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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지구촌 역사는 대조선의 역사이다 (지구조선사연구회 카페)

작성자치우천황(이종식)|작성시간10.11.18|조회수146 목록 댓글 0

제목: 대조선의 지구촌역사 연구

 

일시: 2008.8.23(토) 글쓴이:지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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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2. 한반도사의 허구성 ( ~10)

3. 문헌속의 대조선의 진실 ( ~18)

4. 지구촌내의 대조선흔적 ( ~22)

5. 대조선의 부활

6.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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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연구목적

 

본 연구는 대조선의 숨겨진 역사를 발견하고 증거하며 대한민국인에게 알리고자 함이 주목적이다. 아울러 대조선은 500여년간 지구촌에게 유일무이한 대제국을 형성하였으며 대조선의 영향이 지구상내에 끼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큰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2) 정의

 

대조선

1893년 시카고 박람회때 근세조선이 공식으로 사용한 국호가 <대조선>임이 최근 밝혀졌다. 1897년 일제에 의해서 대한제국으로 바뀌기 전까지 조선의 공식명칭은 대조선이었다. 대조선은 한글로 씌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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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반도사의 허구성

 

(1) 서울 경복궁의 허구

 조선신궁(그림12)과 조선궁궐 중에서 누가 주인이냐 ? (채윤기. 자유토론실. 번호28번, 007.09.18 18:27에서 발췌)에서 인용된 글귀가 아래와 같다.

 

김한배 교수(서울시립대 건축도시조경학부)의 저서에서 "남촌 도시경관의 과거, 현재, 미래"에서 96쪽을 보면, “남산 중턱에 조성된 초 대규모 조선신궁의 위치가 기실 창덕궁, 종묘, 경희궁, 총독부에서 출발하는 시각축의 교점 상에 정확히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일제는 정도 이래의 의미를 전도시킨 것은 물론, 과장하자면 조선수도의 경관적 급소에 비수를 꽂은 것과 같은 폭거를 저질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일제의 배후의도와 계획과정에 대해서는 향후 별도의 심층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즉, 창덕궁, 종묘, 경희궁, 총독부(경복궁의 시선방향과 일치) 모두가 조선신궁의 메이지 왜왕을 우러러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자료는 한반도 조선의 허구를 한 번에 증명해 보이는 대단한 성과이고, 대륙조선사 연구의 금자탑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서울의 황궁이 모두 모조품임을 만인에게 알린 것이기 때문이다.

 

(2) 개성 만월대의 허구

 “성균관 대성전 앞마당에는 궁궐터 수창궁과 회경전을 지키던 용머리 장식 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조선최초의 황궁은 개경의 수창궁이다(07.9.5)"에서) 그렇다면, 태조 이성계가 자주 들렀던 회암사(조선왕조(황제)실록 태조2년 2월 24일)는 있는가? 역시나 없었다. 다만, 회암사는 한반도 경기도 양주군에 절터만 남아있었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남북 합의에 따라 2007년 5월부터 약 2개월에 걸쳐 (5.15~7.13) 고려 궁궐터인 개성 ‘만월대’에 대한 남북 공동 발굴 작업(시굴조사)을 진행하였고, 이에 대한 학술 조사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개성은 고려 474년간 도읍으로, 수많은 사찰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개성시 만월동 송악산(松嶽山)(숭산)기슭에 위치한 고려궁성 유적은 지금까지 흔히 ‘만월대(滿月臺)’로 불려지며 당시의 화려했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수창궁, 회경전, 회암사, 만월대, 모두 터만 있다고 한다. 북역고려사에 고려는 '그 너비가 만리가 된다' 라고 나온다. 개성황궁 미복구는 의도된 것이라 본다.

 

(3) 남산의 허구

일제때 남산의 사진은 서울의 남산이 아니었다. 일제때 남산을 배경을 해서 일본군의 포대가 있고 격렬한 전투장면 사진이 공개되었다.

 

사진참조( 남산 일본군포대- 대륙조선사 정석근님. 08.7.30)

 

1) 산모습이 긴 산맥의 모습이다. 서울의 남산은 산맥이 없고 동산의 형태이다. 산이 굉장이 높아보인다. 대략 200여m의 현재 서울의 남산의 높이하고 거리가 멀다. 산의 중턱에서 포대가 싸우는데, 그만한 중턱이 서울에는 없다. 포대하고 산하고 거리가 너무 멀어 보인다.

 

2) 조선의 정복은 외교전으로 했는데, 서울한복판 남산에서 왜 포대를 동원해서까지 무력을 행사했을까? 조선은 그당시 싸울만한 군대도 없었는데.. 누구랑 싸웠다는 것인가? 문뜩 떠오르는 것은 의병이다. 산맥으로 둘러싼 산악지역에서 조선의 의병장 군대와 싸운 것으로 기대된다. 의병장의 활동은 한반도 서울과는 무관하다.

 

3) 저 정도 싸움은 처절하였을 것이고, 서울 경복궁의 목조건물은 모두 불탔을 것이다. 만약 서안에 조선의 한성(서안)이 있었다면 외부 성곽을 제외하고 성내의 민가들은 모두 불탔을 것이다. 지금의 대륙 서안고성은 외부 성곽만 남아있다.

 

4) 서안에도 남산이 있다. 서안의 남쪽 진령산맥의 한 봉우리가 남산 혹은 남한산이라 한다. 서안의 남산이라고 하면 이 사진의 모습으로 안성맞춤이다.

 

(4) 강화도 석모도 보문사의 허구 (07.11.9 탐사)

1) 반도 강화도, 석모도(席毛島)는 신라 선덕여왕때(635) 신라의 영토인지는 불확실하고 보문사가 창건된 내용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기록에도 없는 것을 그냥 전해져 내려 온다고 한다.

