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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인류

[스크랩] 중국어는 인공어다.(3)

작성자마인드워시|작성시간05.11.18|조회수96 목록 댓글 0
 
제3장 漢語가 漢字에서 派生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1. 漢字의 口語(漢語)化 過程
  한자 발생과 변화에 대한 기존의 학설에 따라 한자의 口語化 과정에 대해서만 간단히 살펴본다.

字典
時代
 
編者
字數
遞增字數
增字數/年
甲骨文編
~BC1066
孫海波
1,723
(附2,949)
 
 
金文編
~BC220
容康
1,894
(附1,199)
171
 
創頡編
BC220~210
李斯 等
3,300   
1,406
140字
訓纂編
AD1~5
揚雄
5,340
2,040
100字
續訓纂編
60~70
班固
6,180
840
13字
說文解字
100
許愼
9,353
3,173
90字
聲類
227~239
李登
11,520
2,167
17字
字林
 
呂忱
12,824
1,304
字統
後魏
 
楊承慶
13,734
910
玉篇
543
顧野王
16,917
3,183
17字
廣韻
1011
陳彭年 等
26,194
9,277
20字
類編
1066
王洙 等
31,319
5,125
93字
洪武正韻
1375
樂韶風 等
32,254
935
4.5字
1446 훈민정음
字匯
1615
梅膺祚
33,179
925
3.8字
康熙字典
1716
張玉書 等
47,035
3,856
38字
中文大辭典
現代
1968
 
49,905
2,870
11.5字
     ▫漢字 字 數의 增加 趨勢
   《漢字學》王風陽。1989。길림문사출판사. p.532에서 전재


  -년간 증자수는 필자가 계산해 본 것
  -저자는 秦 이사의 《창힐편》을 漢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갑골문편과 금문편의 附라는 수치의 정확한 의미는 별도의 설명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해독하지 못한 글자를        뜻하는 것으로 짐작되며 후세에서 해독을 못했다 하더라도 총 글자 수에 합산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된다.
  -저자는 한자 수가 년 20~30자 전후로 증가해 왔다고 하는데 이는 BC1066년부터 현재까지 3000년으로 5만 자를     나눈 결과임. 같은 책의 여러 곳에서 BC1324년대의 사실(商의 遷都)을 기록한 문장이 포함된 갑골문의 발생연대     를  BC1066년도의 주의 건국연대로 문자발생의 기준 연도로 삼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위 표에서 漢字의 增字數를 보면 《說文解字》 이전 100년 동안은 年間 평균40자라는 엄청난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漢 代에 들어와 본격적인 문자사용을 반영한 것이다.
《說文解字》는 최초로 漢字를 六書라는 제자원리에 따라 분류한 현재까지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자전으로《說文解字》에서 갑자기 글자 수가 급증한 것은 그 때 까지 문자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것을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갑골문편(BC1066)의 글자 수를 附로 기록된 것까지 합한 4,600字의 절반인 2,300字를 기준으로 하여 《說文解字》(AD100)의 9,300자를 비교하면 년 간 6자 정도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를 다시 요약하여 정리하여 보면 
갑골문편(BC1300) 2,300자  ⇒  설문해자(AD100) 9,300자  ⇒  강희자전(AD1700) 47,000
                7000자/1400년=5자/년        37,700자/1600년=23.6자/년
와 같은 결과가 나오는데 이런 추세를 대입하여 갑골문편이 있기까지는 한해에 3자 정도 발생되었다고 가정하고 거꾸로 문자발생 시기를 소급해서 추정한다면 문자의 발생시기는 늦어도 BC 2100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만약 갑골문편의 글자를 3,000자 정도로 잡고 같은 방법으로 계산하면 이보다 300~400년은 더 거슬러 올라가게 될 것이며 이는 바로 고조선(BC2333)의 건국 시기이기도 한 堯·舜 시대를 지나 중국의 소설가이면서 문자학자인 駱賓基 선생이 《金文新攷》에서 최초의 문자로 考證한 丨(신, 곤)과 亼(집)을 이름자로 쓴 神農의 시기가 되는 것이다.

  1) 殷墟 甲骨文 以前
  殷墟 발굴 갑골문편에는  商의 19대 왕 盤庚 元年(BC1324)에 있었던 商丘로부터 殷으로의 천도 기록이 나오는데 위의 《漢字學》에서는 《甲骨編》의 연대를 周의 건국 년대인 BC1066년으로 잡은 것은 잘못된 것으로 그 시기의 사건(遷都)을 문장으로 기록한 연대를 가지고 그 글자의 발생 년대로 算定하는 중국 문자학계의 일반적인 오류는 반드시 고쳐져야 할 것이다. 
  이 시기까지의 글은 노예사회에서 중요한 통치수단으로 주로 역사의 기록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周에 대해서는 후대의 孔子를 비롯하여 모든 漢族들이 찬란한 문화를 이룩한 理想的인 왕조로 모든 공을 갖다 붙여 주고 칭송하면서 유독 商에 대해서는 폄하하면서 나라 이름까지 殷으로 바꾸어 가능하면 商이라는 이름은 입에 담기도 싫어하는 듯한 태도에서 甲骨文 자체도 단순한 占卜辭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똑같은 글인 占卜辭를 자신들이 빌려 쓸 때에는 雅言이 되니 웃지 못 할 아이러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가 생긴 까닭은 殷에 의한 문자의 발전과 사용을 점이나 치는 정도의 미미한 것으로 돌리고 周의 건국연대를 갑골문의 발생연대로 잡으면서, 商의 문자를 빌려 쓰게 된 것을 애써 감추고 모든 공을 훔쳐 독차지하고자 하기 때문이라 본다.

2) 춘추전국시대
춘추시대에 이르러 諸子百家가 일어나면서 漢文도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을 것인데, 周 王朝가 명분만의 왕조로 그 힘이 약해져 覇候國이란 강한 제후국의 보호 아래 그 명맥만 겨우 유지해 왔던 상황은 바로 통치수단으로 왕실이 독점하던 문자가 여러 제후국으로 나아가 일반백성까지 사용 범위가 확대 된 것을 의미하며, 제자백가의 출현이 문자와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설명보다는 거꾸로 문자의 개방이 제자백가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고 설득력 있는 해석이 될 것이다. 이러한 한자 사용의 확대와 전쟁 등으로 한문의 原來音으로 읽는 수준에서 차츰차츰 장음화하기도 하고 억양이 보태지기도 하며 전술한 바와 같이 논어에서 [雅言]이라고 할 만큼 말과 같은 형태를 띄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2. 雅言의 출현
  1) 제후국에 따라 몇 가지 다른 언어가 사용되었다.
  당시 제후국간에 서로 다른 말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史記》〈진본기〉에는 “융왕은 유여를 사신으로 秦에 파견하였다. 유여의 선조는 진나라 사람으로, 융 땅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진나라 말을 사용할 줄 알았다.”에서 秦나라말이라고 제후국 나름의 말로 표현하고 있으며, 앞서 인용한 바 있는《論語》〈述而〉의 “子所雅言:《詩》《書》集禮,皆雅言也.(孔子는 평상시에 盧나라 방언으로 말하지만, 詩·書를 읽고 예를 행할 때는 雅言을 사용하였다 ”고 하여 盧나라 말이 따로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2) 雅言은 어떤 말인가?
앞서 인용한 중국의 학자(前者)는 “雅言”을 “大雅”와 “小雅”나 “雅樂”에서의 “雅”와 같이 “바르다, 우아하다, 좋다,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로 새겨 “雅言, 바른 말”이라는 복합명사 새겼다. 朱子와 차주환은 “雅”를 “言, 말하다”이라는 동사를 수식하는 “雅=常”이라는 부사어로 새겨 “雅言 늘 말하다”로 새겼는데 “바르다, 우아하다”는 “雅”의 원 뜻을 “常 상식적, 정상적, 늘, 항상”의 뜻으로 확대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漢文 문장을 변형시킨 “漢語”를 당연한 말로서 인식하고 일상용어로 사용한 朱子 마저도 “漢文”이라는 문자나 문장이 “雅言”이라고 하는 말의 기능으로 사용되는 상황을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기록된 데로 雅言이라고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을 달리 해석하기 위해 궁리한 결과일 것이다.
필자가 중국현지에서 사온 다른 책에서도 전자와 같은 해석을 하고 있는데, 현대 백화문으로 번역을 해 두었으므로 그대로 옮기고 단어들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 (kǒng) () (yǒu) (shí) (yòng) (tōng) (xíng) () () (yꐁn) (nꐃ) (shí) (zꐃi) (jiꐂng) () (shī) (jīng) 》、《 (shū) (jīng) 》、 () (zhí) (xíng) () () () (shí) (hòu)
    공자   평소 사용  통행(的)의   말,    그때 在(진행혐) 강습   시경            서경          와  집행  예의(的)의  때(경우).
(zhè) (xiē) (shí) (hòu) (yòng) () () (yꐁn) (shì) (tōng) (xíng) () () (yꐁn) 。"
이런    경우 사용(的)의 (말)  모두 이다 통행(的)의 말.

