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수도 개경(開京)의 이주 추정경로
차 례
1. 철원(鐵圓)-->송악군(松岳郡)
2. 송악군(松岳郡)-->평양(平壤)
3. 평양(平壤)-->강화(江華)
4. 강화(江華)-->개경(開京)
5. 개경(開京)-->한양(漢陽)-->개경(開京)
6. 개경(開京)-->한양(漢陽)
7. 고려의 한양(漢陽)과 조선의 한양(漢陽)?
8.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마지막 천도[개경(開京)-->천진(天津)]
1. 철원(鐵圓)-->송악군(松岳郡)
『고려사』지리지에 따르면, 고려 최초의 도읍지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는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부소갑(扶蘇岬)이다. 신라(新羅)에서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쳤다. 태조(太祖) 2년(919년)에 송악(松嶽)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여 개주(開州)라 하고 궁궐을 창건하였다."
또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고려 태조와 첫 도읍지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헌강왕 3년(877년) 봄 정월에 우리(고려) 태조대왕이 송악군(松岳郡)에서 태어났다."
"경명왕 3년(919년) 우리 태조께서 도읍을 송악군(松岳郡)으로 옮겼다."
그런데 고려 태조 왕건이 즉위한 곳(918년)은 궁예(弓裔)가 도읍지로 삼고 있었던 철원(鐵圓)이며, 철원(鐵圓)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림 1] 고려 개경 이주 추정경로(송악군->평양성->강도->천진시?)
왜냐하면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궁예와 양길이 반란을 일으킨 곳이 북원(北原) 소경인데, 북원(北原) 소경은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곳으로서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근거: 『신라 9주의 비밀 계림과 금관』, 김진경 저, 어드북스, 2016. 2. 11)
즉, 당초 궁예가 양길과 함께 신라 북원(北原) 소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진성왕 5년(891년)에 북원(北原) 소경으로부터 북원(北原)의 동쪽 명주(溟州, 하슬라주)로 진출하였으며, 진성왕 9년(895년)에는 (서쪽으로) 한주(漢州, 우수주)의 철원(鐵圓) 등을 차지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궁예가 양길의 세력을 빼앗은 후, 898년에 송악군(松岳郡)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903년에 도읍지를 철원(鐵圓)으로 옮겼는데, 송악군(松岳郡)과 철원(鐵圓)이라는 지명은 현재의 중화인민국 25사(史) 아무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또 신라 말기에 반란을 일으킨 궁예나 견훤에 관해서는 현재의 중화인민국 25사(史)에는 아무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궁예와 견훤 등이 일으킨 반란의 역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황하 주변이지마는 궁예와 견훤 등이 일으킨 반란의 역사는 신라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즉, 궁예와 견훤이 일으킨 반란의 역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간 본 연구원이 고대 역사적인 지명들의 위치를 연구한 결과, 궁예가 도읍지로 삼았다는 철원(鐵圓)이라는 지명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로 추정할 수 있었다. 또 이곳은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이었으며, 신라의 매초성(買肖城)이었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즉, 『삼국사기』지리지에 따르면, 신라 9주 중 한주(漢州, 우수주)에 속하는 79개 지명 중에 철원군(鐵圓郡)과 부소갑(扶蘇岬)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평양성, 북원소경으로 추정) 서쪽 주변 인근지역에서 현재 가장 규모가 큰 도시는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철원, 관미성, 매초성으로 추정)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요성시에 아직도 요성고성이 우람한 자태를 뽐내며 그대로 남아있다. 이 요성고성이 백제 시대에는 관미성(關彌城)이었으며, 신라 시대에는 매초성(買肖城)이었다가 고려 시대에는 철원(鐵圓)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지명의 본래 위치를 찾는데 있어서 고대에 번성한 지역은 사람이 살기 편리한 곳으로서 현대까지도 큰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 또는 전제를 활용할 만하다. 만약 특별한 경우, 이런 전제 또는 가정이 맞지 않지 않는 경우에는 예상되는 지역에서 가능한 지역을 하나하나 검토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요성고성은 백제의 서성(西城)으로서 관미성(關彌城)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아울러 백제의 동성(東城)은 하남 위례성(慰禮城)이 있었던 곳으로서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제남시로 추정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고려사』지리지에 따르면, 고려의 도읍지 송악군(松嶽郡)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부소갑(扶蘇岬)이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지리지에 따르면, 신라 9주 중에서 한주(漢州, 우수주)에 속하는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고려의 도읍지 송악군(松嶽郡)은 고구려 때 부소갑(扶蘇岬)이라고 불렸는데, 철원군(鐵圓郡)과 함께 한주(漢州, 우수주)에 속하는 지명으로서 송악군(松嶽郡)과 철원군(鐵圓郡)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로 가까운 인근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태조 왕건의 출생지로서 부소갑(扶蘇岬) 또는 송악군(松嶽郡)이라고 하는 곳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었는지 밝히고 있는 명확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신라 9주 중에서 한주(漢州, 우수주)에 속하는 지명으로 열거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고려 초기에 도읍지로 삼았던 송악군(松嶽郡), 즉, 부소갑(扶蘇岬)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즉, 『삼국사기 』 신라본기 경명왕 8년(924년)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공격해 가던 시기에 신라가 후당(後唐, 923~936년)에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느닷없이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에 관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
"경명왕 8년(924년) 봄 정월에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 역시 (후당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도대체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 가 누구인가?