 

2) 대륙 절강성 보타산(普陀山)은 본래의 신라의 영토로서 주위에 신라초가 있었고, 신라 선덕여왕때 절을 창건했다면 바로 보제사(普濟寺)로 사료된다. 보제사(普濟寺)가 북송 때 건립하여 보타관음사로 하고 청때 보제사라 했다함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북송은 그당시 고려의 속국으로 하남성 개봉에 있었고, 청은 영토가 산서성북쪽에 있어 절강성에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문사는 대륙의 보제사에서 옮겨온 명칭으로 볼 수 있다. 보제사는 또한 고려의 사찰로 1125년 인종때 황제가 보제사로 행차하여 비가 오기를 빌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사 절요 상, 619p 민족추진위 옮김)

 

(5) 용문사의 허구 (07.10.22 탐사)

1) 용문사는 대한민국 전통사찰 제 47호이다. 그런데 사찰의 기록판에는 신덕왕(913년),혹은 경순왕때 창건했다고 전한다고 했으나, 실제로 삼국사기등을 찾아보면 나오질 않는다. 즉 전설로 기록을 한 것이다. 그리고 위치도 불분명하다.

 

그리고 용문사가 만리대국 조선의 황족을 위하여 재건한 것 치고는 외모상으로 규모가 너무 작고 초라해보였다. 그 대웅전을 포함하여 지장전, 범종각등 6개여동이 전부다.

 

2) 고려, 조선에 나온 용문사 내력은 반도가 아닌 대륙 하남성 낙양의 용문석굴에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대륙 용문석굴주변에는 2345여 개의 석굴, 2800여 개의 비문, 50여 개의 불탑, 10만 개 정도의 조각상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남아있다. 과연 조선의 위상을 만천하에 알리는 표상이다. 용문석굴은 현존하는 종교, 미술, 서예, 음악, 의료, 건축 등 방면의 살아있는 역사 자료이다. 따라서 '대형 돌조각 예술 박물관'이라고도 칭해진다.

 

3) 그리고 반도 용문사에는 임진왜란때 불이 났다고 하는데 이것은 규모를 늘리지 못한 것에 대한 부연설명에 불과하다. 지형으로 볼때도 그곳은 대규모 사찰이 들어설 수 있는 지역도 아니다. 한편, 일본군은 반도를 침략한 것이 아니라, 대륙으로 침투하였기 때문에 불이 날 까닭이 없다.

 

(6) 남한산성의 허구

새롭게 고쳐 쓴 신하멜표류기(최두환저. 서울, 우석출판사, 2003) 에선 남산산성의 높이가 2메일(3200여m)로 나온다. " 그 성터는 그 높은산의 2메일되는 곳에 있다." 한반도 남한산성이 아니다. 청나라가 쳐들어 왔다면 한반도의 남한산성이 아니라, 섬서성 진령산맥(남산, 남한산, 목멱산, 종남산)이다.

 

(7) 천년의 도시 경주의 허구 (천년의 도시 경주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07.9.7)

1) 천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의 수도,도읍지는 한곳이 아닌 세 곳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보면, 처음수도를 정한 곳은 금성이고, 이후 월성,명활성으로 옮겼으며, 다시 월성으로 천도했다고 나온다.

 

첫번째 수도 금성은 박 혁거세 21년에 정한 것임.

두번째 수도 월성은 파사 이사금 22년에 정함.

세번째 수도 명활성은 자비 마립간 12년에 정함.

네번째 수도 월성으로 다시 정한 것은 소지 마립간 10년이었다.

 

2) 경주란 명칭은 신라가 망한 이후, 고려 태조 왕건이 전 신라왕 경순왕에게 정승공이란 직책을 내리고, 전 신라궁궐의 동쪽에 으뜸가는 저택 한구역을 주었으며, 신라의 국명을 지방지역인 경주로 고치고 정승공의 식읍으로 삼은 것에서 유래된것이다. 그런데, 정승공이란 직책은 태자보다 한수위인 직책이라 한다. (삼국사기)

3) 따라서 경주는 도시도 아니고, 수도도 아니고, 그냥 그지역의 명칭인 것이다. 더군다나 한반도 경주도 아니다. 그곳은 신라의 황도라 볼 수 없다.

 

(8) 백제의 허구

한반도 부여, 공주등지에 백제의 황궁터 하나 없다. (공주시 공산성 탐사)

 

(9) 아차산의 허구 (서울의 아차산은 조선의 아차산이 아니다. 08.8.9)

 1) 조선때 문인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 내에 실려있는 아정유고 제3권, '문(文)'에서의 협주기(=한강을 거슬러 가며)의 내용이다. " 1776년, 내가 3월25일 정사원과 동자와 함께 청교에 사는 심경문의 집에 이르자, 여문중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들과 함께 출발하여 광희문을 나와 전관의 고개에서 쉬면서 동쪽에 있는 아차산을 바라보았다. 그 산은 붉은 쇳물을 내리부은 듯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다. 산 밑의 평원에는 풀이 푸르고 무성하여 역마들이 꼴을 뜯고 있으며, 밭의 보리가 이리저리 쓰러져 있다. "

 

2) 조선시대 문헌속의 아차산은 한반도의 녹음이 우거져 있는 그런 아차산이 아니다. 산에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가 나지 않는 사막기후의 산을 말한다. 그리고 아차산은 신당동 야산(전관의 고개)에서 나무와 말을 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1km이내거리)로 나온다.

 

그런데 서울의 신당동에서 아차산을 본다면 산의 테두리는 볼 수 있어도 어느 물체를 볼 수는 없다. 양쪽의 거리만 해도 7여km나 된다. 그래서 서울의 아차산은 조선시대의 아차산이 아닌 것이다.

 

(10) 독립문 사진의 허구

사방에 산들이 모두 초원지대, 준사막지대처럼 나무가 거의 보이질 않는다. 서안일대는 양들을 키우기에 적당한 초원지대가 펼쳐진 지역이다. 바로 독립신문에 찍힌 독립문사진은 반도 서울의 서대문구의 독립문이 아니고 대륙 서안(한성)근처의 독립문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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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헌속의 대조선의 진실

 

(1) 서양인이 그린 조선인의 그림

1) 조선인에는 아랍인과 북미인디언이 있다.

