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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겨레의 철학

1. 과거사를 아는것은 나의 실체를 아는것이다.

작성자천리안|작성시간07.12.06|조회수60 목록 댓글 0

Ⅰ. 역사란 무엇인가
                                                                                              대전대 한의대 윤창렬교수님 글

 

 

1. 역사는 진리의 종합적인 모습이다

 

역사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이 생활해 온 총체적인 모습으로 진리의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이다. 역사를 버리고서 인간은 진리의 진면목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며 역사를 떠나 지구촌의 대세를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단재 신채호의 역사 정의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人類社會)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상태의 기록이니… (신채호 저, 이만열 주석, {조선상고사} 상 27쪽)

신채호선생은 아(我)와 비아(非我)를 주체적(主體的)으로 인식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개별성으로서의 존재파악이요 공동체적으로는 민족의 주체성 파악이다. 나라와 겨레의 역사는 한 집안의 족보와 같은 것이다. 내 집은 작은 집이고 나라는 큰 집이다. 나는 작은 나이고 겨레는 큰 나이니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일이 곧 대인이 되는 것이다. 작은 나는 죽어도 큰 나는 죽지 않는 영원한 것이다.


Ⅱ. 왜 우리 역사를 알아야 되는가

 

1. 역사는 자아인식을 목적으로 한다

 

영국의 외교관이며 정치학, 역사학 교수였던 E. H. 카(1892∼1982)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가 곧 역사라 하여, 역사는 과거의 지나간 사실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살아 생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민족과 국가의 발전은 올바른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만해 한용운도 {조선독립의 서}에서 "월조(越鳥)는 남지(南枝)를 생각하고 호마(胡馬)는 북풍(北風)을 그리워 우나니 이는 다 그 근본을 잊지 아니함이라."고 하였다. 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하여 여우도 죽을 때가 되면 머리를 자기가 태어난 굴을 향하고 죽는다고 하니 근본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미물이나 동물에게도 나타나는 진리라고 하겠다.


 

한민족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공부하고 체득하는 것은 인류의 새 시대, 21세기를 한민족이 열어 나가는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사항이라 할 수 있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행촌(杏村) 이암(李?)이 지었다는 [단군세기(檀君世紀) 서(序)] 앞부분에 이런 말이 있다. 爲國之道(위국지도)가 莫先於士氣(막선어사기)하고 莫急於史學(막급어사학)은 何也(하야)오.

나라를 위하는 길이 민족지도자들(국민)의 기상을 높이는 것보다 먼저 할 게 없고, 역사를 바로세우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史學(사학)이 不明則士氣(불명즉사기)가 不振(부진)하고 士氣(사기)가 不振則國本(부진즉국본)이 搖矣(요의)오 政法(정법)이 岐矣(기의)니라.

 

 

사학(史學)이 분명하지 못하면 사기(士氣)를 진작시킬 수 없고, 사기가 진작되지 못하면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며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분열됨이라.

嗚呼(오호)라 "정유기(政猶器)하고 인유도(人猶道)하니 기가리도이존호(器可離道而存乎)며 국유형(國猶形)하고 사유혼(史猶魂)하니 형가실혼이보호(形可失魂而保乎)아. 병수도기자아야(竝修道器者我也)며 구연형혼자역아야(俱衍形魂者亦我也)라. 고(故)로 천하만사(天下萬事)가 선재지아야(先在知我也).

 

 

"오호라! 정치는 그릇(器)과 같고 사람은 도(道)와 같으니, 그릇이 도를 떠나서 어찌 존재할 수 있으며, 나라는 형체(形)와 같고 역사는 혼(魂)과 같으니, 형체가 그 혼을 잃고서 어찌 보존될 수 있으리요. 도와 그릇을 같이 닦는 자도 나요, 형체와 혼을 아울러 발전시키는 자도 나로다. 그러므로 천하만사 가운데 먼저 할 일은 나를 아는 것이다. 그러한즉 나를 알려면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겠는가?
사학(史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라고 하셨다.

 

 

백범 김구 선생은 "철학도,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인 것이지만 민족의 혈통만은 영원하다."고 하였다.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은 민족단합의 근원이며, 민족자존의 원동력이며 민족발전의 추진력이다.

우리는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만을 배워왔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정신과 혼이 배여 있는 고유한 종교와 사상은 잊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민족은 있으되 역사는 없고, 아니 역사는 있으되 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민족의 역사는 어렴풋이 알되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애국심은 역사의 올바른 인식으로부터

 

민족이란 무엇인가?