그 당시 후당(後唐, 923~936년)의 절도사(節度使) 중에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란 없었다.
그러나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가 후당(後唐)의 공식적인 절도사가 아니었다면, 고려 태조 왕건이 외교상 임의로 만들어 사용한 직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삼국사기』에 느닷없이 고려 태조 왕건과 더불어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주(泉州)는 어디였이며, 왕봉규(王逢規)는 누구였는가?
그런데 여기서 왕봉규(王逢規)는 고려 태조 왕건과 동일 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왕봉규(王逢規)와 고려 태조 왕건의 행적이 똑같기 때문이다. 즉,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공격하는 경로 상에 왕봉규(王逢規)가 두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가 675년에 매초성(買肖城)에서 당(唐)과 일전(一戰)을 벌여 당군(唐軍)을 궤멸시키고 전마 30,380필을 얻었는데, 그 당시 당군(唐軍)이 쳐들어왔다가 패주하고 달아난 곳의 지명이 '천성(泉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천성(泉城)'이라고 하는 곳은 매초성(買肖城)의 서쪽에 있어야 하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당(唐)은 신라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한주(漢州, 우수주)에 속하는 79개 지명 중에 매소홀현(買召忽縣), 부소갑(扶蘇岬), 북한산군(北漢山郡), 철원군(鐵圓郡) 등이 열거되어 있는데, 매소홀현(買召忽縣)은 미추홀(彌鄒忽)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즉, 매소홀현(買召忽縣)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였음을 알 수 있는데, 매소홀현(買召忽縣)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이 있었으며, 신라가 매초성(買肖城)이라고 부른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매소홀현(買召忽縣)은 북한산군(北漢山郡) 또는 철원군(鐵圓郡)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북한산군(北漢山郡) 또는 철원군(鐵圓郡)은 서로 다른 지역이라기 보다는 시기적으로 서로 다르게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후한서』와 『진서』에 따르면, 유주(幽州, 현 산서성 장치시 둔유현으로 추정)에 속하는 지명으로서 '천성(泉城)' 또는 '천성주(泉城州)'가 기록되어 있는데, '천성(泉城)' 또는 '천성주(泉城州)' 혹은 천주(泉州)가 모두 같은 곳으로서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라의 매초성(買肖城)은 바로 백제의 관미성이 있었던 곳이었으며, 궁예의 도읍지 철원(鐵圓)으로서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로 추정할 수 있는데, '천성(泉城)' 또는 '천성주(泉城州)' 혹은 천주(泉州)가 위치가 매초성(買肖城)의 서쪽에 있어야 하며, 유주(幽州, 현 산서성 장치시 둔유현으로 추정)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당(唐)의 도읍지는 현재의 섬서성 서안시이므로 당군(唐軍)이 쳐들어왔다가 패주하고 달아난 경로가 매초성(買肖城)의 서쪽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주(幽州)의 위치를 현재의 산서성 장치시 둔유현으로 추정하게 된 근거는 『요사』 지리지 남경(南京, 연경)에 관한 기록이다. 즉, 유주(幽州)는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연도(燕都, 계)가 있었던 곳으로서 수(隋)의 탁군, 당(唐)의 유주가 있었던 곳으로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장치시 둔유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고려의 양계5도(兩界五道) 중 교주도(交州道)에 속하는 동주(東州)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즉, 동주(東州)는 궁예가 도읍을 정하였던 철원(鐵原)임을 알 수 있는데, 철원(鐵原)의 위치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로서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었다.
또 고려 태조 왕건이 즉위(918년)하자마자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지를 옮겼는데, 철원(鐵原)을 동주(東州)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철원(鐵原)이 송악(松岳)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임을 알아챌 수 있지 않겠는가?