  雅言을 아예 通行的語言라하여 周王朝의 왕도 지방에서 통용되는 말이라고 설명을
붙여 놓았다. 과연 통행하는 말이었을까?  《論語》〈述而〉의 이 句節에 대한 현대
백화문으로 된 해석에서 원문에서는 단음절로 된 명사를 똑같은 의미를 가진 복합
단어로 만든 덧붙인 단어와 원문을 의역하면서 의미의 전달을 위해 덧붙인 중복된
말들을 제거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

古文言文(論語): 子所雅言詩書集禮, 皆雅言也。(12字)
現代白話文: 孔子有時用通行的語言,那時在講習詩經書經和執行禮義的時候. 這些時候用
的都是通行的語言。(40字)
일견하여 한문 문장과 백화문(한어)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보인다.
文言文에서 子,詩·書,集,礼로 단음절의 단어로 쓰인 것을 白話文에서 孔子, 詩經·書
經, 執行, 儀礼와 같이 의미가 달라지는 것 없이 덧붙인 글자를 제거해 버리면
(孔)子有時用通行的語言,那時在講習詩(經)書(經)和執(行)禮(義)的時候.這些時候用的都
是通行的語言。
⇒子有時用(通行的語言),那時在講習詩書和執禮的時候.這些時候用的都是(通行的語言)。
  여기서 (  ) 속의 通行的語言은 雅言이란 단어를 번역한 말로 雅言을 通行的語言으로
 바꿔 쓴 것 같이 通行的語言을 雅言으로 바꾸더라도 의미나 문법상 어떤 차이도 없을
것이다.
⇒子有時用雅言,那時在講習詩書和執禮的時候.這些時候用的都是雅言。으로 29字로 된
제법 간결한 문장이 되었는데 이를 다시 논어의 고문언문과 비교하면
古文言文: 子所雅言詩書集禮, 皆雅言也。(12字)
       ⇒子有時用雅言,那時在講習詩書和執禮的時候.這些時候用的都是雅言。(29字)
  여기서 那時在講習詩書和執禮的時候에서 講習詩書和執禮(시서의 강습과 집례)는 진행
의 의미를 가진 在에 걸리는 말로 講習이란 말은 詩書에 대하여 集禮에 대비하는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추측하여 보충한 말로 공자의 행위이니 學習이나 讀의 경우보다는
講習이라는 행위가 적절할 것이나 본문에서는 원래 생략되고 없는 것을 덧붙여 해설한
 말에 불과하므로 지워 버린다고 하여 문법적으로 문제는 없을 것이다.  또한 연결사
和는 본문에서 생략했던 것이므로 생략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那時在에서 那時는
그 앞에 나온 有時를 다시 중복하여 쓴 것에 불과하며 在 또한 진행의 의미를 명확히
한 것에 불과하고 在가 없더라도 詩書集禮할 때 외의 다른 의미를 생각할 수 없으므로
 문법이나 의미의 변화 없이 생략이 가능하다.   그 뒷 절 這些時候用的都是雅言에서
皆=都(모두)이고, 雅言은 공통이고, 是=也(이다)로 대비되는 것으로 “這些時候用的
(이런 때 사용한)”은 논어의 원문의 문법적 구성과 아무 관련 없이 의미해설을 위해
덧붙인 말로 “執禮的時候.這些時候用的都是雅言”에서 執禮的時候를 반복한 것에 불과
하므로 지워버려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執禮的時候에서 的時候(--의 경우, --를
할 때)는 논어 원문에도 없으나 詩書集禮 할 때라는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고 있으므로
 지워버릴 수 있다. 이렇게 현대 백화문에서 복합단어로 사용한 것과 중복하여 풀어쓴
것을 제거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된다.
           子所雅言詩書集禮, 皆雅言也。(12字)
         ⇒子有時用雅言,詩書執禮.都是雅言。(15字)
이제 위의 두 문장을 비교함으로 근본적인 문법적 차이를 찾아 볼 수 있다.
논어 원문의 [所]는 백화문에서 [有時用]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여
     所(---으로서): 雅言으로(雅言을 이용하여) 詩書를 읽거나---
   ⇒有時用: 시서를 읽거나 ---할 때 雅言을 사용하다.  의 차이로서, 有는 有歲此에
서와 같은 의미로 생략해버리면 결국 [所:(雅言)으로서---했다]와 [時用:---할 때 (雅言
)을 사용했다]라는 어투의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漢語(白話文)는 한문을 해설하고 풀어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
릴 수 있다.
영어나 우리말의 고문이나 고어의 해석이라면  고대에 쓰던 단어의 뜻과 음이나 문법의
변화로 인해 달라지고 이해하기 힘든 것을 설명하는 것인데, 위에서와 같이 중국어는
단어와 문법상의 차이는 없으면서 단지 많은 단어를 사용하거나 지금도 이해할 수 있는
한 음절로 된 단어를 복합 단어로 풀어쓰고 있다. 이것은 단음절로 된 한문문장을 소리
로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음절을 늘리고 풀어 쓰게 되었다는 가설을 입증해 주는 것이
아닐까?  漢文= 漢語라면 한어를 간략하게 기술한 것이 한문이고 한어에서 한자가 만들
어졌을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말의 음을 생략한 것이 문자이면서 음을 생략한 문자가 말 그 자체일 수는 없다.  따라
서 한문의 음이 어떤 말에서 나왔는지에 관계없이 한문을 풀어서 해설하는 문장이 지금
의 백화문으로 발전하고 말의 기능을 하게 된 것이 분명하다.
  백화문에서 “孔子,詩經·書經,通行語言,執行儀礼”라고 해석한 글이 논어에서는
“子,詩·書,雅言,集礼”로 생략하여 쓰인 것이며 논어에서도 “孔子,詩經·書經,通行
語言,執行儀礼”로 쓸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논어에 쓰인 문자들이나 해설을
 위해 덧 부친 말 모두가 고유의 의미를 가진 독립적인 글자이고 단지 한 글자로 된
 단어이냐 복합어로 된 단어이냐의 차이밖에 없는 것으로 논어 문장 자체가 古文이
면서 文言文이고 古語이며, 이를 복합단어로 만들고 의역하듯이 풀어쓴 것이
 現代文인 白話文이고 口語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論語의 漢文 文章 자체가
雅言인 것이다.

