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웨슬리 = 알미니우스주의 = 펠라기우스주의로 등식화 하시는 것 같습니다. 차이를 발견하시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글입니다.
---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와 John Wesley와의 관계 ---
by 이선희 교수 (목원대학교)
1. 문제:
이 연구의 질문은 ‘John Wesley(1703-1791)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한 마디로 간단히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웨슬리는 1738년 그의 회심 체험 후 일 년쯤 지나서 쓴 설교 ‘값없는 은혜’(Free Grace)[1739년 4월]에서는 칼빈주의의 이중예정설을 비판할 때, 칼빈주의의 이중예정설에 대한 Arminius(1560-1609)의 비판적 논증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논증을 사용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인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그는 1741년에 쓴 설교 ‘거의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에서는 당시 영국교회가 네델란드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한 소위 ‘English Arminianism’에 근거한 ‘the Holy-Living- and-Holy-Dying-Tradition’이라 일컬어지는 구원관을 세부적으로 묘사하면서 그 오류의 핵심을 정확히 지적하고, 그 아르미니우스주의적 구원관은 올바른 의미의 이신칭의 교리로써 보완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웨슬리는 적어도 당시 영국교회가 표방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비판자인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는 1778년부터 스스로 편집하여 발행한 anti-Calvinism의 잡지인 ‘Arminian Magazine’에 발표한 ‘The Question "What is an Arminian?" answered by a Lover of Free Grace’라는 글에서는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비교할 때 Arminius의 논증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논증을 사용하면서 자신을 아르미니안이라고 자칭하였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웨슬리는 자신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라는 의식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웨슬리 당시에 아르미니우스주의라고 불리는 사상은 하나의 단일한 형태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서로 다른 형태들로 있었다. (2) 웨슬리는 그 가운데 어떤 형태의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하여는 핵심적으로 동의하였으나, 다른 형태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명백히 그 오류를 지적하고 배격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아르미니우스 자신의 사상의 핵심은 무엇이었고, 웨슬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 사상에 (그가 동의한 부분만큼은) 동의했던 것인가? (2) 영국교회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아르미니우스 자신의 사상과 어떻게 다르고, 웨슬리는 이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어떤 이유에서 배격했던 것인가? (3) 웨슬리는 자신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라고 자칭했는 바, 그의 사상은 아르미니우스 사상의 반복일 뿐인가, 아니면 동일한 부분도 있지만 다른 무엇인가? 만일 후자라면, 웨슬리의 사상은 아르미니우스 자신의 사상과도 동일하지는 않으며, 당시 영국교회의 아르미니우스주의와도 다른, 말하자면 제3의 아르미니우스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의 아르미니우스주의 독특한 특징은 무엇인가?
2. 가설:
이 연구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웨슬리는 칼빈주의의 이중예정설,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공로 개념, 의지의 자유의 제한(즉, 불가항력적 은혜 개념)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의 비판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아르미니우스가 제시한 하나님의 예지 개념, 그리스도의 보편적 속죄공로 개념, 의지의 자유 인정(가항력적 은혜 개념)을 수용하였으나, 특히 인간의 의지의 자유 개념에 대하여는 영국교회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半펠라기우스주의 내지 펠라기우스주의적 오류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하여 지극히 사려 깊은 신학적 장치를 첨가함으로써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결과시켰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 자신의 사상에 있어서도 아직 덜 명료했던 부분들을 충분히 발전시킴으로써 칼빈주의의 운명론 및 反율법주의적 위험을 피하며, 또한 영국교회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공로에 의한 구원’의 위험을 피하고, 개신교 신앙의 근본인 ‘믿음에 의한 구원’의 이치를 보다 더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웨슬리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인간 의지의 자유의 지나친 강조를 통하여 신인협동설적으로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을 왜곡한 영국교회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거부하였고, 아르미니우스 자신의 원래 사상을 복원함과 동시에 神單動說의 운명론적 및 反율법주의적 위험과 神人協同說의 ‘공로에 의한 구원’의 위험, 이 양자를 피하면서 개신교 구원론의 핵심인 ‘믿음에 의한 구원’의 원리를 명백하게 표현하는 쪽으로 보완하였다.