2. 송악군(松岳郡)-->평양(平壤)
그런데 고려 태조 왕건은 늦어도 935년 이전에 다시 도읍지 개경을 다른 곳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즉, 도읍지를 옮긴 곳은 바로 양길과 궁예가 반란을 일으켰던 신라의 북원(北原) 소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918~935년) 고려의 남쪽에 견훤의 반란 세력이 있었고, 신라가 아직 망하지 않았으며, 서쪽에서는 현재의 산서성 태원 일대에서 거란족의 수장인 야율아보기가 916년에 대진국(발해)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927년에 대진국(발해) 중경 현덕부(옛 고구려 장안성, 현 하북성 탁주시로 추정)를 공격하여 대진국왕 대인선을 살해하여 대진국(발해)가 망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즉, 고려의 첫 도읍지(송악군, 개경, 개주)가 본래 천주(泉州)로서 그 위치를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쪽으로부터 거란의 압박을 받게 되고, 남쪽으로부터 견훤의 압박을 받음으로써 고려는 도읍지를 동쪽으로 천도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 태조 왕건이 도읍지 개경을 평양(북원소경)으로 옮긴 시기를 늦어도 935년 이전에 옮겼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삼국유사』와 『고려사』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신라왕 김부가 935년에 고려 때조 왕건에게 나라(신라)를 바치자 태조 왕건이 두 딸을 김부에게 시집보냈는데, '낙랑공주'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려가 천도한 새로운 개경을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낙랑(평양)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낙랑(평양성, 북원소경)으로 도읍지를 옮긴 시기는 935년 이전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목종이 990년에 서경(西京)으로 행차하면서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웅도(雄都) 평양(平壤)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990년 9월 7일 기묘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기회에 부응하여 세상에 내려와서 큰 덕으로 사람을 대하시니, 모든 고을이 내조(來朝)하여 삼한(三韓)이 편안해졌다.
존귀한 자리에서 남면(南面)하면서 서경(西京)을 처음 설치하고, 종실(宗室)의 친족을 보내 요충지를 지키게 하였으며 직무를 나누어 맡김으로써 각자 권한을 가지도록 하였다. 매년 봄과 가을을 맞아 직접 재계(齋戒)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오랑캐를 막아 국경을 굳건히 하고자 하여 웅도(雄都) 평양(平壤)에 의지하여 우리 조종(祖宗)의 패업(霸業)을 공고히 하셨다.'(중략)"
즉, 평양(平壤)을 웅도(雄都)라고 기록했는데, 웅도(雄都)가 도읍지를 의미하고 있는게 아니겠는가?
또 상기한 '기묘 교서(敎書)'의 뒷 부분을 보면, 서경(西京)이 요성(遼城)이었으며, 서도유수관(西都留守官)은 자리를 비우지 말라고 아래와 같이 지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략)... '이제 하늘과 사람이 같이 경사를 누리고 원근(遠近)이 다 평안하며, 모든 농사꾼이 풍년을 함께 축하하고 곡식들도 모두 잘 여무는 데 올랐으니 10월을 택하여 요성(遼城)을 찾아가 조상들의 옛 규범을 행하고 나라의 새로운 법령을 펴고자 한다. [이번 행행(行幸)은] 다만 관문(關門)과 산하(山河)의 형세를 살필 뿐 아니라 장차 아울러 백성의 안위(安危)를 알아보고 지방 관리의 숫자를 덜거나 더하며 산천(山川)에 올리는 제사를 깎거나 정하려는 것이다.
그 행차(行次)의 의장(儀仗)과 모시고 따르는 관료, 식사[御膳]와 악관(樂官)은 모두 마땅히 줄이고 덜어내며 서도유수관(西都留守官)과 연로(沿路)에 있는 주현(州縣)의 수령(首領) 및 여러 진(鎭)의 지휘관은 잠시라도 임소(任所)를 떠나지 말도록 하라.
(이번 행차를) 검소하게 하라는 나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대들의 번화(繁華)한 풍습을 경계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즉, 요성(遼城)이 서도(西都)이며 서경(西京)으로서 요동성(遼東城)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고구려 요동성(遼東城)이 있었던 고려 서경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 광부고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3. 평양(平壤)-->강화(江華)
그런데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가 918년에 개국된 지 313년 후에 몽고족이 1231년 8월 29일에 고려를 침입하여 백성들을 도륙하자 고려는 1231년 12월 2일(음)에 몽고와 화친을 맺었다.
