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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탐구

'모든' 소득의 십일조로 인한 웃지 못할 사례들

작성자아날로그|작성시간15.08.10|조회수624 목록 댓글 0

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모든' 소득의 십일조로 인한 웃지 못할 사례들

성경 어디에도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씀은 없다.

민수기 31:25-47을 보면 어떤 소득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500분의 1을 요구하시고 어떤 소득에 대해서는 50분의 1을 요구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곱이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렇게 서원을 한 것이다. 그런 조건부 십일조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는 본받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 근거로 삼을 만한 구절이 히스기야 왕의 종교 개혁을 언급한 역대하 31장에 나오고 있으나, 문맥을 살펴보면 그 구절의 '모든 것'이 '모든 소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또 예루살렘에 거한 백성을 명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음식을 주어 저희로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라 한지라.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역대하 31:4,5)

여기서 뒤에 나오는 '모든 것'은 앞에 열거되어 있는 여러 품목들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특히 십일조의 대상이 되는 모든 품목들이라는 의미이다. 십일조의 대상 품목들은 토지 소산과 관련해서는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주로 곡식과 포도주, 기름 들이다.

그리고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히브리 문장 구조를 살펴보면 31:5 하반절에서 '처음 것'에 해당하는 '레아시트'라는 단어가 맨 앞에 나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곡식, 포도주, 기름, 꿀, 밭의 모든 소산들이 다 '처음 것'에 걸린다는 말이다. 즉 곡식의 처음 것, 포도주의 처음 것, 기름의 처음 것, 무엇무엇의 처음 것 등으로 풀어서 쓸 수 있는 문장인 셈이다.

이스라엘은 토지 소산의 처음 것, 혹은 첫 열매를 먼저 제사장의 몫으로 하나님께 바치고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의 10분 1을 십일조로 바쳤다. 이런 '처음 것'들은 토지 소산의 60분의 1 정도였다. 십일조는 정확하게 말해 60분의 59 곱하기 10분의 1, 그러니까 토지 소산의 600분의 59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하지만 원래 십일조라는 것이 소산물의 특성상 정확하게 분량을 잴 수는 없고 10분의 1 안팎으로 계산하면 되었다.

 

첫 열매를 먼저 떼고 그 다음 십일조를 계산하는 이스라엘의 풍습은, 다른 어떤 것보다 십일조부터 떼어놓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한국 교회의 권면과 비교가 된다.

또한 '모든 것'의 십일조가 돈(화폐)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더미'로 쌓아두었다는 역대하 31:6 이하의 말씀을 볼 때 더욱 확실해진다. 그 모든 것은 '양식(음식)'이었기 때문에 더미로 쌓는 데 몇 달이 걸렸던 것이다(역대하 31:7).

재미있는 것은 이 본문을 해설해놓은 《컬러 큰 성경》(성서간행사) 699쪽에 보면 '십일조에 관한 말씀들' 항목에 십일조의 원칙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 여섯 번째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쳐야 함'이라는 원칙이 나와 있다. 그 원칙에 대한 참조 성경 구절로 레위기 27:30-33을 들고 있다. 이 성경 구절은 세 번째 원칙인 '소산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임'의 참조 구절로도 소개되고 있다.

레위기 27:30-33은 토지 소산과 가축의 10분 1을 십일조로 바치라고 하였지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한 구절이 아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가축의 십일조는 언급되지 않고 토지 소산의 십일조만 언급되고 있다.

농경 목축 사회에서 토지 소산과 가축이 '모든' 소득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이미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고 다른 일거리나 매매 행위 등을 통해 여러 형태의 소득들이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왕정시대로 넘어갈수록 다른 종류의 소득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성전세나 헌금, 다른 세금들은 돈으로 냈으나 십일조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돈으로 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양식의 형태로 성전 곳간에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가나안 땅에서 토지 분배가 있은 연후의 토지 소산과 가축의 개념은 소득이나 부의 축적 수단이라기보다 양식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레위인, 또는 가난한 자들과 양식을 나눠 먹는 구제의 정신 가운데서 행해졌다. 한 가족이 1년 동안 먹는 양식의 10분 1을 내어놓아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양식의 10분 1은 될지언정 '모든' 소득의 10분 1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말라기와 느헤미야 시대까지는 십일조가 토지 소산의 10분 1로 양식에 국한되었다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러다가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더 많은 성전 수입을 위해 제사장들과 함께 십일조의 대상을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토지 소산 이외에 박하, 회향 같은 특수 작물들도 십일조의 대상이 되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십일조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화폐 소득을 십일조에 포함시키고부터였다. 화폐 소득을 포함시키자 자연히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으로 확장되었다.