3. 입증:
위의 가설은 다음과 같은 논증으로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1) 아르미니우스와 웨슬리는 칼빈주의의 이중예정설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동일한 논증으로써 비판한다:
(a) 아르미니우스: 그는 칼빈주의의 이중예정설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법령으로써 예정하기를, (그 때에는 아직 창조되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타락하지도 않은 것으로 여기시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의 여하한 의나 죄, 순종이나 불순종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는 마음을 따라서,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보여주기 위하여, 또는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 지혜,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능력을 보여주기 위하여, 일부 개인들은 영생으로, 그 나머지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 James Arminius, The Works of James Arminius, The London Edition, tr. by James Nichols and William Nichols, 3 Vols(Grand Rapids: Baker Books, reprinted 1999), Vol.1, 614. 이 책은 이하 WJA로 표시.
이 예정을 집행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세 가지 수단을 예정하였다: (1)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原義의 상태로 의와 진정한 거룩 안에서 창조”[=웨슬리의 ‘도덕적 형상’ 정의와 동일]. (2) “아담의 타락의 허용, 또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지어서 부패하도록, 또는 불결하게 되도록 명령함(ordination)”. (3) “원의와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 또는 제거. 그리고 죄와 저주 안에 갇히게 함”. ibid.
택자를 위한 예정을 집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수단을 하나님은 예정하였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중재자 및 구원자로 주기로 예정함. (2) [택자의] 마음과 정서와 의지 안에서 외적으로는 말씀으로, 내적으로는 성령으로써 믿음에로 부르시기로 예정함. 효과적인 역사를 통하여 택자는 필연적으로 이 부르심에 동의하며 복종한다. 그리하여 택자는 이 부르심을 믿고 복종하는 것 이외에 달리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로부터 그리스도의 피와 그의 성령을 통한 칭의와 성화가 일어나고, 그리고 이로부터 모든 선행이 나오게 된다. (3) 하나님은 택자들을 믿음과 거룩과 선행의 열심 안에 지켜주는 수단을 예정하였다. 이것이 견인의 은사다. 이 덕분으로 선택되고 믿음을 가진 자들은 전적인 의지를 가지고 죄를 짓거나 또는 믿음과 은혜로부터 전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달리 말해서, 그들이 전적인 의지를 가지고 죄를 짓는다거나 또는 믿음과 은혜로부터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ibid, 615.
“영원한 죽음으로 버려진 자들을 위한 법령의 집행을 위하여 예정된 방법은 ... 누구라도 구원하기에 필요충분한 구원의 은혜를 그들에게는 주지 않음으로써 죄 안에 방임해 두는 것(desertion in sin)이다. 이를 위한 방법 두 가지는 이것이다: (1)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하여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2)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그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도 그리고 그가 주는 유익들에도 참여할 수가 없다.” ibid, 616.
“유기된 자들 가운데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완고해지게 하는 것(obduration)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자주 크게 범함으로써 또는 복음의 은혜를 거부함으로써 완고해진다. 이 방법의 예정을 집행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1) 그들에게 율법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을 주어서 그들의 양심을 조명하는 것, 그리하여 변명할 수 없게 하는 것, (2) 효과적이지 않으며 충분하지 않은 복음의 설교를 그들에게 주어서 그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것이다. 이 복음의 설교는 외적이기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복종하지 않게 하거나, 내적이기는 하지만 단지 마귀에게도 있는 믿음 정도를 갖게 하는 것이다.” ibid.
아르미니우스는 이 이중예정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나는 다음의 이유들 때문에 이 예정설을 거부한다. (1) 이 예정은 기독교의, 구원의, 또는 구원의 확실성의 토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a) 기독교의 유일한 토대는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스도가 구원을 상속할 자들이 될 자들의 구원자요, 머리요, 토대가 되도록 지정하신 그 법령이다. 그러나 [이중]예정은 바로 이 법령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 [이중]예정설은, 믿음을 통하여, 살아 있는 돌들인 우리가 유일한 모퉁이 돌인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쌓아지며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그 머리에 연합된다고 가르치는 교리가 아니다. (b) 이 예정은 구원의 토대가 아니다. 이것은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다. (c) 이 예정은 구원의 확실성의 토대가 아니다. 구원의 확실성의 토대는 ‘믿는 그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것인데, 즉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인데, 이 예정은 이 논증 가운데 ‘나는 믿는다’는 것도, 따라서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ibid, 618-619.
