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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탐구

[펀글] 지옥에 있는 부자는 영원한 지옥을 보고 가족이 지옥에 들어오지 않기를 아브라함에게 간청한다.

작성자성도의본분|작성시간19.06.07|조회수120 목록 댓글 8

기독교에 대한 반론(2): 지옥: 기독교의 하나님은 진노의 심판자가 아닌가?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되도록 더러 생략하고 의역한 부분이 있음 -역자-)

팀 켈러



누가복음 16: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지옥의 심판과 사랑의 하나님. 이 두가지가 어떻게 양립하는가. 자주 제기되는 의문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무엇이라 답을 해야 할까요? 저는 목사니까 여러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걸 들었어요. "목사님 지옥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성경에 지옥을 불로 묘사한 부분이 많은데 그건 사실 다 은유적인 인 표현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죠. 그러면 제가 또 이렇게 얘기 합니다. "아마 불보다 몇천배는 더 무서운 그런 곳이죠." 그러면 다들 벙~찌고는 하는데...

제 논지는 이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지옥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면 그래야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고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되죠. 상충되는것 같습니다. 하나 하나 보죠. 먼저 지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비유에 두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죠. 주석가들이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하는 말이 뭐냐면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 비유에만 유일하게 등장인물한테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만 이름이 있고 부자한테는 이름이 없죠. 이건 의도적인 대조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부자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자도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했고, 성경을 읽었던 것이죠. 그런데 아무 이름도 없이 지금 지옥에 있는겁니다. 왜 그렇죠? 25절을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렸다는 거지요. 철학에 최고선(summum bonum)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삶에서 제일로 중요한것을 summum bonum이라고 하죠. 여러분들의 summum bonum은 뭡니까? 삶의 궁극적 목적. 궁극적 가치. 의미. 자기 정체성을 결정하는 그 무엇. 그게 무엇이건 그 summum bonum, 즉, 최고선에 의하여 그 사람의 정체성, 아이덴티티가 결정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부자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다라고 되어 있지요. 과거형입니다. 이 부자한테는 생전에 자기의 지위와 부가 곧 그의 정체성, 아이덴티티였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 지위와 부가 사라지니까 이 사람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죠. 왜냐면 그게 바로 '나' 니까. 부자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런 겁니다. 돈이 없으면 나는 낫띵(nothing)인거야. 이런 겁니다. 결과로 아무 정체성도 없는, 이름이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죠.

지옥이라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빼앗기는 곧입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빼앗기면 어떻게 됩니까? 대안이 뭐에요?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는 죽음에 이르는 병(sickness unto death)라는 책에서 죄의 정의(the definition of sin)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면서 죄란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에 의해 자기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죄의 정의란 무엇이냐고 했을때, 전통적으로 죄를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으로 말해 왔죠.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게 충분한 죄의 정의가 될 수 있는가가 키에르케코르의 문제의식이었죠. 왜냐면 바리새인들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구요. 율법을 아주 지독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 자기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 하는 행위더라는 겁니다. 내가 율법을 이렇게 잘 지켰으니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실 수 밖에 없다는 식의 생각을 가진거죠.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율법을 지독하게 지키면서 이루고자 하는건 결국 그런 율법지킴의 행위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거라는 겁니다. 자기 정체성을 하나님께 두는게 아니라, 내가 도덕적인 삶을 얼마나 살아내느냐에 두었다는 것이죠. 바로 거기서 자존감을 얻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걷은 번지르르하고 아주 거룩해보이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교만과 자기 의에 가득차 있더라는 것이지요. 왜냐면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내 아이덴티티를 하나님 아닌 다른데 두는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의 죄에 대한 정의는 아주 성경적인 것입니다. 로마서 6장의 논지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더러 누리라고 주신 좋은 것들이 있죠. 그런데 그런것들을 감사히 누리는 것을 넘어서 어떤 궁극적인 대상으로 삼으면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나에게 저것만 있으면 정말 좋을 거야. 아니면 내 삶은 의미가 없어." 돈, 직장, 여러분의 외모, 배우자, 가족, 자녀, 권력, 인정.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이런것들로부터 자존감과 안정감을 얻는다면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여러분의 진짜 신앙의 대상은 다른데 있는 겁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화재와도 같은것이죠. 그래서 불이라는 은유가 사용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중독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아주 파괴적이죠.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사람이 해체가 되어갑니다. 중독이 되어갈 수록 같은 만족을 얻기 위해 더 큰 자극을 요하게 되죠. 어느 순간부터는 자극에 비해 받은 쾌감이 줄어듭니다. 사람은 점점 피폐해지죠. 또 하나의 결과는 고립입니다.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매사에 비관적이 되고 남탓, 환경 탓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을 부정하게 되죠. 더이상 현실을 현실로 인식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뭔가에 중독된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죠.