이어서 고려는 그 다음 해 1232년 6월에 도읍지를 개경(평양)에서 '강화(江華)'로 천도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1232년 6월 16일(음) 최우(崔瑀)가 왕을 협박하여 강화(江華)로 천도하였다."
"1232년 6월 17일(음) 최우(崔瑀)가 2령(二領)의 군대를 동원하여 처음으로 강화(江華)에 궁궐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과연 강화(江華)는 어디였는가?
이제까지 알려지기로는 강화(江華)가 현재의 경기도 강화도라고 하지만, 『고려사』에 따르면, 고종(高宗)이 7월 6일에 개경(開京)을 출발하여 7월 7일에 강화(江華)에 도착하였는데, 개경에서 강화까지 1박 2일에 걸쳐 이동해야 하는 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황해도 개성시에서 경기도 강화읍까지는 직선거리로 대략 25km에도 못 미친다. 즉,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개경(開京)과 강화(江華)는 현재의 황해도 개성시와 경기도 강화읍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수(隋)가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을지문덕의 매복에 걸려 무기를 모두 버리면서 죽기살기로 도망친 거리가 하루낮 하루밤(대략 24시간) 동안 약 450리(실제이동거리)였다고 하니 직선거리로 약 140km였음을 알 수 있다.(당척 1리=약 540m, 굴곡지수=실제 이동거리/직선거리=1.725 적용)
즉, 그 당시 최고 이동 속도는 세계 정상급 마라톤 선수가 달리는 속도(시간당 약 20km)의 약 절반에 해당하며, 현대 보병 부대가 이동하는 속도(시간당 약 5km)의 약 2배에 해당하는 속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종(高宗)이 1박 2일에 걸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아무리 빨리 이동했다고 하더라도 직선거리로 140Km를 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고려의 개경(開京, 평양, 낙랑)을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로 볼 경우, 주변 반경 140km이내에 몽고의 공급을 막기 좋은 지역으로 천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고종(高宗)이 개경(開京, 평양, 낙랑)에서부터 1박 2일에 걸쳐 이동한 강화(江華)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로부터 140km 이내에 위치하고 있는 현재의 산동성 제남시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림 2] 강화(광주, 현 제남시)의 추정지역과 몽고의 고려 공격경로
즉, 현재의 산동성 제남시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황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의 태산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몽고의 공격을 방어하기 좋은 지형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현재의 산동성 제남시는 백제 도읍지 하남 위례성이 있었던 곳으로서 신라가 이곳을 점령했을 때는 국원경(國原京)을 두었으며, 본래 신라 최초의 도읍지 금성(金城)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몽고는 1231년부터 1259년까지 28년 동안 고려를 총 11차례 침입하였다. 결국 고려가 육지로 나와 항복하는 조건으로 몽고군이 철군하기로 하였는데, 고려 태자(王倎, 원종: 1259~1274년)가 고종을 대신하여 입조하기 위하여 1259년 4월 21일 몽고로 출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 당시 몽고 황제는 징기스칸의 손자 몽케칸(재위: 1251. 7~1259. 8)이었는데, 몽케칸이 1259년 8월 11일 병으로 죽었다고 하자 고려 태자(王倎, 원종: 1259~1274년)는 몽케칸의 동생 쿠빌라이가 남송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전쟁터로 찾아갔다고 한다.
그 당시 쿠빌라이는 현재의 호북성 양양(襄陽)에서 남송과 전투를 하고 있었는데, 몽케칸이 죽었기 때문에 몽골 대칸의 승계여부로 갈등하면서 전투를 중지하고 군대를 돌려서 북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1259년 8월경에 노상에서 고려 태자(王倎, 원종: 1259~1274년)를 만난 쿠빌라이는 놀라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고려는 만 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이고, 당(唐) 태종(太宗)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귀부(歸附)해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크게 칭찬하고, 함께 개평부(開平府, 형 산서성 대동시로 추정)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고려사』에 따르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1260년 3월 20일 홀필열(忽必烈, 쿠빌라이, 재위: 1260~1294년) 대왕이 황제에 즉위하여 조서(詔書)를 내려서 서경(西京)의 주둔병을 철수시켰다."
고려로 돌아온 고려 태자(王倎, 원종: 1259~1274년)는 1260년 4월 21일 강안전(康安殿)에서 즉위하였다.