3) 雅言은 孔子시대 周의 왕도에서 通行한 語言인가?
論語에 나타난 雅言이라는 단어에서 文이 바로 言으로 인식되는 자신들의 관념체계를 모
르는 체 슬쩍 덮어두고 서구와 접촉을 통해 비로소 분화된 현대적인 言語의 개념만을 부
각시켜 雅言을 왕도에서 통용되던 말이라하여 어른과 아이, 신분의 차별 없이 사용한 소
리말로 슬쩍 둔갑시키고 있다.
詩書集禮에 쓰인 雅言이야말로 희귀한 기록이며 공경대부들이 독점한 귀한 文으로서 雅
言일 수밖에 없다. 위대한 聖人으로 추앙 받는 孔子마저 평소 노나라 말을 하였는데 詩
書集禮의 경우에 한하여 특별히 사용하였다고 강조하는 雅言이 시중에서 일상생활에 사
용되는 말이었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孔子가 평소에는 노나라 말을 쓰더라도 詩書集礼에 대해서만은 漢文으로 씌어진 글이기
 때문에 漢文으로 풀어 강독하거나 集礼할 수밖에 없었으며, 孔子가 周游한 魯→衛→
(陳)匡→衛→曹→宋→鄭→陣→蔡→楚→衛→魯 어디에서든 詩書集禮에 대해 말할 때에
는 漢文 즉, 雅言으로 쓰여 졌으니 雅言을 쓸 수밖에 없었고, 周의 王都에서라 해도
그 상황은 똑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나, 정작 공자는 雅言을 사용하였다는 周의 왕도
에 가서 가르쳤다는 기록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고증도 없이 평소 周에
 대해 칭송한 공자에 의탁해서 단지 소망에 의해 조작한 허구의 사실에 기대어 주장하
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작은 비단 《白文對照 十三經》編著者 등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며, 2000년 넘게 중국 문자 훈고학에서아무런 고증이나 典據없이 만들어낸
날조와 왜곡의 작은 단편에 불과하다.
공자시절 文이 곧 言이이었다. 胡奇光등 중국학자들이 말하는 雅言이라는 것은 孔子가
 左傳·襄公25年》에서 인용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志有之: 〈言以足志, 文以足言.〉不言, 誰知其志? 言之無文, 行而不遠.
  이런 말이 있습니다: 〈言語로써 뜻을 충분히 표현하고, 文彩로써 言語를 완벽하게
수식한다.〉 말을 하지 않으면 누가 그의 뜻을 알겠습니까?  말을 하여도 文彩가 없다면
 먼 곳에까지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4字의 [言]이 가리키는 것은 모두 [文]이며, 言은 文彩가 있어야 제대로
된 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漢文을 언어화하여 사용하는 중국에 있어서 변할
수 없는 진실이며, 漢語의 완전한 소리 말로서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현재까지 [文]
과 [言]을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실에 입각한 중국인의 관념이다.

3. 漢文의 口語化 過程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이 필요 없을 정도로 中國의
語文學 관련 서적에 잘 정리되어 있다.
필자는 음운학이나 소학에 관련된 책을 읽거나 문학사 등의 수강과정에서 느꼈던 몇
가지 정황을 중심으로 한문 사용 行態의 변화과정을 살펴 정리함으로 한문의 口語化
과정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런데 춘추시대 [雅言]의 출
현에 관련한 小學史 서적을 뒤지던 중 중국인이 정리한 소학사의 기록이 바로 필자가
 고심하며 설명하려했던 것들을 잘 정리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소학사의 기록을
보면서 은연중 공격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방어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국인들의 고심의 흔적들을 보게 되었다. 중국인 스스로 漢語가 원래부터 사용하던
口語라고 정면으로 말하거나 논제로 꺼낼 필요도 없는 사안 인양 깔아뭉개 버리고,
이러한 漢語가 말로서의 존립여부가 달린 결정적 문제에 대하여는 거론조차하지 않고,
 언어학적 이론의 핵심을 슬슬 피해가면서 “통용어를 사용하면 한 민족이다”라고
하여 외국어를 第二 母國語로 쓰는 민족은 모두 한 민족이라 하여 영어를 관용어로 쓰는
 필리핀인들은 앵글로색슨 족이고 원필리핀어는 영어의 방언이라는 식으로 누가 시비
거는 사람도 없는데 미리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주로 인용한 胡奇光의《中國小學史》에서는 《方言》을 주로 인용하였는데 이
책을 잘 보면 漢語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中國小學史》에서는 《方言
》을 인용하여 -先秦시기에 맹자는 齊나라 말과 楚나라 말의 차이를 지적하였으며, 
-荀子는 楚語·越語·夏語(즉 雅言) 등 3개의 말이 鼎足의 勢를 이루고 있다고 지적하
였다고 하면서 은근 슬쩍 雅言을 夏語라고 하며 漢族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
言語를 지칭하는 듯한 「通語」「梵語」「雅言」「俗名(俗言)」「常言(恒言)」「轉語
」등의 용어는 모두 문자 훈고학 분야에서 다루는 주제이며 이것들 모두 문헌에 나타
나는 문자의 훈고에 관한 것이지 文을 떠난 言과 語는 존재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中國大百科辭典》중〈語言 文字〉편을 따로 때어내어 우리말로 번역하여 단
행본으로 출판한 《中國文字訓詁學辭典》에서「通語」「梵語」「雅言」「俗名(俗言)」
「常言(恒言)」「轉語」등 言語의 유형으로 느끼게 하는 개념들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通語] : 《方言》에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공통적으로 사용
하는 낱말을 通語라고 한다. 〈통어〉란〈방언〉에 대하여 상대적인 개념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 예로『〈娥아〉·〈女嬴영〉은〈好(곱다)〉라는 뜻이다. 秦 지방에서는
 〈娥〉라고 하고, 송·위 지방에서는 〈女嬴〉이라 한다.  秦·晉 지방에서는 곱고
가벼운 것을 일러 모두 〈娥〉라고 말하며, 관동지역과 河濟 지역에서는〈媌〉또는
〈姣〉라고 하며, 越·魏·燕·代 지방에서는 〈姝〉또는 〈봉〉이라 한다.  관서
지역과 秦·晉 지역의 옛 도시에서는 〈姸〉이라 말한다. 〈好〉가 그것의 通語이다』 

[凡語]: 《方言》에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각지에서 일반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낱말을 말한다. 그 예로 『〈嫁〉〈逝〉〈徂〉〈適〉은〈往〉이라는 뜻의 말
이다.  집에서 나가는 것을〈嫁〉라고 하며, 여자가 출가하는 것을〈嫁〉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逝〉는 秦·晉 지방의 말이며,〈徂〉는 齊 지방의 말이고,〈適〉은 宋·魯
 지방의 말이다. 〈往〉은 범어이다.』

[俗名=俗言]: 〈俗言〉〈俗呼〉라고도 하며 입으로 보통 말하는 명칭을 가리키는 것.
〈俗〉은 보통 〈雅〉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말하는 것이며, 〈雅〉는 서면적인 글말에
 접근되는 것인데 비하여 〈俗〉은 입말 언어에서만 사용되는 것이다.

[常言=恒言]: 통속적으로 보통 하는 말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상생활 중에
 親屬·呼稱·禮義風俗·거주·여행·음식·의류·장식·인사 등에 관한 통속적인 명칭,
 혹은 일반적인 成語·諺語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동일 사물에 대한 명칭은 여
러 지방에서 각기 다른 고유의 명칭을 지니고 있을 수 있는데, 〈常言〉이라는 것은
바로 그 통용이 비교적 보편적인 명칭을 두고 한 말이다.

[轉語]: 낱말의 음이 변화되므로 말미암아 그 낱말이 또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바,
 그러한 낱말을 일러 〈轉語〉라고 한다.

