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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탐구

[금주의 설교(10편)] / 그리스도인답게 살자 (1)

작성자우림과둠밈|작성시간11.08.27|조회수263 목록 댓글 0

 

 

[금주의 설교(10편)]

 

 

/ 그리스도인답게 살자 (1)

 

 

(고전 16:13-14)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쓰는 편지를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세 가지의 권면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 권면을 살펴봄으로써 은혜를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깨어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밤과 같이 어두운 시대입니다. 마치 우는 사자가 그 먹이를 바라보고 있듯이 마귀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도전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어찌하든지 이 세상의 교훈과 풍조를 좇아 안일하게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살도록 합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신자는 그러한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인데 여기서는 특별히 영적 각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대 속에서 깨어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 매일의 순간들을 감사하면서, 주님을 의지하며 경건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굳게 서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로 사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처럼 위험한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생각에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이 바로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돌이켜 사는 생활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생활입니다. 그 나라의 삶의 최대 강령은 “사랑함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구했고 그를 본받아 우리가 나타내 보이는 사랑보다 더 큰 믿음의 역사는 없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희생도 감수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이것이 우리 신앙 생활의 모토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건하면서도 그러나 믿음으로 인해 더욱 용감하게 인생을 사는 삶을 말합니다. 세상을 이긴 주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어두움의 세력들을 이기고 강건하게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깨어있고 사랑을 실천함으로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세상을 이긴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히 어두움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 약한 자를 돕는 약함의 은혜 (2)

 

 

(살전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호주 시드니의 알렌 워커 목사는 어느 날 깊은 밤에 로이 브라운이라는 젊은이로부터 전화를 받습니다. 빚을 지고 깊은 절망에 빠져 앞날이 암담한 나머지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며 전화를 한 것입니다. 워커 목사는 브라운이 절망에서 헤어나 새 삶의 길을 찾도록 예배 참여를 권유하는 등 어떻게 하든지 도움을 주려고 30분간이나 정성껏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고아로 자란 그는 끝내 킹스 거리의 가스가 가득 찬 방에서 자살했습니다. 워커 목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거대한 도시 군중 속에 있으면서도 고독하게 사는 이들을 어떻게 도와 줄 수 있을까?’ 그래서 시작된 것이 생명의 전화입니다.

 

우리 사회에 자살 문제가 심각합니다. 2010년 자살자가 1만5413명이라니 군대 사단 병력이 해마다 하나씩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혹자는 똑똑하게 살고 열심히 사는 것은 배웠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성장한 세대의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삶의 정체성, 즉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삶의 의미를 깨닫도록 돕는 것이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만약 자살 준비를 다해 놓고 곧 죽으려는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면 여러분은 무슨 말로 권면하시겠습니까? 두 가지 질문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는 “왜 죽으려고 하십니까?”입니다. 죽으려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실망했는지, 어디에서 화가 났는지를 물으며 시간을 끄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지금까진 왜 살았습니까?” “자식들은 어떻게 하고요?”입니다. 그런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질문함으로써 자살 생각의 동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합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초대교회는 약한 자들의 교회입니다. 바울은 교인들에게 약한 자를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고 합니다. 누가 약한 자를 붙들어 줄 수 있을까요? 약한 자에게 도움을 줄 수는 사람은 약한 사람입니다. 마음 상한 자가 마음 상한 자를, 눈물 흘리는 자가 눈물 흘리는 자를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약함을 은혜로 여겼습니다(고후 11:30).

 

지난 폭우로 서울 북아현동에 이재민이 생겼습니다. 한 사람이 매몰되어 죽었는데 지체장애인이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장애인 시설에 있던 사람인가 알아보았더니 명부에 없었습니다. ‘아하, 정말 어려운 사람은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54세인 그는 결혼도 못한 채 86세 된 노모의 돌봄으로 살았습니다.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쇠약해져 더 돌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웃에 살던 80세 된 권사님이 자기 집에 허름한 방 하나를 만들어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하, 약한 자를 붙들어 주는 것은 강한 자가 아니로구나.’