『고려사』지리지에 따르면,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에 강안전(康安殿)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원종이 즉위한 고려의 도읍지가 강화(江華)에서 개경으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에서 1270년에 원으로 보낸 표문에 따르면, 왕은 강화(江華)에서 개경(開京, 평양, 낙랑)으로 나왔지만, 백성들은 그 당시 아직 강화(江華)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1270년 2월 4일 군대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글에서 말하기를, '신이 갑자년(1264년)에 친조(親朝)하였을 때 (강화에서) 옛 수도로 나오는 일을 아뢰었으나, 귀국하여 수도를 재건하려고 뜻하였지만 권신(權臣)이 가로막는 바람에 일을 마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약간의 병력을 주어 함께 귀국하게 해주시면, 곧바로 옛 수도로 가서 섬에 살고 있는 신민(臣民)을 모두 육지로 나와 거주하게 하고 이로써 권신을 제거하고 나머지는 모두 보살피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중략)"
4. 강화(江華)-->개경(開京)
즉, 『고려사』기록에 써있는 그대로 따르면,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1232년에 개경(開京)에서 강화(江華)로 도읍지를 옮겼다가 60년이 지나서 비로서 다시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고려는 도읍지를 한양(漢陽)으로 천도하는 문제를 수 차례 논의하였다고 한다.
5. 개경(開京)-->한양(漢陽)-->개경(開京)
『고려사』에 따르면, 1390년 9월 17에 송경(松京)을 출발하여 21일에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양왕 2년(1390년) 9월 17일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였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 문하평리(門下評理) 윤호(尹虎)에게 남아서 송경(松京)을 지키게 하였으며, 또한 백관(百官)의 분사(分司)를 설치하게 하였다."
"공양왕 2년(1390년) 9월 21일 어가가 한양(漢陽)에 이르니,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 유구(柳玽)가 채붕(彩棚)을 차려놓고 온갖 놀이를 펼쳐 맞이하였다. 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그만두게 한 후에서야 들어갔다."
즉, 송경(松京, 개경)에서 한양(漢陽)까지 천도하는데, 17일부터 21일까지 4박 5일 걸린 셈이다.
그런데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왕(공양왕)이 약 6개월 후 1391년 2월 2~10일 기간 중에 남경(한양)으로부터 개경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즉, 개경(송경, 평양)에서 한양(남경)으로 천도할 때는 4박 5일이 걸렸는데, 다시 개경으로 환도할 때는 8박 9일이 걸린 셈이다.
비록 4박 5일 걸리는 거리라고 하더라도 각 고을에 들리면서 천천히 이동했다면 8박 9일 이상 걸릴 수도 있는 거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때의 한양(漢陽)이 어디를 의미하는가?
만약 이 때의 한양(漢陽)이 이제까지 알려져 있는 조선의 도읍지 한양(漢陽)이라면,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황해도 개성시에서 현재의 서울까지 직선거리로 약 58km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림 3] 현재의 개성시. 강화읍, 서울시
한편,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고려의 양광도(楊廣道)에 속한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 양주(楊州)의 연혁을 설명하면서 양주(楊州)가 신라시대에 북한산주(北漢山州)였으며,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쳤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15년(554년)에,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와서 국경[封疆]을 정하였다. (진흥왕) 17년(556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창설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14년(755년)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쳤다. 고려(高麗) 초에 또 양주(楊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14년(995년)에 처음 10도(道)를 정하고 12주 절도사(節度使)를 두면서 (양주를) 좌신책군(左神策軍)이라 부르고, 해주(海州)와 함께 좌우(左右)의 이보(二輔)로 삼아서 관내도(關內道)에 소속시켰다.
현종(顯宗) 3년(1012년)에 이보(二輔)와 12절도(節度)를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로 고쳤다. (현종) 9년(1018년)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하였다. 문종(文宗) 21년(1067년)에 승격시켜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이 되었는데, 근처 고을의 백성을 이주시켜 채웠다.
숙종(肅宗) 원년(1096년)에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磾)가 『도선밀기(道詵密記)』에 의거하여 남경(南京)으로 천도할 것을 요청하면서 양주(楊州)에 목멱양(木覓壤)이 있어 도성을 세울 만하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일자(日者) 문상(文象)도 맞장구를 쳤다. (숙종) 4년(1099년) 가을에 왕이 직접 행차하여 지세를 살펴보고서,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고 5년 만에 완성되자, 왕이 마침내 직접 행차하여 살펴보았다. 충렬왕(忠烈王) 34년(1308년)에 한양부(漢陽府)로 고쳤다.(중략)"
즉, 신라가 현재의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하고 북한산군을 두었는데, 한양군(漢陽郡)이라고 고쳤으며, 고려(高麗) 초에 양주(楊州)로 고쳤다가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을 두었으며,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한양부(漢陽府)로 고쳤다고 한다.