이상에서 주목할 점은 [通言]이나 [凡語]는 모두 揚雄이 쓴 《方言(輶軒使者絶代語釋別
國方言)》에서 처음 등장하는 말이라는 것과,  [雅言]을 포함하여 [通言]이나 [凡語]
 모두 그 대상이 文字, 즉 漢文字로 된 단어에 대하여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모두 문자 훈고나 소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俗名]·[俗
言]을 [雅言] 이라는 書面的인 글말에 대하는 입말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여 [雅言]과
 [通語] 및 [凡語]가 書面語를 말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혀 두고서도, 이 것들이 마
치 일상 대화에 사용하는 소리 말인 양 周의 王都 지방에서 통용되었느니 하면서 현대
에 와서 말이라고 할 때의 개념과 같은 일상 대화에 사용되는 말인 것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通言]이나 [凡語]는 그 지방이나 제후국의 말의 문법과
 어법적인 차이와 관계없이 한문으로 쓸 경우는 한문이라는 단어의 뜻과 문법적인 요소
는 동일하며, 단지 같은 漢字로 된 단어이지만 지역에 따라 다르게 쓰이는 단순한 單語
의 차이에 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漢字의 字意를 다루는 것으로 소리 말과는 관계가
없는 문자 훈고학의 분야인 것이다. 通言이나 俗言에서 言이란 文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漢字 단어 중 비교적 넓게 통용되는 것이 [通言]이고 지역에 따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凡語]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雅言]은 正雅한 가장
 규범적이거나 표준적인 漢文字를 일컫는 것일 뿐 역시 文으로서의 言이며 소리 말은
아님을 스스로 밝혀 두고서도 중국인들은 다른 말들을 하고 있다.
한편 [俗名=俗言]이나 [常言=恒言]이야말로 소리 말에 대한 명칭인데 이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더러 연구 성과도 없다. 또한 오늘날 현대적인 언어학분야에
서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할 본질적인 말인 소리 말에 대한 용어에 대해서는 거론도 하
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雅言]에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같은 책 바로 뒷장에서 
〈雅〉는 서면적인 글말에 접근되는 것인데 비하여〈俗〉은 입말언어에서만 사용되는
 것이다.”라고 하여 그것이 書面語 임을 못 밖아 두고서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리고 [雅言]과 [俗言]으로 직접 비교할 수 있는 것을 〈雅〉와〈俗〉으로 바꾼 벼룩
도 낮 짝이 있다는 속담을 실감케 하는 중국학자들의 낮 짝을 보기 바란다.

[雅言]: 이 용어는 《論語》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이다.  《論語·述而》편에 『子所雅
言,《詩》·《書》·集禮皆雅言也.』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말의 뜻은 공자가 《詩經》
과《書經》을 독송할 때와 예의를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 하는 말은 모두 雅正한 말이었
다는 것이다.  즉 당시의 中夏 지역의 공통어를 말하는 것으로 明·淸시대의 이른바
〈官話〉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胡奇光의《中國小學史》와 《文白對照 十三經》에서 通行的語言이나 주나라의 말로 夏
語라고 하여 특정한 언어를 지칭한 것을 여기서는 雅正한 말이라고 하여 보통 명사로
 풀이하고 있어 추론을 통하여 갖다 부친 전자의 해석에 비하여는 직역에 가까운 해석
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바로 뒤에서 中夏지역의 공통어라고 하며, 나아가 明·淸시
대의 官話즉 Mandalin이라고 하여 모든 과정을 뛰어넘어 단번에 지금의 漢語, 즉 소리
말로 비약을 시키고 있는 것으로서 시경과 서경을 讀誦한다는 것은 시경과 서경에 씌어
진 한문을 소리 내어 읽는다는 것이며, 이럴 때에 독음의 변화를 통하여 소리말까지 발
전하였다는 필자의 주장을 완벽하게 보증해 주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학자들이 필자
와 같이 시경과 서경의 독송으로부터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오늘날의 한어로까지 이행
되어 온 과정을 설명하지는 않고 당시의 중화지역의 공통어라는 마치 한문과 별도의
소리 말로 읽었다는 듯이 말하면서,  詩經·書經= 讀誦= 소리로 읽음= 소리말로 읽음=
中夏의 通用語= 詩經·書經= 漢文= 明·淸시대 官話의 등식이 만들어지게 하는 중간의
변화과정을 생략해버린 다소 비약적이고 무리가 따르는 설명을 하고 있다. 또한 불량한
 의도를 갖고 아예 한문으로부터 이행해 온 과정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고 하다보니
전술한 해석이 나오는 것으로, 아무리 숨기고자 해도 은연중 사실을 고백하지 않고는
 《論語·述而》에 처음 등장한  [雅言]이라는 이 주옥같은 말을 자신들의 옛 말로
둔갑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청대의 劉台拱이 지은 《論語변지》에서는---지방 말들을 종합적으로 모아서 표준말
로 툴이함에 있어 각종 물건들을 부류에 따라 유사한 것들을 한데 모아 놓았으므로
〈爾雅〉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詩經》에 있는〈風〉·〈雅〉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왕의 도읍지에서 사용되는 말이 가장 표준적인 것이므로 〈雅〉라는 말을 넣어서 이름
하였던 것이다.  列國 들에서 사용되는 말은 모두가 표준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風
〉이라는 말을 써서 이름 하였던 것이다.----〈雅〉라는 것은 〈夏〉지역을 일컫는 것이
다.

여기서도 유태공의 말을 인용하여 왕의 도읍지에서 사용되는 말이 가장 표준적이므로
<雅>라하고 열국의 말을 모은 것을〈風〉이라 한다 하여 도읍지의 말과 〈雅〉를 강조
하고 있다.  왕의 도읍지의 말에 대해서는 이미 그 허구를 지적한바 있으며 여기서는
녹음기를 틀듯이 꼭 같은 이야기를 하는 〈雅〉·〈風〉에 대해 양계초는〈風·頌·雅·
南이란 무엇인가〉에서

   四詩의 설이 《史記》〈孔子世家〉에 보이는바--- 시 3백 편은 본래 4체로 분류하였
으니 南·風·雅·頌이 그것이다. 그런데 《毛詩》의 序 이래로 ‘南’의 참뜻을 해석
하지 못하고 주남·소남을 패풍, 용풍 이하의 13 국풍과 같이 취급하고 합해서 ‘15 국
풍’이라고 부르게 되니 이로 말미암아 ‘四詩’는 세 가지만 남게 되었고 그리하여
‘아’를 ‘대아’와 ‘소아’로 나누어 ‘四詩’의 수를 채웠으니 시체가 문란하게 된
 것이다.--
‘南’:《시경》〈고종〉편(소아) ‘雅와 南을 연주하고’(以雅以南)에서 南은 雅에
대하는 詩體
    《예기》문왕세자 ‘모두 南을 북으로 연주하다’(胥鼓南)
    南은 일종의 음악의 이름.  일종의 합창음악으로서 음악이 끝날 때에 노래한 것.
‘風’: ‘風’이란 ‘諷’이며 그것도 ‘소리 내어 외움’(諷誦)이라고 할 때의 ‘諷’
자의 본 글자.
     ‘風’은 소리 내어 외울 수 있으나 노래할 수 없는 것.
‘雅’: 정악
‘頌’: 南과 雅는 노래만 할 뿐이나 ‘頌’은 노래에 춤을 겸한 것이다