 

 (그누구도 등재를 할수 없었던 조선의 숨겨진 그림 2장 08.7.19)

그림= 삽화의 제목- [한국의 남녀]

 

서양인이 최초로 그린 한국인 그림. 미지의 한국인. 프랑스 화가 셍 쏘베의 1806년판 채색 판화로 '아시아 왕국의 민족들'이란 시리즈 테마가 첨부되어 있음.

 

 이 모습은 진짜 조선인의 모습이다. 왼쪽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의상의 아라비아인, 오른쪽은 시베리아, 아메리카 인디언의 모습이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조선인의 참증거이다. 정말 어이없게도 서양인이 이웃국의 아라비아인을 몰라 한국인이라 제목을 붙였을까? 

 

벌써 조선은 서양의 코앞에서 그 위세를 떨쳤기 때문에 조선을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동양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바로 조선인들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 조선인은 corean, 즉 한국인이라 표현했다. 1806년당시 나폴레옹이 있던 유럽의 건너편에 조선이 있었는데, 조선은 지중해연안의 오스만제국에서부터 인도의 무굴제국, 시베리아에서 동부로 진출하는 러시아제국,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까지 였는데, 그곳 미국은 동부에서부터 서부로 개척을 시작하려는 시점이었다.

 

미지의 세계 조선이 아니라, 그당시 현존하는 강대국 대조선국이었다. 조선에 있는 조선인은 서쪽의 아랍인에서부터, 인도인, 중국본토의 조선인, 한반도의 조선인, 시베리아의 원주민, 아메리카의 인디언을 모두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조선인에는 아랍인, 아프리카인, 일본인이 있었다.

 

 

그림= 중류층 여인과 소년 그리고 지게꾼.

 

KOREA Middle Class Woman Boy &Coolie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는 1930년대 WPA의 한국 소개 포스터이다. WPA( Works Projects Administrtion: 공사기획청)은 1930년대 미 행정부 산하기관으로 1939년 까지 존속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인네의 모습은 아라비아인들이 덮고 다니는 흰옷에 붉은 외출복을 입었다. 히잡, 차도르는 분명 이것의 변형으로 보인다. 독을 이고 가는 지게꾼은 흑인이다. 머리도 약간 곱슬거리고.. 아프리카, 인도, 아랍인이 아닐까?. 어린이의 신발은 나막신이다. 왠지 일본과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조선의 영역을 상상케한다.

 

이 그림에서 조선이란 나라는 과거에 아랍인들이 사는 중동을 포함하고, 흑인이 많이 살고 있는 서남아시아, 아프리카, 인도, 그리고 나막신을 신는 제주도, 동남아시아, 일본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암시한다.

 

3) 조선인에 대한 다른 그림

 

1925년 미국인이 그린 조선민화  (아랍인은 조선인)

 

1910년 우드빌그림

(조선인에 아랍인,북방인포함) 

 

 

(2) 시카고 세계박람회의 조선관은 중원풍의 건물 (08.5.23)

중원풍이라는 것은 조선이 대륙에 있었다는 뜻이고 고종황제도 1893년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박람회의를 위하여 힘썼다는 의미이다. 건물의 기와를 보면 대륙의 일반적인 형태이고, 처마밑의 문양은 중국전통가옥에서 볼 수있는 것들이다.

 

 

 

 

(3) 자금성의 비밀- 명, 청의 왕성이 아니다. (콘크리트역사와 명청의 역사. 08.4.9)

시멘트의 공장생산을 위한 공업생산이 시작된 것은 서구에서 1848년~ 1875년 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량으로 생산되기는 1920년 이후인 것이다. 결국 콘크리트는 1920년이후에 본격적으로 대량생산했다는 사실이 나온다.

 

바로 서구에선 목조나 석조대신 콘크리트에다 철근을 넣어 만든 철근콘크리트를 재료로 건물을 정식으로 짓기 시작한 것은 20세기가 훨신 넘었을 때였던 것이다.

 

아시아에서도 콘크리트의 역사는 20세기를 넘겨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그런데 명의 역사는 1368년~ 1644년이고, 청의 역사는 1616년~ 1912년이다. 그때의 건축물들은 목조로 지어지는 것이 당연한데도 실지로 지어진 것은 틀림없는 철근콘크리트구조였다.

 

명,청의 황성이라는 자금성이 20세기에 세워졌다는 것이 바로 나온다. 즉, 명이 망하고, 청이 망한 후(1912년)에야 자금성이 세워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콘크리트역사와 명청의 역사에서)

 

(4) 서안은 한성- 종루는 서울종각의 원조이다.

지금 서울의 종로2가에 있는 종각(보신각종)에 대해서, 종각이 현 중국 섬서성 근처 동대가쪽에 있는 (종루)종러우와 흡사하다.

 

(5) 만리장성은 조선의 장성이다. (08.7.4)

조선왕조실록중 세종실록 62권 15년 (1433년 癸丑계축) 10월 26일 을혜에 이렇게 나온다.

 

" 짐 역시 이로서 옛 선조들이 (천하의) 만리장성을 건축하여 오랑캐 적을 방비함으로서 오히려 (나라의) 난이 없었는데, 이런이유로 적들이 출입하는 요해에 수목이 많다하여 어찌 벌채하기가 어렵겠는뇨? 만약 에 풀이 마르기를 기다려 풀과 병행하여 태운다면, 어찌 길 닦는 일이 어려울 것인가?"

 

만리장성은 세종황제에게는 중요한 국토의 방비수단이었고, 항상 오랑캐의 습격에 대비하는 방파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서 만리장성은 조선의 장성임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할 것이다.

 

(6) 삽살개의 진실- 에스키모 개(사모예드)와 똑같다. (08.8.7)

1930년 중외일보에 기재된 삽살개의 사진과 그 설명을 보면, " 손잡을 줄 모르는 삽살개! 이렇게 (수레을 끌며) 새끼들을 데리고 놀러갑니다." 라고 나온다. 아래사진을 보면 삽살개가 캐나다지역의 에스키모개인 사모예드와 많이 닮았다.

