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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화세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6.04.10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 때 살아본 것도 아니고... 그런데 '924년 기록'이라는 표현을 3번이나 쓰셨는데, 카오스님답지 않게 왜 그렇게 황급하십니까? 그 당시 복건성에는 5대 10국 중 아마 민월이 세워지지 않았던가요? 아마 남당이 고려 왕건에게 조공을 했을 것으로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을 겝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삼국사기를 뜯어 고쳤지만, 후학들이 동방의 역사를 올바르게 전달하기를 희망했지, 뜯어 고쳐진데로 교육하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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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카오스 작성시간16.04.10 글을 따로 작성해서 옮겨 붙이다보니 중복되어 이상해 졌었더군요. 이제 고쳐진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예, 당시 5대10국 시기의 강주, 천주 등이 현재의 천주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조금 혼란스럽긴 합니다만, 모두 당나라의 절도사들이었었는데, 당나라가 후량에게 망한 뒤 자립했었었다가 후당이 후량을 몰아내자 다시 신속하려고 했었던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워낙 먼 지역이어서 결국 왕봉규는 후당으로부터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라는 이름뿐인 벼슬만 얻었을 뿐이므로 결국 실질적으로는 민월, 남당 등 5대10국시대의 남부지역 국가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연히 소멸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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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카오스 작성시간16.04.10 5대10국의 남부지역국가 중에서 (지역적으로) 왕건과 관련될 수 있는 국가는,... 오월(吳越;908~931)과 민(閩;933~945) 정도인데, 그동안 권지국사였었던 왕건은 '閩이 건국되는 933년의 1년전인 932년에 겨우' 후당으로부터 고려왕을 책봉받았으므로 924년경에 왕건과 閩은 무관하다고 보입니다. 대체로 오월(吳越;908~931)과 관련된다고 보이는데, 왕봉규와 오월(吳越;908~931)의 관계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당시 5대10국의 모든 국가들은 완벽하게 단일한 통치력을 구사했었던 것이 아니라 각 지방의 해당실력자들 사이의 합종연행을 했었던 것을 후대 사가들이 적당히 5대10국으로 분류했었던 것이므로 단순히 판단하긴 어려워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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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카오스 작성시간16.04.10 '왕건이 강주의 항복을 받았다'라고 하더라도 후당이 후량의 천주절도사인 왕봉규에게 '권지강주사'라는 이름뿐인 벼슬을 내리는 것은 가능합니다[즉, 후량시기에도 왕봉규는 거의 독자세력이었었던 것입니다]. 즉, 당시 왕건은 후량으로부터는 토벌대상이었었지만, 후당이 들어서자 어떻게해서든지 권지국사라는 꼭지를 떼어내고 고려국왕을 공식적으로 책봉받으려고 했었던 상황이므로 한때의 전투에서 항복을 받긴했었지만, 제대로 다스릴 수도 없이 아주 멀리 떨어진 강주를 후당이 왕봉규에게 이름뿐인 벼슬(권지강주사)을 줬다고 하더라도 이이를 제기하거나 불평할 상황이 아니었었다고 봅니다. 어쨋든 한번 다시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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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카오스 작성시간16.04.10 아닙니다. '신라의9주5소경'은 강소성신라가 한반도신라로 이동하기 위하여 '강소성지역의 지명을 모델로 해서 만든 지명'을 현재의 한반도에 배치한 것입니다. 즉, '신라의9주5소경'은 애당초부터 현,한반도에만 있었던 지명인데, 그 모델이 된 지역이 현,강소성이므로 대체로 당시,강소성지역의 지명들이 이용되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론 서로 완전히 다르곳이지만,.. '강주'라는 같은 지명이 강소성과 한반도 양쪽에서 거론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물론 924년도에도 같은 곳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천주'는 현,복건성에만 있는 지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광화님이 '후량의천주절도사'와 '후당의권지강주사'를 혼동하시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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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카오스 작성시간16.04.11 광화세계 후당은 923년에 후량에 이어서 건국되는데, '924년의천주절도사'는 후당에게서 받은 벼슬이 아닙니다. 그래서 편의상 '후량의천주절도사'라고 한 것입니다. 즉, 당시의 정세로서는 '천주절도사왕봉규'는 후량이든 후당이든 손을 쓰지 못하던 상황이었으므로 왕봉규가 천주절도사라고 하면 후량이 인정했었던 것이어서 923년에 후당이 들어섰었더라고 '천주절도사왕봉규'는 그대로였었습니다. 즉, 당나라 말기부터 중국대륙 전체는 각지역의 절도사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었었고 조정의 '천자'는 절도사들이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서 임명하던 시기였었던 것입니다. 923년 건국인 후당이 924년에 왕봉규에게 절도사벼슬을 내렸다고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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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카오스 작성시간16.04.11 카오스 어쨋든 중요한 것은 '權知(권지)'라는 '조건부' 직위명칭에 있습니다. 