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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겨레의 철학

2. 과거사를 아는것은 나의 실체를 아는것이다.

작성자천리안|작성시간07.12.06|조회수19 목록 댓글 0

Ⅳ.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사상

사대주의와 외래 종교에 물들지 않은 우리의 주체정신을 소유한 역사가들에 의해 서술되었던 {단기고사}, {규원사화}, {환단고기} 등이 근래에 번역 출판되면서 우리 민족의 진정한 역사와 철학과 종교 사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1. 인류의 어머니 나라, 환국

삼국유사의 고조선 조를 보면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 하여 우리 민족의 최초의 국가는 환국이라고 하였다. 환국은 우리 말로 '광명의 나라'이다. 고려 초기의 원동중 씨가 쓴 {삼성기(三聖紀)}를 보면 환국은 시베리아 중앙고원(파내류산 = 천산 : 天山)과 바이칼호를 포함한 시베리아 전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리의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 환국은 9환족 12환국의 연방국이었으며 3,301년 간 지속되었고, 7명의 환인이 다스렸으며, 문화수준은 구석기 말 내지 신석기 시대였다.

그리고 초대 환인을 안파견 환인이라 하였는데 '안파견'은 '만인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백성을 교화할 때 주제천신(主祭天神)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로서, 우리 겨레는 바로 삼신 하느님의 피를 받은 천강족이며, 천손민족임을 나타낸다. 우리 민족 최초의 종교가 신교(神敎 : 以神設敎)이고, 환인이 천산에서 광명의 도를 체득하여서 국호를 환국이라 하고 통치자를 환인이라 하였으므로 우리 민족 최초의 철학은 광명이세(光明理世)라는 광명철학이었다.

그리고 조즉제등동산(朝則齊登東山)하야 배일시생(拜日始生)하고 석즉제추서천(夕則齊趨西川)하야 배월시생(拜月始生)하는 풍속(風俗)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태양의 총화색인 백색을 선호하여 백의를 즐겨 입었다. 그리고 지선수행(至善修行)하야 개심광명(開心光明)하는 수행을 중시하였다. 또 오훈(五訓 : 桓國五訓)이 있어 질서를 바로 잡았는데, 오훈은 일왈성신불위(一曰誠信不僞)요, 이왈경근불태(二曰敬謹不怠)요, 삼왈효순불위(三曰孝順不違)요, 사왈염의불음(四曰廉義不淫)이요, 오왈겸화불투(五曰謙和不鬪)였다.



환국지말에 인구가 증가한데다가 기상의 이변으로 북방이 점점 추워지자 환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한 갈래는 성지 태백산으로 이동하여 환국의 정통을 지켜 오늘의 한민족이 되었고, 삼위산 방면으로 가다가 몽고의 고원에서 초원을 보고 이곳에 정착하여 몽고족이 되었고, 십간십이지지의 신장(神將)과 공공(共工),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燧) 씨 등과 더불어 삼위산의 납림동굴(拉林洞窟)까지 간 민족은 반고씨를 위시한 중국 민족의 뿌리가 되었고

몽고에서 알타이산의 이목로(移牧路)를 따라 중앙아시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수메르 제국을 건설한 무리는 수밀이족(須密爾族)이 되었고, 여기서 분파하여 바빌론 문명을 세운 아카드(山岳人 혹 아파티)족이 되었고, 태백산을 향해 들어 오다가 금아림(선비산) 좌우계곡에서 주저 앉아 사냥하던 계레는 읍루(揖婁 : 만주족)가 되었고,이에 앞서 베링해협을 넘어 아메리카로 넘어간 사람은 아메리카 인디언이 되었다.