 

 

조선의 토종개인 삽살개가 에스키모개와 닮았다는 것은 조선의 토종개가 조선의 어디에도 많이 볼 수 있는 개인만큼, 그 개가 북극주변에 널리 퍼져 살았다는 뜻이다. 이는 토종개가 살았던 북극까지 조선의 영역이 계속됨이 의미한다. (오로라가 조선에서 관측되었음. 63도 북쪽) 현재 한반도에는 삽살개가 사라진 대신 털이 많아 얼굴을 가린 처음보는 품종으로 둔갑해 있다.

 

동아시아에 있었던 삽살개는 일제때 거의 멸종되었다고 한다. 혹시 대조선의 흔적을 없애려는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아니었을까? 옛 어른들은 털이 얼굴을 덮는 개가 삽살개가 아니라고 했고, 에스키모개라야 맞다고 했다.

알레스카 북극개와 똑같은 조선의 삽살개의 원조

 

(7) 악어가 있는 조선- 새롭게 고쳐 쓴 신하멜표류기(최두환저. 서울, 우석출판사, 2003)

70p에 " (조선)강에는 악어들이 종종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고, 크기는 다르지만, 어떤 악어는 길이가 18엘레(12.34m), 20엘레(13.72m)가 되었으며~ " 라고 나오면 조선에 여러종류의 악어가 있음을 말해준다.

 

(8) 고려, 조선은 모두 만리의 나라다.

세조실록1권 1년에서 "우리 동방(조선)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이라 불렀습니다. ." 그리고 조선이전의 고려도 만리지국이었는데, 북역고려사 제5책 지(志) 56권 지제10 지리1편 첫줄에 보면, “우리나라는 ~ 강토의 너비가 거의 만리가 된다.” 고, 분명히 명시되어있다.

고려사절요 인종2년(1136년)에는 " 1만리의 천하를 가지고도 외국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치하지 못한데서 기인합니다." 라고 나온다.

 

 

  

                                                         1만리 =10리가 4km일경우

                                      <------------------------------------------->

                                                         1만리 =10리가 6km일경우

             <------------------------------------------------------------>

 

 

(9) 명청나라는 대륙을 통일했나?

명은 사천성, 청해성일부에 위치, 청은 내몽골북쪽에 위치. 대륙통일은 물건너가고, 그 빈자리는 바로 대조선, 천자의 땅이었다.

 

(10) 정화제독의 세계정복 (1421년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캐빈 멘지스지음, )

1421년 정화는 혼일강리역대국지도등 조선의 지도를 이용하여 세계정복의 길을 나선다. 정화는 황해도의 제후국, 명나라 출신이면서 대조선인이었다. 그는 조선의 대함선단을 만들어 복건성 동해앞바다에서 출항을 하여 오대양 육대주로 진출했다.

그의 위업을 위해 세워진 복건성에 기념비엔 이렇게 씌어져 있다."수평선 너머 지구 저편에 있는 나라들 모두가 우리의 발 밑에 있었으니, 서쪽에서도 더 서쪽으로 들어간 나라들이나 북쪽에서도 더 북쪽으로 들어간 나라들에도 예외는 없었다. 그것이 제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단 한들 말이다." -정화의 기념비 <천비지 신령응기(天妃之 神靈應記), 대륙 복건성 장락현,1431-

 

(11) 대조선사 지도의 의의

조선의 세계지도는 세계지도가 아니다. 다만 조선의 강역도일뿐이다.

1) 구대륙을 그린 세계최초의 지도는 고려 공양왕때 지도 대명혼일도(1389)이다.

 

 

 

 

2) 혼일강리역대국지도는 현존하는 조선의 천하도이다.

 

 

1402년(태종2)에 혼일강리역대국지도는 대사성 권근, 좌정승 김사형등이 만든 지도로

중국을 중앙에 배치하고 동쪽은 한반도와 일본, 서쪽으로는 아라비아, 유럽, 아프리카에 이르는 구대륙 전역을 포괄한 지도였다.

 

 

3) 한국본여지도(조선본여지도)는 조선이 대륙임을 말한다. (08. 5.26)

 

 

『중국고대지도집』에서 연구자중의 한사람인 임금성은 이 지도를 "왕반제지 여지도 조선모회증조본"라고 이름을 붙이고, 세로180cm, 가로190cm에 비단채색으로 17세기초에 제작되었는데 왕반의 원본은 1594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지도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가져간 것으로 보고 1637-1644년 사이(병자호란때)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출판한 『서울 하늘 땅 사람』이란 도록안에 ‘조선본여지도’가 있는데, 이 지도는 중국과 한반도가 같이 그려진 대조선의 본토지도이다.

 

사진= 한국본여지도

 

 

4) 조선에는 사해가 있었다. (조선 정조황제시절의 지구전도 .08.5.17)

1780년대 조선정조시대(청)의 경판천문전도(京板天文全圖)를 보면 조선의 본토지도 상부에 지구전도 2개가 나오는데, 그 왼쪽의 전도에 4해가 나온다. 그 사해란 북극해, 인도양(원 태평양), 태평양(원 대동양), 대서양을 뜻한다.

 

 

1780년대면 미국이 독립을 앞두고 있었고, 영국이 인도,호주를 점령하던 시기, 네델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점령했고, 러시아가 아시아로 진출하여 서시베리아를 점령했으나, 오스만터키가 점령중인 동유럽을 제외하곤 전 아시아 아프리카가 무주공산지역이 아닌 대조선의 영역이었음을 밝힌 내용이었다.

 

 

5) 최한기.김정호의 지구전도, 지구후도 (김정호의 1834년의 세계전도 08.5.19)

1834년이면, 미국은 남북전쟁바로 이전시기이고, 직접탐험하지 않고는 그릴 수 없는 지도이다. 지구전도,지구후도는 세계지도가 아니라, 조선지도이다.

 

 

 

 

 

 

(12) 오악은 고려의 산이다.

고려말기 공민왕, 즉 공민황제때 몽골의 중원장악을 막기위해 고려의 산하의 이름을 지정한 일이 있었다. 그 이름하여 다섯개의 산 오악과 4개의 바다 사해와 4개의 강 사독, 그리고 오진이 있었다.