 

자신을 강한 자로 생각하면 인생을 스스로 꺾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래도 약함이 은혜인 것은 약한 자를 붙들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자살 사건에는 평균 6명의 가족 혹은 친구들이 고통을 느낀다고 합니다. ‘생명사랑 밤길걷기’는 인생의 밤길을 걷는 이들과 함께 걸으며 생명을 보듬는 자리입니다. 오는 26일 오후 7시 시청 앞 광장에 모입시다. 함께 걸읍시다. 생명을 위해!

 

조경열 목사 (아현감리교회)

 

 

/ 하나님이 쓰시는 종 (3)

 

 

(삼상 17:45-49)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들어가면서 : 본문은 사단의 세력을 대표하는 골리앗 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다윗의 싸움입니다. 이것은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싸움으로서 통쾌한 한판승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엔 힘도 지략도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물매 돌 하나로도 하나님 쓰시는 도구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될수 있는지 본문을 통해 잠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상황을 극복하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절대 기준은 없다, 라고 말들 합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각기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시대는 특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자기가 편한 시간에 맞추어 1부, 2부, 3부로 나누어 드리지 않습니까? 물론 장소가 좁아서 그런다고는 하지만 현재의 예배 문화가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맡긴다면 하나님을 내 삶의 결정권자로 최우선 순위를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를 계속해서 하나님과 성령님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들어 하나님은 우리가 싫어하는 일들을 강요하는 매우 엄격한 분이며, 늘 우리의 잘못만 지적하여 책망하시는 분으로 사단은 하나님을 매도해 갑니다.

 

결국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게 하며,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해결하려고 움켜지게 만들고 모든 문제들을 내 욕심에 이끌려 행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기도할 때도 교묘하게 우리를 조종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뜻에 맞추어 기도하게 합니다. 쉽게 표현해서 우리아들이 서울대학에 원서를 넣는데 꼭 합격시켜주세요. 사업을 확장했는데 꼭 성공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게 합니다. 즉 우리가 정하고 바라는 기도 제목으로 가득 차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갈 여지가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니 그대로 다 되게 해 주세요 라고 고집스럽게 기도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자기의 어려운 상황들만 쉽게 빗겨 가기만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 들은 절대 기준 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 절대 기준이란 우리가 처한 상황보다 하나님이 더 위대하고 강하신 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 속에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모든 어려움들을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이 우리 성도들의 기준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믿음을 구원의 통로요 천국 가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어 전 가족을 구원하였고 갈 바를 알지 못하나 믿음으로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난 아브라함은 이방인 최초의 히브리인이 되었고, 모세는 믿음으로 공주의 아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였고,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숨겨준 기생 라합은 가족과 함께 구원받았으며, 사사들과 여러 왕들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히11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전쟁임을 보여줍니다. 만약 준비된 전쟁이라면 군량미를 비축하고 엄격한 군사훈련과 규율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였으며 이들에게 전쟁은 새로운 돌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 베들레헴 에브랏 작은 동네에 이세의 아들 8형제가 살았는데 장성한아들3형제는 전장에 나가 사울 왕을 쫓았고 말째인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그 아비는 다윗에게 전쟁에 지처 있을 형들에게 줄 식량을 주어서 길을 떠나게 합니다. 다윗이 떠나는 여행은 참으로 위험한 여행임을 보여줍니다. 혹 그 전쟁터에서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무려 40일 동안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대적만 했습니다. 고대 전쟁이 그러했듯 자신들이 믿는 신을 앞세워 나옵니다. 골리앗은 자기의 신과 자신의 힘과 무기를 가지고 아침저녁으로 나와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께 도전을 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처한 환경이 너무나도 무서워 벌벌 떨면서 도망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이나 고난이 닥치면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이 어려움들은 반듯이 극복해야할 신앙인 것 입니다. 다윗은 과거 양을 치면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악한 짐승과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약4:7-8보면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 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피하거나 도망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두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을 성결케 할 때 모든 어려운 상황들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입니다.