(2) “이 예정설은 그 자체 안에 복음의 전체나 또는 일부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복음은 일부는 ‘회개하라, 그리고 믿으라’라는 명령으로, 그리고 일부는 죄들의 용서를 주고, 은혜의 성령을 주고, 영생을 주겠다는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예정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과도, 그리고 이와 연결된 약속과도 관련이 없다. 이 예정은 다만 오직 예정자이신 하나님에게만 알려져 있는 신비를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ibid, 619-620.
(3) “이 예정설은 그리스도 이후 600년 동안 있었던, 총회든지 지역회의든지 간에, 어느 공의회에 의하여 허락되거나, 법령화되거나, 승인된 적이 없다.” ibid, 620.
(4) “그리스도 탄생 이후 600년 동안 올바른 정통적 견해를 가졌던 교회의 교사들이나 성직자들 가운데 누구도 이 교리를 주장하거나 승인한 바가 없다.” ibid, 621.
(5) “이 예정론은 개혁교회와 개신교회의 이름으로 제네바에서 한 권으로 인쇄되고 출판된 그 신앙고백문들의 상호일치와 일치되지도 않고 통하지도 않는다.” ibid.
(6) 이 예정론은 하나님의 본질에 거슬린다. ibid, 623.
(7) 이 예정론은 인간의 본질에 반대된다. ibid, 625.
(8) 이 예정론은 창조의 행위에 정면으로 반대된다. ibid, 626.
(9) 이 예정론은 영생의 본질에 노골적으로 대적한다. ibid, 628.
(10) 이 예정론은 영원한 죽음의 본질에 대하여도 적대하는 것이다. ibid, 628.
(11) 이 예정론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킨다. ibid, 629.
(12) 이 예정론은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심하게 모독한다. ibid, 630.
(13) 이 예정론은 인간의 구원에 해를 끼친다. ibid, 631.
(14) 이 예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말하는 [구원의] 순서를 뒤바꿔 놓았다. ibid, 632.
(15) 이 예정론은 복음의 전도를 노골적으로 막는 것이다. ibid, 633.
(16) 이 예정론은 거룩한 종교 생활 일반을, 특히 기독교의 거룩한 생활을 완전히 전복시킨다.
(b) 웨슬리는 칼빈주의의 이중예정설을 비판하는 그의 설교 “Free Grace”에서 아르미니우스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논증을 전개하였다: (1) “이 예정이 옳다면, 모든 설교가 필요없을 것이다”(문단번호 10). (2)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의 교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규례[=은혜의 수단들]를 필요없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11). “예컨대 이 교리는 몇 가지 종류의 거룩을 파괴한다. 말하자면, 원수들, 악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 대한 사랑을 파괴한다.”(12). (3) “이 교리는 기독교의 위로와 행복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13). (4) “위로를 주지 못하는 이 교리는 선행을 하려는 우리의 열심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18). (5) “이 교리는 기독교의 계시 전체를 전복시키는 직접적이고도 노골적인 경향성이 있다.”(19). (6) “이 교리는 기독교 계시로 하여금 자가당착에 빠지게 함으로써 그 계시 전체를 전복시키는 경향성이 있다.”(20). (7) “이 교리는 신성모독으로 가득 찬 교리이다. .... 이 교리는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위선자요, 사람들을 속이는 자요, 상식적인 진실성 조차 없는 인간으로 만든다.”(23).
웨슬리의 이중예정설 비판의 논증은 아르미니우스의 그것과 비교하여 Methodism의 특성을 더 보이고 있다. 즉, 웨슬리는 복음의 설교와 은혜의 수단 사용과 선행을 하려는 열심을 강조하는 것이 구원을 가르치는 맥락에서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중예정설은 이것을 방해한다고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이중예정설이 기독교 계시 전체를 뒤집어 엎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모독적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아르미니우스와 같다.