 

첫째, 민족이란 언어, 문자, 풍속, 관습, 생활, 사상, 그 밖의 문물일체를 공동 소유하고 있는 짙은 혈연의 사회적 집단으로 운명공동체, 역사공동체, 문화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둘째, 나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고 명예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은 세계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은 국통의 단절됨이 없이 단일민족으로서 지속되어 온 세계에서 유일한 민족이라 할 수 있다. 민족의 부흥은 애국심이 충만할 때 이루어지는 것인데, 애국심의 고양은 역사의 올바르고 자랑스런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하여 단재 신채호 선생도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라는 글에서

*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귀에 애국이란 말이 생생하게 울려 퍼지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눈에 국(國)이란 글자가 배회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손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봉사케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발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뛰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목구멍이 항상 나라를 찬양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뇌가 항상 나라만을 생각케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머리털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뜨겁게 솟구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혈혈누누(血血淚淚)가 나라를 위하여 솟구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대저 역사가 무엇이기에 그 공효의 신성함이 이와 같은가. 역사라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의 변천소장한

실적(實蹟)이니 역사가 있으면 그 나라가 반드시 흥기하니라. 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단군세기 서}에 국유형(國猶形) 사유혼(史猶魂)이라는 말이 있다. 국가라는 것은 우리의 몸뚱아리와 같고, 역사는 우리 몸속에 있는 혼과 같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이나 국가는 혼빠지고 얼빠진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역사가 비록 있더라도 후세들의 기를 펴주고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는 역사교육을 실시하지 않으면 역사없는 민족과 진배없다. 엄하게 기르되 기(氣)는 죽이지 말라는 속담이 있지만, 지금의 역사 교육은 학생들과 우리 민족의 기(氣)를 살리기보다 죽이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 실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사는 아시아 대륙의 한끝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역사다. (이기백 저, {한국사 신론} 서문)

(2) 우리 겨레가 처음 어디서 살았는지 분명치 않으나 단군신화가 말하는 고조선이 대동강 평양 근처에 세워진 것만은 사실이다. (국정교과서의 한 대목)

 

(3) 대동강변에 설치된 한사군은 원시적 국가 형태로 볼 것이나 韓민족은 漢나라의 식민지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는 변칙적인 과정을 밟았다. (김철준·한우근 저, {한국사 개론})

(4) 한국사는 반도의 태반을 한족(漢族)에게 빼앗김으로써 상고(上古)에 있어서 외래족에게 굴복하는 선례를 남겼다. (이병도 저, {한국사 대관})


석주 이상룡1) 선생은 "노예역사의 교육은 노예국민을 만든다."2) 라고 하였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무정신의 역사는 무정신의 민족을 낳고, 무정신의 민족은 무정신의 국가를 만든다." 라고 하였다.

역사의 실례를 들어 보더라도 민족의 역사와 주체성이 확립되었던 고구려, 백제, 대진국 등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민족의 부흥 운동이 일어났었지만, 외래 종교와 사대주의에 물들었던 신라에서는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었다. 영토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는 생생한 교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Ⅲ. 우리의 역사가 왜 왜곡되었나

 

우리 민족이 위치하는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팔괘 중에 간방(艮方)에 속한다. 艮의 섭리는 모든 것을 창조한 모체이며 새로운 창조를 위해 완성되는 장소인데(成始成終), 현실적으로는 드러나지않고 숨어버리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간(艮)'을 '씨'라고 비유하는 데서 쉽게 알 수 있다.

 

사과나 배, 복숭아 등의 씨는 생명의 뿌리이지만 가장 깊숙이 내재해 있어서, 가장 큰 덕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숨어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의 역사는 간도수(艮度數)의 섭리에 의해 진실이 은폐되고 왜곡되고 소멸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3) 특히 삼성조시대의 역사는 그 중에서도 뿌리의 역사가 되므로 더욱 더 드러나지 않게 될 운명이었다.

둘째는, 주체성을 상실해 아(我)와 비아(非我)도 구별치 못했던 얼빠진 사람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역사가 왜곡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단재는 신채호선생은

(1)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구의 병화에서보다 조선사를 저작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서 더 탕잔되었다.4)

(2) 조선의 사가들은 매양 얼토당토않은 혹을 붙여서 조선사를 지으려하였다.

(3) 도깨비도 뜨지 못하는 땅뜨는 재주를 부리어 중국의 졸본(卒本)을 떠다가 조선 함경도의 성천(成川) 혹은 영변(寧邊)에 놓았으며, 중국의 안시성(安市城)을 떠다가 용강(龍岡) 혹은 안주(安州)에 놓았으며, 아사산(阿斯山)을 떠다가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을 만들었다.