그런데 상기한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은 고려의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 양주(楊州)가 마치 이제까지 알려져 있는 조선의 한양(漢陽)으로서 현재의 우리나라 서울을 설명하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려 개경(송경, 평양)이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 주변지역에 있었다고 본다면,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 인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양광도(楊廣道)에 속한 양주(楊州, 남경, 한양)와 광주(廣州)의 위치를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그림 4] 고려 양광도에 속하는 양주(남경)와 광주(강화) 추정지역
왜냐하면 상기한 『고려사』 지리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시대의 한양(漢陽)이 양주(楊州)였으며, 신라 시대의 북한산주(北漢山州)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앞서 설명한 『삼국사기』지리지에 따르면, 신라 9주 중에 한주(漢州, 우수주)에 속하는 79개 지명 중에 매소홀현(買召忽縣), 부소갑(扶蘇岬), 북한산군(北漢山郡), 철원군(鐵圓郡) 등이 열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매소홀현[買召忽縣, 미추홀(彌鄒忽)]은 북한산군 또는 철원군에 속한 지명으로서
백제의 초기 도읍지였음을 알 수 있는데, 백제 관미성(關彌城)이 있었고, 신라가 매초성(買肖城)이라고 불렀으며, 고려 시대에는 철원(鐵圓)으로 불린 곳으로서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로 추정할 수 있다.
또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양광도(楊廣道)에 속한 광주(廣州)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광주목(廣州牧)은 처음에 백제(百濟)의 시조(始祖) 온조왕(溫祖王)이 한(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에 나라를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 (홍가) 13년(기원전 8년)에 이르러 한산(漢山) 아래로 가서, 목책(木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이주시켜 궁궐을 짓고, 그곳에 살게 하였다. 이듬해 도읍을 옮겨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불렀다.
근초고왕(近肖古王) 25년(370년)에 이르러 남평양성(南平壤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新羅) 태종왕(太宗王) 때에 이르러, 김유신(金庾信)을 보내 당(唐)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뒤에 당의 군대가 돌아가자 문무왕(文武王)이 점차 그 땅을 수복하여 한산주(漢山州)로 이름을 고쳤으며, 또 남한산주(南漢山州)로 고쳤다. 경덕왕(景德王) 15년(756년)에 이름을 한주(漢州)로 고쳤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23년(940년)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성종(成宗) 2년(983)에 처음으로 12목(牧)을 설치했는데, 한주(漢州)도 그 중의 하나이다.(중략)"
즉, 현재의 산동성 제남시에 백제(百濟)의 동성 하남 위례성(慰禮城)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에서는 광주목(廣州牧)을 두고 광주(廣州)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6. 개경(開京)-->한양(漢陽)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로서의 지세를 보기 위하여 송경(松京)을 출발하여 계룡산에 다녀왔는데, 1393년 1월 19일 출발해서 한강에서 4일을 쉬고 2월 8일 계룡산에 도착하였다. 즉, 한강에서 쉰 4일을 빼면 16박 17일 걸린 셈이다.
또 돌아올 때는 2월 13일 출발해서 2월 27일 도착했으므로 14박 15일 걸린 셈이다.
그런데 이 때 태조 이성계가 출발한 송경(松京)이 어딘인가?
즉, 고려의 마지막 도읍지이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조선의 첫 도읍지 '송경(松京)'은 과연 어딘인가?
만약 이제까지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의 도읍지 송경(松京, 개경)이 현재의 황해도 개성이었다면, 개성에서부터 계룡산까지 직선거리로 약 190km이므로 현대 보병 부대의 이동속도(시간당 약 5km)로 하루 12시간씩 꼬박 3일 걸리는 거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의 지세를 보기 위하여 송경(松京)에서 계룡산까지 오는데 16박 17일이 걸렸고, 다시 계룡산에서 송경(松京)까지 되돌아 가는데 15박 16일이 걸렸다면, 조선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송경(松京)이 어디였겠는가?
