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열매와 십사만 사천
어릴 때 비사치기 놀이를 했습니다. 손바닥만 한 납작 돌을 땅에 세워 놓고, 4-5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다른 돌을 던져 쓰러뜨리는 놀이입니다. 방법은 그 외에도 깨끔발로 차기, 옆구리에 끼고 가서 맞추어 넘어뜨리기 등 다양합니다. 돌이 잘 안 세워지면 약간 흙이 파지게 해서 세우곤 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돌을 완전히 땅에 묻거나, 그렇게 묻은 돌에서 뭔가 자라 나오기를 기대한 적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나 씨앗을 흙에 심어 본 적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하얀 감자씨를 땅에 묻으면 하얀 감자꽃이 피고, 보라색 감자씨를 심으면 보라색 감자꽃이 폈습니다. 마당가에 분꽃 씨나 봉숭아 씨도 심어 보았습니다. 일단 이런 것들을 심은 후에는 싹이 나기를 고대하게 됩니다. 위 두 사례를 비춰볼 때, 아래 본문의 첫 열매는 죽은 돌멩이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무언가가 우리 안에 심긴 최종 결과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어린양께서 시온산에 서 계시고
그분과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
그들은 … 어린양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그분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며,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 열매로 드려지도록 사람들 가운데서 사 온 이들입니다(계 14:1, 4).
사실 위 첫 열매를 알려면 먼저 신약의 사복음서와 서신서를 통해 우리 안에 무엇이 심겼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심었고, …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 안에 심긴 것은 생명이신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셨습니다(고전 3:6, 요 11:25). 이것은 우리가 거듭났을 때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영 안에 들어오셔서 연합되신 사건이기도 합니다(요 3:6, 고전 6:17). 제가 주님 앞에서 위 첫 열매에 대해 묵상할 때 다음 세 가지가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돌멩이가 아니라 씨를 심어야 함: 여기서의 ‘돌멩이’는 생명이 아닌 모든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입니다. 여기에는 ‘교리 공부’나 (유월절에) 문설주에 바른 ‘피’도 포함됩니다. 이런 것들이 필요하고 또 유익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생명은 아닙니다. 즉 ‘문설주에 피를 바름’과 함께 “그날 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씨가 우리 안에 심어진 것입니다(출 12:8).
저는 이 점을 다음의 체험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 주님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알고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지만, 정작 생명을 얻으려고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라며 성경 연구와 주님 자신을 구분하셨습니다(요 5:39-40).
2) 과거에 구원파 분들과 토론했을 때 ‘죄 사함(칭의) 자체가 거듭남은 아니다’라고 하자 ‘이게 뭐지?’하다가 결국에는 둘의 차이를 인정했습니다.
3) 한 형제님이 교파에 오래 계셨던 한 신실한 자매님에게,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 1:27)라는 말씀을 근거로, “거듭난 사람 안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내주하신다”라고 하자, 그 자매님은 왜 지금까지 이처럼 중요한 진리를 분명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느냐며 탄식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생명이 성숙해야 함: 신약의 서신서들은 한 마디로 생명의 씨가 떨어진 이들이 생명이 성숙하도록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 전도와 주일 성수와 헌금 등의 밖의 봉사가 아니라 먼저 부지런히 주님을 먹고 마심으로 생명이 성숙하고, 그 생명이 밖으로 표현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요 6:57. 히 5:14-6:1, 고전 2:6, 엡 4:13, 빌 3:15).
최대한 오래 살아야 함:.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므로 우리는 육신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최대한 오래 살면서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 주님이 오시기를 고대해야 합니다.
이제 아래는 위 본문에 대한 간략한 해석입니다.
첫 열매(십사만 사천): 사도 바울처럼 죽은 이기는 이들인 사내아이와 달리, 여기의 첫 열매는 영적으로 성숙한 이들이 에녹처럼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의 보좌로 휴거된 이들입니다.
어린양을 따라가는 사람들: 성경은 베드로를 포함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른 여러 사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눅 5:11 등). 그런데 여기서 ‘어린양을 따라간다’는 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제쳐놓고, 주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우리의 것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인자이신 주님께서 아버지와 깊은 연합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를 포함한 삼일 하나님과 깊은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우리에게 주님 자신 외의 모든 것을 십자가로 끝내는 자기 부인을 요구합니다(마 16:24).
적지 않은 이들을 이 길이 너무 좁아서 이 시대에 첫 열매가 되는 과정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모든 이들을 (대환난을 통과시켜서라도) 결국에는 익게 하실 것입니다(계 1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