(4) 위서(僞書)를 그대로 믿고 아조(我朝)를 무욕(巫辱)한 것을 그대로 수입하였다. 고 갈파하였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왜곡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열거할 때 민족사학자들은 삼독(三毒)의 해(害)와 외래종교의 영향을 꼽고 있다. 삼독(三毒)이란 중독(中毒)·왜독(倭毒)·양독(洋毒)을 말하는데, 중독(中毒)이란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중국에 예속되어 중국에 조공이나 바치며 반도 안의 소중화(小中華)로 만족하면서 살아온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요, 왜독(倭毒)이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뒤에 한국은 일본 문화의 한 지류이며 그 혜택을 받고 성장해 왔다는 식민사관에 물든 것이요,

양독(洋毒)이란 해방 이후 서구의 문물과 사상에 물들어 우리의 역사를 내려깍는 것을 말한다. 이것의 공통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역사와 문화의 위대성을 망각한 채 자기비하, 자기학대, 피지배 민족의 열등적 역사관을 주입시킨다. 이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중독(中毒) : 사대주의사관(事大主義史觀)

 

신라 26대 진평왕 30년(608년) 원광법사를 통해 수나라에 걸병표(乞兵表)를 지은 것을 사대주의의 효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무열왕 김춘추가 648년에 당에 들어가 패강 이북의 땅을 당에 바치기로하고 나당밀약(羅唐密約)을 맺어 사대의 길을 열었고, 신라 28대 진덕여왕 4년(650년) 부터 당나라 고종의 영휘(永徽) 원년의 연호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5)

 

이후 통일신라시대는 숭당(崇唐), 고려시대는 사송(事宋), 조선시대에는 숭명(崇明)이 국시(國是)로서 자리잡은 결과, 주체성을 상실한 사대주의 유학자들에 의하여 우리 역사가 쓰여져 역사가 왜곡되게 되었다.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비아적(非我的) 입장에서 쓴 대표적인 사대주의 사서(史書)이다.

김부식의 아버지 김근(金覲)은 송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송(宋)의 소식과 소철을 사모하여 셋째 아들 이름을 김부식(金富軾)으로 짓고, 넷째 아들의 이름을 김부철(金富轍)로 짓는 등 김부식의 아버지 때부터 사대의 심리가 몸에 배어 있었다. 따라서 김부식 그의 이름 속에는 사대의 기운이 벌써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의 사서(史書)에서 우리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왜곡된 몇가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6)


 

 

1) 김부식의 삼국사기

 

① "진덕여왕 4년에 당의 永徽 연호를 행하게 되었다."의 아래 부분에 다시 논하기를 "편방(偏方)의 소국으로서 천자의 나라에 신속(臣屬)한 나라는 본래 사사로이 연호를 지어 쓰지 못하는데 법흥왕이 스스로 연호를 쓴 것은 미혹된 일이다. 당태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도 오히려 고치지 아니하고 머뭇거리다가 이제 봉행당호(奉行唐號)하니 가위(可謂) 과이능개(過而能改)라." 하였다.

 

 

② {수서(隋書)}의 "고려(高麗) 교오불공(驕傲不恭)하야 제장토지(帝將討之)하니라."를 "아(我) 교오불공(驕傲不恭)하야 제장토지(帝將討之)하니라."로 고쳐 아(我)와 비아(非我)를 구별하지 못하였다.

 

 

③ "고려(高麗) 침기봉장이수지(侵其封場以?之)하고 입기군현이거지(入其郡縣以居之)라. 시고(是故)로 병연화결(兵連禍結)하야 약무영세(略無寧歲)러니 급기동천(及其東遷)하야 치수당지일통이유거조명이불순(値隋唐之一統而猶拒詔命以不順)하고 수왕인어토실(囚王人於土室)하야 기완연불외여차(其頑然不畏如此)라. 고누치문죄지사(故屢致問罪之師)에 수혹유시설기이함대군(雖或有時設奇以陷大軍)이나 이종어왕항국멸이후지(而終於王降國滅而後止)하니라."7) 하여 우리 민족의 입장이 아닌 망당(亡唐)의 유신(遺臣)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2) 일연의 삼국유사

 

① 고조선(古朝鮮)조에서 석유환국(昔有桓國)의 아래 주(註)에서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천제(天帝)의 환국(桓國)을 불교의 제석환국(帝釋桓國)으로 변조하였고, 환웅천황이 천강(天降)한 태백산을 지금의 묘향산이라 주(註)하여 사실을 왜곡하였고, 단군 왕검의 도읍지 아사달(阿斯達)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반도 안으로 축소하였다.