즉, 고려의 마지막 도읍지이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조선의 첫 도읍지 '송경(松京)'은 계룡산에서 16~17일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려의 마지막 도읍지 '송경(松京)'은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북성 천진시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 5] 고려의 한양과 조선의 한양
왜냐하면 계룡산에서 요령성 단동까지 약 480km, 단동에서 금주까지 약 300km, 금주에서 하북성 천진까지 약 380km를 잡으면, 계룡산에서 현재의 하북성 천진시까지 직선거리로 대략 1,160km에 달한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대 보병 부대의 이동속도(시간당 약 5km)로 하루 12시간씩 이동한다면, 꼬박 16일 정도 걸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송경(松京)', 즉,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에서 출발하여 계룡산으로 갔다면, 산동성 덕주시에서부터 하북성 천진시까지 약 200km를 이동하는데 필요한 3일이 더 걸렸을 것이다.
과연 고려의 마지막 도읍지이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송경(松京)'의 위치가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였는가, 아니면 현재의 하북성 천진시였는가?
7. 고려의 한양(漢陽)과 조선의 한양(漢陽)?
한편, 위에 언급한 '1390년의 한양천도'와 '1391년의 개경(송경) 환도'가 실제 역사를 올바르게 기록한 것이라면, 1392년 7월 고려 공양왕이 폐위되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곳으로서 '송경(松京)'은 평양(개경, 낙랑)으로서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이어야 할 것이다.
즉, 고려 도읍지 '송경(松京)'이 평양(개경, 낙랑)에서 하북성 천진시로 천도했다는 기록은 아무 곳에도 없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관찰해 보면, 한양(漢陽)이 두 군데로 나타난다.
즉, 고려시대에는 현재의 황하 강변 산동성 요성시에 고려의 한양(漢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제까지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현재의 서울에 조선의 한양(漢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390년의 한양천도'와 '1391년의 개경(송경) 환도'가 실제 있었던 올바른 기록인지, 아니면 고려의 개경(송경)이 현재의 황해도 개성에 있었던 것처럼 꾸미기 위하여 고려의 한양(漢陽)이 조선의 한양(漢陽)인 것처럼 창작하여 본래의 『고려국사』(조선초에 편찬된 최초의 『고려사』)를 뜯어고친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우기 『고려사』에 따르면, 홍건적이 1359년 12월에 현재의 하남성 개봉시로부터 황하를 넘어와서 서경(西京)을 함락시켰으며, 1361년 11월에는 개경(開京)을 함락시켰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성계가 1370년 1월과 8월에 원(元)의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388년 3월에는 명(明)이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겠다고 해서 그 해 4월 18일 고려의 좌·우군이 요동을 정벌하러 출정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고려의 서경(西京)과 개경(開京), 철령위(鐵嶺衛)와 요동 등의 위치를 [그림 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는데, 개경(開京, 평양, 낙랑)에서 국경방향에 있는 한양(漢陽, 남경, 양주, 철원)으로 천도할 수 있겠는가?
[그림 6] 고려 마지막 도읍지 추정지역(천진시)
8.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마지막 천도[개경(開京)-->천진(天津)]
그런데 상기한 바와 같이 『고려사』에 따르면, 이성계가 1370년 1월에 원(元)의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하였는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갔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1370년 1월 4일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가 기병 5,000명과 보병 10,000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600여 리를 행군하여 설한령(雪寒嶺)에 이르렀으며, 또 700여 리를 행군하여 갑진일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이날 저녁 서북방쪽에 자줏빛 기운이 하늘에 가득 찼는데, 그 빛이 모두 남쪽으로 향하였다. 서운관(書雲觀)에서 이르기를, '맹장(猛將)의 기운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성계를 보냈으니, 필시 거기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성계가 1370년 8월에도 원(元)의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였는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갔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1370년 8월 13일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 및 서북면상원수(西北面上元帥) 지용수(池龍壽)와 부원수(副元帥) 양백연(楊伯淵) 등에게 명령하여, 동녕부(東寧府)를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1370년 11월 2일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와 지용수(池龍壽) 등이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부교(浮橋)를 만들어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1370년 11월 4일 (아군이) 요성(遼城)으로 진군한 뒤 요성을 급습하여 함락시켰다."
또 명(明)이 1388년 3월에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겠다고 해서 그 해 4월 18일 고려의 좌·우군이 요동을 정벌하러 출정했는데, 평양(平壤)에서 출발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위화도(威化島)에 주둔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록되어 있다.
"1388년 4월 18일 좌·우군이 평양(平壤)에서 출발하였는데, 사람들이 100,000명이라고 일컬었다."
"1388년 5월 7일 좌·우군(左右軍)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위화도(威化島)에 주둔하였는데, 도망가는 병졸들이 길에 줄줄이 이어졌으므로 우왕이 소재관에서 참수하게 하였으나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1388년 5월 11일 이성원수(泥城元帥) 홍인계(洪仁桂), 강계원수(江界元帥) 이의(李薿)가 먼저 요동(遼東) 경계에 들어가서 사람을 죽이고 돌아오니, 우왕이 기뻐하며 금으로 된 정아(頂兒)와 무늬 있는 비단[綺絹]을 하사하였다."