이 중 특기할 사항은 서양사람들이 인류문명의 뿌리로 여기는 수메르 문명이 환국의 이주민에 의하여 건설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수메르인은 B.C. 3,500년 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진출하여 우르, 우르크, 라가슈, 움마 등의 도시 국가를 세우고, 이후 오리엔트 문명의 뿌리를 이루었다. {The sumerians}와 {History bigins at sumer}(1897년)를 쓴 Samuel N. Kramer 교수는 수메르인이 동방에서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설은 다그라쓰 씨와 C. H. 고든에 의해서도 확인되었으며, 고든은 추가하여 이들이 중근동에 들어오기 전에 고대의 문자를 가지고 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에노(上野景福)씨는 수메르에서 사용한 설형문자(cuneiform)가 태호복희(太昊伏羲)의 팔괘부호와 흡사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 사서에 의하면 우리의 12환국 중에는 수밀이국과 우르국이 있었으며 복희씨는 서계(書契)문자의 창시자였다. 수메르인들이 높은 장소, 높은 고원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평지로 이동하여 예배할만한 높은 산이 없자, 흙을 쌓아 인조산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지구랏트(Ziggurat)로서 지금까지도 이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은 수메르인들이 건립한 지구랏트이다. 이는 환국에서 이동해 간 수메르인이 고향의 종교의식이었던 제천의식을 잊지 않고 지켰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동일한 교착어로서, 대영백과사전에서는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그 어근을 같이 한다고 하였다.


수메르의 문화는 이후 바빌로니아, 페니키아, 앗시리아, 헤브라이 등으로 계속 전해지면서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구약성경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즉 기독교의 뿌리도 우리 환국에 두고 있는 것인데,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구약의 모세오경12)의 모법(母法)이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13)이다. 1914년 미국의 크레이와 릇즈가 수메르 법전의 단간(斷簡)을 발견했는데, 이 함무라비법은 수메르 법전의 보수법(補修法)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즉 수메르 법전 → 함무라비 법전 → 모세오경이다.

그리고 헤브라이 사람들의 유일신관도 삼일신고의 신관과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크레머(Kramer) 박사는, 아브라함의 고향도 지금의 이스라엘 땅이 아닌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칼데아우르 지방이었고, 노아의 장자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된 셈(Shem)의 어원도 Sumer에서 나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Shumer에서 어미 'er'이 떨어지고 모음 'u'가 'e'로 전음되어 'Shum'이 'Shem'으로 되었다고 했으며, 이런 현상은 고대 수메르어와 히브리어 사이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였다.14)

결론적으로 환국은 인류의 시원사를 밝혀주는 전 인류의 어머니 나라로서 또 4대 문명의 모체로서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2. 하늘의 광명이 비친 땅, 배달국

환국의 대이동 때 천부(天符)와 인(印) 삼개(三個)를 가지고 서자부(庶子部) 종족의 수장이었던 환웅천황15)이 삼백(三伯)16), 오가(五加)17)와 제세핵랑군(濟世核郞軍)18) 3,000명을 거느리고 백두산에 내려오셔서 재세이화(在世理化)하시며 홍익인간(弘益人間)하셨다. 그리고 호족을 추방하고 교화된 웅족과 더불어 배달계레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배달국은 18대 환웅 동안 1,565년 간 지속되었다. 도읍은 신시(神市)에 정하시고 나라 이름은 배달19)이라 하였으며, 삼칠일(三七日)을 택하여 삼신상제(三神上帝)님께 천제를 올렸다.

배달국은 환국의 정통을 이은 장자국이다. 그 이유는 7대 환인으로부터 정통의 표시인 天符와 印을 받았고 광명(光明)의 사상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이 지상에서 다스리고 교화한다는 재세이화(在世理化)로써 우리 민족은 사후의 세계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이상, 하느님의 이상을 이 지상에 구현하고자 한 철학의 소유자였다.

우리 나라의 교육법 제1조에 "교육은 홍익인간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具有)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여 인류 공영의 이상실현에 기여하게 한다. "라고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환웅천황의 신시개천의 법통과 홍익인간의 사상이 계승되고 있다.


주체성을 상실한 후세에 와서 우리의 국시가 사대주의(事大主義) 또는 반공(反共), 통일(統一) 등으로 여러번 바뀌었지만, 홍익인간만이 남북한의 동질성을 회복케 하는 불변의 국시라 하겠다. 또한 주체성과 정통성을 확립하여 각 개인으로 하여금 민족과 국가 발전을 위하여 봉사하게 하는 방법론은 불교의 팔만대장경이나 유교의 사서삼경, 예수교의 신구약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국사와 국사의식에서 찾아야 하고, 특히 신시개천(神市開天)의 법통인 광명개천(光明開天)·재세이화(在世理化)·홍익인간(弘益人間)의 3대 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이상은 하늘의 이상을 지상에 구현하는 것으로서 더 구체적으로 삼신 상제님의 이상을 지상에 펼치는 것이다. 배달국시대에는 환국(桓國)시대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삼신(三神)사상이 삼백(三伯)의 제도로 현실화되었다.