(2) 이중예정설에 대한 대안 제시에 있어서 아르미니우스와 웨슬리는 근본에 있어서 동일하다.
(a) 아르미니우스:
“이제 나는 이 주제에 대하여 내 자신의 의견을 말하겠다. 이 의견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나는 본다. (1) 죄인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첫 번째의 절대적인 법령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 자신의 죽음으로써 죄를 멸하며, 상실된 구원을 그의 순종으로써 획득하며, 그 자신의 덕으로써 이 구원을 전달하여 주는 중재자, 구속자, 구원자, 제사장, 왕으로 지정하기로 정한 그 법령이다. (2) 두 번째 하나님의 정확하고 절대적인 법령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총애 안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러한 회개하며 믿는 자들의 구원을 효과적으로 하여 그 종착에 이르도록 견인되게 하겠다고 정하고, 그러나 회개치 않으며 믿지 않는 모든 자들은 죄 가운데와 진노 밑에 남겨두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낯선 자들로 저주하겠다고 정한 법령이다. (3) 세 번째 하나님의 법령은 회개와 믿음을 위하여 필수적인 수단들을 충분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으로 관리하기로 정한, 그리하여 그 수단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엄격에 어울리도록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서 규정하고,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가 그 수단들을 지정하고 실행에 옮기기로 정한 법령이다. (4) 이 법령들의 뒤를 잇는 네 번째 법령은 개개인들을 일부는 구원하기로, 그리고 나머지는 저주하기로 정한 법령이다. 이 법령은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다. 이 예지로써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preventing grace)를 통하여 믿을, 그리고 하나님의 후속하는 은혜를 통하여 견인할[=견고하게 인내하며 끝까지 갈], 즉, 회심(conversion)과 믿음(faith)을 위하여 적절하고 적합한 수단들[=은혜의 수단들]의 (위에 서술한 그러한) 관리를 따라서 믿고 견인할 사람들을 영원으로부터 알고 계셨다. 또한 하나님은 믿지 않고 견인하지 않을 자들을 이 예지로써 알고 있었다.” ibid, 653f.
(b) 웨슬리:
웨슬리는 그의 설교 “예정에 관하여”(On the Predestination)에서 이중예정설에 대한 그의 대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하나님은 이 세상의 시작시점부터 만물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만국에서 믿을 그들을 미리 알고 계셨다. ... 그러나 그 사람이 믿는다든지 또는 믿지 않는다든지 하는 하나님의 지식의 대상물 그 자체는 하나님이 그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에 의하여 원인이 제공되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믿느냐 또는 믿지 않느냐에 있어서 마치도 하나님이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자유롭다(문단번호 5). 만약 인간이 자유롭지 않다면, 그는 상을 받을 수도 없으며, 그에게 처벌을 줄 수도 없다(6). (2)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법령으로 정하시기를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믿는 자들은 모두 그의 아들의 형상을 닮게 될 것이다, 즉 모든 내적 죄와 외적 죄로부터 건짐을 받아서 모든 내적 거룩과 외적 거룩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정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불변하는, 되돌릴 수 없는, 저항할 수 없는 그 법령 때문이다. 즉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막 16:16]라는 법령 때문이다(7). (3) 이렇게 예정하신 그들을 하나님은 또한 부르셨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다. 미리 아신 자들을 외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부르신다. 외적으로 부르심은 은혜의 말씀으로 부르심이고, 내적으로 부리심은 그 말씀을 성령으로써 가슴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떤 이들은 ‘효과적 부르심’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는 것이다. 이는 칭의를 의미한다(8). (4) 부르신 그들을 의롭게 하셨다. 이는 그들을 올바르게 만드셨다는 뜻이다. 그들을 성화하신 것이다(9). (5) 의롭게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이것이 마지막 단계다. 그들을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상속물의 참여자가 되기에 합당하게 만드신 후에, 그들에게 ... 그들을 위하여 예비되었던 왕국을 주신다. 이것이 영원부터 그가 놓으신 계획에 따라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 즉 모든 곳과 모든 때에 있어서의 진정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순서이다(10).”