라고 하여  1)정악과(雅)  2)합창음악(南)  3)춤을 곁들인 음악과(頌)  4)諷誦(風)의
네 가지 詩體로 해석하고 있으며  ‘風’에 대해 《모시》에서 설명한 “위에 앉은
통치자는 아래의 백성을 성현의 유풍으로서 교화하고 백성은 통치자의 허물을 멀리
풍자함”(上以風化下 下以風刺上)등을 억지해석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은 원래
부터 중국인은 風(虛風)이 세기로 정평이 나 있으므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필자로서는 아직 《시경》에 까지 공부가 미치지 못하여 이러한 측면을 가지고 주장
할 수는 없으나,  위의 [雅言]에 대해 설명한 글에서 처음 ‘雅言’을 단순히 ‘雅
正한 말’이라고 했다가 논리적인 설명 없이 《모시》등에 실린 ‘風’의 뜻을 그것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판단할 필요 없이 그런 말이 있었다는 것만을 근거로
‘雅言은 왕도의 말이고 夏族의 말’이라는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는 수긍할 수가 없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雅言]이나 [通言]· [凡語] 등은 단어의 차이 밖에 없고,
결국은 漢文字 내지 漢文文章으로 기록된 것인데, 이상한 논리로 “夏華族의 雅正한
말”로 바꾸기 위해 ‘風’이라는 王化가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서 사용하는 ‘風’이라
는 이름을 붙인 허구의 말까지 만들어 대비시킴으로 역시 허구인 ‘雅言’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는 고습이 한편으로 가련하고 측은하다는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
을 수 없다.
孔子는 시와 음악을 아끼고 이의 정비를 위해 힘썼다.  그러므로 《論語》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 [雅言]이란 말이 공자가 시를 암송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신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4. 한어가 한문에서 파생되었음을 시사하는 정황 들
이제 필자는 漢語는 漢文이 口語化한 것이라고 느꼈던 몇 가지 단서들을 논리적인
체계나 선후 구별 없는 데로 앞으로 연구하고 정리할 숙제로 간단히 제시해 두고자
한다.
(mꐀ) (mꐀ) (bꐃ) (bꐃ) 등 한문의 뜻과 상관없는 호칭어나 의문문을 만드는 (mꐄ) (() (hꐂo) (mꐄ)안녕하세요?) 와 같이 작은 口자를 앞에 붙인 말들은 漢語와는 다른 원래의 소리 말의
잔재일것이며, 원 소리 말의 뿌리 위에 漢文이 만들어 진 것이라면 媽(mꐀ)가 ‘母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문자로 만들어 져야만 했다.  그런데 馬는 말의 형상을 딴 글자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
 어머니의 이미지를 어떻게 찾아 볼 수 있을까?  “어머니는 자식의 위급한 상황을 보
면 말과 같이 빨리 달리는 사람이다.” 라고?  필자가 농담 삼아 갖다 부친 해석이지만
 그럴듯하지 않는가? 그런데 대단한 학문으로 생각하는 문자훈고학에서는 필자의 농
담보다 더 웃기는 설명이 정설로 굳어져 있는 것이 허다한 실정이다.
▫위와 비슷한 경우로 음이 같으면 글자 뜻과 상관없이 통용되는 通仮字들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고, 자전의 같은 部首에 실린 글자들보다도 음소역할을 하는 글자에 따
라 동일하거나 유사한 의미를 가진 한자의 수가 더 많은 현상과 소리를 따온 仮借字
들도 비슷한 경우인데 이러한 정황은 양날의 검 같아서 한편으로는 漢字의 소리 말
에서의 발생을 증거 하는 것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漢語에서 漢文이 생겨났다는 것을
 부정하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소리를 우리말로 바꾸어 보면 그 글자를 모르고도 음만으로 의미를 유
추할 수 있는 글자들이 의외로 많다. 특히 金文과 같이 오래된 글자일수록 이런 경
우가 많아 한국 사람이 본격적으로 金文공부를 하게 되면 중국 사람들이 의미를 몰라
 그 비슷한 모양만 쫓아 억지 해석한 것들을 바로 잡는 금문이나 고문자 해석에 있어
서 획기적인 전기를 이룰 수 있으리라 장담하는 바이다.  소리와 글자의 뜻이 넘나
드는 예를 하나 든다면