그리고 일웅일호(一熊一虎)는 곰과 호랑이가 아니라 웅족과 호족이다. 곰과 호랑이라고 하는 것은 한문 실력이 부족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우리가 월남전때 맹호부대를 파견했는데, 신문에 맹호향월(猛虎向越)이라 했을 때 용맹스런 호랑이가 월남땅에 갔다고 해석할 수 있겠는가? {환단고기}의 [삼성기] 下에는 웅호이족(熊虎二族)이라하여 두 개의 부족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환웅천황의 신시개천(神市開天)은 이번의 후천개벽과 중요한 관련이 있으므로 그 원문을 아래에 소개한다.


석유환국(昔有桓國)하니 서자환웅(庶子桓雄)이 수의천하(數意天下)하사 탐구인세(貪求人世)어늘 부지자의(父知子意)하시고 하시삼위(下視三危), 태백(太白)하니 가이홍익인간(可以弘益人間)일새 내수천부인삼개(乃授天符印三個)하야 견왕리지(遣往理之) 하시니라. 웅(雄)이 솔도삼천(率徒三千)하시고 강우태백산정신단수하(降于太白山頂神檀樹下)하시니 위지(謂之) 신시(神市)요 시위환웅천왕야(是謂桓雄天王也)시니라.

장풍백우사운사(將風伯雨師雲師)하사 이주곡주명주형주병주선악(而主穀主命主刑主病主善惡)하시고 범주인간삼백육십여사(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하사 재세이화(在世理化)하시니라. 시(時)에 유일웅일호(有一熊一虎)하야 동혈이거(同穴而居)러니 상기우신웅(常祈于神雄)하야 원화위인(願化爲人)이어늘 시(時)에 신유(神遺)로 영(靈)하니 애일주(艾一炷)와 산이십매(蒜二十枚)라.

왈이배식지(曰爾輩食之)호대 불견일광백일(不見日光百日)이라야 변득인형(便得人形)이리라 웅호(熊虎)가 득이식지(得而食之)하야 기삼칠일(忌三七日)이러니 웅(熊)은 득여신(得女神)하고 호(虎)는 불능기(不能忌)하야 이부득인신(而不得人身)하니라. 웅여자(熊女者)가 무여위혼(無與爲婚)일새 고(故)로 매어단수하(每於檀樹下)에 주원유잉(呪願有孕)이어늘 웅(雄)이 내가화이혼지(乃假化而婚之)하야 잉생자(孕生子)하니라. ({삼국유사})




① 우주법도를 논리화하고 중국대륙을 개척한 배달국의 태호복희

복희씨는 배달국시대 5대 태우의환웅의 막내 12번째 아들20)로서 현재 복희씨의 무덤은 중국 하남성 회양현성(淮陽縣城) 북쪽 1.5km에 위치해 있는데 회양은 엣날의 진국(陳國)으로 복희가 도읍(都邑)했던 곳이다. 춘추시대 이후로 능묘(陵墓)가 있었고 한나라때 능앞에 사당을 세웠다. 송태조가 조칙을 내려 능묘(陵廟)를 세웠고 명·청대를 거치면서 여러번 수리하였다. 능앞에는 "태호복희지묘(太昊伏羲之墓)"라는 큰 비석이 있다.

태호복희의 태호는 '크게 밝다'는 뜻으로 환국, 배달국의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법통(法統)을 계승하신 분임을 알 수 있다. 가장 위대한 업적은 신교(神敎)의 우주관(宇宙觀)을 정립한 것인데, 삼신상제(三神上帝)님의 감화를 받아 영통(靈通)을 이루신 분이며, 우리의 국기인 태극기를 최초로 획하신 분이며, 주역(周易)과 팔괘(八卦)를 그리셨으며, 하도(河圖)를 그리시어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우주법도를 논리화하셨다.

따라서 주역(周易)은 중국의 문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에서 시작되었다. 태극·음양·오행·팔괘의 원리는 우주 질서를 파악하는 최고의 진리이며, 이의 주재자가 삼신상제님이시다. 129,600년으로 순환하는 우주1년의 원리도 북송 때, 동이족의 혈통을 받은 소강절이 최초로 언급한 것이지만 그 뿌리는 복희씨가 정립한 태극우주관으로 소급해 올라 간다. 태극이란 서로 대립되는 陰과 陽이 협조와 조화에 의해서 만물을 창조 변화시키는 이치를 말하는데, 곧 우주의 마음자리이다.