 

화폐와 박하와 및 향료의 십일조는 탈무드의 랍비들이 주문하는 내용이었으나 이는 성경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성서 대백과》 제4권, p.752, 기독지혜사)

중세 교회에서도 4세기 무렵 십일조를 채택하고 나서 근 1000년 가까이 지난 13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시켰다는 사실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거의 독점 체제에 가까웠던 중세 교회가 왜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장시키는 데 1000년이나 걸렸을까. 그것은 중세 교회에서도 전통적인 십일조의 대상은 '모든' 소득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화폐 소득을 중심한 '모든' 소득이 십일조의 대상이 됨으로써 십일조가 변질되고, 그것이 전통적인 십일조 정신을 흐리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십일조가 나눔의 양식이 아니라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의 치부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윌리엄 버클리 박사가 쓴 《예수의 생애와 사상》을 참조해 보면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이 얼마나 치부하였는가를 잘 알 수 있다.

 

팔레스틴의 일반 노동자가 한 주일에 한 번이라도 고기를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라지도 않던 행운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 제사장들은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데서 오는 직업병 때문에 고생을 했다. ……

제사장의 특권과 급료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제사장들은 일곱 가지 종류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출 23:19). 그것은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꿀이었다. 이 제물은 본래 하나님께 바치는 것인데 바쳤던 것을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다. 제사장들은 개인적으로 돕는 사람들이 농산물의 가장 좋은 것을 성전에 바치는 제물로 가져왔다(민 18:12). 수확의 50분의 1이 제사장에게 분배된 평균량이었다. 여기에 십일조가 더 첨가되었다(민 18:20-22). 음식으로 쓰이는 모든 것의 10분의 1이었다. 이것은 레위 지파의 생계를 위해서 정해진 것인데 제사장들은 자기들이 받을 분량을 받았다. 거기다가 할라(challah)라는 과자, 또는 빵 반죽의 제물이 있었다. 어떤 빵을 굽든지 제사장들은 그 빵의 24분의 1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제사장들은 비교적 빈곤한 편에 속하는 나라에서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희생으로 전례 없는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같은 책, p.230-231)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주장하였고 13세기 무렵에 중세 교회가 채택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현재 한국 교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엄밀히 말해 전통적인 십일조는 우리가 먹는 양식의 10분 1 정도만 내면 되는 것으로, 굳이 돈으로 계산한다면 1년 식비의 10분 1 정도 될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고 한 그 말 속에 십일조 정신이 녹아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 교회 교인들은 십일조와 관련하여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1년 식비의 10분 1 정도가 아니라 그 수십 배를 각종 명목의 헌금으로 내는 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십일조의 몇 배, 아니 수십 배를 이미 하고 있으니 십일조를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따위의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 걱정을 하기 보다, 정말 내가 도와야 할 이웃을 외면하고 방관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과 회개를 먼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식비는커녕 생활비의 10분 1을 십일조로 내겠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듯이 야단이다. 무조건 돈으로 들어오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전혀 성경의 뒷받침을 받을 수 없는 억지인 셈이다.

다시 말하건대 십일조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나눔의 양식이다. 양식이라는 차원을 벗어나면 그 순간 십일조 정신이 흐려지고 만다.

한국 교회에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계산하느라고 얼마나 웃지 못할 사례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① 월급을 받으면 세금을 공제하기 전 명목상의 임금으로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세금을 공제하고 난 후에 실제 수입으로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은 십일조와 관련하여 가장 기초적인 것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금 이외에 다른 것들도 공제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빚 문제까지 겹친다면 혼돈은 더욱 심해진다.