즉, 요동(서경)에 위치하고 있었던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기 위하여 평양(平壤)에서 출발하여 압록강(鴨綠江)을 넘어가야 했다면, [그림 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요동(서경, 요동성, 동녕부)이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 주변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므로 평양(平壤)과 고려의 도읍지가 압록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때, 평양(平壤)은 과연 어디인가?
이제까지 고대 지명의 위치를 연구한 바에 따르면,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곳이 평양(平壤)으로서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로 추정할 수 있는데, 고려시대 개경이 첫번째 도읍지 송악군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요동 정벌군이 출발했다는 평양(平壤)은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가 될 수 없으므로 고려의 마지막 왕경(王京)이 압록수 북쪽에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왕경(王京)을 평양(平壤)이라고 불렀다고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즉, 동녕부(東寧府)와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평양(平壤)에서 출발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갔다는 기록은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마치 현재의 이북 평양을 거쳐 현재의 요령성으로 공격한 것처럼 꾸민 것임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런데 요동 땅을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로 추정할 수 있으므로 평양(平壤)은 압록수(鴨綠水)로 추정할 수 있는 현재의 하북성 호타하 이북에 있어야 하며, 앞서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을 다녀온 거리와 기간을 고려할 때, 고려의 마지막 왕경(王京)은 현재의 하북성 천진시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후, 또는 강화에서부터 아예 현재의 천진시 주변지역으로 천도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이 마지막 천도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고대 지명의 위치를 밝히면서 전후 사정을 보니 마지막 천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역사적 비밀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유적은 현재 천진시에 남아있는 천진성이다.
[그림 7] 동녕부와 고려 마지막 도읍지 추정지역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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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카오스 작성시간 17.06.15 1. ‘그림1’에 ‘궁예의 철원’으로 추정해서 비정하신 ‘철원,남경,한양(현,요성시)’가 아마, ‘현,련성시(聊城市)’을 말하시는 것은 아니신지?...혹시 요성과 련성의 중국발음이 요성과 비슷해서 착오하신 것은 아니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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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카오스 작성시간 17.06.15 2. 양길(+궁예)이 처음 반란을 일으킨 곳이 ‘북원(北原)’이긴한데,...그 ‘북원(北原)’이 ‘통일신라9주5소경의 北原小京(or北原京)’이라는 근거가 있나요?...즉, 양길의 북원(北原)은 그냥 ‘북쪽(北)들판(原)’으로서 9주5소경과 무관한 것 아닌가요?...[물론 통설에서는 北原小京을 현,원주로 주장하고 있고, 북원과 북원소경이 그리 멀지는 않을 것이겠지만, 카오스는 북원을 현,산동성태산의 동쪽 평야지대[대략 현,산동성濰坊市(유방시)] 정도로 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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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카오스 작성시간 17.06.15 3. 따라서, ‘통일신라의 북원(北原)소경 =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곳’이라고 보는 이유가 납득되지 않네요. 즉, 고구려의 (남)평양성도 최소한 패수이남으로는 남하하지 않으므로 패수(or패강)이 현,산동성지역까지 내려와있었다는 것은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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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여러주장들’은 ‘너무쉽게 단정하시는 것들’이어서...간단히 질문드리기 어렵네요...일단 1,2,3에 대해서 만이라도 간단하게 답을 부탁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광화세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6.15 카오스 련자인줄 알았는데, '애오라지 료'자라고 하더군요.
삼국의 지명은 삼국사기가 아니면 찾을 수 없죠. 같은 지역의 지명을 여러개로 표기하기도 하고 방향을 바궈 놓기도 하고 거리는 없으니 더듬더듬 퍼즐을 맞춰야 하는데, 다른 지명들과 중첩되지 말아야 하죠.
북원소경과 북원은 지명이 같습니다. 지리지에 따르면, 우수주 평원이 북원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죠. 대청광여도에는 '평원'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 있죠. 한산주 북한산주는 평양이라고도 한다고 써있지만 위사로 봅니다. 북한산 운운하는 것은 '서'자를 '동'자로 고쳐서 백제의 서성과 동성을 감추고 북성과 남성으로 기술해 놨죠. -
작성자광화세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6.15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신당서 지리지와 요사 지리지, 후한서 지리지에 근거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