또 서계(書契)문자를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천제를 올릴 때 처음으로 동물의 희생(犧牲)을 사용하였다.

복희씨의 나라는 15대간 왕통이 이어지다가 혈맥이 끊어졌다.




② 경농과 동양의학의 창시자 신농

신농(神農)은 쟁기와 보습을 처음 만들어 경농을 시작했고, 백초를 맛보아 동양의학을 창시했으며, 일중위시(日中爲市)하고 교역퇴(交易退)하는 시장을 처음으로 설했다.

웅씨족(熊氏族)의 후예로 소전(少典)이 있었는데, 8대 안부연(安夫連) 환웅지말(桓雄之末)에 소전(少典)이 명을 받고 강수21)의 감병관으로 갔었는데, 소전의 아들 신농은 후에 열산22)으로 옮아 갔다. 그의 나라는 8대 520년간 지속이 되다가 마지막 왕 유망에 이르러 치우천황에게 멸망당했다.

지금 신농의 무덤은 호남성 영현 성(城) 서남쪽 15km에 있다. 황보밀이 지은 {제왕세기}에 '장우장사(葬于長沙)'라 하였고, 송대(宋代)의 나필(羅泌)이 지은 {노사(路史)}에는 '붕장장사다향지읍(崩葬長沙茶鄕之邑) 시왈다릉(是曰茶陵)23)'이라 하였다.


명나라 만력 48년(1620년) 오도남(吳道南)이 지은 {비기(碑記)}에 이르기를 "송태조가 등극한 후 두루 고릉(古陵)을 찾았는데, 문득 꿈에 한 신이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것을 보고 비로소 다릉에서 염제릉(炎帝陵, 신농의 무덤)을 찾았다."고 하였다.

중국의 호북성에는 신농이 백초를 맛보고 틀(架)을 세워 놓고 오르내리며 채약(採藥)을 한 신농가(神農架),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는 신농가(神農架)의 주봉(主峯)인 대신농가[大神農架 : 신농정(神農頂)]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③ 도읍을 청구로 옮긴 14대 자오지 환웅

세칭 치우천황이라 하며, 도읍을 대능하 유역의 청구로 옮겼으며 신용관절(神勇冠絶)하야 동두철액(銅頭鐵額 : 청동기 시대임을 의미)으로 중국의 하북, 산동, 강소, 절강 등의 땅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해동산북(海東山北) 천왕관경(天王管境)24)을 구가하게 되었다.

소전(少典)의 별파(別派)25)인 황제 헌원과 탁록의 들에서 10년 동안 73회나 싸워 마침내 그를 사로잡아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천황의 능이 산동성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궐향성(闕鄕城) 중에 있는데 높이가 칠척(七尺)이고 진한대(秦漢代)까지 주민들이 시월에 항상 제사를 지냈다 한다.

이 때 황제헌원이 우리 청구국(배달국)에 와서 문물을 배워감으로써 우리 한민족의 철학인 주역, 음양, 오행의 내용이 중국에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26)

배달국 시대는 교화(敎化)의 시대로써, 불이 발견되었고(고시례 : 高矢禮), 문자가 발명되었고(신지혁덕 : 神誌赫德), 집을 짓기 시작했고, 가축을 길렀고(왕금 : 王錦), 남녀혼취지법(男女婚聚之法)을 정하고(육약비 : 陸若飛), 음양·오행·팔괘·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및 청동기 등을 발견하였다.



3. 삼신상제의 이상을 지상에 구현코자 한 고조선시대

고조선 시대는, 환국과 배달국이라는 생·장의 단계를 지나 우리 민족의 고대 정치와 사상과 문화와 종교가 완성된 시기이다. 다시 말해 사상과 제도의 완벽한 일치를 이룬 시대인데 환국시대부터 구환족(九桓族)은 삼신(三神)으로 일원지조(一源之祖)를 삼아 소도제천과 책화(責禍), 화백(和白), 관경제(管境制) 등의 제도를 유지해 왔었다.