 

2. 신앙적 의지를 포기하지 말라

 

당시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에베스담밈에 진 쳤고 블레셋은 그 반대편에 진을 치고 서로 대립할 그 40일이 지날 때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은 감히 감당 못할 일을 다윗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다윗역시 골리앗의 시건방지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태도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비장한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반대자가 등장합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친인척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어느 때든지 반대자들이 나타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는 그의 맏형 엘리압이고 다른 하나는 사울 왕입니다.

 

엘리압은 다윗을 꾸짖어 그의 마음을 낙심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게 합니다. 삼상17:28보면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라고 호되게 야단을 칩니다. 성경 느4;3에도 보면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비웃음과 조롱을 하면서 낙심시켜 성벽을 재건하지 못하게 합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허락을 받고 성벽을 재건중임에도 불구하고 방해자들에게 무참한 조롱과 핍박을 받습니다. 다윗 역시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심부름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형들의 시기심과 노여움으로 괜한 핀잔을 주어서 물러가게 합니다. 사울왕은 어떻습니까? 네가 가서 저 불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고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라 하며 부정적으로 말을 하여 용기를 꺾어버립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과거, 들에서 양을 칠 때 발생한 어려운 상황들을 이야기하며 능히 감당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삼상17:34-36에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하고 담대히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성도라면 주위의 온갖 피박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결코 자신의 신앙적 의지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서머나교회 감독이던 폴리갑(AD80-165)은 86세‘아우텔리우스 황제’때 순교하며 말하길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나를 한번이라도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하신 주를 모독할 수가 있겠소 하자 총독은 그를 다시 회유하기 위해 말하길 지금 사나운 짐승들을 준비해 뒀는데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겠다고 협박하자 폴리갑은 또다시 말하길 그 짐승들을 부르시오 우리는 선을 버리고 악으로 돌이켜서는 안 되고 오히려 악에서 돌이켜 덕을 행하는 것이 선한일이요 라고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화형에 처해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목숨이 위태로울 지라도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신앙적 의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라

 

하나님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다윗이 선포했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골리앗은 철저히 자신의 힘과 무기를 의지하며 나왔지만 다윗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갑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셨고, 둘째 너의 목을 베어 온 땅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고, 셋째 구원이 창과 칼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께 있음을 만 천하에 보이겠다. 라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며 나아갔던 것입니다.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보면 다윗은 시대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앞서 있었으며 작은 일에도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말하고, 다윗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은사를 개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확고한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시39:7보면“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고백했으며 시71:1에“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라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다윗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한 사람이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순수한 신앙을 보시고 그를 쓰시고자 선택하셨고 사울 왕 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영적 리더들이 다윗처럼 영향력 있는 리더십을 갖추지 못하는 것은 신실한 믿음과 정직함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데서 비롯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사울왕은 자기의 생명의 은인 임에도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심에 눈이 멀어 평생 다윗의 뒤만 쫗다가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죄악들을 통하여 깊이 통감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순수한 신앙을 지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가면서 : 하나님이 쓰시는 종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자기 신앙의 믿음을 지키며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이 모든 것들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하나만 가지고 그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승리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전쟁터 앞에 있는 다윗만 하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여 그 어떤 상황이라도 해쳐 나아갑시다.

