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교회에서 칼럼을 쓰는데 어디선가 꽹가리 소리와 북소리가 요란하다. 처음에는 무슨 농악대 소리인가 했는데 그치지 않고 나고 있다. 궁금해진 아내가 보고 오더니 건너편 집에서 무당이 제상을 풍성하게 차려놓고 굿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요란했나 보다. 지금은 조금 수그러진 감이 없지 않지만 필자가 어렸을 때는 집집마다 굿을 하는 집이 적지 않았다. 그 유명한 계룡산 밑에서 태어났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오래 전에 정부에서 계룡산에서 무단 점거하여 굿당을 차려놓는 것을 금지하여 지금은 산 밑의 마을로 내려와서 굿을 하고 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고 하니 무속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엄청난가 보다.
무속신앙은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오지에서는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지만 뉴욕이나 런던의 뒷골목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뭐, 우리나라에서도 미아리에 가면 점집이 촘촘히 들어서 성황을 이루고 있으며, 필자가 사는 대전에서도 대나무에 오색 깃발이나 태극기를 걸어놓은 굿당이 사라지지 않은 걸 보면 그 생명력이 끈질기다. 오래전 우리네 조상 때부터 과학문명이 발달한 현대에 이르기 까지 무속신앙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오는 걸 보면 그들을 찾는 고객이 끊이지 않다는 증거일 게다. 사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은밀하게 점집을 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속신앙의 특징은 무엇인가? 복을 빌고 복을 받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이다. 그 복이란 세상에서 잘 되고 성공하는 현세적이고 지상적인 복을 말한다. 말하자면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복이다. 복을 받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무당이 시키는 대로 제사상을 차리는 비용을 건네주면 따로 할 일이 없다. 그리고 무당이 굿을 할 때 옆에서 정성스레 빌면 된다. 말하자면 귀신에게 복을 받으려면 돈이 있으면 기본적인 것은 준비된 셈이다. 말하자면 돈이 곧 정성이고 치성이다. 그게 성이 차지 않는다면 산 밑의 굿당에 가서 새벽처럼 일어나 정화수를 떠놓고 촛불을 켜놓으며 절을 하고 간절히 빌면 더 큰 복을 받고 소원을 이룬다고 믿고 있다. 비는 일수를 늘이거나 새벽처럼 일어나 찬물에 목욕까지 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말하자면 희생적인 신앙행위의 수위를 높일수록 귀신으로부터 소원을 이룰 확률이 높아진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방식이 무속신앙에서 복을 받는 비결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네 교회에도 이러한 기복신앙의 뿌리가 깊다. 그간 전도를 할 때, 예수 믿고 복을 받으라는 구호가 씨가 먹힌 이유이다. 말하자면 복에 익숙한 우리네 사람들에게 잘 어울리는 전도전략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인 복을 받고 싶어 교회로 몰려들었다. 이 속내를 잘 이용한 목회자들의 탐욕스럽고 간교한 계략이 유효했던 탓이다. 그래서 지금 수많은 교회가 들어서고, 기존의 수십 개의 교단과 수백 개 아니 수천 개의 군소교단에서 배출한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여전히 그 전도전략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희생의 강도를 더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소원을 이루고 응답을 받는다는 투의 신앙방식이다.
그러나 베이비붐 시대의 여파로 우리나라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경제부흥을 이루던 시절에는 교회가 덩달아 성장하였지만, 지금은 인구가 감소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지갑도 얇아져서 교회를 개척하면 대부분 오래 가지 못하고 문을 닫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대형교회는 더욱 럭셔리해지고 안락해져서 사람들이 더 많이 찾는 반면에 환경이 열악한 미자립 교회는 더욱 쪼그라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래도 군소교단 출신의 목회자은 그들 나름대로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을 벌이는 형국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기복신앙의 전도전략이나 기도전략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이유이다.
고단하고 팍팍한 삶의 문제를 호소하면 이들 목회자들의 처방은 희생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전략이다. 이들은 문제를 해결하고 기도응답을 받으려면 대개 새벽기도를 작정하고 헌금봉투에 지폐를 넣어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처방이다. 대부분의 기도원에 가도 이러한 행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인도 거의 없이 교회간판만 겨우 붙어있는 이상한 교회나 근본을 알 수 없는 목회자들만 이런 처방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처방을 내린다. 문제가 생기면 작정기도나 새벽기도, 각종 기도회의 참석, 십일조 준수에다 주의 종인 목사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말은 조금씩 달라도 희생의 강도를 더하면 소원을 이룬다는 기복신앙의 기본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앙방식이 천지를 지으시고 우주를 운행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처방인가? 하나님은 희생적인 신앙행위만 하면 소원을 이루어주시고 세속적인 복을 주시는 분이신가? 그렇다면 세상의 잡신과 귀신들을 섬기는 무속신앙과 무엇이 다를 게 있는가? 무속신앙은 돈을 많이 들여 제사상을 차리거나 새벽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횟수를 늘려 희생적인 신앙행위만 높이면 자신의 신이 감동해서 복을 준다는 방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 뜻대로 행해야 복을 준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아무리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더라도 그 속내나 목적, 성품 등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으며 헛수고일 것이라고 성경에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1:11~15)
하나님은 우리가 가져오는 헌금과 희생행위를 기뻐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품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하기를 원하시며,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의식에 참여하기보다 일상의 삶에서 예배의 삶을 살기를 원하며, 자신이 원하는 목록을 큰 소리를 나열하는 기도행위보다 하나님을 부르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회개하는 기도를 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세상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과 불의를 자행하며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이용해서 지갑을 채우고 거짓과 불법적인 향응과 뇌물과 사기를 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주일에 말쑥하게 옷을 빼입고 경건한 얼굴로 예배에 참석해서 빳빳한 지폐를 헌금함에 넣으며 천국의 자격을 철썩 같이 믿고 있다. 그리고는 기도할 때마다 자신의 원하는 기도목록을 경쟁적으로 외치고 있다.
이 같은 신앙방식은 거룩한 하나님을 무속신앙의 귀신으로 아는 가증하고 뻔뻔한 행위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진리인 기독교를 세속적인 무속신앙으로 변질시키는 가증한 자들이다. 그렇데 어떻게 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천국의 자격을 얻으며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누릴 것인가?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을 귀를 닫고 외면할 것이며 그동안 드렸던 많은 헌금은 교회의 통장에 쌓일지는 몰라도 하늘나라 창고에 쌓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두 가지 선택을 해야 한다. 더 이상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고 예배시간에 소파에 기대어 TV 오락프로를 시청하든지, 아니면 지금까지의 신앙의 태도를 갈아엎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 칼럼을 다 쓸 때까지 길 건너의 굿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랜 신앙의 연륜에도 기독교를 무속신앙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행태를 고치려 하지 않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필자의 가슴도 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