단군왕검이 구환족(九桓族)을 통일한 후 제일 먼저 삼신상제(三神上帝)님께 천제(天祭)를 올리고(봉제우삼신 : 奉祭于三神),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원리에 의해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도입하였다.

즉, 단군이 겸섭(兼攝)하는 진한(眞韓, 人에 해당)은 압록강 이북, 요하이동의 땅이고, 마한(馬韓, 天에 해당)은 압록강 이남의 반도와 제주, 대마도의 땅이고, 번한(番韓, 地에 해당)은 요하의 서쪽으로부터 하북, 산동, 산서, 강소에 이르는 땅이었다. 진한은 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마한, 번한은 칸27) 등을 두어 다스렸으니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원리인 일즉삼(一卽三), 삼즉일(三卽一)의 원리에 합치된다.


이러한 삼한관경(三韓管境)의 원리는 근세에 단재에 의해 주장되었는데, 우리 민족의 철학과 사상을 알았기에 그리 할 수 있었던 내용이다. 근자에 고조선(古朝鮮)의 역사를 발굴한 윤내현(尹乃鉉) 교수 등이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로서도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는 내용이다.

외래종교에 얼빠진 사람들이 단군을 자꾸 신화의 인물이라하므로 초대 단군의 일대기를 간략히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B.C. 2370 신묘 5월 2일 인시(寅時)에 탄생

B.C. 2357(14세) 웅씨국(熊氏國)의 비왕(裨王)에 추대

재위 24년, 이 때 요임금 등극

B.C. 2333(38세) 무진 10월 3일

九桓을 통일하고 天帝에 卽位, 요 25년

B.C. 2285(86세) 대홍수 범람

B.C. 2283(88세) 운사(雲師) 배달신에게 명하여

마리산에 제천단을 쌓음

B.C. 2280(91才) 마리산에 오르시어 삼신 상제님께 천제를 드림

B.C. 2267(104才) 도산회의를 소집하고 부루 태자를 보내 禹에게

五行治水之法을 전해 줌

B.C. 2241(130才) 3월 15일 붕어하심

비서갑(지금의 하얼빈) 하백의 따님(낙빈)을 맞아 부루, 부소, 부우, 부여의 4子를 두셨다.






동이(東夷)와 요순(堯舜)에 대한 고찰(考察)

'동이(東夷)' 또는 '구이(九夷)'라 함은 단군이 직접 관할하는 삼한관경(三韓管境)의 영토가 아니라 중국 지나의 하북, 하남, 산동, 강소, 절강 등지에 진출한 조선인의 이주 집단이다.

이들 지역은 이미 치우천황에 의해 회척(恢拓)되어 낭야를 연합 수도로 삼은 조선의 분국(分國)이었다. 이 낭야 분국은 조선이 감우소(監虞所)를 두어 다스렸다.

단군왕검이 당요와 병세(竝世)하였는데 요덕(堯德)이 쇠하여 쟁지(爭地 : 땅의 분쟁)가 그치지 않자 천왕(天王)이 우순에게 명해 동이(東夷) 지역을 떼어 주어서 다스리게 하고,28) 군대를 파견하여 주둔시켜 당요(唐堯)를 공벌(共伐)하고자 하였다. 이 때 요(堯)는 힘이 달려 순(舜)에 의해 목숨을 보존하고 나라를 양위하게 되었다.


이 때 순은 요를 가두고(산동성 견성현), 요의 아들 단주를 막아서 부자가 서로 볼 수 없게 하였다.29) {맹자(孟子)}에도 '순(舜)이 남면이립(南面而立)하고 요솔제후(堯率諸侯)하야 북면이조(北面而朝)하였음'을 묻는 질문에 맹자(孟子)가 이를 '제동야인지어(齊東野人之語)'라고 부정했지만, 오히려 '요가 늙어서 순에게 선양했다' 하는 것이 궤변이다. 이 뒤에 감우소(監虞所)를 산동성 낭야성에 두고 '이결구려(以決九黎 : 九夷) 분정(分政 : 分朝) 지의(之議)'했는데 {서전}에 언급된 동순망질사근동후(東巡望秩肆覲東后)30)라는 것이 그 증거이다.