 

(출 17:11-13)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모든 전쟁에서의 승리의 근원은 인간의 무기나 지혜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신본주의 적 삶만이 승리하는 길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연합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면 못 감당할일이 없는 것 입니다. 제아무리 골리앗과 같은 문제들이 있을 지라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앙적 의지를 포기하지 아니하며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시선을 주께 고정시키고 나아간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담대히 복음을 전할 때 자신과 무너진 신앙공동체를 다시 세우게되는 승리의 역사가 이루어지 게될 것입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 멘-

 

청주 아름다운 교회 심광보 목사

신앙상담: 010-8753-5472

 

 

/ 팔 복 (11.8.24 수요예배) (4)

 

(마 5:1-12)

 

 

본문의 말씀은 역사 이래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하게 여겨지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붙여진 그 이름도 다양합니다. ‘산상수훈’, ‘팔복’, ‘천국 대 헌장’, ‘왕의 선언’, ‘말씀 중의 말씀’등으로 불려져 오고 있습니다.

 

1. 본문은 복에 대한 8가지 말씀입니다.

 

(3절) ‘복이 있나니...“ (4,5,6,7,8,9,10)

 

이 복은 단순한 외적이고 물리적인 복만이 아니 이를 포함한 보다 더 깊은 의미의 복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마카리오스)은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자기 속의 비결, 환경과 독립적이며 빼앗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2. 8복을 위한 8가지 제안입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프로코스)는 복이 있나니

 

이는 물질이 빈곤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기 주권을 하나님께 이양시키고 자신의 주권을 포기된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을 높은 가치에 두며 물질의 영향에서 초월합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좌우 되지 않습니다. 이런 신자는 빼앗을 수 없는 천국을 받습니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격심한 애통을 말합니다. 어려운 삶을 하나님 앞에서 슬퍼함도 포함됩니다. 이웃의 고난에 함께 아파함도 포함됩니다. 자신 속의 어둠과 죄를 발견하고서 ‘어찌할고’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함을 말합니다. 이런 신자에게의 복은 위로입니다. 세상에서 받을 수 없는 평안,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위로입니다.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이리 저리 끌리는 ‘굴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용과 성숙, 정제됨과 교만에 제거된 겸손, 배움의 필요성을 느껴 잘 경청함과 온화함의 사람을 말합니다.‘모세는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더라’(민12:3)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돌을 든 성난 군중 앞에서 모세는 땅에 엎드립니다. 이런 신자는 복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세상에서는 폭악한 사람이 땅을 정복할 것 같으나 온유한 사람이 다스립니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

 

고대사회에서는 서민이 고기를 먹기란 매우 힘들었습니다. 생수를 맘껏 먹기도 힘들었습니다. 고기의 공급로와 수도 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농경사회에서는 육류와 생수가 절대적으로 요구되었으며 그들은 매우 주리고 목말라했었습니다. 이런 주림과 목말라함처럼 완전한 의를 갈망하고 갈급해한다면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요즘에 쓰이는 말로 ‘공감하다’라는 용어가 비슷할 것입니다. 원 뜻은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 입장이 되어 봄’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알아 느끼고 측은히 여기고 사랑을 베품입니다. 이런 신자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이 그를 긍흉히 여겨주시고 타인의 긍휼도 받게 될 것입니다.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세탁하다’와 ‘키질하여 골라냄’, ‘ 정예요원’,‘섞이지 않은 순수’를 말합니다. 신자가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잘 세탁되고 정제되며, 구별되고 혼합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흠정역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복이 있나니’로 번역합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보낸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선을 위해 도모하는 신자는 ‘저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사람)’이라는 놀라운 칭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크리스천으로서 의를 안고 살아가노라면 박해가 뒤따릅니다. 사회적인 기회로부터 때론 제외되며, 음주의 회식자리가 불편합니다. 세상의 언어와 행동, 문화와 충돌합니다. 불신 가족의 불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은 참된 신자에게는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이며, 좁은 길이며, 천국길이며, 영혼과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길에 서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홍천온누리교회 이인용목사

 

 

/ 길갈에 선 열두 돌 (5)

 