참 놀라운 사실은 <고려사> 공민왕 조에 지정된 사실이 나온다는 것이고, 그 오악의 산 이름을 보면 한반도에는 전혀 없는 산으로 대륙의 중원지방에 틀림없이 존재해 있다는 사실이다. 현중국의 것이라는 산들이 모두 고려의 산이었던 것이다.

중악숭산지신 中嶽嵩山之神 = 고려의 가운데산 숭산의 신

남악형산지신 南嶽衡山之神 = 고려의 남쪽산 형산의 신

서악화산지신 西嶽華山之神 = 고려의 서쪽산 화산의 신

동악태산지신 東嶽泰山之神 = 고려의 동쪽산 태산의 신

북악항산지신 北嶽恒山之神 = 고려의 북쪽산 항산의 신

 

이와 같은 오악은 조선의 5대명산이 되었고, 현재 현중국의 5대명산으로 불리우고 있는 것이다. 숭산, 형산(지리산), 화산(삼각산), 태산, 항산 이다.

 

 

 

(13) 고려의 수도는 숭산인근이다.

서긍의 고려도경(역주선화봉사고려도경,조동원외 4인 옮김,75p)에 나온다. " 현재의 도읍지는 개주라고 하였으며 현재도 여전히 개성부를 두고 있다. 그 성의 북쪽에는 숭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형세는 서북에서 시작되어 산둥성이를 내려오다가 ~~ "

 

(14) 고려의 제2의 황성은 강소성 금호(남경으로 추정됨)에 있다. (08.5.18)

려성(黎城)의 최초의 이름은 고려황성이다. 명나라 세종(1522~1566년)때 편수된 <보응현지략(寶應縣志略)>에 기록이 보이는데 "고려황성(高黎皇城)은 강소성 금호현의 서남쪽 80리에 있다. 송 영종때 1064년부터 1067년까지 고려황제가 축성했다." 고 나온다.

 

역사학자 라비(羅泌)의 저서 <로사(路史)>에 "고려(高黎), 동양에는 고려성(高黎城)이 있다. 세속에서는 고려곽(高黎郭)이라 부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서의 기록에도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은 고려성이 이 곳 (금호현)의 문화국 관리의 말대로 고려성(高黎城)이 고려성(高麗城)이라 한다.

 

(15) 모란꽃은 고려의 꽃이고 낙양이 주산지다 (08.8.6)

대륙 하남성 낙양시는 고려의 개경인근이다. 고려시인 정습명의 시에서 보듯이 고려에는 모란꽃을 많이들 재배했다고 나온다. 현재 대륙의 낙양시에 모란꽃축제가 많이 일어나는 것과 연관이 많다.

이뿐만이 아니라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고려자기를 보았더니 모란을 소재로 한 자기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고려인들은 모란을 즐겨심었고 흔히 보았던 모란을 소재로 도자기에 그려놓은 것이다. 그 모란이 낙양에 많았고, 낙양은 고려에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16) 호남성은 고려의 땅이다.( 양자강이남도 고려땅이었다는 고전문학의 증언. 08.8.7)

1) 조선시대 문학지 동문선 권69 기(記) 운금루기(雲錦樓記) (이제현저)에 나오는 내용이다. " ~~ 그러나 명예를 다투는 자는 조정에 모이고 이익을 다투는 자는 시장에 모이게 되니, 비록 형산 衡山, 여산 廬山, 동정호 洞庭湖, 소상강 瀟湘江(주3)이 반발자국만 나서면 굽어볼 수 있는 거리안에 있어 우연히 만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런것들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2) 그만큼 호남성이 고려영토내 주위에서 엎어져 코닿을 거리,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곳은 고려의 산하에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즉 고려는 대륙에 있어 하남성, 호남성 등지에 있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17) 성도의 왕건묘

대륙당국은 "전촉왕 왕건묘" 현지에서는 토속거주인은 "가우리(고려) 왕건묘" 라 부른다. 청뚜 시내의 영릉로에 있는 전촉왕 왕건묘 영릉임. 10세기 초 혼란기에 성도를 중심으로 전촉(前蜀:903~925)을 세운 왕건의 묘로 永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고려태조 왕건의 묘가 분명하다.

적사암으로 만든 묘실은 전실과 중실, 후실로 나뉘고, 전 길이 23.4㎝로 관좌양측에는 12위의 역사상(力士像)이 늘어서 있고, 동. 서. 남의 3방에는 24위의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기생상이 새겨져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의 특징을 보면 각각의 그림이 각기 다른 자태와 조형의 미를 보여주며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왕건의 묘는 1942년에 발굴되었고 1961년 국무원에 의하여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지정되었는데 무덤의 길이는 80m정도에 15m높이로 묘실이 남아 있다 . 왕건묘가 대한민국인에게 알려진 이후 왕건묘는 영릉으로 바뀌어 고려왕건의 이미지를 지우고 있다.

처음발견당시의 왕건묘

후대 영릉으로 변경함

 

(18) 고려의 서쪽경계는 아랍이다.

고려사절요에 보면 고려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중 아라비아가 나온다. 이는 아랍이 서쪽국경을 마주대고 있음을 뜻한다. 이외 조공을 바치는 나라는 송, 동여진, 거란, 탐라, 요, 서여진, 동북여진 ,일본, 대마도 등이다.

 

4. 지구촌내의 대조선흔적

 

(1) 아메리카

1) 최근에 알려진 북미의 피라밋은 배달의 유적 (08.5.21)

미국 일리노이주 커호키아(Cahokia) 피라밋 발견 (BC 3000년추정)

 

2) 아나사지문명(Anasazi civilization)은 배달의 후예문명 (08.5.3)

100년 아나사지문명 애리조나 뉴멕시코,콜로라도 유타에서 발원하다. 아나사지는 나바호어로 옛날의 것이라는 뜻이다. Anasazi civilization에는 수렵과 야생식물 채취가 성행했고,

옥수수와 호박 경작을 통해 식량을 조달했다.

뛰어난 바구니 제조 기술을가지고 있었고, 동굴에 거주하거나 석조 기둥과 아도비 벽돌로 만든 가옥에 살았다 . 절벽 궁전 에는 장식주택 ,키바(북미 Pueblo 인디언의 지하실 큰 방)등이 있으며 서남지방의 유적에 해당된다.