  亼(집): 神農의 이름자. 天地人과 丿(별), 乀(불), 丨(곤, 신) 의 삼신이 모인 집.
        삼위일체 여호와의 집, 三神閣
    ⇒ 邑(사람들을 모아 도읍한 곳, 삼신의 집에 읍함)
       令(삼신의 집 아래 조아린 모습)
  集(집): 새들이 밤이 되면 돌아오는 집.  중국 안휘·하남·강소·산동성을 중심으로
 한 옛 東夷族들의 본거지에 산재한 高辛集, 大寺集, 淝河集, 楚店集, 孫叮集, 龍集
, 伊集 등 589개에 달하는 集이란 鄕村市의 이름
  宇宙: 집宇, 집宙 별들의 집
  家: 돼지를 族号로 사용한 高陽 임금의 넷 째 아들의 집. 제가, 저희가, 豚兒라는 말
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집.  家字위의 갓머리에 찍힌 점은 亼의 省略 体(京:삼신이 都
하신곳. 享:삼신에게 제사지냄)이며 머리 위의 上秺(상투로부터 下秺를 거쳐 삼신이 이
어짐. 여자는 가르마)이고 하늘이 내려주신 기운 示(天垂三象)를 받는 정수리 囟(신),
 가마이며 그 머리 腦(뇌- 하늘로부터 내리는 내(巛 示)를 받음)
  祖는 돌아가신 且(하투)로서 선조. 囟(가마) 이며, 丨(신)이며, 腎(신)이며 돌하루방
의 모습이고, 金文에 무수히 기록된 鳥王(且의 후예이며 새 왕들) ⇒ 新羅, 金城(새성,
 새벌) 새롭다는 뜻의 아사달⇒ 오곡의 祖인 조(黍)와 사직, 해와 눈을 맞춰 붉게 물든
 제사상의 대추(棗조), 뭇 새의 元祖인 鳥, 모든 쇠붙이의 원조인 새(金) 새로 관직명
을 삼았다고 하여 小昊金天氏를 東夷鳥族의 조상이라고 하는 중국인들이  “ () (tīng) () () (niꐂo) (huꐃ) 。 ( () (tīng) () () (niꐂo) (huꐃ) )가 내가 너의 좆같은 소리를 들었다.”로 사전에 실려 있는 중국 땅인 山東地方 方言의
 의미를 알 수는 없는 대신 우리 경상도 지역에서는 “새 ㅇ 같은 소리”라고 똑 같은
의미의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이야기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한 말장난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나, 그분들에게 정호완씨가 쓴 《우리말의 상상력》을 권한다.
  ▫漢 代에 들어와 楚辭가 없어지고 樂府詩만 남게 되고,  한자에도 급격한 음운의 변화
가 일어난다. 그중 하나가 雙聲(雙聲聯綿字)과 疊韻(疊韻聯綿字)으로 “고대 중국어는
단음절사가 위주이지만 쌍음절사도 제법 있었는데, 이러한 쌍음절사 중에는 聯綿字가
적지 않았다. 연면자란 ‘彷佛, 參差, 安檼, 崔嵬, 滄茫, 逍遙’처럼 쌍성이나 첩운으로
 구성된 단어(詞)”라고 하여 고대에도 많았다 라고 만 기술하여 저자가 저술한 시기로
부터 고대라고만 하여 애초의 고대 한문에 많이 쓰였다고 오해하게 하는 쌍성과 첩운이
 漢 代로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는 필자의 복합단
어를 만들어 음가를 늘려왔다는 주장을 입증해 준다.
  ▫이러한 음운적 변화는 漢 말 에 이르러서는 변려문을 출현시키고, 魏·晉 남북조
시대에는 일시 美辭麗句에서 벗어나 古文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唐 代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의 운율에 대한 연구와 함께 급속한 음운의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문과 말을 구분하지 않음과 동시에 노래와 극 자체를 순수 문학 장르로
구분하지 않고 취급하고 있다. 극문학의 발전과정을 개괄하여 보면, 唐 初까지는 奇怪
와 小說이라하여 불교의 전래와 함께 불경을 해설한다든지 하는 주로 씌어진 극본의
그림을 보여주고 설명하며 읽어 주는 방식의 무대예술이 발전하다가 唐 末로부터 宋 代
에 講昌이라하여 노래로 부르는 극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눈으로 보고 설명을 듣는
수준의 공연예술이 노래를 듣는 수준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조기 백화가 출현하였다
고 하는 唐·宋 대에 와서 한문의 독음의 변화와 연면자와 복합단어 등을 통하여 어느
정도 소리로 그 의미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음절이 늘어나는 등 상당한 정도의 口語化
가 이루어 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중국의 극에서도 시각적인 요소가 중요
한 위치를 차지하고 소리는 단지 보조적인 역할밖에 못하는 것으로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전통극을 대표할 수 있는 京劇에서는 검보(瞼譜)라고 하는 얼굴의 분장
에서부터 이미 그 인물의 지위와 성격이 결정되어 있으며, 무대 소품의 종류와 개수
위치가 모두 특정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으며, 우측으로 도는가 좌측으로 도는가, 몇
번 웃는가 하는 등의 동작 하나 하나가 定式이라고 하는 약속된 의미를 가지고 있어
“楚王別姬”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먼저 楚漢誌를 읽어 그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밖에 손짓 발짓 움직임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저것은 슬픔을 나타내
고 저것은 분노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식으로 배우나 연출가와 동일한 수준에서 극본을
 이해하지 않고는 제대로 감상을 할 수 없다.
  ▫음운의 변화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성조의 변화와 入聲이 사라진 것이다. 성조
의 변화와
입성이 사라진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동시에 일어났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이전부터
운율을 4성으로 구분하여 왔지만 새로운 4성 체계는 예전과는 별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차이가
 많으며 그중 가장 큰 변화가 入聲(去聲)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入聲 중 [ㄹ]음이 가장 오래
 남아 있었는데 1375년의《洪武正韻》에까지 남아 있다가 1615《字匯》에서는 완전히 그 자치를
 감춘다.  이에 대하여 唐作藩은 그의 저서 《중국음운학》에서 入聲韻이 사라져 가는 과정과 방언
에 남아있는 흔적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고 있는데 “湖北·江西의 어떤 지역에서는 원래 [-t]
 운미였던 글자를 [-l] 운미로 읽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湖北 通城方言에서는 ”殺“을 [sal]로
읽는데, 한국한자음에서도 [-t]가 [-l]로 변한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라고 하며 중국 방언에
남아있는 입성의 흔적으로부터 유추하여 “殺”의 음이 [sat]→[sal]→[殺(shꐀ)]로 입성이 사라지
게 되었다고 하면서 한국의 [sal]음이 그 중간 과정에 해당한다고 끌어 붙여 자신의 이
론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殺”을 [sat]로 읽은 적
도 없을 뿐 아니라 앞으로 [sha]로 읽게 될 가능성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그가 한국어
판 서문에서 지적한 “---현대 한국어에는 고대 중국어의 단어나 어음성분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風“을 ”풍“[p'uɠ]으로 읽고 ”晩“을  ”만“[m
an]으로 읽는 것은 현대 중국어의 경순음---고대 중국어에서 중순음---으로 읽혔다는 것
을 반영해주고, 아울러 한국어의 이러한 단어들은 9세기 이전, 즉 중국어에서 중순음과
 경순음이 분화되기 전에 전해졌음을 말해준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어의 한
자음이 원래 고대 음에 가깝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그것은 중국에
서 한자가 전해질 당시의 중국어 음을 받아들여 변형 없이 유지해 왔다고 하여 한국
에서 한문을 받아들인 시기의 차이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여 은연중 한자에 대한 지
적재산권을 지키기에만 급급한 중국학자의 위기감을 잘 나타내 보여 준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단순 명확한 것으로 “현대 표준 중국어에는 入聲韻이 없는데 원래
의 古入聲韻 글자가 모두 陰聲韻으로 읽히고 있다.  이는 입성운이 음성운으로
바뀌어진 것이다.”라고 하여 한국의 음운과 관계없이 중국에서 입성운이 사라져
 버렸음을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入聲을 통하여 적지 않은 소리의 조합을 확보할 수 있는데도
구태여 없애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발음의 연음화를 위해서라는 것은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일이며 [ㄹ]음은 그중 소리를 단절시키는 정도가 약하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입성운은 17세기에 끝내 없어지면서도 1716년의《康熙字
典》에도 半切로는 입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학자의 태도를 소개
하는 것으로 이 주제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를 하고자 합니다.
  李忠九씨는 《漢字部首 解說》이라는  책에서(p.26 각주21)
  “乙  於筆切:‘을’은 ‘ㅇ’ ‘’의 합음과 일치하지 않는데, 이러한 현상은
 반절표기에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漢字音의 변화, 漢國漢字音(漢은 韓의 오기로
 보인다), 그리고 類隔(半切音과 被切字音의 불일치) 등의 문제로 설명된다.
  乙과 筆은 모두 質韻에 속한다(《廣韻》). 따라서 乙과 筆은 聲이외의 나머지 부분
즉 韻은 동일한 것이다.  이는 《東國正韻》에 ‘·잃 乙’과 ‘·짏 質’로 나타나,
韻 부분의 국어표기가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全韻玉篇》 에서는 ‘을 乙’과