영혼에는 불멸성이라는게 있습니다. 우리는 의식을 가지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 어떤 사람, 그 어떤 것으로부터 진정한 자기 아이덴티티와 만족과 자존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뭔가에 궁극적으로 중독이 되어 있어요. 왜냐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필수적인 것들이니 어디에선가는 그런 것들을 얻어야 되거든요. 만약 우리가 80년 정도만 살고 그냥 없어지는 존재다 그러면 별 문제가 안되겠죠. 그런데 영원히 사는 존재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성질이 좀 급하고, 쉽게 짜증을 내고 그런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이 생에서 그런 성격적 결함을 그냥 내버려 둔다고 해도 크게 보면 별 차이가 없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영원이라는 영역으로 그런 결함들이 이어진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지옥이라는건 불평으로 시작되는 겁니다. 항상 투덜거리고 불평하는 것으로 시작되요. 스스로 그런 모습을 비판적으로 보고 고치려고 노력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을 지나가면 그럴 수 조차도 없게 됩니다. 왜냐면 나 자체가 사라지거든요. 그냥 불만과 불평만 기계처럼 남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옥이란건요 하나님이 보내는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싹을 잘라버리지 않는다면 점점 사람을 지옥과 다름 없는 삶을 살게금 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불입니다. 장작불이 타는 모습을 그려보세요. 그 안에 나무가 어떻게 됩니까? 점점 소멸되고 사라져갑니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건 좋습니다. 그런데 그게 내 삶이 되어버리면, 그게 바로 '나'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뭔가 잘못되면 그게 바로 '나'이기 때문에 살아갈 의지마져 잃어버릴 정도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 정체성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뭔가가 틀어지면 내 자신이 아무 가치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곧 깊은 수렁 같은 상실감에 빠져버리죠. 그러니까 우리가 누리게금 되어 있는 많은 '좋은 것들(good things)'에 우리는 중독이 될 수가 있고 그렇게 되면 그것들로 인해 우리 스스로가 고립되고 해체되어버리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게 지옥이라는 불입니다.

CS Lewis가 묘사한 지옥을 보면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지옥의 문은 밖에서 잠겨있는게 아니라 안에서 잠겨 있다고요. 안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걸어 잠그는겁니다. 끊임 없는 부인(denial)입니다. 중독된 사람들의 특징이죠. 나도 안좋은거 아는데 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게 지옥이라니까요? 오늘 본문을 보세요. 지금 지옥에 있는 부자는 현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주석가들에 의하면 지금 이 부자는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부인하고 끊임없이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천국에 있고 부자는 지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부자는 나사로를 종으로 부리려고 합니다. 나사로더러 물을 가져오라고 하죠. 그리고 지옥에 있으면서도 그곳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는게 아니라 나사로를 오히려 그리로 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자세히 읽어 보시면 부자는 지금 하나님이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고 불평하고 있죠. 내가 형제가 5명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라도 여기 안오도록 좀 알려줘라 이러는 겁니다. 왜냐면 나한테는 누가 그런걸 안알려줬다는 거거든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 난 여기 있으면 안되는 사람이야. 근데 여기도 뭐 그리 나쁘지 않군. 그냥 날 내버려둬. 이런겁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지옥이란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한 다른 그 무엇을 바탕으로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입니다. 점점 스스로를 해체하면서 현실을 부인하는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거대한 구덩이에다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던져 넣으시는 류의 그림은 지옥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기회를 주시고 용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용서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나를 그냥 이대로 내버려두라고 하죠. 그게 지옥입니다.


 

결국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만이 남게 됩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구요.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반대로 하나님이, 너희의 뜻대로 될 지어다, 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옥은 바로 그 선택입니다.