삼한의 중심지인 진한(眞韓)의 수도는 지금의 하얼빈으로 단군이 직접 다스렸고, 마한(馬韓)은 평양, 번한(番韓)은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唐山市)이다. 마한의 초대 부단군은 웅백다(熊伯多)로 이후 맹남(孟男)까지 35대가 계승하였고, 번한의 초대 부단군은 치우천황의 후손으로 용맹과 지혜로 소문난 치두남이었고 이후 기준(箕準)까지 74대가 계승하였다.

진한의 수도도 그 후 2번의 이동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① 송화강 아사달 시대 (현 하얼빈)

: 초대 단군왕검 - 21대 소태(蘇台) [B.C. 2333-1286, 1048년간)

② 백악산 아사달 시대 (현 農安, 長春)

: 22대 색불루(索弗婁) - 43대 물리(勿理) [B.C. 1285-426, 860년간]

③ 장당경 아사달 시대 (현 요령성 개원)

: 44대 구물(丘勿) - 47대 고열가(古列加) [B.C. 425-238, 188년간]

이 내용은 문헌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는데, 서거정의 {동국통감}에 '향수(享壽) 1048년'은 진한의 송화강 아사달 시대만을 언급한 것이며, {삼국유사} [고기(古記)]의 '수(壽) 1908년'은 송화강 아사달시대 1048년과 백악산 아사달시대 860년을 합한 연수이다. 요약컨대, 단군조선 시대는 47대 동안 총 2,096년간31) 지속되었다.


그리고 3세 단군 가륵 때, 삼랑을보륵(三郞乙普勒)이 정음(正音) 38자(字)를 지었는데 이를 '가림다(加臨多)'라 하였다. 이것은 후대 세종대왕 때 한글의 모체가 되었다.

지금의 국어학자들은 훈민정음이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창제라고 주장하나, 정인지 서문에서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 : 발음기관의 형상을 본떴으되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함)'이라 했고, 또 최만리(崔萬理)의 소(疏)에서도 '자형(字形)은 방고지전(倣古之篆)이나 용음합자(用音合字)는 진반어고(盡反於古)라 : 글자의 형태는 옛 전자를 모방했지만 音을 기록할 때 글자를 합하는 것은 다 옛것과 반대이다.'라 하여 옛 전자를 모방했음을 밝히고 있다.


가륵 단군 6년32)에 열양(列陽 : 산동성) 욕살33)인 색정(索靖)을 약수(弱水 : 감숙성 장액현 서북)로 귀양보냈는데 이 사람이 흉노(凶奴)의 조상이 되었다. 4세 단군 오사구 원년에는 봉황제오사달(封皇弟烏斯達)하야 위몽고리한(爲蒙古里汗)으로 삼았다. 47대 단군 고열가(古列加)는 위(位)를 버리고 입산수도(入山修道)하여 신선이 되었다.34) 그 후 해모수에게 나라를 넘길 때까지 오가(五加)가 공화정(共和政)을 실시하였다.35)

초대부터 21대까지는 '삼한(三韓)'으로 통칭했고, 22대부터 43대까지는 '삼조선(三朝鮮)'으로 주로 불렀으며, 44대 구물(丘勿) 단군은 '대부여(大夫餘)'라고 국호를 바꾸었는데 이를 원시부여라 한다.



4. 북부여(北夫餘)

북부여는 B.C. 239년(임술년) 4월 8일에 해모수 단군이 웅심산(熊心山 : 지금의 길림성 서란현)에서 즉위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모수 단군 재위 45년36)에 노관의 부하 위만이 망명을 구해 왔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병석에 누워 있어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는데, 번조선(番朝鮮)의 왕 기준(箕準)이 속아서 위만에게 박사(博士)를 배수하고 상하운장(上下雲障)37)을 떼어 봉해주었다. 이 해 겨울에 해모수 단군께서는 붕어하셨다.

2세 단군 모수리 원년38)에 번조선 왕 기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입해이불환(入海而不還)하였다.

기준을 몰아낸 위만39)은 도읍을 험독(險瀆)40)으로 옮겼으며, 그의 손자 우거 시대에 한무제의 침입을 받았을 때, 토착인인 조선 장 상에 의해서 정권이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한사군이 아닌 조선 장상의 自治四國이 설립되었다.