이중예정설에 근거한 칼빈주의의 구원론에 대한 대안으로서 아르미니우스와 웨슬리가 제시한 구원론의 중심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1) 믿는 자는 구원하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으로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법령[=영원하고, 불변하고, 절대적인 예정], (2) 이 원리에 따라서 하나님은 믿을 자 개개인을 영생에 이르도록 구원하기로 구체적으로 예정하고, 믿지 않을 자 개개인을 영원한 멸망으로 보내기로 구체적으로 예정한다. 그리고 이 예정은 불변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집행된다. (3) 하나님의 이 예정은 믿을 자들의 믿는 사실, 믿지 않을 자들의 믿지 않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 예지는 그들의 믿음, 또는 믿지 않음에 원인제공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믿음을, 또는 믿지 않음을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3) 웨슬리 자신의 특징적인 아르미니우스주의(아르미니우스의 개념 가운데 특히 의지의 자유 개념, 은혜의 수단 사용 개념, 믿음 개념을 개신교의 기본 정신에 일치하게 명료화하다)
여기서 우리는 아르미니우스와 웨슬리에게 있어서 인간의 의지의 자유 개념과 믿음 개념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만일 의지의 자유가 믿음을 발생시키고, 이 믿음이 영생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이는 펠라기우스주의나 세미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써 구원의 조건인 믿음을 성취하고 그로써 구원을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확히 펠라기우스주의이다[=calling upon God for salvation with his own merits]. 사실 웨슬리 당시 영국교회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인간이 의지의 자유로써 믿음을 선택하고, 의지로써 믿음을 발생시키며(=동의[assent]라는 의미의 믿음), 이 믿음에 일치하여 거룩한 삶을 살면(Holy-Living), 임종 시에 칭의를 받고 구원으로(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다(Holy-Dying)고 주장했기 때문에, 웨슬리는 그의 회심 바로 전에 이런 형태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오류를 발견했고, 회심 후에 이 구원론을 그의 설교 ‘거의 그리스도인’에서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 구원론을 올바른 의미의 이신칭의론으로써 보완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그의 설교 ‘거의 그리스도인’ 참조).
그렇다면 웨슬리가 영국교회의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보완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제시한 올바른 의미의 이신칭의론에 의한다면, 인간은 구원을 위해서는 의지의 자유로써 믿음을 선택해야 하고 또한 할 수 있되, 자신의 의지로써 스스로 믿음을 생산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믿음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그 믿음을 선택한 사람 안에 생산하는 것이다. 이 명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웨슬리가 준비한 개념들이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인간은 그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즉 원죄 하에 있든지, 또는 원죄에서 벗어나서 성화 과정 안에 있든지 간에, 항상 의지의 자유(liberty of the soul=freedom of choice=a power of self-determination)를 갖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인 spirit/soul의 비물질적 본질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 의지의 자유는 자유의지(free-will)와는 다른 것이다. 자유의지는 선을 선택하지 못하고 악만을 선택하는 상태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벗어난 의지를 지칭하는 말이다. 자유의지는 원죄 하의 인간에게는 없다. 선행은혜에 의하여 희미하게나마 일시적으로만 회복된다: “인간이 태어난 그대로의 상태에서 자유의지(natural free-will)를 가졌다는 것은, 인류의 현재 상태에서는,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단지 다음을 주장할 뿐이다: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개개의 인간을 조명하는’ 그 초자연적 빛이 함께 하는 동안만, 모든 인간의 경우에 예외없이, 초자연적으로 회복되는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가 있다(I assert only, that there is a measure of free-will supernaturally restored to every man, together with that supernatural light which 'enlightens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Predestination Camly considered’, 문단번호 45). 그리고 중생 이후에 성화은혜에 순종하는 동안만 자유의지는 회복된다.