 ‘질 質’로 나타나,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에 의하면 乙이 於筆切의 國音 적용에
불일치하는 현상은 韓國字音의 문제이지, 한자음 -半切·直音- 自體의 문제는 아닌 것
이다.  한자가 전래되고 한국음으로 표음된 뒤, 국음의 변화로 말미암아 현재음에
被切字와 半切字의 불일치 현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라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면
1. 한자에 받침(入聲)이 없이 단독으로 ‘ㅡ’운을 가진 글자 자체가 없다. 입성 없는
‘그·느·드·므·브·스’와 같은 운의 글자를 한 字라도 제시해 보라.  따라서 중국
에서 입성이 사라진 후로는 ‘ㅡ’운 자체가 사라진 것으로 중국에서 ‘·잃’로 표기하고 실제로는
() (이)로 읽는 것을 우리는 옛 음 그대로 읽어온 것이다. () , () () () () 등에서 모든 ‘으’ 나 ‘의’음이 중국에서는 ‘이’로 표기되고 있는데 선생은 앞으
로 모두 중국원음대로 ‘이’라고 읽으십시오.
2. 乙자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한자음은 음과 훈을 따로 새겨 원형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데 비해 그것이 설사 漢族의 말에서 나온 글자라고 할지라도 중국에서는 말로서
 사용하면서 무수한 음운의 변화과정을 거치게 되어 중국의 학자들은 오히려 우리의
자료에 의지해 한자의 고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하며 양국학자의 공동연구를 추구하고
있는데 반해 무조건 중국 사람들의 음이 정확하리라고 아무 생각 없이 예단하는 우리학
자의 병폐, 원숭이 놀음이 여기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3. 《東國正韻》은 世宗朝 1448년 간행되었고(한글 1446)  한편 중국에서는 《洪武正
韻 1375》으로부터 《字匯 1615》사이에 입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음운의 큰 변화가 있
었다.  따라서 《東國正韻》에서는 중국에서 ‘잃’로 표기하고 ‘을’로 읽던 ‘일’
로 읽던 살아있는 음이므로 그대로 표기하다,  《康熙字典 1716》을 본뜬《全韻玉篇》
에서는 아예 중국에서는 사라진 반절음의 ‘잃’이란 음을 포기하고 ‘을’로 적었을
것이다.  한글을 사용하면 半切法이라는 표기방법 자체가 필요 없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
다.  그러나 《東國正韻》이나《全韻玉篇》을 아직 찾아보지 못한 필자로서 《東國正韻
》과《全韻玉篇》에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체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4. 앞으로의 연구과제와 자세
1) 한문과 한어에 대한 우리의 인식
이 글의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계기의 첫째는 금문에 대해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는 것이고 그 외에도 진태하 교수의 《東方文字》에 대한 책과 교양강좌에서 하신 말씀
이 큰 지표가 되었다.  그런데 진태하 교수의 동방문자에 관한 책은 그 머리말과 서론이
외에는 뒤이은 문자 해석부분을 보고는 그 책을 살 가치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중국의
학자들이나 한국이나 일본에서 이때까지 간행된 비슷한 종류의 책과 다른 것이 전혀 없
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표의문자와 표음문자에 대한 혜안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더 근본적인 데까지 관심을 가지시지 못하고  우리 학자들이 한문과 한문 문
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열등감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풍긴다. 근
본적인 문제제기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家]자와 같은 몇 글자에 대해 우리가 만든 것
이라는 피상적인 주장만 제기하고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태도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기존의 훈고와 석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 같다는 안타까운 느낌을 떨쳐버릴 수
가 없다.
또 한 분 姜舞鶴 선생의《漢文字와 陰曆은 우리의 문화》라는 책을 읽으며 필자로서는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선생께서는 고조선에서 율력지와 천문지를 제외한 홍범구
주의 문화를 그것도 26자에 불과한 제목만 주나라에 전수하여 주었으며 따라서 고조선
이 더 발달된 선진문화를 가졌음은 물론 한자를 먼저 사용하고 있었다는 논거로 초지일
관하게 洪範九疇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것은 고조선이 실재했고 제왕
학 내지는 농경과 통치수단으로서의 선진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었으며 그 것을 기록할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정황증거를 통하여 한문이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고
조선의 실체에 대해서마저 소위 우리의 학자들이 앞장서 반대하고 있는 현재의 비참한
현실에서 필자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
이 되리라는 것을 아시고 홍범구주에 대해서 만이라도 쉽게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한문이 우리 글 일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가지는 독자가 많이 생겼으리라고 생각
한다.  그리고 음력은 우리 교과서에 殷나라에서 시작된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고
하시면서 정작 선생께서 殷商의 정체에 대해 오해를 하고 계심으로 그러므로 우리의 것
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의 하나를 부정의 근거로 만들고 계시고 있다.
위의 두 분과 달리 김효신 신부께서는 《上古硏究資料集》이라는 956쪽에 달하는 저서
에서 “魏書” 와 “古記”등의 典據와 언어학적 고찰과 현장답사를 통해 중국 땅에서
“아사달과 평양성”도 찾아놓고, “秦開” “鮮卑” “首露王과 許黃玉” 등 인물과
민족에 대한 고증과 앞으로 연구를 위한 자료를 모아 우리에게 남겨주고 가셨다.  이
책에서는 놀랍게도 유명한 소설가(역사소설가)가 중국안양의 박물관 마당에 놓인 銅鼎에
 기대서서 “의미 모를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하며 엄연히 문장을 이루고 있는 글자들
을 그림으로 밖에 보지 못한 그 글들을 수메르와 이집트 글들과 비교하며 고증하고 있다
. 이 책은 그 전거가 너무 풍부하고 치밀하며 관련 언어학적 지식 없이는 그 깊은 의미
를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으로 인하여 쉽게 읽히지 않고 어느 누구도 그 훌륭한 자료를
 인용하는 사람도 보지 못하였지만 지명에 대해 누구나 흥미를 느낄만한 이러한 내용도
 실려 있다.  “---그래서인지 이 고장 지도를 보면 우리말과 오가는 말이 너무나 많다
.  [吐魯番(Turpan) 들판]  [烏魯木齊(Urumchi) 오르목제(께)]  [塔里木(Tarim) 다리목
]  [吉木乃 길목내]  [達坂城 들판(성)]  [紫達木盆地 자달목]  [托什干河 터주간물] 
[阿克蘇 악소(雄牛)]  [烏吐希拉克 웃불락(上部洛)] 눈에 크게 뜨이는 것만 추려보아도
 이러하다. 그러니까 天山을 太白山으로 불렀으며, 이 태백산을 둘러싸고 살다가 옛날에
는 살기 좋았을 阿斯塔納 곧 阿斯達川을 발원지로 동남으로 紫達木을 끼고 내려가 靑海
·四川·湖北·湖南·江西로 뻗어서 江西道昌縣께 檀樹山 또는 단수산께를 둘러싸고 살
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다른 곳에서는 [察布査尼 찹쌀], [我加克巴衣
水 아각바위물], [那拉堤 나라제] ,[格尼木 갈래목], [汗騰格里峯 6995m 한등거리봉]
, [烏蘭 우란=울안], [都蘭 들안], [可可西里山 가까스리산] 등의 지명도 고증을 하여
두었다.
금문을 제대로 해석하는 날 김효신 신부님이 정리하신 이 내용은 어느 누구도 부인 못
할 역사적 사실로 나타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신부님과 같은 연구태도를 본 받아
그 증거로 입증할 수 있는 만큼만 주장하는 일련의 연구가 계속될 것이며 지금은 漢語
가 漢文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만을 주장하는 바이다.
“제주도에서는 요즘도 집 아래 돼지를 키운다.  그러므로 家자는 우리가 만든 글이다”
라고 하여 비록 그 것이 사실의 일 단편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지지를 받아내기 미
약할 뿐만 아니라, 금문 기초강좌만 듣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豕를 族號로 하여
 “제가” “저희가”라고 자신을 칭하는 종족의 집이라는 본질적 의미를 제주도의 돼
지우리에 밖에 견주지 못하며, 막상 陳이란 성씨가 舜임금이 태자의 신분으로 동쪽을
책임진 封邑의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과 같은 글자 한자 한자가 역사사실을 기록하는 것
이란 의미를 모르고 하찮은 그림으로 만들고 결정적이지 못한 근거로 반론의 빌미만
주는 어리석은 짓은 말아야 하겠다.
이 글을 여기 까지 읽은 독자께서는 앞서 소개한 바 있는 金大成 저《금문의 비밀》을
 보시고 神農과 黃帝로부터 시작하여 태어난 왕자의 이름과 재상으로 책봉되었을 때의
 이름 제위에 올랐을 때의 이름과 같이 문자와 함께 출생하고 물러가는 역사 즉 문자의
 흐름에 대해 한번 느껴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말과 문자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시기 바라는 마음에서 Walter J. Ong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의 내용을 소개한다.