(수 4:1-9)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넌 후 아주 특별한 명령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지파마다 한 사람씩 열두 명을 선택해 요단강으로 다시 들어가 돌 열두 개를 가져와 길갈에 기념비를 세우게 합니다.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3절) 기념비로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억하며 증언토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7절).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인식을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서 조상들로 하여금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게 하셨는가에 대해 상징적으로 교육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유월절에 가족들과 함께 텐트에 머물면서 애굽과 광야에서 고난당하던 아픔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이런 역사인식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수천년이 지났음에도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나라를 재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역사인식이 없으면 개인이든 국가든 항상 눈앞의 이익만 붙잡으려는 근시안적 사고에 젖을 위험이 커집니다. 총체적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삶의 자세가 국가를 바로 세울 수 있으며, 이러한 교회가 다음 세대에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신 일들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열두 돌을 강에서 가져와 길갈에 세울 뿐 아니라 여호수아는 강바닥에도 열두 돌을 세우도록 합니다. 강바닥에 묻혀 물에 쓸려갈 것임에도 기념비를 세우라고 한 것은 그 의미 때문입니다. 9절에서 열두 돌을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세우라고 명령하십니다. 언약궤는 죄로 인해 어린양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언약궤가 섰던 곳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돌을 세우게 합니다. 로마서는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롬 6:2). 세례는 물에 잠기는 예식이며 성도가 옛 삶에 대하여 죽었음을 상징합니다. 성도는 요단강에서 잠김으로 어린양이 피 흘려 죽으신 사건과 함께 죽음을 경험하며 자아와 육적인 정욕도 못 박혀 죽게 됩니다. 옛 삶은 영원히 묻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옛 삶은 장사 지낸 바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듯이 새 사람은 새 삶을 살게 될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열두 돌이 길갈에 세워졌는데, 길갈은 ‘수치가 물러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수 5:9). 어린양의 죽으심과 함께 옛 삶은 매장되고, 부활의 권세로 모든 죄악의 수치는 물러가 새 역사가 길갈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고전 15:2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맺혀질 생명의 열매가 있음을 약속한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과 소망을 가진 자로서 살게 하시려는 은혜의 약속을 받았습니다(롬 6:4). 저주가 물러간 자리가 바로 길갈입니다. 길갈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역사가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새롭게 써졌듯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자리에서 성도의 삶은 새롭게 세워지고 이어질 것입니다.

 

송태근 서울 강남교회 목사

 

 

/ 저기 평화가 온다 (6)

 

 

(사 11:5-9) “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모두가 살기 어렵다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었습니다. 평화가 사라지고 정의가 무너졌다고 사방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주전 8세기 이스라엘은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우성 속에서 전혀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평화가 오고 있으며 이제 평화의 새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평화의 새 세상이 열리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에게서 무슨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평화를 꿈꾸고 새로운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과 평화의 상상력을 가져야 합니다. 평화가 깨지고 분단이 깊다고 한탄만 해선 안 됩니다. 대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대안을 상상해야 합니다.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도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9절) 이게 무슨 말입니까? 평화는 힘의 논리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평화가 오기도 하고 갈등이 고착되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아는 지식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보복과 살육이 아니라 화해와 용서,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아는 지식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우리는 광복 66년이 지나도록 아직 분단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 평화에 목마르고 속히 비극적인 역사가 끝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단지 정치·군사·경제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참된 평화와 통일은 주님을 아는 지식, 서로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는 과정을 요구합니다.

 

주님은 허물과 모순, 죄로 얼룩진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용서받았으니 서로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가 거저 받았으니 우리 또한 거저 주는 인격을 지니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움이 아닙니다. 미움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새로운 역사는 없습니다. 새로운 역사는 미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그 미음을 넘어설 때 열립니다.

