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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탐구

700년만에 이단에서 풀려난 사람

작성자가로|작성시간26.06.11|조회수30 목록 댓글 0

마이스터에크하르트 그가  이단으로 정죄되어 잊혀진 인물이었으나 그를 죽은자 가운데 불러낸 자가 독일의 헤겔이다. 헤겔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철학의 아버지라 불렀다.
마이스터에크하르트의 제자 타울러는 종교 개혁을 한 마틴루터의 스승이기도 하다.
 
마틴 루터가 역자인 '독일신학'은 필자가 젊었을 때 구입하여 읽어보다가 도저히 이해가 안되어서 덮어버린 책이다.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아퀴나스가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했는데 반해 마이스터에크하르트는 신비주의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 신은 이성으로 증명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이스터에크하르트는 후대에 기라성같은 유명 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특히 하이데거가 두 인물을 바라본 시각을 구조적으로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비판: "존재를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사를 '존재를 망각한 역사'로 보았습니다. 그 정점에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중세 스콜라 철학이 있습니다.

  • 존재-신학(Onto-theologie) 비판: 아퀴나스는 신을 '최고의 존재자(Summum Ens)', 즉 이성으로 증명하고 규정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대상'으로 정의했습니다.
  • 이성의 한계: 하이데거가 보기에 이것은 신(존재)을 인간의 이성이라는 틀 안에 가두고 통제하려는 시도입니다. 신을 '생각의 도구'나 '존재자들의 원인'으로 격하시켜, 진짜 신비로운 '존재 자체'를 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하이데거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대단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하이데거 후기 철학의 핵심 개념인 '초연함(Gelassenheit, 내맡김)'은 실제로 에크하르트의 사상에서 직접 가져온 단어입니다.

  • 인간 중심적 사유의 포기: 에크하르트는 신을 이성으로 규정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인간의 이성과 의지, 심지어 '신에 대한 고정관념'까지 모두 비워내야 한다고(탈자아) 주장했습니다.
  • 존재의 드러남: 하이데거는 이 '비워냄'의 상태에서만 존재(신)가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보았습니다. 신은 논리적 계산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다가오는 '신비' 그 자체라는 점에서 하이데거와 에크하르트는 완벽히 통합니다.

결과적으로 중세 교회는 아퀴나스의 논리를 정통으로 삼고 에크하르트를 이단으로 몰았지만, 하이데거의 눈에는 교회가 '존재의 진리'를 이단으로 만들고 '존재를 망각한 논리'를 정통으로 삼은 거대한 왜곡이었던 셈입니다
 
마이스터데크하르는 어떻게 이단에서 풀려났는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의 삶은 중세 종교계의 가장 높은 정점과 가장 깊은 나락을 모두 경험한 드라마틱한 인생사였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자 수십 개의 수도원을 이끌던 행정가였지만, 말년에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쓸쓸히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그가 이단으로 몰려 침묵 속에 갇혔다가 700년 만에 명예를 회복하기까지의 일대기를 정리해 드립니다. 


1. 엘리트 학자이자 유능한 행정가 (전반기)
에크하르트는 독일 튀링겐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했습니다. 당시 스콜라 철학의 거두였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밑에서 공부하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적 배경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 '마이스터'라는 칭호: 그는 당대 학문의 최고 권위였던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마이스터(Meister)'는 이름이 아니라 '신학 교수(Master of Sacred Theology)'를 뜻하는 최고의 경칭입니다. 
  • 수도회의 지도자: 그는 탁월한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작센 교구의 지방 장관이 되어 47개가 넘는 남녀 수도원을 총괄하고 개혁하는 고위직을 역임했습니다. 

2. 민중을 향한 파격적인 설교와 갈등 (중반기) 
50대에 접어든 에크하르트는 스트라스부르와 쾰른 등지에서 대중 설교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그의 비극이 싹트게 됩니다. 

  •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 설교: 당시 신학은 지배층의 언어인 '라틴어'로만 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에크하르트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민중, 특히 여성 수도자(베긴회 등)들을 위해 독일어로 설교를 전했습니다. 
  • 파격적인 신비주의: 그는 "이성으로 신을 규정하려 하지 말고, 네 마음의 자아를 완전히 비워내라(초연함)"고 가르쳤습니다. 심지어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영혼의 불꽃)은 신의 본질과 하나다"라는 파격적인 경지를 설교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중재 없이도 인간이 신과 직접 연합할 수 있다는 의미로 들렸기에, 교회의 권위를 위협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찍히게 됩니다. 

3. 질투가 낳은 비극, 이단 재판 (말년) 
그의 폭발적인 인기는 시기와 정치적 갈등을 불러왔습니다. 당시 쾰른의 대주교였던 하인리히 2세(프란치스코회 출신)는 도미니코회였던 에크하르트를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1325년, 대주교는 에크하르트를 이단 혐의로 고발합니다. 

  • "나는 오류를 범할 순 있으나 이단은 아니다": 에크하르트는 재판에서 강력하게 자기를 변호했습니다. "생각이 잘못되어 오류를 범할 수는 있지만, 교회를 부정하려는 악한 의지(이단)는 내게 없다"고 항변한 것입니다. []
  • 아비뇽으로의 도보 여행과 죽음: 지역 재판의 불공정함을 느낀 그는 자신의 결백을 교황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60대의 고령의 몸을 이끌고 교황청이 있던 프랑스 아비뇽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판결을 보지 못한 채, 1328년 초 아비뇽 근처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4. 사후의 정죄와 700년의 침묵
그가 죽고 난 바로 다음 해인 1329년 3월 27일, 교황 요한 22세는 교황 칙서(In Agro Dominico)를 발표합니다. 

  • 교황청은 에크하르트의 저작 중 28개 명제를 문제 삼아, 그중 17개는 '이단적'이고 11개는 '이단의 혐의가 짙다'고 공식 선언했습니다. 
  • 비록 에크하르트 본인을 직접 이단자로 지명하여 저주하진 않았지만(그가 죽기 전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겠다고 밝혔기 때문), 그의 사상과 책은 전면 금지되었고 그는 철학사와 신학사에서 수백 년간 지워진 이름이 되었습니다. 

5. 1992년, 700년 만의 복권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르러 에크하르트의 텍스트가 재발굴되었습니다. 그의 사상이 이단이 아니라 기독교의 깊은 영성(부정신학)을 표현한 것이라는 학계의 연구가 쏟아졌습니다. 
결국 에크하르트가 속했던 도미니코 수도회는 가톨릭 교황청에 그의 명예회복을 공식 요청했습니다. 

  • 마침내 1992년,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은 에크하르트에 대한 이단 정죄 판결을 공식적으로 철회하고 그의 복권을 선언했습니다.
  • 가톨릭교회는 "에크하르트는 결코 이단적인 사상을 가지지 않았으며, 그의 명제들은 단지 당시의 엄격한 교리적 언어로 오해받았을 뿐, 오늘날에는 정통 신학 안에서 자유롭게 읽힐 수 있는 훌륭한 신학자"라고 공식 인정했습니다. 

이성이 지배하던 중세에 '신비와 존재'를 먼저 보았던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대가로 고독한 말년을 보냈지만, 결국 700년 뒤에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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