② 고조선조 다음에 위만(魏滿) 조선조를 두어 위만을 고조선의 후계 왕국인 것처럼 조작하였다.

③ 연개소문 장군을 수나라 양견(楊堅)의 부하였던 양명(羊皿)의 후신으로 모함하여 놓았다.

 

 

3) 서거정의 동국통감 (외기사관 : 外紀史觀)

① 단군조선사를 외기(外紀)로 다루어서 타국사(他國史)인 것처럼 적었다.

② 삼국기(三國紀)부터 기록하여 삼성조(三聖祖)시대의 역사를 산거(刪去)했다.

4) 안정복의 동사강목 (수기사관 : 首箕史觀)

"기묘(己卯) 조선기자(朝鮮箕子) 원년(元年)"을 서두에 적고 "은(殷) 태사기자(太師箕子) 동래(東來)하니 주천자(周天子)가 인이봉지(因以封之)라." 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가 기자(箕子)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꾸미고, 단군왕검의 사적은 기자동래(箕子東來)의 밑에다 적고 있다.

 

 

 

5) 이 외에 정인지의 {고려사}, 한백겸의 {동국지리}, 한치윤의 {해동역사}, 정약용의 {아방강역고}8) 등도 모두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여 기술하고 있다.

단재는 우리 나라 역사서를 평가하기를 "대개가 정치사들이요, 문화사에 상당한 자는 몇 못됨이 일감(一憾)이요, 정치사 중에도 {동국통감}, {동사강목} 이외에는 고금을 회통한 저작이 없고 모두 일왕조의 흥망 전말로 글의 수미를 삼았음이 이감(二憾)이요,

 

 

공구(孔丘)의 {춘추}를 史의 극칙(極則)으로 알아 그 의례(義例)를 효빈(效嚬)하여 존군억신(尊君抑臣)을 주(主)하다가 민족의 존재를 잊으며, 숭화양이(崇華攘夷)를 주(主)하다가 말내(末乃)에 자국까지 양(攘)하는 벽론(僻論)에까지 이름이 삼감(三憾)이요, 국민의 자감(資鑑)에 공하려 함보다 외인에게 첨미(諂媚)하려한 의사가 더 많아 자기의 강토를 촌촌척척(寸寸尺尺)이 할양(割讓)하여 말내(末乃)에 건국시대의 수도까지 모르게 하였음이 사감(四憾)이다."라고 하였다.9)



2. 왜독(倭毒) :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한국의 통치를 영구화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사서(史書)를 약탈하고 역사를 악랄하게 조직적으로 왜곡하였다.

한국 강점 후 일제 총독부 산하의 취조국에서 1910년 11월 전국의 각 도, 군 경찰을 총동원하여 그들이 지목한 불온서적의 일체 수색에 나섰다.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지방에서는 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가, 세도가 등을 샅샅이 수색하였다. 다음해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서적 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광복 후 출간된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 씨가 지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서 밝히고 있다.

이는 일제가 조선사를 말살하려고 한 공개적인 첫 만행이었다. 총독부 취조국은 필요한 일부 서적, 즉 조선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만한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분서했다.

일제는 당초 3년 동안 수색을 하면 그들이 없애고 싶은 서적은 모두 씨를 말릴 것으로 생각했지만 서적의 압수, 분서 소식을 들은 소장자들이 깊이 감추는 바람에 3년은 고사하고 6년 동안이나 강압적인 서적 수색을 강행했으나 씨를 말리지 못하자, 무단정치로 악명 높던 사내정의(寺內正毅)는 총독부 취조국이 관장하던 관습, 제도 조사업무를 1915년 중추원(中樞院)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반도사 편찬을 담당시켰다.

 

 

1919년 3·1운동 후 일제는 어쩔 수 없이 무단정치를 철회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했으며,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조선 총독 제등실(齊藤實)은 교활하게도 조선 사람들을 반일본 사람으로 만들려고 이른바 '교육시책'에서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듬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라고 떠벌려 놓고 1922년 12월 훈령(訓令) 제64호로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을 제정, 공포하여 조선 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조선사편수회는 사료 수집에 열을 올리는 한편 1927년 6월 조선사 편찬을 위하여 조직을 확대 정비했는데, 이 때 이병도(李丙燾)가 금서룡(今西龍)의 수사관보로 들어간다.