 

3) 중남미의 피라밋은 배달의 유적

멕시코중남부의 아즈텍 피라밋.

 

4) 이씨족은 대조선의 이주민( 인디언 이시이족=李씨족 ,김재관저,08.4.8)

북미원주민에 이씨족이 있읍니다 대륙조선의 명확한 흔적이다. 이전까지 북미에서 조선의 흔적이 나타난것은 아나사지문명이 있었고, 피라밋의 발견이 있었고, 조선의 문화인 멧돌문화가 있었다. 그리고 몽고반점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씨조선을 상징하는 이씨족 =이시이족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자를 썼던 것이다.

 

이번에는 이씨와 더불어 한자사용, 한국인과 혈연관계의 일치, 짚신신기, 머리땋기, 한국말과 비슷한 말(토론토=토론하는 터, 아파치=아버지, 코시앵해=고생해, 웅주마티=곰이 많지등)이 많다.

인디언 중에 '이시이' 족이라고 있다. 이 이시이 족이 쓰고 있는 깃발을 보면 갑골문자로 나무 목 자와 아들 자 자를 기록해 두었다. 나무 목(木) 자 밑에 아들 자(子) 자가 있으면 한자 말로 무엇입니까? '오얏 이(李)' 자 이씨(李氏) 가 '이시이'가 된 것이다.

 

5) 신라의 지명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 스크랩,08.5.19)

스페인의 지명에 Silla와 Sila가 있다. 또 이들 지명이 Corea란 지명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 참고 : 잃어버린역사,보이는 흔적

 

6) 갓쓴 조선인 (이어서 멘지스 홈피에 오른 기마 사울아비? 김환. 08.5.19)

1600년대 근세조선때 중남미 페루에서 조선의 고유영토임을 증거하는 그림이 발견되었다. 단지 중국의 것이라 표현했지만, 사실 그림의 갓을 보니 말탄 조선양반들임을 알 수 있다.

홈피의 설명-Horsemen (말탄사람) "안토니오 델라 칼랑차"가 페루의 트루일로라는 곳에 도착했을때 발견한 중국아니면 일본인으로 보이는 그림의 사본이다."

 

7)한자

청화백자, 벼농사, 성벽쌓기 등 캘리포니아의 흔적 외에 한자가 기록된 엽전이 발견되었다.

- 1421년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캐빈 멘지스지음, 조행복옮김.

 

8)나전칠기

대륙에서 4000년의 역사를 가졌고, 베트남(국립중앙박물관 전시)에서도 성행했으며 아메리카에서도 발견되었다.

 

9) 윷놀이 (멕시코가 조선인 증거 <윷놀이 문화> 08.5.23)

인디언과 한국인의 윷놀이 페스티발- 1893년 시카고 콜롬비아 박람회는 코리아 역사상 최초로 참가한 국제행사였다. 그 당시 한국전시관이었던 Corea Exhibit의 위치를 찾아내 한국의 연합뉴스 등에 크게 보도된 바 있는 1893한국전시관복원기념사업회(회장 김성규)가 이번에는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역사적으로 최초로 코리안 인디언 합동 윷놀이 축제를 개최했다.

시카고 박람회 당시 서양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진 코리안 윷을 본 스튜어트 컬린은 그의 <한국의 놀이>(1895년 발행)에서 '코리안 윷놀이는 세계의 모든 윷종류의 원형'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1893년 시카고 박람회 당시 한국전시관을 복원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노력해온 본 기념사업회 회장으로서 필자는 지난해 2006년 2월 시카고 인근에서 코리안 윷과 거의 일치하는 인디언 윷과 윷말판을 발견하여 동포사회에 크고 보도된 바 있었다.

 

10) 조선아메리카

조선인들이 남미를 경영했다는 언어상의 증거도 있다. 항해하는 선박은 콜롬비아로 참반인데 대륙조선어로는 삼판이며, 뗏목은 남미에서는 발사, 대륙조선에서는 팔소라고 하며, 브라질에서는 잔가다, 타밀에서는 지안가다라고 한다.

페루의 어느 산촌사람들은 19세기말까지 대륙조선어로 말했다. 난파선, 혈액형, 건축술, 그림, 관습, 언어, 의복, 기술, 공예품, 염료, 조선과 남미사이를 이동했던 식물과 동물등 산더미 같은 증거들은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긴 태평양 연안과 내륙에 널리 퍼진 조선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영향이 너무나 깊고 넓어 그 시기의 아메리카대륙은 "중국(조선) 아메리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이다. -- 1421년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캐빈 멘지스지음,

 

10-1) 신라의 개미핥기는 아메리카가 신라의 영역이었음을 뜻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신라사 전에 보면 동물토우인형중 개미핥기, 원숭이가 있었다. 개미핥기는 주로 북아메리카의 멕시코, 남아메리카의 우르과이,북아르헨티나등 열대지방에 분포한다. 아메리카지역의 신라란 지명과 더불어 개미핥기의 표현은 신라인들의 발길이 아메리카에 빈번했다는 사실이고 그곳이 신라의 영역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2) 호주

11)조선인의 흔적

근세조선 태종때 홍보제독의 함대중 일부가 난파되어 호주 빅토리아주부근에 있었는데, 그 지점에 살았던 양제리족사이에는 황인들(조선인)이 그들가운데 정착했다는 전설이 있고, 그 족속의 피부빛에서 사실을 판단할 수 있으며 함대의 방사선 탄소 측정법으로 검사한 결과 조선태종때에 가까운 것으로 논증되었다고 한다.

<중국인(조선인)의 호주발견>을 쓴 위취현교수는 난파된 자들이 머레이에서 쿡타운까지 갔다고 했고, 중국인(조선인)기병들이 부근의 강들을 답사했다고 한다. 조선인 홍보는 세계최초로 마젤란해협을 통과했고, 남극을 발견했으며, 호주남부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의 살아남은 배에는 비단 같은 보물이 가득차서 호주 서부해안에서 본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거래할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호주에 조선이 세운 관측대가 브리즈번에 있고, 원주민들이 그들을 보았다는 곳이 여섯군데나 되며,조선인이 세운 비석이 케언즈, 캔버라, 퍼스등지 지금도 있다고 한다.

