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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 연구실

『신라 9주의 비밀 계림과 금관』 마지막 제 22장 『삼국사기』 비밀코드(초안) 사전공개

작성자광화세계|작성시간16.01.27|조회수167 목록 댓글 0




『신라 9주의 비밀 계림과 금관』

마지막 제 22장 『삼국사기』 비밀코드(초안)

사전공개

 

『삼국유사』의 맨 마지막 쪽에 발문(跋文)이 기록되어 있다. 동 발문에 따르면, ‘본사(本史)’와 ‘유사(遺史)’를 왜 다시 발간하게 되었는지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 동방(東方)의 삼국에는 ‘본사(本史)’와 ‘유사(遺史)’ 두 책이 있으나, 달리 간행된 적은 없고 단지 본부(本府)에만 남아 있는데, 세월이 흘러 자획이 닳아 없어져 한 줄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겨우 네댓 글자뿐이었다.”

 

즉, 상기한 발문에 기록되어진 대로 이해한다면, 조선 중종 7년(1512년) 겨울에 경상도 경주진(慶州鎭) 본부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각각 한 권씩 있었는데, 두 책은 각각 고려시대 1145년과 1280년경에 처음 간행된 지 대략 300~400년이 되었으므로 인쇄가 흐릿해져서 알아볼 수 있는 글자가 한 줄에서 네댓 글자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다시 간행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사가 앞으로 실전(失傳)되어 동방(東邦)의 지난 일을 후학(後學)들이 들어서 알 수 없게 될까 봐 다시 간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판을 뜨고 다시 발간하게 된 것을 크게 축하하고, 널리 배포할 수 있도록 수고한 이들에게 크게 상을 주고 기념하면 될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발문(跋文)의 마지막 부분에는 역사책을 다시 간행하면서 느끼는 참담(慘憺)하고 비장(悲壯)한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아아! 물건이란 오래되면 반드시 없어지게 마련이고, 없어지면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이니,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이러한 이치를 알아 때가 되어 일어나면, 영원히 전하여 줄 것을 후세에 나타날 은혜로운 학자들에게 간곡히 바란다(亦有望於後來之惠學者云).”

 

즉, 상기한 발문(跋文)의 앞뒤 내용이 서로 다르다. 다시 말해서 목판본 인쇄물이 오래되어 글자가 흐릿해져서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음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세월의 이치를 논하면서,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던 내용을 뜯어고쳐야 하는 참담하고 비장한 심정이 배어있지 않은가?

다만,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세월의 이치를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았을뿐이며,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던 내용을 뜯어고쳤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일어나는 이러한 이치를 알아 때가 되어 흥하게 되면, 후세에 올 은혜로운 학자(後來之惠學者)들이 영원히 전하여 줄 것을 바란다.’고 하는 조선 선비의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별도로 발문(跋文)이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발문(跋文)은 ‘본사(本史)’와 ‘유사(遺史)’를 모두 지칭함으로써 두 책의 발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선 중종 7년(1512년)에 재발간한 『삼국사기』의 책 명칭은 『삼국사』로 고쳐져 있다. 즉, 원래 1145년에 발행한 원본은 『삼국사기』이었겠지만, 책 제목 자체를 뜯어고쳐 놨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고려사』 세가 권제17 인종 23년(1145년)과 지(志) 권제11에 따르면, 김부식이 ‘『삼국사(三國史)』’를 편찬하여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본래 『삼국사기』의 제목이 『삼국사(三國史)』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사』 지(志) 권제11에 부기되어 있는 주석(註釋)에 따르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인용한다는 주석이 두 군데 남아 있기 때문이다.

즉, 조선은 『고려사』마저 뜯어고치면서 『고려사』 원본(原本)에 기록되어 있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삼국사(三國史)』’로 고쳐 놓았으나, 고의적인지 실수인지는 알 수 없어도 주석에 기록되어 있었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에서 왕왕이 『구(舊)삼국사』를 인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삼국사기』 원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고려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뜯어고쳐진 조선 중종 7년(1512년) 이후에 뜯어고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후손들이 혹시 우둔하여 역사책이 뜯어고쳐졌는지 알아채지 못할까 봐, 아예 책 제목을 바꾸어 놓았다고 추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의 책 이름이 『삼국사(三國史)』로 바뀌어져 있는데, 누가 보더라도 ‘책이 바뀌었나’, 또는 ‘내용을 뜯어고쳤나’ 하면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고려사』에서 ‘김부식이 『삼국사(三國史)』를 편찬하여 바쳤다.’고 기록해 놓고선, 주석에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인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누가 보더라도 『삼국사(三國史)』는 무엇이고,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무엇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조선의 사관(史官)들이 역사책을 뜯어고치면서 일을 게을리해서 트집잡힐 정도로 허술함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조선의 사관들이 『삼국사기』가 뜯어고쳐졌음을 후손(後孫)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고의적으로 표식이 나도록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간 대일항쟁기가 끝나고 70년이나 지났는데도 명(明)과 조선이 왜곡시켜 놓은 ‘꾸며진 역사’를 그대로 교육하고 있으니 우리나라 백성(百姓)들이 참을성이 매우 강한 민족이기는 한 것 같은데, 완고하고 아둔하다는 평을 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역사책이 뜯어고쳐져서 부실하면, 가능한 한 역사를 올바르게 찾아서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할 게 아닌가?