졸본(卒本 : 연해주의 유분하지역)에서 즉위41)한 고두막한(高豆莫汗)이 한나라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후에 해부루를 동부여후로 강등시켜 가섭원(迦葉原)으로 붸아내고서 북부여의 5대 단군으로 대통을 이었다.42) 6대 단군 고무서는 아들이 없어 딸 소서노(召西努)를 고주몽에게 시집보내고 사위인 고주몽이 B.C. 58년에 북부여의 7대 단군으로 대통을 계승하고 연호를 다물(多勿)이라 하였다.

준왕이 입해이불환(入海而不還)하자 제가지중(諸加之衆)이 한반도의 남쪽으로 대거 이주하여 익산에 도읍을 정한 마한43)이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무강왕(武康王) 탁(卓)이 박사 악용건(樂龍建)으로 하여금 진한(辰韓 : 都慶州)을 다스리게 하고44), 좌대부 진완(秦玩)으로 하여금 번한(番韓 : 都金海)을 다스리게 하니45), 이것이 '중삼한연맹국(中三韓聯盟國)'이다.


진한은 B.C. 193년에서 B.C. 57년까지 137년간 지속되었고, 번한은 B.C. 193년에서 B.C. 39년까지 155년간 지속되었다.

이후 백제(B.C. 37-A.D. 660), 신라(B.C. 57-A.D. 935), 가야(A.D. 42-532)까지 '후삼한 시대'가 펼쳐졌으며, 고구려까지 합하여 '사국(四國)시대'가 전개 되었다.

최숭(崔崇)이 B.C. 195년 낙랑산(樂浪山)으로부터 진보(珍寶)를 싣고 바다를 건너 평양에 도읍한 최씨의 낙랑국은, A.D. 32년 최리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황자(皇子) 호동이, 최리의 딸로 하여금 자명고(自鳴鼓)를 찢게 하고 낙랑을 병합(竝合)함으로써 멸망되었다.


동명부여(졸본부여, B.C.108 - B.C.58)의 속국이었던 동부여(B.C.86 - A.D.22)는 북갈사(A.D.22 - A.D.68)로 계승되었다. 이후 북갈사는, 고구려에 투항후 우태(于台)의 벼슬을 받아 훈춘(王軍春)을 식읍(食邑)으로 하여 동부여후(東夫餘侯)에 봉해졌는데 이를 남갈사(南曷思)라 한다. 동부여가 항복하자 고구려가 왕의 종제(從弟)를 연나부에 봉해 주어 연나부부여(椽那部夫餘, A.D. 22-494)가 되었는데, A.D. 494년 문자열제 때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5. 삼국(三國) 시대

1). 고구려(高句麗)

B.C. 58년 고주몽 성제46)가 북부여의 6대 고무서(高無胥) 단군의 사위로서 북부여의 대통(大統)을 계승하고 다물(多勿)이라 건원(建元)하였다.

B.C. 37년, 고주몽 성제가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연호를 '평락(平樂)'이라 하였다. B.C. 26년에 졸본에서 눌견(訥見)47)으로 이도(移都)했다가 A.D. 3년 국내성으로 이도(移都)했고, A.D. 427년 평양으로 천도했다.

고주몽 성제가 동부여로부터 도망할 때 자칭(自稱) 천제자天子)48)라 하시고, 오이(烏伊), 마리(摩離), 섬보(陜父)의 삼인(三人)과 함께 엄리대수(淹利大水)49)를 건너서 모둔곡(毛屯谷)50)에 이르러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默居)의 삼현(三賢)을 만나 모두 7인이 졸본(유분하)으로 들어가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니, 5토(土)가 7화(火)51)로써 작용(作用)하는 이치이다.



원광법사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사친이효(事親以孝), 사군이충(事君以忠),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의 화랑오계(花郞五戒)는 사실은 고주몽이 지은 다물옥계(多勿五戒 : 삼한오계)이다.

고주몽성제는 요동성에 칠중목탑(七重木塔)을 지어 제천(祭天)하였으며, 대통일(大統一)시대를 열었던 호태열제(好太烈帝)도 말을 타고 마리산에 이르러 등참성단(登塹城壇)하야 친제삼신(親祭三神)하였으며, 속리산(俗離山)에서도 제천(祭天)하였다.