또 하나의 적용점을 드릴게요. 제 개인적으로 지옥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굉장한 중요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면 모두 영적인 중독자들입니다. 그런데 중독을 고치려면 뭐가 필요한지 아십니까? 그 심각성을 중독자가 깨달아야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우리 내면의 이 지옥의 불길이 치밀어 오를때가 있죠. 기껏해야 그럴 때 우리가 한다는 건 입으로 후후 불어대는 것밖에는 못됩니다. 사태만 더 악화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나는 이런 존재구나. 나한테 이런 문제가 있구나 하고 알고 있으니까 정말 많이 도움이 되더라 이겁니다. 그 불을 끄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도 알게 되구요.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여러분의 아이덴티티는 뭡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규정합니까?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여러분을 위해 하신 바로 그 일에 서 계십니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 기대고 계십니까? 외적인 상황이 어떻건 흔들리지 않는 그 어떤 중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스스로를 사업가, 부모, 예술가, 학자, 이런것으로 정의하고 계십니까? 지옥의 교리만큼 사람을 깊은 자기 성찰로 내모는 교리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그렇게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직면하실 의지가 있으십니까?

두번째로, 지옥의 교리가 없다면 이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심판의 하나님과 지옥 교리를 받아들이면 어떤 사람들한테는 이것이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우려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억압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죠. 네이션 지에서 릭 워렌이 이 질문을 받았습니다. 인터뷰하는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기독교의 지옥교리는 분열을 조장한다. 왜냐면 아무리 경건하게 산다고 해도 기독교 안믿으면 다 지옥간다는거 아니냐? 기독교 신자들하고 심판 받은 비기독교인들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취급하는거 아니냐?" 그런데 이 질문은 핵심을 벗어난 질문입니다. 왜냐면 방금 우리가 살펴본대로 지옥이란건 신이 폭력적으로 보내는 어떤 장소가 아니니까요. 오늘 본문 25절을 보세요.



누가복음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여기 "얘" 라는 말이 나오죠. 아브라함이 "너 이 악한 죄인아" 이렇게 안 부릅니다. 이 말은 "아들아"에 해당되는 "테크난"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아주 측은하고 슬픈 마음이 담겨있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건 하나님이건 아브라함이건 또는 그 누구건 지옥이라는 불로 향하는 이들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지 어떤 경멸의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Exclusion and Embrace'라는 책에 보면 저자가 크로아티아인 인데요 발칸 반도의 폭력 사태가 일어나면서 몇년 동안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보복하고 죽이고 보복하는 폭력의 악순환이 지속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폭력의 악순환이 심판의 하나님을 믿어서 생기는게 아니고 그런 존재를 믿지 않음으로 인해 생겨나더라는 겁니다. 만약 하나님이 정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면 그런 하나님은 예배할 가치가 없습니다. 폭력에 의한 인간의 자력 구제와 그로 인한 더 큰 폭력의 발생을 막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심판자이심을 믿는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비폭력의 원칙은 신적인 심판(divine vengeance)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자기 집이 불타고, 자기 가족들이 죽임을 당하고 성폭력을 당하는걸 지켜본 사람들이 총칼을 들고 가해자들을 죽이려 하는게 자연스러운거죠. 폭력의 순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안 그럴수 있냐는 겁니다. 단순히 폭력으로 해결되는게 뭐가 있어 이러면서 도덕적인 훈계를 늘어 놓는다면 화만 더 나죠. 그러면 어떻게 정의를 구현합니까? 더 큰 폭력의 방지와 정의의 요구를 둘 다 만족시키는 방법이 뭡니까?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신을 믿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궁극적 심판의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 사회의 폭력은 더 증가한다는 거죠. 내가 스스로 정의를 구현해야 하니까. 그래서 심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평화로운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 지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두개는 상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 마지막절을 보세요. 부자가 아브라함한테 자기 형제들한테 기적을 보여주라고 요청을 하죠. 나사로를 다시 보내라는 겁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난다면 이건 기적이죠. 깜짝 놀랄겁니다. 그리고 그 나사로더러 지옥이 있으니까 착하게 살아라 이렇게 말하라고 시키라는거죠. 그런 기적을 통해서 충격요법을 쓰라는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뭐라고 말합니까? 소용 없다. 31절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라고 되어 있죠. 여기 "권함을 받지 않다"라고 하는 단어는 단순한 합리성 이상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단순한 지옥에 대한 두려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지옥가는것을 두려워 한다고 해서 빠져나올 수 있는게 아닙니다. 지옥은 자기 안으로 함몰되는 것, 즉, 자기중심성(self-centeredness)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세상의 문제입니다. 항상 내가 먼저입니다. 사람들한테 지옥간다고 겁을 줘서 착하게 살도록 한다고 해 보세요. 그들이 착하게 사는 이유가 뭡니까? 지옥안가려고 착하게 사는 겁니다. 결국 이기적인 동기인것이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선행을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착하게 사니까 내가 원하는것을 해 주세요. 성공하게 해 주시고 내 이상형 배우자를 주시구요. 하나님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 삼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하는 다른 모든 목적들이 바로 내 진짜 '아이덴티티'죠. 그래서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열심히 착하게 사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지옥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런 외적인 행위로 마음에 가득한 악을 꽉꽉 억누르는 것에 불과한 겁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결코 아니죠.