조선 보선단의 공예품들이 시드니,브리즈번, 다윈동쪽등지에 있고, 조선함대 난파선만 호주 사방에 8척정도 있다고 한다. 호주가 미개하고 문명이 뒤떨어졌다는 인류학자의 말은 믿을 수 없다. -1421년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캐빈 멘지스지음,

 

(3) 아프리카

12)이집트의 피라밋은 배달의 유적 (BC3000년경)

13)백제내의 아프리카동물들 (08.8.8)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백제금동대향로에 보면 동물중 코끼리,사자,악어가 있었다. 이는 백제가 아프리카와 멀지 않음을 뜻한다.

 

 (4) 아시아

14) 페르시아는 부여인가- ( 페르시아는 주몽이 탈출한 부여이다 08.6.21)

페르시아는 주몽의 모국 부여였고, 부여의 대소왕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이었다. 그리고 동부여가 위치했던 가섭원이라는 곳은 지금의 카스피해였다. 따라서 중동은 우리나라의 부여,고구려의 역사의 고향이다.

북부여, 동부여는 카스피해의 서남쪽, 동남쪽에 이르는 오늘날 터키, 이란땅으로 밝혀지고 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의 부친인 캄비세스가 부여의 금와왕으로 보인다. 캄비세스의 cam은 금을 나타내며, 황금의 아이를 나은 자안패가 cowrie인데, 카우리는 고려, 가우구리이고, 이는 고구려, 개구리와 연관성이 있다.

금와왕은 아이때에 금빛 개구리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당시 부여왕 해부루에 의해서 양자로 들여와 태자가 되었다.

 

삼국사기 고려본기에 의하면 부여의 재상 아란불이 "요전날 천제께서 제게 내려와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우고자 하니 너희는 이곳을 피해가라. 동쪽바닷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서 도읍할 만 곳이다."라고 하였고 부여 해부루왕에게 권해 그 곳에 도읍을 옮겨 동부여라 하였다.

그곳 가섭원, 카스피해연안에는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가 예전부터 와서 도읍을 정해놓고 있었다고 한다. 해모수는 하백의 딸 유화를 정을 나눠 주몽을 낳고 어느날 사라진다. 부여의 금와왕이 아이를 밴 유화를 만나 후처로 기용을 하고, 유화는 주몽을 낳는다.

주몽은 성장하여 천재적인 소질로 인하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와 적대감을 이루다가 도주하여 해모수의 나라 메디아제국으로 들어간다. 주몽이 간곳은 메디아제국내 졸본부여이고, 졸본은 투르판이며 박트리아의 동쪽에 있다.

지중해문화와 단군조선(박용숙저)에 보면 페르시아는 이란의 페르시스주에서 따왔고, 페르시, 파르스는 푸르, 부르,불이고 불(火)이 부여로 전음되었다고 했읍니다. 그래서 페르시아가 부여가 되는 것이다.

 

15) 중앙아시아 고구려성의 흔적 (중앙아시아의 성벽과 고구려 성벽.08.3.5)

고구려의 치성과 옹성은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고 중국보다 더 이른 시기에 독창적으로 창안한 축성법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러한 고구려의 산성 축성법은 후대에도 계속 한국의 중요한 전통으로 내려왔다.

 

조선시대 유성룡의 산성론을 보면 이러한 방어체계는 한국의 전통으로 전해 내려왔다는 것을 알수 있다. 호레즘의 성곽에 치와 옹성이 너무도 잘 남아있었다는 사실이다.

대략 2-6세기에 사용된 호레즘의 40여 성곽 가운데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토프라카라와 아요즈카라(카라는 곧 성이란 뜻)에 대한 슬라이드를 보았는데, 고구려의 옹문과 치와 너무도 유사했습니다.(김용만,고구려의 재발견)

 

16) 인도는 가야의 본국-( 가야의 파형동기가 맞나?.08.3.9)

시집온 공주(허황옥황후)는 이웃국 사람. 허황옥 황후는 아유타국공주로 인도 갠지스강 유역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도와 한반도는 너무나 멀고 통신시설도 발달안된 상황에서 바로 도착해서 결혼했다는 것은 좀 이해가 안된다. 두 왕국은 가까워야 정답이다.

한반도 남부의 허황후의 릉이 사실인지 증명할 수 없다. 릉이 있다면 중원대륙남부나 인도에 있어야 한다. 허황후의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 그 사서의 근거는 절대 한반도를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부에 허황후 릉이 있으면 황릉도 같이 있어야 하는데 혼자 별개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사실여부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17) 동남아, 서남아는 백제의 강역-( 東方의 로마帝國 百濟 2 .08.3.5)

동남아는 담로를 뜻하는 지명들이 널리 퍼져 있다. 그리고 백제유물에 駱駝낙타문양이 있음은 백제의 영토가 동남아를 비롯하여 인도 서북부지방, 그리고 대륙의 신장성, 초원,사막지대인 중앙아시아지역으로 뻗어 갔음을 의미한다. 아주 놀라운 사실들이다.

동남아시아의 백제의 담로지명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법왕(法王) 1년(599년) 7월에 백제에서 낙타 한 마리, 나귀 한 마리, 양 두 마리, 흰꿩 한 마리를보내왔다" 고 나오고, <살아있는 백제사(이도학지음)> 의 451쪽에 "백제땅에는 남방조류인 공작과 앵무새 그리고 건조지대에 서식하는 낙타, 초원의 목축인 양도 서식할수 있었다." 고 서술되어 있다.

 

18) 서안의 신라 진덕여왕 (황제)묘, (08.5.3)

다음블로그 향고도, 중국고지도,장안지에 수록된 장안지도에서 보면 섬서성 서안에 신라 진덕여왕(황제)묘가 표기된 것을 볼 수가 있다.