② 목회자 모임에서 빚을 먼저 갚아야 하는가, 십일조를 먼저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갑론을박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목회자들은 빚을 먼저 갚는 것이 이웃을 위하는 일이므로 십일조 내는 것보다 빚을 먼저 갚는 것이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얼마 후에 교단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목회자들은 자기들이 의논하고 토의하여 내렸던 결론을 철회해야만 하였다.
빚을 갚고 나면 소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십일조를 하라는 것인지, 빚을 끝까지 갚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지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③ 또 어떤 사람은 월급을 타서 십일조를 하고 나머지 돈을 쪼개어 정기적금에 들었는데 적금 만료가 되어 목돈을 가지게 되었다. 이럴 때 이미 십일조를 뗀 돈으로 적금을 들었는데도 새로 목돈이 생겼다고 거기에 대한 십일조를 또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나오자 옆의 교우가 원금에서는 십일조를 안 해도 되고 이자에 한해서만 십일조를 하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왜냐하면 이자는 새로 생긴 소득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각종 소득을 일일이 점검해보아야 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어쩌면 수학 계산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십일조를 제대로 하기가 힘들 것이다. 켄덜 목사는 '주의 깊은' 사람이면 충분히 십일조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런 이자 액수에까지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이미 십일조를 떼고 국민연금을 내고 나서 노후에 연금을 타게 될 때에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④ 어떤 교수가 특강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먼 지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가는 동안에 밥도 사 먹고 커피도 마시고 간식도 사 먹었다. 구두 밑창이 떨어져 구둣방에 가서 수리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강의를 하러 가기 위해 치러진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강의를 마치고 강의료 50만 원을 받았다.

 

자, 이제 강의료에 대한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일단 비행기 삯을 강의료에서 빼는 것은 기본일 것이다. 그 다음 들어간 경비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어쩌면 그 모든 비용들이 50만 원을 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그 50만 원에 대한 십일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⑤ 아버지가 이미 십일조를 뗀 돈에서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었다. 아이들도 그 용돈에서 십일조를 떼어야 하는가? 물론 떼어야 한다는 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돈이 돌아다니는 곳이면 십일조를 계속 떼어야 하는 길고 긴 순환 고리가 이어질 것이다.
가령 111만 원을 벌게 된 아버지가 십일조 11만 원을 떼고 나머지 100만 원을 아들 10명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하자. 아들 10명은 각각 십일조 만 원씩을 떼게 되어 도합 10만 원의 십일조를 떼는 셈이 된다. 그리고 아들 10명이 각각 나머지 9만 원을 또 자기 아들 9명에게 만 원씩 나누어주었다고 하자. 아들의 아들들은 각각 십일조 1,000원을 떼게 되어 한 가정당 9,000원씩 도합 9만 원의 십일조를 떼게 된다. 손자대까지 내려오는 동안 원래 111만 원이었던 수입에 대한 십일조가 벌써 30만 원이 되는 셈이다. 그런 일이 용돈이 오가는 추석 명절 같은 날 방안에서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돈이 돌다 보면 십일조로만 나가는 금액이 50만 원, 60만 원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⑥ 만 원짜리 한 장이 물건을 산다든지 하여 소비되거나 축이 나지 않고 용돈처럼 1,000명의 사람들을 거쳤다고 하자. 만 원짜리 한 장이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십일조로 거둔 돈이 자그마치 100만 원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만 명이 모인 자리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가지고 이런 수법을 쓴다면(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만약에 말이다) 순식간에 1,000만 원의 십일조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만 원에 대한 십일조는 그 만 원에서가 아니라 다른 돈으로 낸다는 조건하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런 노동도 없는 가운데 만 원짜리 한 장이 돌아다니기만 해도 이렇게 엄청난 십일조가 거두어지니 이보다 더 기이한 산술(算術)이 어디 있는가!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먹어 치울 수 있는 양식의 십일조를 요구하셨는지도 모른다.

⑦ 어느 미션 계통의 대학에서 교수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미리 십일조를 떼고 지급했다. 교수들이 항의를 하자 학교 당국에서 대답하기를, 교수들은 교내에 있는 대학 교회 소속으로 볼 수 있으므로 대학 교회에 내야 하는 십일조를 미리 떼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물론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학교 재정난 때문에 그런 편법을 썼음에 틀림없다. 이런 편법이 가능한 것이 바로 '모든' 소득에 대한 십일조의 허점이기도 하다.