금서룡(今西龍)은 1903년 동경제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도제대 교수로 있었는데, 1921년 단군고라는 논문을 써서 경도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근래(1920) 조선인 사이에는 갑작스레 단군을 숭봉, 존신하는 바람이 불고 있어서 단군을 조선민족의 조신(祖神)으로 믿는 단군교(檀君敎) 또는 대종교(大倧敎)라는 교도까지 생겨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사태 때문에 논문을 서둘러 발표한다고 하였다.

특히 그는 1512년 경주 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중간한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의 [고조선기] 중 '석유환국(昔有桓國)'의 '국(國)'자를 '인(因)'자로 변조하여 경성제대 영인본이라며 각 계에 배포했었다.

 

 

1932년 7월 21일, 조선사편수회의 제6차 위원회에서 육당 최남선은 이를 '천인(淺人)의 망필(妄筆)'이라고 통박하였다. 그 후 1938년 본문만 총 35권의 조선사가 완간되었다. 당시 쌀 한가마에 10원 미만이었는데, 일제는 이 사업에 잔뜩 100만 원을 투자했다.

식민사관의 폐해는 반도사관(半島史觀) 주입, 고대사 말살, 특히 단군의 신화화, 한사군 설치, 광개토왕 비문의 조작10)등이다. 우리는 해방 이후 다른 분야에서는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풀려 나왔지만 국사에 있어서만은 아직도 일제의 식민사관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참고적으로 식민사관에 대한 내용이 정리된 {다물(多勿)} 147∼152 쪽의 내용을 소개한다.

송오순 : 제가 한마디 추가하겠습니다. 이왕에 식민사관에 대한 말씀을 하실려면 우선 식민사관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합니다.

박기자 : 좋습니다. 그럼, 식민사관의 정의부터 말씀해 주세요.

임성국 : 오늘의 좌담회를 준비하려고 서재를 뒤지다 보니까 마침 {다물}지 1981년 12월호에 최만주 선생이 손수 쓰신 '식민 사관이란 무엇인가'하는 권두 논문이 눈에 띄기에 가져 왔습니다. 그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정의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제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고 한국을 일제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편리하도록 한국 역사를 위조했습니다. 그 위조한 역사를 한국민들에게 강제로 반복 교육함으로써 한국 민족이 일제의 침략 정책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여 한민족의 자주적인 민족성을 완전 거세하여 식민지 백성으로 길들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 국민에게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시킴으로써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획책한 것이 바로 식민사관입니다.

그런데 이 일제의 식민사관을 성립시키는데는 일정한 구성 요건이 꼭 필요한데 바로 이 구성요건이 제거되지 않고는, 제 아무리 그 껍데기를 다른 이름으로 예컨대 '민족사관'이라고 바꿔 붙인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제의 식민사관을 반복하는 반민족적인 교과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 그 구성요건이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상고사(上古史)와 국조(國祖)의 부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이 중국 대륙과 만주를 지배했던 상고시대의 4천년의 역사를 아예 쏙 빼버리고 국조인 단군과 그 윗대의 환웅과 환인 시대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 역사의 시작을 '위만 조선'과 거짓으로 꾸며낸 '한사군'에 맞춤으로써 '고조선의 건국이념'도 '국조'도 '장구한 역사'도 없애 버릴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소위 한사군 즉 한(漢)의 식민지였던 것처럼 꾸며 이것을 한국에 대한 외국 세력의 식민지 선례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대에 역시 거짓으로 꾸며낸 일본 통치부(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상륙했던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는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한민족은 스스로 나라를 세운 일도 없었고, 고유문화도 없었고, 한반도는 주인없는 미개지였던 것처럼 조작하여 침략자의 한국 강점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압축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발해와 통일 신라가 양립했던 우리 민족의 남북조 시대를 대동강 이남으로만 줄여버리고, 대륙에서 흥망했던 고구려와 대진(大震)의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사에서 아예 없애 버리고, 고구려와 대진의 뒤를 이은 대금, 대청을 말갈 또는 여진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아닌 것처럼 꾸며내어 대금, 대청과 그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의 활동사에서 제거하려는 논리로, 우리 민족사를 대륙에 기반을 둔 강대국이 아닌 대동강 이남만의 반도내의 소국의 역사로 만들려는 음모입니다.

 

 

 

셋째로 우리 민족은 오늘날까지 제대로 완전한 독립을 해 본 적이 없는, 주인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이병도의 전국유이민(戰國流移民)설]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역사를 날조했습니다.