이미 전제주의를 벗어나 민주화를 달성하였고, 국제 규범 속에서 통용되는 질서와 정신세계를 추구하고 있으며, 21세기 정보화 사회가 빠르게 성숙되어 가고 있는데, 아직도 ‘조선의 꾸며진 역사’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백성을 속이고 있는게 아닌가?

그런데 조선의 사관들이 어쩔 수 없이 역사책을 뜯어고치면서도 단순히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가 뜯어고쳐졌다는 사실만 알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실제 올바른 역사가 무엇이었는지도 밝혀낼 수 있도록 꼼꼼하고 야무지게 비밀코드를 심어 놓았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명(明) 대의 사관들이 1421~1512년 기간중에 중국 23사에 고대 지명의 위치를 북쪽 또는 동북쪽으로 변이시키는 위사(僞史)들을 곳곳에 삽입시켜 놨는데,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지명의 위치가 변이(變移)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 본래의 위치가 어디였음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가 뜯어고쳐졌다고 하더라도 후손(後孫)들이 고대 역사를 복원할 수 있는 근거와 논리를 제공하고 있으므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나라 보물 중에서도 보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대한민국 후손(後孫)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이 모자라거나 정성(精誠)이 부족해서 감추어져 있는 비밀코드들을 모두 밝혀내지 못할까 봐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을 뿐이다.

그런데 비밀코드는 왕왕이 본문에 부기되어 있는 주석(註釋)에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 부기되어 있는 주석(註釋)들이 모두 비밀코드로서 올바른 기록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변이(變移)시킬 지명의 위치를 확실하게 변이시키기 위하여 조선 중종 7년(1512년) 당시의 지명(地名)으로 주석(註釋)을 달아 놓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興德王, 826~836년)의 기록에 따르면, 장보고(張保皐)가 당(唐)에서 귀국하여 청해진(淸海鎭)을 세웠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흥덕왕 3년(828년) 여름 4월,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의 성은 장씨(張氏)인데 일명 보고(保皐)라고 한다.

당(唐)의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가, 후에 귀국하여 왕을 알현하고, 졸병 1만 명을 이끌고 청해(淸海)에 진(鎭)을 세웠다[청해(淸海)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

 

즉, 상기 기록에 따르면, 청해(淸海)는 ‘지금의 완도(莞島)’라고 주석이 붙어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면, 누구든지 청해진(淸海鎭)은 현재의 전라남도 완도(莞島)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 원본(原本)의 주석이 남아있음으로 해서 『삼국사』의 본래 제목이 『삼국사기』인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왕왕이 원본(原本)의 주석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즉, 『삼국유사』 기이제일편 ‘북부여’에 따르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전한서(前漢書)』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년(서기전 59년)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 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王)이라 일컬으며, 국호를 북부여라고 하였다.”

 

즉, 상기 기록 중에 주석이 붙어 있는데, 흘승골성(訖升骨城)의 위치가 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요(遼)의 남경(南京, 연경)이 춘추전국시대의 연도(燕都, 계)와 같은 지역으로서 현재의 북경시로 변이되어 있지만, 요 남경의 본래 위치를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으로 추정할 수 있으므로, 의주는 그 동쪽 인근에 있는 현 산서성 로성시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흘승골성은 로성시 주변 인근 지역에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1년(서기전 37년)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다. 즉, ‘고주몽이 동부여(東扶餘)에서 피신하여 엄사수(淹㴲水)를 거쳐 졸본천[卒本川, 『위서』에서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렀으며, 비류수(沸流水)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는데,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였으며, 고(高)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즉, 『삼국사기』에서 『위서』를 인용하였는데, 졸본천이 흘승골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신당서』지리지 하북도에 따르면, 환도성이 현 하북성 석가장시 정정현임을 알 수 있으며, 그 인근에 흐르고 있는 현 사하(沙河)가 졸본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흘승골성은 현재의 산서성 남부 장치시에서부터 하북성 석가장시에 이르는 지역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무튼, 이미 뜯어고쳐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이제 와서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이 후세에 나타날 혜학자들에게 한 가닥 실낱같은 휘망을 걸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비밀코드를 심어 놓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대한민국 백성의 일원이라면 누구든지 한(韓)민족의 구성원으로서 비밀코드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고대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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