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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인류

[스크랩] 신라 왕릉에 묘비가 없다

작성자치우천황(이종식)|작성시간12.02.07|조회수14 목록 댓글 0

신라 왕릉에 묘비가 없다


한나라의 왕릉이라면 당연히 묘비가 있어야 함에도 경주 신라왕릉에 묘비가 없어 연구자들에겐 곤혹스런 부분입니다


거의 유일하게 29대 태종무열왕의 능만이 능 앞 비각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신라 태종무열왕릉비가 있어서 태종무열왕의 능이라고 하지만 현재 이 능의 비신은 없어지고 비신을 받치고 있었던 귀부와 비신의 머리를 장식하였던 이수만 남아있고, 그 이수 전면 중앙에는 '태종무열대왕지비'라 새겨져 있는게 전부라 이 역시 많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때문에 신라의 왕릉이라 불리는 것들은 대부분 추측일뿐 실제 왕릉이 맞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의문을 품고 사서 연구를 시작하여 <상고사의 새발견>을 쓴 이중하 선생 같은 경우는 중국 대륙으로 답사를 가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거해서 강소성에서 혁거세의 왕릉자리를 찾았고, 삼국사기에 의거해서 신라 27대 선덕여왕과 31대 신문왕릉을 사천성과 호북성 경계에 있는 낭산에서 발견했다고 하는군요


사실 한 왕조가 무려 천년동안 수도를 한번도 안바꾸는 것 또한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일이라 경주가 과연 신라의 수도인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별다른 이견이 없다가 점차 의문점을 제시하는 추세입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의 내용(아래의 정의 참조)처럼 비석은 전한 말기나 후한 초기부터 사용했고, 한국의 비석은 통일신라 이전부터 사용한 것이 확실한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라 왕들의 묘에서는 비석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29대왕인 태종무열왕릉에만 비석일부만이 있을 뿐입니다)


한 나라의 왕릉에 비석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신라왕은 모두 56명입니다


그런데 묘가 없는 왕은 25명이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왕의 묘지는 31명입니다


그러면 31명의 왕릉이 비석과 함께 있어야 됩니다


백제왕의 묘도 모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 분의 묘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고려왕의 묘도 한반도에 있어야 합니다


즉, 신라왕릉 31곳, 백제왕릉 32곳, 고려왕릉 34곳이 모두 한반도에 있어야 하지만 불행히 이 모든 왕릉은 흔적도 없습니다


다만, 경주에 있는 왕릉 몇개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정작 비석이 없습니다


어느 왕의 묘인지도 모릅니다


공동묘지라도 비석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왕릉에 비석이 없다니 말이 됩니까?


현재 경주에 있는 묘에는 비석이 없습니다


신라 992년간 왕의 묘지가 경주에만 공동묘지처럼 비석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있는 경상도 경주는 낙랑(樂浪)이라고 되어 있고, 낙랑은 현재 순화현(淳化縣)에 정해 있었다는 기록대로 하자면, 한국땅에 있는 경주는 낙랑이 아니므로 한국땅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순화현(淳化縣)이란 어디입니까?


현재 중원 대륙에 있는 서안(西安) 위쪽에 있는 곳이 순화현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있는 경주는 두번째 경주입니다


경주는 모두 5번 옮긴 것으로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24대 양원왕(陽原王 AD.496년) 8년에는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고, 25대 평원왕(平原王 AD.522년) 28년에는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장안성은 지금의 중국 한복판에 있는 서안입니다


즉, 신라는 중국 본토에 있었으므로 경주에는 신라의 진짜 왕릉이 없고, 비석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신라의 왕릉이 중국 본토에서 발견된 바가 있습니다


거서간(居西干)인 혁거세 왕릉지와 선덕왕릉지도 중원대륙에서 발견되었으며, 태조 왕건의 묘를 사천성(四川城) 성도(成都)에서 발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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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백과 사전 - 비석>

비석<碑石> : 고인(故人)의 사적(事蹟)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장을 새겨 넣은 돌

비(碑)·빗돌·석비(石碑) 등 여러 말이 있으며, 거기에 새겨 넣은 글은 금석문(金石文)이라 하여 귀중한 사료(史料)가 된다

비석의 시초는 옛날 중국에서 묘문(廟門) 안에 세워 제례(祭禮) 때 희생으로 바칠 동물을 매어 두던 돌말뚝에서 비롯되었다 하며, 또 장례식 때 귀인(貴人)의 관을 매달아 광내(壙內)에 공손히 내려 놓기 위하여 묘광(墓壙) 사방에 세우던 돌을 말하기도 한다

그 돌을 다듬고 비면(碑面)에 공덕을 기입하여 묘소에 세우게 된 것은 훨씬 후세의 일이며, 당시는 비석이라 하지 않고 각석(刻石)이라 하다가 이것을 비석으로 부르게 된 것은 전한(前漢) 말기나 후한 초의 일이다

진대(秦代) 이전의 각석으로는 우(禹)나라가 치수공사(治水工事) 때 세웠다고 하는 구루비(碑:河南省 衡山),주(周)나라 목왕(穆王)이 "길일계사(吉日癸巳)"의 4자를 새긴 단산각석(壇山刻石) 등이 있으나 진위(眞僞)는 확실치 않다

진나라 때는 시황(始皇)이 세운 추역산(鄒忌山)·태산(泰山)의 각석 등이있고, 한(漢)나라 이후에는 유서(儒書)나 불경(佛經)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도 유행하였다

한국은 비석이 언제부터 세워졌는지 확실치 않으나 고구려 때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창녕(昌寧)의 척경비(拓境碑), 백두산 정계비(定界碑) 등은 역사상 자랑할 만한 비석이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는 많은 비석이 세워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비석이 성행하여 그 유품의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비석의 종류로는 묘비(墓碑)를 비롯하여 능비(陵碑)·신도비(神道碑)·기적비(紀蹟碑)·기념비·순수비·정려비(旌閭碑)·송덕비(頌德碑)·애민비(愛民碑)·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유허(遺墟)·성곽(城廓)·대단(臺壇)·서원(書院)·묘정(廟庭)·빙고(氷庫)·교량·제지(堤池) 등에 세우는 기적비가 있다

비석은 대개 비신(碑身)과 이수(촬首)·귀부(龜趺)로 되어 있으나 요즈음 서민층의 묘소에는 이수와 귀부 없이 비신만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또 자연석의 일면을 갈아서 글을 새기고 위를 둥글게 한 것을 갈(碣)이라고 한다

 

 

자료출처 http:// coo2.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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