예컨대 삼국사는 민족 분열, 동족 상잔의 역사이고, 고려사는 기강없는 음탕한 역사이고, 조선사는 탐관오리, 사색당쟁으로 일관한 망국의 역사로 만들어 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뿌리도 임자도 없었던 근본부터가 한(漢)의 식민지였던 나라, 둘째, 반도 안에 움추린 채 기를 못폈던 약소국, 셋째, 예로부터 피정복민인 무능하고, 부패하고, 분열하고, 민족 상잔의 망국 근성을 가진 민족으로서 스스로는 발전할 수 있는 추진력이 없는 정체된 사회 속에서 살아온 미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할 능력도 없는 한갓 고깃덩어리가 열강의 침략 야욕만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평화를 파괴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동양 평화를 유지할 사명을 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거나 식민지로 통치하는 것이 합당할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의 행복도 증진시킬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일제 식민사관의 골자입니다.

이처럼 역사를 날조하기 위하여 일제는 우리나라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역사책은 전부 약탈하여 갔습니다.

 

 

이러한 한국사 날조의 음모는 일제의 명치유신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제는 명치 유신이래 그들의 국시였던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안으로는 일본 역사를 한국지사(韓國支史)가 아닌 자생민족사로 날조하여 소위 황국사관을 만들어 냈고, 밖으로는 한국 역사를 오히려 일본지사(日本支史)처럼 날조했습니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은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그 첫 단계로 역사 정복(식민사관 날조), 둘째로 종교 정복(민족종교와 그 밖의 여러 종교를 탄압하고 신사참배 강요), 셋째로 국어와 한글 정복(일어를 강제로 사용케하고 한글을 못 쓰게 함), 넷째로 전통 정복(창씨 개명)을 총독부의 정책으로 강행했습니다. 대략 위와 같은 식민 통치 각본의 원전이 바로 다름아닌 식민사관으로 위조된 조선사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국사 교과서의 표지 이름이나 그림이나 삽화가 제 아무리 우리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해도 그 내용이 대체로 위에 말한 식민사관 내용을 탈피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제 식민사관의 답습 또는 복창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가짜 조선사는 모두 6편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 통일 이전을 제1편으로 하고 신라통일 시대를 제2편, 고려 시대를 제3편, 조선 시대를 제4, 5, 6편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짜 역사의 역점이 안팎으로 교묘한 짜임새를 보여 주고 있는데에 우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즉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근세와 근대사의 중요성이라는 미명으로 조선 왕조사에 역점을 둔 것은 실상 반도 속에 움추려 기를 못 폈던 반도속방사관(半島屬邦史觀)을 주입시키려는 음모입니다.

 

 

또한 신라 통일 이전을 제1편으로 설정한 것은 고조선의 대륙 지배 역사가 우리 민족 정신을 자각시키는 원천이될 것이 두려워 그것을 깡그리 이름도 내용도 말소해 버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가짜 조선사의 핵심이 되는 제1편 신라 통일 이전(즉 고조선시대), 제2편 신라 통일 시대, 제3편 고려시대와 같은 우리 민족이 그 능력과 재질을 과시하여 크게 웅비했던 시대를 날조하는 작업에는 일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면 비록 일본의 요인이라고 해도 감히 근처에 얼씬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묘하게도 한국사람 이병도씨가 무슨 연고가 있었는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서 이러한 고대사의 6개편의 역사날조 작업의 주역으로 깊숙이 관여했던 사실은 우리 사학계가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수수께끼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우리 사학계 현역 교수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하생들로 단단한 인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며 더구나 그 정예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일제의 식민 사관을 철저히 답습하여 국사오도(國史誤導)와 민족 종교 거세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 사학도들이 설 자리는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최남선과 같은 독립운동가나 이에 준하는 독립지사를 빼놓고는 오직 일제의 식민사관의 포교사(布敎師)의 지위 밖에는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비록 광복후라고도 해도 겉치레만 자주(自主), 자유(自由)였지 사실상 진정한 국사학도들이 공부할 우리 국사의 진본(眞本)은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랜 황무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러한 무대에서 이병도의 진두 지휘하에 당시 사학자들이 교육받고 성장하였다면, 이 사람들을 새로 교육시켜 식민사관으로 인한 왜독을 철저히 제거하는 작업이 최선결 과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국사 이외의 다른 전문 분야에 있어서는 공인 교수, 박사를 우선 그 방면의 학술 전문가로 꼽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국사학계와 국사교육 정책에서만은 기실 이른바 전문가가 비전문가요, 재야의 세칭 비전문가가 오히려 실제의 전문가였습니다. 요컨대 이 사이비 전문가들, 식민사관에 완전무결하게 중독된 사람들을 하루 빨리 재교육시켜 진정한 민족 사학자로 재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최만주 선생의 한결같은 주장이었습니다. 이상으로 식민사관과 그 문제점들을 대강 말씀드렸습니다.