 

여기저기서 아우성 소리가 들립니다. 남북한 분단문제, 젊은이들의 실업문제, 등록금문제, 전셋값 폭등 등 모두가 참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계는 점차 불안정해 가고 희망의 등불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희망을 노래해야 합니다. 분노의 함성도 정당하고 탄식과 눈물도 이유가 있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현실이 어두워도 저기 평화가 온다고, 우리 스스로 평화의 상상력을 지닌 존재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그날은 올 수 있다고, 또 그날을 만들어 갈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고 이사야는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이고 평화입니다. 내가 화해의 일꾼이며 주님을 아는 지식을 온 땅에 널리 전해야 할 바로 그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평화를 가지고 오시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진우 목사 (서울제일교회)

 

 

/ 안식으로서의 ‘쉼’ (7)

 

 

(창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은 인간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두 가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일과 쉼입니다. 이 두 가지의 조화와 균형 속에서 인간은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현대인의 쉼은 진정한 쉼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정하신 ‘안식’으로서의 쉼을 지켜야 합니다.

 

첫째, 휴식보다는 안식을 얻어야 합니다. 현대인에게 휴식은 또 하나의 수고로운 ‘일’입니다. 노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인간의 휴식 때문에 창조 세계가 병들어갑니다. 사람들이 자연을 마구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본주의 쉼의 문화를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따라 인식하는 성경적 쉼의 문화로 바꾸어야 합니다.

 

창세기 2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3)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멈추고 쉬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근심, 걱정, 염려도 멈추어야 합니다. 쉼과 멈춤은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더 큰 역사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창조 섭리입니다. 우리 모두 창조 섭리에 따라 멈춤과 쉼이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둘째, 소유가 아닌 나눔으로서의 쉼을 보내야 합니다. 현대인의 쉼은 소유지향적인 쉼을 갖고 있습니다. 자연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고, 거리를 내 휴지통인양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나만 즐거우면 그만인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자연과 다른 사람들은 어떻든지 간에 자기만 잘 쉬면 그뿐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우리의 쉼에는 안식일과 안식년, 희년의 정신이 배어 나와야 합니다.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의 정신은 ‘나눔’과 ‘회복’입니다. 안식년과 희년에는 사람과 동물과 자연이 참된 쉼과 해방을 얻습니다.

 

성경은 “제 칠년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출 23:11)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나만 즐거운 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먼저, 너 먼저, 그리고 나의 신앙이 쉼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나도, 너도, 자연도, 하나님도 즐거운 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됩니다.

 

셋째, 쉼은 떠남이 아니라 만남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쉬기 위해 무조건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아니고 쉼을 통해 만남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일의 멈춤과 쉼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역하시다가 쉬실 때는 어김없이 하나님과 만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마 14:23)라고 증거 합니다. 휴가나 주말 때에 그냥 놀기만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또한 가족의 만남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일이 바빠서 찾아뵙지 못한 부모, 친척, 형제들을 만나야 합니다. 주5일 근무로 인한 토요 휴무도 안식과 효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쉼을 통해 우리의 삶에 만남과 사랑이 넘쳐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회복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휴식보다는 안식을 얻어야 합니다. 소유가 아닌 나눔으로서의 쉼을 보내야 합니다. 쉼은 떠남이 아니라 만남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강정식 목사 (새성남교회)

 

 

/ 한센병 환자의 믿음 (8)

 

 

(눅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한 마을에 들르게 되셨습니다. 열 명의 한센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명의 한센병 환자만 예수님께 다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3단계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도덕적인 믿음입니다.

 

한센병은 저주받은 부정한 병입니다. 이 때문에 한센병 환자들은 남에게 피해를 줄까봐 조심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도 가까이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있는 힘껏 큰 소리로 예수님께 긍휼히 여겨 달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선생님이여!”는 최대의 존경과 절대적인 복종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절대 복종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의 행위는 아름답습니다. 도덕성이 결여된 믿음은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도덕적인 믿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둘째,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순종하는 곳에 주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곳에 주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것은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이 인정받았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한센병 환자들의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저들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셋째,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감사해하는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가족의 품으로 달려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예수님께 돌아왔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그가 감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그를 저주받은 자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부정하다고 멀리 했습니다. 그는 육신의 고통으로 시달리며 정신적 갈등으로 괴로워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 절망 가운데서 치료해주셨습니다. 그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독수리같이 인생을 새롭게 해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이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은혜에 감사하는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를 통해 영혼의 병을 치유 받고 영생의 구원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가 더 큰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다는 걸 본문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임석영 목사(서울 고덕중앙교회)