(2) 인간이 의지의 자유로써 믿음을 선택하면, 하나님이 손수 그 사람 안에 믿음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이 때, 만일 인간의 믿음 선택이 원인으로서 작용하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믿음을 발생시키는 것이라면, 이것도 역시 Semi-Pelagianism과 동일한 것이다. 즉, 인간도 일하고 하나님도 같이 일하면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human-divine-coperation이라고 규정하여 진정한 의미의 Semi-Pelagianism과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에도 믿음을 선택한 인간의 의지의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회복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Semi-Pelagianism적 명제들은 모두 divine-human-coperation이다.
웨슬리는 이런 문제를 파악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을 선택한 사람 안에 믿음을 발생시키는 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핵심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믿음을 발생시키는 유일한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의지의 자유로써 믿음을 선택한 사람은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라. 그리하면 내가 은혜를 주리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담은 은혜의 수단을 두려움과 떨림으로써 사용한다(그의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관하여’ 참조). 은혜의 수단의 사용은 하나님의 명령의 수행이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 안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power도 merit도 없다: “그들은[=은혜의 수단을 power나 merit로 오용하는 자들, 예컨대 로마-가톨릭 또는 영국국교회의 Holy-Living-Tradition]은 은혜의 수단 안에 모종의 능력(power)이 있어서 그 능력으로 조만간에 분명히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든지, 아니면 은혜의 수단의 사용에는 일종의 공로(merit)가 있어서 이 공로가 분명히 하나님을 움직여서 그들에게 거룩을 주시거나 또는 거룩없이도 그들을 용납하시도록 할 것이라고 그들은 안일하게 꿈을 꾸고 있다”(그의 설교 ‘은혜의 수단, II,4).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라는 명령에 복종하여 행하며 믿음을 달라고 간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기뻐하시는[=즉, 외부의 여하한 것에 영향을 받지 않은 하나님 자신의 단독적인 결정에 따라서] 순간에 그의 성령으로써 그 사람의 영혼 안에 믿음을 발생시킨다. 그래서 믿음은 값없이 주어진 은혜에 의하여 그 사람 안에 발생한 하나님 자신의 행동이다. 믿음의 발생은 divine-human-coperation이 아니다. 그래서 웨슬리의 구원론은 신인협동설이 아니다. 웨슬리는 이런 개념으로써 영국교회의 신인협동설적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극복한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에 의하면, 은혜의 수단 사용은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이되(하나님의 명령이므로, Ordinances of God), 조건적으로,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 필수적이다. 그에 비하여, 믿음은 구원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직접적으로, 바로 앞에서 필수적이다.
(3) 웨슬리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믿음을 발생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믿음 정의는 다음과 같다: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명료하게 깨닫게 하심으로써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다”(Faith in general is defined by the Apostle ... a divine evidence and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 of God and the things of God; 그의 설교 ‘성경적 구원의 길’, II,1). 이 믿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의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의 여하한 것의 결과가 아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명료한 깨달음이기 때문에,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칭의하며 동시에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칭의는 relative change이지만, 동시에 일어나는 중생은 real change이기 때문에, 본인이 믿음을 받는 순간에 실제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 없다면, 믿음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겠다는 의지의 결단을 의미하는 믿음으로써 칭의를 받는다는 소위 영접기도 개념은 웨슬리의 믿음 개념, 칭의, 중생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웨슬리는 믿음의 성격을 이렇게 보았기 때문에, 이신칭의 뿐만 아니라, 이신성화를 주장한 것이다: “믿음이 칭의의 조건이요 유일한 조건인 것과 정확히 마찬가지로, 믿음이 성화의 조건이요 유일한 조건이다”(위의 설교, III,3).
그러므로 웨슬리의 구원론의 구조는 신단동설도 아니고 신인협동설도 아니다. 신단동설이 아닌 이유는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갖고 믿음을 선택하든지 믿지 않음을 선택하든지 양자 간에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으로 작용하면서 예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믿음을 선택하면, 위에 말한 방식으로 오직 자신의 자비를 근거로 하여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이 믿지 않음을 선택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불변의 절대적 법령에[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리라]에 근거하여 그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요소가 그 자신의 구원 또는 멸망의 결정에 있어서 한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지의 자유로써 믿음을 선택하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행위에 power와 merit를 전혀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웨슬리는 신인협동설을 거부한 것이다.