그 후, 고구려가 멸망하게 된 것은 중국으로부터 불교와 도교의 수입으로 신교의 정신이 약해졌기 때문이다.52)


2) 백제(百濟)

소서노(召西努)가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대방고지(帶方故地)53)에서 나라를 세움으로써 백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B.C. 19년 소서노가 죽자 비류가 왕이 되었으며, 온조는 마려(馬麗), 오간(烏干) 등의 신하와 함께 배를 타고 와 B.C. 18년에 하남(河南) 위례성에서 나라를 세웠다.

백제는 11대 비류왕때 하북성의 요서(遼西), 진평(晋平) 등을 경략하였고, 양자강 하류의 좌우양안(左右兩岸)을 점령하여 250여 년 간 통치하였다.54)

또한 백제는 일본열도에 진출하여 수세기 동안 일본 민족을 지배하였었다.

3) 신라(新羅)

신라의 삼국통일은 '망국통일', '반벽통일'이었다. 신라 시대에 이미 사대주의와 외래종교에 의해 민족의 정신이 해체기로 접어들었으며, 대진국과 남북조의 시대를 열었다.

6. 대진국(大震國)

환환단(桓桓檀) 고구려55)의 정통을 이어 A.D. 668년 세조진국열황제대중상(世祖振國烈皇帝大仲象)이 동모산에서 등극하여 926년 거란의 침략에 망할 때까지 15세 259년 동안 지속되었다.

5경(京) 60주(州) 1군(一郡) 36현(縣)의 제도가 있었고, 원폭(圓幅)이 9,000여 리로 당·왜·신라에서 조공을 받았으며 천하(天下)에서 모두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했고 발해삼인당일호(渤海三人當一虎)라는 말까지 있었다.

3대 광종(光宗 : 묘호) 무황제(武皇帝 : 시호)56) 때 서압록하지상(西鴨綠河之上)에서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께 천제(天祭)를 올렸었다.


738년, 4대 세종광성문황제(世宗光聖文皇帝)가 입태학(立太學)하야 교이천경신고(敎以天經神誥)하며 강이환단고사(講以桓檀古史)하였으며, 상자국도(上自國都)로 하지주현(下至州縣)에 이르기까지 개유학(皆有學)하여 구서오계(九誓五戒)를 조석송습(朝夕誦習)하였다.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대해 2대 태조성무고황제(太祖聖武高皇帝 :대조영)는 {삼일신고(三一神誥)어찬(御贊)}을 지었고, {단기고사}를 지은 태조(太祖)의 친제(親弟) 대야발(大野勃)은 {삼일신고(三一神誥) 서문(序文)}을 지었고, 태조(太祖)의 처남(妻男)인 문적원감임아상(文籍院監任雅相)은 {삼일신고(三一神誥) 주(注)}를 지었고, 세종광성문황제(世宗光聖文皇帝 : 대흠무)는 {삼일신고봉장기(三一神誥奉藏記)}를 지었기에, 환환단 고구려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는 대진국이지 한반도의 반쪽만 차지하고 외래 종교에 빠져 주체성을 상실한 통일신라가 결코 아니다.

그 후 대진국은 자연재해로 나라가 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고려(高麗)

고구려의 정통 국시(國是)를 이었다고 자칭한 고려는, 오히려,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아 정통을 단절했으며, 구성(九城)회복의 공(功)이 있는 윤관, 오연총이 사대주의 유림당에 의해 붸겨나게 했으며, 건원칭제(建元稱帝)를 주장하던 국풍당(國風堂)이 사대주의 유교인에 의해 타도되게 했으며, 정명론자(征明論者) 최영 장군이 숭명사대(崇明事大)의 주자학자(朱子學者)에 의해 몰락당하게 하는 등의 역사적 과오를 범했다.

원은 북쪽으로 쫓겨가 버리고, 명은 새로이 나라를 세운 직후라, 아직 만주를 장악할 만한 실력이 없었던 원말명초(元末明初)에 우리 민족이 만주를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명나라가 강계에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 압록강 일대를 탈취하려 했을 때 최영이 만주 수복군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겁을 먹고 물러가 버렸다. 그야말로 만주 수복의 더 없는 상서로운 징조였었다.

심지어 1371년 당시 만주의 중심지 요양(遼陽)의 평장사(平章事)였던 유익(劉益), 왕우승(王右承) 등이 고려에 내부(內附)할 것을 자청했었다. 다시 말해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를 망친 것이 바로 사대주의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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