돌아 그녀는 다시 19로의 모퉁이에 섰다.



뜨거운 승부도 아름답지만 그 승부를 지켜보는 이들도 아름답다.
그 승부의 미학과 과정을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해설자도 당연히 아름다워야 한다.
승부사의 층이 두터운 만큼 그 저변에서 바둑 팬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영감에 스파크를 일으켜주는 바둑가이드의 층이 두터워지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딱 부러지는 해답이 좋아 수학을 전공했다는 도은교 아마 6단이 바둑의 또 다른 가치, 또 다른 얼굴, 또 다른 재미, 또 다른 성취를 발굴하고 획득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세계타이틀보다도 더 빛나는 진리가 그 방향 어딘가에 묻혀있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닐까?

그날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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