박기자 : 임 선생님, 그런데 저희 세대에게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요.

임성국 : 그게 무엇입니까?

박기자 :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해방된 지 40년이나 되도록 그야말로 식민사학자들이 사권(史權)을 휘어잡고 독립된 대한민국 땅 안에서 그처럼 활개를 칠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임성국 :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첫 단계로 역사를 날조하고, 그 다음으로 종교 탄압, 국어와 한글 못 쓰게 하기, 창씨 개명으로 우리 민족성을 말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해방이 되자마자 종교, 국어, 한글 그리고 창씨 개명했던 우리의 이름은 당장에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학계에서도 역사만 빼고는 모두 일제의 손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환수된 것이 사실입니다.

 

 

가령 일제의 식민통치용으로 쓰이던 행정 기관, 철도, 경찰 그 밖의 모든 분야가 해방되는 날로 비록 미군정하이긴 하지만 우리 민족의 복리를 위해서 봉사하는 기관으로 바뀐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소나 말을 부리던 주인이 바뀐것이나 마찬가지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사 분야만은 일반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한채 행정과 정치의 사각지대에서 온존하면서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의 시녀 노릇을 해왔습니다.


박기자 :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성국 : 우선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해방후 한국 역사를 주체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가령 민족 사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박은식, 신채호 같은 분은 이미 일제의 탄압으로 타계한 뒤였고 그 뒤를 이은 사학도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처지였는데 이러한 독립 투사들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우리나라 사학계에는 일본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던 이병도나 일제가 정책적으로 식민사관 포교사 즉 일제의 주구로 길러낸 친일 사학자들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민족 사학자가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중국 북경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정인보 선생이었습니다.

 

 

이병도 따위는 정인보 선생 앞에서는 인격에 눌려 제대로 氣도 못 펴고 쩔쩔매는 판이었습니다. 정인보 선생과 이병도씨는 말하자면 해방된 한국의 사학계의 양 거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총독부의 조선사 날조에 적극 가담했던 친일 사학자요, 또 한 사람은 독립투사요 철두철미한 민족 사학자였으니 두 사람의 학설은 사사건건이 대립할 수 밖에 없었죠.

 

이 팽팽한 대립이 그대로 어느 정도 계속되었더라면 이병도가 S대학에서 양성한 제자들과 정인보 선생이 Y대학에서 길러낸 제자들이 거의 비등한 숫자로 막상막하의 대결을 할 수 있게 되었겠지만 불행히도 정 선생은 6·25때 괴뢰군에게 납북되어 가시는 바람에 그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육당 최남선씨가 있었지만 그분은 일제 때 일본에 부역을 했기 때문에 반민특위에 걸려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죠. 그러니까 대항할 만한 적수가 없어지자 이병도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S대라는 명문 대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내게 되었고 그 제자들로 구성된 학회의 회장과 한림원 원장까지 맡게 되자 한국 사학계에서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카리스마적 독재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씨는 그 때까지도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학계의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그의 승락이 없이는 대학 교수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임 강사 자리 하나도 얻을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3. 양독(洋毒)

 

해방 후 서양학의 영향으로 이룩된 사학을 양독(洋毒)이라 할 수 있는데, 식민주의 사학이 중독(中毒) + 왜독(倭毒)의 복합증상이지 결코 왜독이라는 단순현상이 아니었듯이, 양독이야말로 전근대 사학과 일본 식민사학을 부합시킨 현대의 괴물 사학으로 양독 = 중독 + 왜독 + 양독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이 양독의 특징은 고고학을 위주한 실증주의, 문헌고증주의(랑케사학) 등을 위주로 하는데, 우리 민족의 고대 강역이 만주, 몽고, 시베리아, 중국의 요령성,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임을 생각할 때, 고대사의 자료가 망실된 현실에 있어 역시 민족의 역사를 바로 잡는데 큰 독소이다.