⑧ 자유 직업가로서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어느 성도가 오랜만에 1,000만 원의 수입이 생겨 100만 원의 십일조를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달부터 수입이 일체 없는 기간이 반년이나 이어졌다. 그 성도는 십일조 헌금자 명단이 적힌 주보를 볼 적마다 교회의 목사님이나 다른 신자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염려가 되었다. 한 달에 100만 원의 십일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십일조 액수가 많으니까 떼어먹고 있지 않나 하고 오해를 할 것 같아서였다.
전통적인 십일조는 1년에 한 번 하면 되는 것인데 '모든' 소득의 십일조는 대개 달마다 하는 것으로 관례화되어 있다. 달마다 드리는 십일조에 참여할 수 없는 특수직 종사자들은 소외감을 느낄 만도 하다.

⑨ 남편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데 전업 주부인 아내가 남편의 월급에서 십일조를 떼어 자기 이름으로 헌금을 하면서 남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화가 나서 교회를 찾아가 자기 월급에서 바쳐진 십일조를 돌려달라고 하였다. 아내의 소득에서 십일조가 나간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아내는 남의 소득을 가지고 자기 소득인 것처럼 꾸며 거짓으로 십일조를 했다는 말이었다. 구약 시대로 따지면 남의 밭 소산을 가지고 십일조를 바친 꼴이었다. 전업 주부로서의 노동의 대가를 감안하더라도 남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때 교회에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고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되겠는가?
한번 바쳐진 것은 절대 돌려줄 수 없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에, 일종의 행정 착오와 같으므로 일정 분량은 돌려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⑩ 중고 컴퓨터를 팔아 돈을 보태어 최신식 컴퓨터를 구입하려고 하는데 중고 컴퓨터를 팔아서 생긴 돈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중고 컴퓨터를 파는 목적은 그 돈으로 소득을 삼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최신식 컴퓨터 구입 자금으로 투입하려고 그러는 것인데 잠시 머물렀다 가는 그 돈에까지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돈이 머물러 있는 기간이 길면 십일조를 해야 하고, 머물러 있는 기간이 짧으면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
작은 집을 팔아 큰 집으로 옮기려고 할 때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물론 국가에서는 거래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양도 소득세도 물리고 취득세도 물린다. 2억 정도의 돈을 굴려 집을 옮기는 과정에서 나라에 바친 세금만 3,000만 원 가까이 되는 경우도 있다.
십일조도 나라의 세금처럼 그렇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모든' 소득의 십일조가 봉착하고 있는 딜레마이다.

⑪ 나라 세법에 정통한 세무 공무원이 있는 것처럼 교회마다 십일조 내는 법에 정통한 신자들이 있다. 십일조와 관련된 갖가지 경우를 쾌도난마식으로 척척 잘 해결한다. 하지만 그러한 해결책은 믿음의 차원과는 상관없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런 신자들이나 교회가 제시하는 해결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율법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점들은 전통적인 십일조와는 달리 '모든' 소득에 대하여 십일조를 부과하려는 지나친 종교적인 열심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모세 오경에서 규정하고 있는 십일조보다 한국 교회의 십일조가 더 율법적인지도 모른다.

⑫ 우리가 살아가면서 돈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가치 있는 고귀한 일들을 만나게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 신장을 하나 떼어내어 생면부지의 환자에게 이식하도록 했다고 하자. 그 신장 값을 얼마나 매겨야 할 것인가?
이때에도 십일조의 원칙을 적용하려고 할 것인가.
좋다. 정 그렇다면 여기에 십일조의 원칙을 한번 적용해보자.
우선 신장 값을 2억 원 정도로 잡기로 하자. 신장을 값없이 기증한 사람은 2억 원을 그냥 내어준 셈이 된다. 그 사람이 신자라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는 마태복음 25:40에 입각하여 그 2억 원을 예수님에게 바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20억 원에 대한 십일조라 할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을 바친 것이다.
이 사람이 일생 동안 벌어도 20억 원을 벌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평생 벌 수 있는 돈의 십일조를 이미 넘치게 바친 셈이 된다. 이런 사람에게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강요할 수 있겠는가?
기증을 받은 사람의 입장은 어떠한가? 2억 원에 해당하는 신장을 기증받았으니 그 십일조인 2,000만 원을 교회에 바쳐야 할 것인가? 아무리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라 하더라도 이런 사람에게까지 십일조를 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고귀한 가치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소득의 십일조라는 것은 이런 가치들 앞에서는 빛을 바래게 된다. 다시 말해 십일조로 따질 수 없는, 십일조를 훨씬 초월한 차원이 있다는 말이다.

 

 

십일조를 넘어서 - 기독교인가, 매머니즘인가>(베틀·북)
- 조누가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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