진덕여왕(황제)의 묘는 원나라,이호문이 편찬한 장안지도 중권의 능도, 당소릉도 하 편에 나온다. 그 그림중 왼쪽상단에 등?심사 옆에 있다. 장안지도 중권 소릉도설에는 진덕여왕(황제)가 신라낙랑군왕 김진덕으로 나오고 여황제를 포함하여 황제의 초형상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장안지도는 장안지에 있는데, 장안지는 북송 송민구(1019~1079)가 편찬했고 20권으로 되어 있다. 이중 부본3권이 있는데, 이중에 장안지도가 포함되어 있다. 장안지는 서안의 장안성,임동,보계,상원의 지리,건축,묘지등을 기록한 대륙(고려)의 사서이다.

섬서성 서안에 신라 진덕여왕(황제, 647~654)의 묘가 나온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신라가 중국에 신라방으로만 존재해 있었다는 기존의 학설을 깬것이다. 신라는 대륙에 본거지로 있었고, 대륙에서 통일제국으로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예가 된다.

 

(5) 유럽

19) 동유럽은 배달의 땅-피라밋발견(보스니아 피라미드,이간, 08.5.17)

동유럽 보스니아의 사라예보 북쪽으로 22KM지점. 비스코시에 있다. 모두 3개였는데 높은 곳은 220M이다.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에 이어 최초로 유럽에서 발견된 것이다.

20) 로마제국은 대진국이다. (대진(大秦)은 로마라는 확실한 증거 ,조용정,08.5.19)

위키페디아에 다윈(Daqin)에 표기된 것으로 백인들이 직접 인정하는 내용이다. 로마의 중국식 이름이라고 언급해 놓았다. AD97년경 Gan Ying 이란 중국(고구려계)의 장군이 흑해까지 진출해서 로마를 세웠다고 하고 이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키가 크고 정직하다고 했다.

 

그들은 중앙 왕국(Middle Kingdom, 조정)의 사람들과 닮아서 대진(大秦, 큰 중국) 이라고 불린다. 위에서 나온 중국이 고구려라고 가정하고, 당시 고구려의 중앙조정, 중원이 중앙아시아 부근에 있었다면 사람들은 고구려의 중원과 로마의 국민들은 비슷한 생김새라고 보인다.로마는 금은보화가 많이 나오고, 로마(대진)의 다른 이름은 "Lijian" 과 "Kingdom of Haixi (바다의 서쪽)" 이다. 로마인들은 집을 모두 돌로 짓고, 왕은 영속적으로 집권하지 못하며 가장 뛰어난 자가 투표를 통해 선출되고 만약 국가에 예상치 못한 천재지변이 나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그 결정에 이의를 갖지 않는다고 나온다.

 

21) 북유럽의 아틸라제국 고구려분국 (유럽대륙의 훈족은 고구려인이었다 08.3.5) 미국의 한윤수님의 글<전 世界의 언어는 동방문자를 주축으로 하는 고대우리말에서 비롯되었다>이 지난 1997년 미국의 Cable TV The Learning Chanell에서 Atilla the Hun 이라는 1시간 짜리 다큐멘타리로 방영되었다. 이 내용은 박대종님의 "전 세계의 언어는 우리말에서 비롯되었다.

 

유럽인들은 그들을 "훈(Huns)"이라고 불렀다. 본국 고려(Korea; 고구려의 준말) 땅에서 일어난 그들은 4세기 기간중에 로마 제국을 쳐들어왔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는 그들을 스키타이인(Scythians)이라고 기록했으며 그뒤의 유럽인들은 그들을 몽골인이라고 불렀다. 4세기 초 무렵, 상당수의 반유목 종족은 오늘날 Korea라고 알려져 있는 한국본토에서 만주 동부로 떠나게 되었다. 그 길을 따라 이민족들을 규합하면서 그들은 중앙아시아쪽으로 발걸음을 계속했다. 그곳에서 종족 대부분은 서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당시는 고구려 광개토황제가 대륙에 집권하던 시기이다. 훈은 또다른 고구려세력으로 고구려계인 대진을 무너뜨린다.

 

22) 스페인의 신라지명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 스크랩,08.5.19)

스페인의 지명에 Silla와 Sila가 있음을 알았다 이외에 Silla, Sila, Corea란 이들 지명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성姓씨로도 존재하고 있었다. 아랍에미리트 연방에 신라지명, sila나 silla, silah로 발음되는 지명이 오만과 사우디아라비아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소말리아에서 탄자니아에 이르는 아프리카 동부에서 신라란 단어가 쓰이고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엔 Sila, 또는 Sila-란 접두어가 포함된 지명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열거해 보면 스리랑카(3곳), 태국(2곳), 필리핀(6곳), 인도네시아(10여 곳) 등인데, 심지어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도 한곳이 존재한다.

 

23) 유럽엔 조선계가 있다. 조선계는 지중해연안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채소이다. 그러나 그들이 먹는채소를 조선의 채소라 명명되어졌다. 이는 독일까지 조선의 땅이라 했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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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조선사의 부활

 

최초의 국가 환국이 유라시아에서 처음 태동하고,

이후 배달이 생기어 유라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다스렸으며 ,

삼국시대에는 유라시아에서,

통일신라시대에는 유라시아에서,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영역을 다시 확대했고,

고려, 조선으로 이어진 지구촌경영이 계속되었다.

이후 조선의 문화를 받아들여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구들의 등장으로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조선의 천하도=지구촌이 조선의 통치권역임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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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결론

 

1) 본 연구를 통하여 대조선의 숨겨진 역사를 발견하여 증거했으며 조선은 지구촌의 강자이고 조선이 바로 지구자체임을 알 수 있었다.

 

2) 대조선은 1만년전부터 최초의 국가로 생긴이래 지구촌 곳곳에서 역사적으로 역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근세조선때에는 동시대에 유일무이한 대제국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본 연구는 시작에 불과하고, 앞으로 종합적이고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4) 역사의 진실을 밝히므로서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고 미래의 리스크에 대한 대처를 슬기롭게 할 수가 있다.

 

일시: 2008.8.23(토) 글쓴이:지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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