 

 

 

4. 외래 종교의 폐해

 

1) 유교의 폐해

 

외래의 사상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국수주의라고 할 것이다. 어떤 민족이든지 외래 사상을 받아들일 줄 아는 민족이라야만이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제 정신이 있는 사람에게는 외래 사상이 좋은 약이 될 것이지만, 주체성을 상실한 사람에게는 외래 사상은 아편이 될 것이다. 유교는 중국 중심주의를 제창한다. 중국이 인류의 중앙이고 그 밖의 모든 민족은 중국에 예속되는 것이 천리(天理)라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여기에 물들게 되면 주체성과 자주독립정신이 말살되고 종속적인 사대주의에 철두철미하게 물들게 된다. 이의 폐해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이(夷)'는 중국인이 '동방에 사는 대궁(大弓), 즉 큰 활을 다루는 민족'이란 뜻으로 썼는데, 공자가 {춘추}에서 융적(戎狄)과 동일한 명칭으로 사용한 이래 우리나라 사람도 이에 동화되어 한문 교과서에서까지 이(夷)를 오랑캐라 부르고 있다.

② 이조의 역사가인 서거정, 안정복, 송병준 등이 우리 역사의 시작을 신라의 삼국통일에 맞추고 단군조선을 외기(外紀)로 다루었다.

 

 

③ 기자조선을 환작(幻作)하였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봉기자우조선이불신야(封箕子于朝鮮而不臣也)'라는 오기(誤記)에서 비롯하였는데, 사실 기자가 도망간 곳은 산서성 태원부로 번조선의 땅이었다. 극단적인 사대주의자 김부식조차도 감히 언급하지 못했던 내용이다.


고려때 송사(宋使)가 대동강 평양에 와서 기자묘(箕子墓) 찾아보기를 원하였으나 그 때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하자, 고려 숙종 7년(1102년) 예부상서 정문(鄭文)이 무주고총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기자묘(箕子墓)라 하고 사당을 세워 중사(中祀)로 제향을 올렸다.

그 뒤 평양의 사당에서 주벽(主壁) 단군왕검의 위패를 서향지좌로 하고 기자의 위패를 주벽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기자는 삭망향축(朔望香祝)까지 올리는 제전(祭田)이 있었지만 봄·가을 두 번 지내는 단군 제사에는 제전(祭田)조차 없었다.

 

 

④ 공자의 {춘추}와 주자의 {강목}만 세계 유일의 사필(史筆)로 여기고 우리 민족을 예맥(穢貊)이라 폄칭(貶稱)하여 스스로 오랑캐로 자처하였다.


⑤ 이조의 세조, 예종, 성종 때 우리의 도가사서인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지공기}, {표훈천사}, {안함노 삼성기}, {원동중 삼성기}, {삼성밀기}, {도증기}, {동천록} 등의 문서를 거두어 들여 소각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역사, 철학, 종교, 문화의 중요한 사료를 말살했다.

⑥ 훈민정음 제정의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조종 이래 지성으로 중국에 사사하고 모두가 중국 제도를 본받아 왔는데, 만약 정음이 중국에 전해지는 날에는 사대모화(事大慕華)에 부끄러운 일이라." 하였다.


2) 불교의 폐해

불교는 교리 자체가 공학(空學)에 매이고 개인주의적이어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바로 잡는데 등한히 하였으며, 특히 일연은 삼국유사를 지으면서 '석유환국(昔有桓國)' 아래 주석을 달아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천제(天帝)의 환국을 제석(帝釋)의 환국으로 풀이하여 환인을 한낱 불법의 수호신으로 인식하게 하여 큰 폐해를 가져왔다.11)


3) 기독교의 폐해

서울시에서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이 세계만방에 자랑할만한 것은, 유구한 역사와 단일민족임을 상징하는 단군성전을 새롭게 건립하는 것이라 여기고 단군성전을 건립코자 하였다. 없던 것을 새로 짓는 것도 아니고 사직공원에 모셔져 있는 기존의 단군 영정과 재실이 너무 협소하여 개축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전국적으로 단합하여 단군성전 건립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을 교회에 걸어놓고 매스컴을 통해 단군은 신화의 인물이고 우상이라고 선전을 하였으며 일부 광고 중에는 한국은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문구까지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의 목적을 달성했던 통분할 사건이 있었다.


이외에도 기독교는 조상숭배를 부정하고 장승을 쇠톱으로 잘라버리는 등 민족문화에 반하는 행위를 자행하여 민족보다 사상을 우선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어떠한 종교도 민족보다는 우선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아(我)와 비아(非我)를 구별치 못하여 공자가 한국땅에 들어오면 '한국 속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한국'을 만들려 하였으며, 석가가 이 땅에 들어오면 '한국속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한국'을 만들려 하였으며, 예수가 이 땅에 들어 오면 '한국 속의 예수'가 아닌 '예수의 한국'을 만들고자 광분하였으니, 이제라도 이 미몽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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