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년 왕건의 나주 상륙작전, 견훤의 봉쇄전략 상황 추정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효공왕 14년(910년)에 견훤이 몸소 보병과 기병 3천을 이끌고 나주성(羅州城)을 포위하고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않았다고 한다. 이에 궁예가 수군을 보내어 이를 습격하니 견훤이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나주성(羅州城)은 어디였겠는가?
현 교과서에는 이 때의 나주성(羅州城)이 마치 전라남도 나주(羅州)시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 당시(903년) 궁예가 국호를 마진(摩震)이라고 정했으며, 도읍지를 정하기 위해서 철원(鐵圓)과 부양(斧壤)의 산수를 둘러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 교과서에는 이 때의 철원(鐵圓)이 현 강원도 철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신라의 나주(羅州)와 철원(鐵圓)이 현재의 전라남도 나주와 강원도 철원이었겠는가?
그간 본 연구원이 고대 역사적인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삼국사기』에 나주성(羅州城)과 철원(鐵圓)이라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나주와 철원이라는 지명은 조선의 사관들이 1512년에 『삼국사기』를 뜯어고치면서 그 당시 조선의 지명으로 바꿔치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이는 마치 장보고장군이 청해진을 두었다는 곳의 지명을 완도(莞島)라고 그 당시 조선의 지명을 분명하게 삽입해 넣은 것과 같다.(본 카페 '청해진 장보고 동상과 법화원의 현재 모습' 참조)
그런데 궁예가 891년에 반란을 일으킨 북원(北原)이라는 곳은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곳으로서 신라가 북원소경을 둔 곳이다. 즉, 옛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으며 신라의 북원소경이었던 곳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본 카페 '궁예와 견훤의 반란 추정지역' 참조)
[그림 1] 북원, 철원, 나주, 대야성, 송악군(천주) 등 주요 지명 추정지역
한편, 견훤은 892년에 완산주(전주로 명칭 변경)를 근거로 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무주 동남쪽의 군현들이 항복해서 붙었다고 한다.
또 견훤은 901년에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했으나 떨어뜨리지 못하자 군사를 금성(錦城) 남쪽으로 이동시켜 주변 부락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는데, 907년에는 일선군(상주에 속함) 이남의 10여성을 모두 차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간 본 연구원이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추정한 바에 따르면, 대야성(大耶城)은 대가야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신라 법흥왕이 532년에 가야를 병합함으로써 확보한 곳이다.
그 후, 백제 의자왕이 642년에 신라 아래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빼앗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킨 바 있는데, 백제가 660년에 망한 후, 신라가 신문왕 5년(685년)에 다시 회복하여 청주(菁州)/강주(康州)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즉, 대야성(大耶城)의 위치는 강주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 안휘성 합비시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891년에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옛 평양성이었던 북원소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 동쪽으로 하슬라주와 서쪽으로 한산주를 공략하면서 세력을 넓혀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궁예가 898년에 송악군에 도읍하였다가 905년에 다시 철원(鐵圓)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철원(鐵圓)은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송악군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사료 상으로 볼 때, 대단히 취약하다.
그 이유는 '송악군'은 고려의 첫 도읍지로서 수많은 역사적인 지명 중에서도 가장 의미있는 지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려의 역사를 격하시키고 고려의 강역을 감추기 위하여 고려의 최초 도읍지였던 송악군을 꼭곡 숨겨버렸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조선의 사관들이 1521년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뜯어고쳐 재발간하면서 비록 역사책을 뜯어고쳐야 하는 비통함에 젖어있었지만, 『삼국유사』 발문을 보면, 조선의 사관들이 동방(東方)의 역사가 후손들에 의하여 밝혀져서 길이길이 전해지기를 간절하게 희구했음을 알아챌 수 있지 않겠는가?
비록 그간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불신한다는 둥,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는 둥하는 현상들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오히려 후손들의 생각이 짧아서 사서의 행간에 담긴 뜻을 밝혀내지 못하고 선조들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과연 후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조들이 후손들보다 못났겠는가?
아무튼 그간 본 연구원이 역사적인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고려의 초기 도읍지 송악군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 하남성 안양시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 근거로서 아래와 같이 네 가지 점을 고려할 수 있다.
첫째,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경애왕 4년(924년)의 기록에 느닷없이 '천주(泉州) 절도사'가 튀어나오는데, 그 당시 '절도사'란 신라의 관직이 아니라 5대10국 시대의 절도사를 의미하지만, 그 당시(924년) 후당(後唐, 923~936년)의 절도사 중에는 '천주(泉州) 절도사'가 보이지 않는 점이다.
즉, 왕건의 출생지로서 고려의 최초 도읍지 '송악군'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천주(泉州)'란 지명이 왜 기록되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둘째, 당(唐)과 신라가 675년에 일대 격전을 벌이면서 신라가 당군(唐軍)을 괴멸시키고 차지한 지역이 '천성(泉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바로 '천성(泉城)'이 '천주(泉州)'란 곳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또 당군(唐軍)이 천성(泉城)을 거쳐 신라로 쳐들어왔는데, 신라가 당군(唐軍)을 매초성(관미성, 현 산동성 요성시로 추정)에서 괴멸시키고 차지한 지역이 현 산동성 요성시 서쪽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셋째, 『후한서』군국지와 『진서』지리지에 따르면, 연국(燕國)/광양군(廣陽郡)에 속하는 지명으로서 '천주(泉州)'가 포함되어 있다.
즉, 춘추전국시대부터 명(明) 대초까지 연(燕)의 위치는 현재의 산서성 장치시 등 남부 지역임을 알아챌 수 있다.(본 카페 '천주(泉州) 절도사 왕봉규는 고려 태조 왕건:천주(泉州)는 현 하남성 안양시로 추정' 참조)
다시 말해서 '천주(泉州)'란 곳은 현 산서성 장치시의 동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넷째,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미 찾아진 북원, 철원 등의 주변 지명들의 위치로 볼 때, '천주(泉州)'란 곳은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
즉, '천주(泉州)'란 곳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 산서성 장치시의 동쪽 지역이어야 하며, 현 산동성 요성시 서쪽 지역으로서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 지역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견훤은 완산주(전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무진주(무주) 동남쪽 지역의 호응을 받았다고 하는데, 901년에 대야성을 공격했지만 빼았지 못했다고 한다.
즉, 견훤의 세력이 미치던 지역을 [그림 2]와 같이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그 당시(910년) 견훤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주, 웅주, 전주, 상주, 강주 등 지역을 차지하고 무주의 북부 지역을 차지하려고 무주의 요충지인 나주성(羅州城, 현 산동성 하택시)을 포위봉쇄하고 있었으며, 궁예는 황하 이북 지역을 차지한 상태에서 황하를 건너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견훤보다 궁예를 선택한 나주성(羅州城, 현 산동성 하택시)을 지원한 것으로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왕건이 910년에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에서부터 수군을 이끌고 상륙한 곳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황하를 건너 나주성(羅州城), 즉, 현재의 산동성 하택시로 진입하기 위한 황하 강변 남쪽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 2] 왕건의 상륙지역과 견훤의 포위봉쇄지역(나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