 

 

/ 예수만이 자랑인 사람들 (9)

 

 

(고전 1:30-31)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 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과 인간됨됨이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바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자랑하기 마련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관과 세계관이 요약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는 ‘지식’을 자랑하고 재벌은 ‘돈’을 자랑하며, 미스 코리아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이뿐입니까. 운동선수들은 ‘금메달’을 자랑하며 오스카상이나 노벨상 같은 유명한 상을 수상한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상들이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만이 아니라도 모든 사람들은 몸 자랑, 집안 자랑, 자식 자랑 등 나름대로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혹여 당장 자랑거리가 없는 사람이라도 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도 합니다. 자랑거리란 곧 그 사람이 추구하는 인생의 목적이자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들은 진정한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최고의 자랑거리는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됐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됐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자 감격이고, 놀라운 일입니다. 또한 최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진정으로 자랑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의 자랑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자랑거리에 비하면 ‘배설물’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진 영적인 문제의 대부분은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 최고의 자랑거리인 이유는 스스로 행한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놀라운 복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소유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보물창고와 같습니다. 성도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있어 전부나 다름없습니다. 이를 두고 바울은 “예수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된다”(30절)고 말합니다.

 

지혜가 필요합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입니다. 죄 사함과 온전한 순종함이 필요합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움입니다.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합니까? 그리스도는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영광과 온전한 구원이 필요합니까?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함입니다.

 

이는 이렇게 적용해도 될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필요합니까?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목적과 의미입니다. 삶의 평안과 안식과 기쁨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평안이며, 안식이며, 기쁨입니다. 삶의 능력과 힘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힘이며 능력입니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 비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신성과 지혜 및 지식의 충만함이 있으며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 또한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찾고, 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구원과 영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백금산 목사(예수가족교회)

 

 

/ 귀신에 붙잡힌 자를 구원하자 (10)

 

(막 5:1-20)

 

 

멀쩡하던 사람에게 더러운 귀신이 들리니 무덤에 거하면서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자가 되었다. 그

리고 자신의 몸을 자신이 상하는 자가 되었다. 이러한 귀신으로부터 구원을 해야 한다.어느 것을 구원해야 하는가?

 

1. 귀신에게 붙잡힌 인간을 구원하자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함이 라고 했다. 또 근신하라 깨어있으라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 여 저를 대적하라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사는 자가 있다. 이를 구원하자.

 

2. 귀신에게 붙잡힌 사회를 구원하자

 

귀신에 붙잡힌 자들이 모여 서로 욕하고 미워하고 핍박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있다. 그리할 때 사회는 점차로 병들어져 가고 있다. 물질 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 권세주의자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러면서 모든 죄악이 어린 학생들로부터 만 연되고 있다. 그리고 귀신들린 자가 고침을 받는 것보다 돼지 떼를 더 사랑한다.

 

3. 귀신에게 붙잡힌 가정을 구원하자

 

가정에서도 형제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경쟁의식 이기심 개인주의 때문에 귀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곳이 많다. 그래서 결손 가정이 생기고 문제가 생겨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이는 돈이 나 지식이나 철학이 해결해 주지 못한다. 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때 가능하다. 우리도 건전한 가정이 되자.

 

4. 귀신에게 붙잡힌 나를 구원하자

 

우리는 믿음 기도 순종 봉사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고 했다. 그런데 말씀으로 온순하고 온유하고 겸손해야 할 자들이 강퍅해 지고 불순종의 자녀, 불신앙의 자녀가 되었다. 세상적인 힘만을 자랑하고 있다. 말씀 도덕 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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