즉, 아직 정식직위를 내리기 전에 내리는 벼슬이기도 하지만, 왕왕 벼슬을 내릴 권한도 없는 왕(천자)이 이쁘게 보이는 자들에게 립서비스로 써먹던 숫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경우에는 '후당이 천주지역에 실제 통치력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지역의 과거 절도사였었던 왕봉규가 사신을 보내서 후당을 섬기겟다고하니 '이뻐서' 내린' 명예직 정도로 보면 됩니다. 물론 후당의 통치력이 '천주는 물론이고 강주에까지라도' 미칠 수 있다면, 아마 왕봉규에게 '권지강주사'라는 명예직위를 주지 않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후당이 제것도 아닌것을 인심만 쓴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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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카오스 작성시간16.04.11 광화세계 예, 그럴 것으로 봅니다. 애당초 왕봉규라는 천주지역 실력자가 자칭 '절도사'라고 한 것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삼국사기에서 '천주절도사'와 '신라'가 함께(동시에) 후당에 사신을 보냇다는 것을 기록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즉, 강소성신라가 한반도로 이동하던 과정 및 한반도로 이동한 이후에 신라가 당나라 조정에 통하는 창구가 바로 천주지역이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기록이라고 봅니다. 특히 한반도신라가 배를 타고 천주를 거쳐서 당나라로 들락거렸었다고 보는 것입니다....그래서 의미있는 기록인 것이지요...그리고 아마 왕봉규는 '친신라파'였었던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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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광화세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6.04.11 카오스 중요한 관점은 천주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복겅성 천주라고 하셨는데, 그리 돌아가야 할 일이 있나요? 고대 지명을 추적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명은 유주라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알려지기로는 유주가 춘추전국시대부터 청 시대까지 전부 도읍지로서 현 북경시로 알려져 있지만, 제 의견으로는 현 산서성 둔유현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틀렸다고 보신다면 왜 틀렸는지 논해 볼까요? 기획은 제가 하겠습니다. 댓글은 좁으니까 링을 좀 크게 만들어서 해 보죠. 아무튼 카오스님께 배우는 입장입니다만 작금의 학계처럼 하는 자세로서는 학문이 되지 못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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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카오스 작성시간16.04.11 광화세계 카오스는 일단, 후당으로부터 '권지강주사' 벼슬을 받았었던 '왕봉규의 천주'는 현,양자강 이남지역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데, 추측컨데, 현,복건성 천주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즉, 대략 당나라 말기 정도에서는 (현,하북성,요녕성,북한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지명이동이 일단락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그리고 현,통설에서 현,하북성 정도로 보는 '幽州(유주)'를 광화님께서는 현,산서성 정도로 보시는 것 같은데,... '幽州(유주)의 최초 위치'를 카오스는 더 서북쪽[대략,현,섬서성중북부]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논란하는 것은 범위가 너무커져 에너지소모가 너무 커지므로 이정도에서 앞으로를 위해서 남겨두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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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카오스 작성시간16.04.11 광화세계 '지명이동이라는 객관적인 사건'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지명이동의 '이유(why=왜?)', '주체(who=누가?)' 뿐만아니라, '시기(when=언제?)', '장소(where=어디서?)', '대상(what=무엇을?)', '방법(how=어떻게?)'이라는 6하원칙을 모두 함께 설명할 수 있어야만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역사왜곡의 범위'가 생각보다 너무 광범위하므로 어느 한두가지 근거(증거)만으로서는 증명이 불가능하므로 이 6하원칙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달콤한(쌈박한) 한두가지의 근거'를 찾아 한방에 해결하실 생각은 무리가 될 것으로 봅니다. 일단은 '인간본연의 속성'을 생각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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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카오스 작성시간16.04.11 카오스 어쨋든, 카오스는 역사왜곡이 3번의'대왜곡'과 여러번의 '소왜곡'이 겹쳐져 있다고 파악하고 잇습니다... 당나라 시기의 왜곡은 아마 '두번째의 대왜곡'일 것입니다...그런데, 아직 아무도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차차 알게 되겠지요...
광화님께서도 '역사왜곡자들'의 지적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시기를 조언드립니다...아마, 그분들(우리의 조상들입니다)은 현대인 그 누구보다도 IQ가 높고 또 감성이나 정의감이 투철한 분들입니다. 결코 '역사왜곡'을 쉽게 보시지 마시길 조언드리는 바입니다....[참, 日帝시대와 같이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역사왜곡은 반드시 배척되어야 한다는 것을 첨언해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