그러면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바꿉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급진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우리의 믿지 못하고 부인하는 편협한 마음을 바꿉니다. 그리고 새 삶으로, 새 존재로 만들어 냅니다. 그런 사랑을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말하십니다. 부자가 하는 말을 잘 보세요. 누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이 믿을꺼야 그럽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니라고 말하죠. 그리고 모세와 선지자를 언급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란 무엇에 대한 기록입니까?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이유에 대한 기록입니다.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예수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분이 겪은 고통을 모르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예수님만큼 지옥에 대해서 많이 말하는 인물이 없습니다. 왜냐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지옥을 직접 겪으셨거든요. 우리가 들어가야 할 불구덩이에 그분이 들어 가셨습니다. 사도신경에 "He descended into Hell."이라는 문구가 있지요.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셨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죠. 그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 상실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십자가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에서 단절되는 경험을 합니다. 자신이 해체되고 철저히 고립되는 경험을 합니다. 영원토록 우리가 당해야할 그런 고통을 대신 당하신 것이죠. 왜요? 여러분을 사랑하시니까. 예수님의 겪으신 고통. 그건 단순한 육체적, 정서적 고통이 아니라 바로 지옥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람이 사람을 바꿉니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심판에 관한 기록들이 궁극적으로 예수로 수렴되고 그 예수가 그 스스로 심판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게 아니라 세상 심판을 대신 받고 자기의 원수들을 위해 대신 죽으러 오셨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다른 사람들하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출처] 기독교에 대한 반론(2): 지옥: 기독교의 하나님은 진노의 심판자가 아닌가? (Hell: Isn't the God of Christianity an angrey Judge)|작성자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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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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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성도의본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6.07 영혼불멸설과 영원지옥설은 마귀의 교리이며 무당들이 믿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태양이 신이 아닌것을 밝혀낸 시대에 그저 태양을 신으로 섬기는 것과 같이 미련하고 아둔하며 무지몽매한 자들이 영혼불멸설과 영원지옥을 신봉하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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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불멸설과 영원지옥설은 마귀의 교리이며 무당들이 믿는 것입니다 - 정답
    미가엘을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가 마귀의 교리이며 무당입니다

    말씀을 철저히 부인하니 님들은 마귀의 교리를 따르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스테파노스 | 작성시간 19.06.07 밑도 끝도없이 마귀??

    성경의 근거로 게시글이 주장하고있는데??

    누가 마귀인고?

    이 더러운 이단새끼야~~!!!
  • 작성자백마 | 작성시간 19.06.08 “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 작성자백마 | 작성시간 19.06.08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아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새 번역, 유1:7)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벧후 2:6)

    "영원한 불의 형벌" = " 재가 되게 하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 104:29)

    죽음 즉 사망이 무엇인가? 흙에서 지음을 받은 인간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입니다.
  • 작성자백마 | 작성시간 19.06.08 말라기 4장 1절에 보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하였고,

    시편 37편 20절에는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고 하였으며,

    시편 37편 10절에는“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고 하였다.

    영혼은 죽지 않고 몸만 죽는 다는 사상은 성경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은 육체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지옥은 영혼만 가는 장소도 아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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