또한 믿고 영생으로 갈 자들과 믿지 않고 영원한 멸망으로 갈 자들은 이미 영원 전에 결정되어 있다. 이 결정은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예지는 믿음 또는 믿지 않음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받게 되는 방식은, 위에 말한 대로, 오직 다음과 같다: 의지의 자유로써 믿음을 선택, 그러면 은혜의 수단을 두려움과 떨림으로써 사용,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단독적인 결정에 따라서 그 사람 안에 믿음을 발생시킴. 이런 방식으로 그 사람이 영생으로 갈 사람인 것으로 하나님은 예지하셨고, 그래서 그를 믿고 구원받을 자로 영원 전에 선택한 것이다. 이 예정은 하나님이 예지하신대로 불변하며 절대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웨슬리는 은혜의 수단 사용을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으로 이해하고 강조함으로써 아르미니우스 사상의 소위 도덕적 차원을 복원함과 동시에 은혜의 수단 사용에서 모든 power와 merit를 제거함으로써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개신교의 중심 원리를 충실히 지킬 수가 있었다.
구원을 위하여 회개와 믿음을 강조하고 이것의 구체적인 구현을 위하여 은혜의 수단을 강조한 점에 있어서 아르미니우스와 웨슬리는 동일하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은혜의 수단에서 모든 power와 merit를 제거한다는 원칙을 명료하게 밝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르미니우슨은 믿음을 하나님 자신의 행동으로 명백히 말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이후에 나오는 다양한 아르미니우스주의들은 은혜의 수단 사용에 특히 merit를 부여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명백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믿음조차를 인간의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오해하게 되며, 따라서 믿음도 일종의 인간의 행동으로 왜곡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들이 등장했던 것이다(예컨대, 웨슬리 자신도 회심 전에 깊이 빠져있었던 영국교회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이로써 이 연구의 가설이 입증된 것으로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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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이선희 교수님의 글입니다. 웨슬리 전공자이신 이선희 교수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혹 웨슬리를 잘 모르는 분들은 오해할 가능성이 있는 부분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교수님의 글에서 사람이 믿기로 선택하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허락하신다는 내용에 대한 부분입니다. 제가 밝히고 싶은 것은, 이 글을 통한 이선희 교수님의 취지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인간 측면에서도 그 은혜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의지적 결단과 함께 주어진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지, 구원의 주도권 (initiative) 이 믿기로 선택한 인간에게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모든 사람에게 불가항력적이고 보편적으로 주시는 선행은총 (prevenient grace) 과, 교회의 사역 및 은총의 수단을 사용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 (convincing grace) 사이를 구분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선행은총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기초로 하여, 성령의 보편적 사역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선악의 개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식, 제한된 의지적 선택 능력의 회복을 가져오는 은총이지만, 웨슬리는 선행은총을 구원으로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즉, 구원은 반드시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웨슬리는 이 과정에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 (convincing grace) 는 반드시 교회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는 과정, 혹은 개인 차원에서 본다면 개인이 은총의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과정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웨슬리의 강조점은, 죄를 깨닫게 하는 은혜가 성령께서 율법의 의미를 계시하심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의 성령론, 율법관과도 일치하고, 또 웨슬리가 ‘The Case of Reason Impartially Considered’ (공평하게 숙고된 이성의 역할, 존 웨슬리 설교전집, 설교 87번) 라는 설교에서 인간의 이성은 믿음을 만들어낼 수 없고, 소망을 만들어낼 수 없고, 사랑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강조한 사실과도 일치합니다. 구원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은혜도 믿음도 그 열매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지만, 단지 그것이, 마치 인간의 인격성이 말살된 것처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동의하고 선택하는 과정 없이 모든 것이 불가항력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선희 교수님의 글을 혹시 인간이 믿기로 결정하면 믿음이 주어진다는 식으로 받아들여 웨슬리가 구원의 주도권을 인간의 결정에 둔 것으로 오해하지 않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잠시 부연하였습니다.
- 카페 '그예사랑' 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