2. 서양 언어학자의 시각
1) 口述文化와 文字文化
Walter J. Ong은 “가장 긴요한 것은 구술로 하는 말이며, 구술로 하는 말이 모든 말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근저를 떠받치고 있다.”는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
1913)의 말을 인용하면서 쓰기를 일종의 구술로 하는 말의 보완물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그치고, 그것이 언어 표현을 변형시키는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후 
헨리 스위트(Henry Sweet: 1845~1912)는 “단어는 문자로 짜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
을 맡는 음 단위, 즉 음소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말의 음성적인 면에 주
의를 기울였으나 쓰기에 입각한 문자성(literacy)과 제1차적인 구술성(orality: 문자성
의 세례를 전혀 받지 않은 구술성) 양자를 대조하는 것은 아주 최근에야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Sampson 1980)하고, 구술의 양식에 뿌리박은 사고방식과 문자 양식에 매개
된 그런 방식들과의 뚜렷한 차이를 가장 잘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은 언어학 쪽이 아니
라 패리(Milman Parry:1902~35)의 『일리아드』와『오디세이』등 텍스트에 관한 연구와
 같은 문학연구 쪽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연구를 위한 기초로 언어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언어의 구술적 성격에 학문의 세계가 새삼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으로 명
백한 것은 언어가 구술에 의존하는 현상이며,
  ▫언어는 기본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말하고 듣는 언어이며 음의 세계에 속해 있으며
(Siertsema 1955), 세련된 手話法도 말의 대용에 불과한 것으로 말의 체계에 의존하며, 
  ▫언어는 압도적으로 목소리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역사상 몇 천 어쩌면 몇 만의 말
중 문학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은 106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오늘날 실제로 말해지고 있
는 약 3천 가지의 언어 가운데 문학을 가지고 있는 언어는 단지 78개이고,
  ▫사람의 자연 언어의 경우 문법 ‘규칙’은 우선 무의식중에 사용되고 그런 뒤에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에서 추상되는 것
이라고 설명하고 한편 쓴다는 면에 대하여
  ▫쓴다는 것은 말을 공간에 멈추는 일로 이렇게 함으로써 언어의 잠재적인 가능성이
거의 무한하게 확대되고 사고는 고쳐 짜여지며, 그러한 가운데 어떤 소수의 방언이 ‘기
록방언(grapholects)으로 된다(Haugen 1966: Hirsh 1977)고 하며 기록방언에 대해
  ▫기록방언이란 쓰기와 깊이 결부되어 개개의 방언을 꿰뚫는 언어이며,
  ▫쓰기로 해서 세계는 놀랍게 달라졌지만, -- 씌어진 텍스트라 하더라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본래 언어가 사는 장소인 소리의 세계에 결부되지 않고서는 의미를 지닐
수 없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음독이든 묵독이든 간에 그 텍스트를 음
성으로 옮기는 일이다 라고 하며
  ▫쓴다는 것은 목소리로서의 말의 성격 없이는 결코 성립하지 않는 ‘이차적으로 양식
화한 체계(secondary modeling system)로 구술되는 말이라고 하는 선행하는 1차적인 체
계에 의존한 것이라고 하며, 구술적 표현은 쓰기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져 온 반면 쓰기
는 목소리로서의 말의 성격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고
  ▫무릇 말에 의한 표현의 근저에는 구술성이 잠재돼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위의 설명에서 기록이란 “표준영어로 알려진 기록방언에는 사용 가능한 어휘로 적어도
백오십 만이나 되는 단어가 등록되어 있다”에서 보이는 음성을 그대로 옮기는 알파벳
에 의한 소리의 기록을 뜻하며 한문과 같이 그 소리 말이 단음절이거나 다음절이거나 불
문하고 그 자체로는 한 음절 밖에 취할 수 가 없으므로 결국 소리 말과는 다르고 따라
서 그 자체로 말이 될 수 없음에도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저자와 같은 서양의 학자
들은 한문으로 소리 말이 기록되어 있으리라는 상식에 의한 신념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
 한어와 한문의 관계를 마치 영어를 알파벳으로 기록한 영문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는데 이는 같은 책 143쪽의 포복절도할 주장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143p
  알파벳의 역사에서 아마 가장 주목해야 할 유래 없는 성과는, 한국에서 1443년 조선의
 왕 세종이 한국인을 위해서 알파벳을 고안하라는 칙령을 내렸을 때 이룩되었다.  그때
까지 한국어는 한자만으로 씌어졌다.  한국어는 중국어와는 전혀 유연관계가 없음에
도 불구하고 한국어의 어휘에 한자를 애써 적용(그리고 상호조합)시켰던 것이다(한국어
에는 중국어로부터 많은 차용이 있으나 상당히 한국어화 되었기 때문에 그 대부분의 내
용은 어느 중국인도 이해할 수 없다).  대대로 수많은 조선인, 즉 쓸 수 있는 조선인들
은 인생의 상당한 시간을 복잡한 중국-조선식 철자법을 익히기 위해 소비해 왔다.  그
들은 새로운 쓰기체계를 거의 환영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새로운 쓰기체계로
해서 그들이 애써 습득한 기능이 시대에 뒤진 것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의 글에서 Walter J. Ong은 한문을 영문 알파벳과 같이 중국어의 소리 말을 기록한
문자로 오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동서 p142에서 “알파벳은 아마도 그 기원을 상형
문자에 두더라도 사물로서 다른 사물과의 연결을 모두 상실해 왔다.  알파벳은 그 자체
가 사물로서 소리를 표현하며, 변해 가는 소리의 세계를 정지된 반(半)영구적인 공간의
 세계로 변형시킨다.”에서 보이듯이 한자 자체에 대해서도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자 자체를 중국어의 소리를 기록하는 차원에서는 일본의 ‘가타가나
’와 동급으로 취급하면서도 혼합체계의 알파벳이라고 하여 “중국인이나 중국학자라
하더라도 그것들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일찍이 알고 있었던 사람
도 없었다.  쓸 수 있는 중국인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들어서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중국
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여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글자 수가 많아야할
 이유를 자기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쓸 수 있는 중국인이라 할
지라도 자기가 들어서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중국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에
서 한자의 음을 들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씌어
진 글자를 보지 않고는 소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현상을 거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다.
“思考는 소리로서의 말에 깃드는 것이지 텍스트에 깃드는 것은 아니다.  모든 텍스트가
 그 의미를 갖는 것은 시각적인 상징과 소리의 세계와의 관련성 때문이다.”라고 하며
말은 곧 소리이며 글은 곧 소리를 표시하는 것으로 결국 모든 기록은 말소리의 기록으
로 그 소리 말에 그 의미가 있는 것으로만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저자로서 한문이나 중국
어에 대해 피상적인 연구만으로는 조금의 이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런 저자가 중국어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으면서 한문에 대해 연구를 했다면 학문적으
로 이 책을 완전히 뒤집는 엄청난 업적은 물론이려니와 한문에서 한어화로의 진행에 대
한 완벽한 설명이 가능할 것인데 불행히도 조셉·니담은 중국어를 구사하며 중국문화를
 서양에 소개한 중국학의 태두이면서도 언어는 관심분야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여 한어
의 특이하고 이상한 점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더 깊게 고찰해볼 필요까지 느끼지 못했고,
 월터는 언어학에 대한 학문의 깊이에도 불구하고 한문과 한어와 주변 언어와 역사 문
화에 대해 무식하여 모든 것을 영어와 관련시켜 엉터리 해석을 하고 말았다.
모르면 쓰지 말 것이지 모든 한자에는 ‘形’ ‘聲’ ‘義’가 기본적인 요소로 되어
있다는 기본조차도 모르고 한문이니 중국어니 한국어니 떠들 수 있는 용기가 부러울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오류는 니담이나 월터 등 일부 학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브리태니커에서는 심지어 한국어를 설명하며 “고구려의 말은 신라와 백제의
말과 달랐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월터의 이론들 예로
- 기억에 의지하는 구술 문화의 전승은 음악적인 요소가 큰 기여를 하며(p36~), 구술문
화는 일단 획득된 지식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반복해야하며 따라서 표준화된 정형구
나 상투구를 많이 쓰게 되며(p.40~41),  이는 ‘어떤 본질적인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서 
같은 운율상의 조건 하에서 규칙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의 모임’(p.43)이라고 한데 관심
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이러한 기초 위에서 밀러(Miller 1980)와 유진 이양(
Eugene Eoyang)의 말을 인용하며 “구술적인 정신역학이 무시됨으로써 초기 중국의
내러티브에 대한 오해가 생겼다는 것을 보여주었다(Eoyang 1977). 그리고 플렉스(Plaks
)가 편한 논집(1977)에서 그 이외의 저자들은 문자로 씌어진 중국의 내러티브에 선행
하는 정형구적인 작품에 관해서 검증하였다.”고만 하여 더 이상 진전을 시키지는 못
하였는데 이는 한어와 한문과의 관계를 검토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또한
- 말에는 궤적조차 없다. 말은 발생한 것이자 사건이다.  -- 언어는 일반적으로 행동
양식이지 사고를 표현하는 단순한 기호는 아니다.-- 말이란 우선 첫째로 목소리이며
사건이며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힘에 의해서 생기는 것.-- 사람은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신이 이름 붙인 것을 지배하는 힘을 갖는다. (힘과 행위로서 음성 언어 p.52~55)
- 구술문화에서 이야기 상대가 필수적-- 오래 계속되는 사고는 사람과의 대화가 결부
되어 있다.-- 바로 말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억하기 쉬운 형태에 입각하여 사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강렬하고 리드미컬하고 균형 잡힌 패턴이거나, 반복이나 대구이
거나, ---(생각해낼 수 있어야 안다: 기억술과 정형구 p.55~60)
- 구술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사람들을 집단으로 연결시킨다.  교사가 학급 전체에게
말을 걸때에는 학급을 하나의 통합된 단체로서 느끼며, 학급 전체도 자기네들을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교과서를 꺼내서 그 일부를 읽도록 교사가 명하면, 학생 개개인은
자기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학급의 통일은 사라지고 만다.(p.109)
- 시각은 분리하고 청각은 합체시킨다. ---시각은 사물을 토막 내어 감지한다(Merleau
 1961) --- 시각의 전형적인 이상은 명확성과 명료성이며 반면 청각의 이상은 하모니,
즉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p.112~116)
- 그러므로 오늘날 캐나다나 벨기에 또는 많은 발전도상국에서 엿보이듯이 둘 이상의
다른 언어를 가진 나라들에서는 국민적인 일체성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p.117)
- 사고는 소리로서의 말에 깃드는 것이지 텍스트에 깃드는 것은 아니다.  모든 텍스트
가 그 의미를 갖는 것은 시각적인 상징과 소리의 세계와의 관련성 때문이다.(말은 기호
가 아니다 p.118~122)
  위와 같은 언급들은 앞으로 한문과 한어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긴요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들이며 만약 저자가 한문에 대해 일반적인 상식이라도 가졌더라면 중국이라는
 다민족 국가에서 저자의 상식과는 달리 씌어진 한문이 고유의 의미를 지니고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사이를 통역하고 연결시키는 기능으로
사용되다가 저자의 주장과 같이 의례 등에서 독송을 통하여 참여자를 한데 묶는 수단
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독음법의 변화를 통하여 일상의 대화에까지 이용될 수 있게 되
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을 이론들이라고 생각하며, 언어학에 대해서는 체계
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는 필자로서 앞으로 연구할 과제로 남겨 두면서 이러한 단면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독자의 느낌에 맡겨둔다.

 
<박성현 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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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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