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주제의 글은 필자에게 그림의 떡이다. 필자가 충주에 영성학교를 시작하기 전에, 지난 10여 년 동안 아내와 단둘이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알면 필자의 말에 이해가 가실 것이다. 원룸을 빌려 예배를 드렸으니 그 흔한 반주기조차 필요 없었다. 그런데 기도코칭을 받는 어떤 분이 이런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분은 성가대 지휘자여서 교회음악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다. 그런데 찬양 예배시간이거나 금요 철야예배 혹은 특정한 기도회에는 드럼이나 키보드, 전자기타 등의 악기를 동원하여 열광적으로 분위기를 띄우고 순서에 정해진 누군가가 마이크를 잡고 걸쭉한 목소리로 기도를 선창하면 악기소리와 기도소리가 스피커에서 커다랗게 증폭되어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 때문에 정작 기도의 집중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이분은 그래도 중견교회의 입장에서 말해주셨고, 교인수가 몇 명 안 되는 작은 교회도 반주기를 크게 틀어놓고 목회자가 마이크로 커다란 소음 속에서 기도를 하는 분위기에서 교인들이 기도하기 때문에 자신도 기도집중이 안 되어 곤혹스럽다며 또 다른 어떤 분도 이런 문제를 제기하셨다.
그런데 언제부터, 교회에 각종 악기를 동원하여 마치 콘서트장에 온 것처럼 기도하는 분위기가 된 것일까? 그런 분위기로 기도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이며 효율적인가? 필자가 청년시절에는 복음성가가 그리 많이 보급되지 않았고, 그 당시의 복음성가는 찬송가와 별다르지 않았다. 사실 찬송가의 작곡이나 작사의 연대를 살펴보면 이삼백년 된 곡이 수두룩하다. 그 찬송가들은 대부분 단순하여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복음성가들이 빠르고 기교적인 세상음악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교회 안에 그러한 곡을 반주할 수 있도록 드럼이나 전자기타, 키보드가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그 노래의 가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예수님의 보혈 등 성경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곡의 분위기가 경건하며 깊이 몰입되는 기도를 도와주고 있는, 내면을 울리는 음악들인가? 그리고 왜 기도시간이 되면 마이크로 선창하여 모두들 스피커에서 나오는 엄청난 고성을 듣는 열광적인 분위기에서 기도해야 하나? 이렇게 기도하다가 쿵쾅거리는 음악 속에서 열광적으로 찬양을 반복하면서 오랫동안 기도하다보면 뜨거운 분위기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격앙되고 큰소리로 기도를 외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두어 시간 하다보면 옷이 땀에 젖고 성대도 결절되어 쉰 목소리가 나오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격정적인 기도회를 마치면 기도다운 기도를 한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마치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처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필자가 이런 기도회가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기도회를 통해서 성령의 열매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런 기도회에서 하는 기도들은 대부분 자신이 얻고 싶어 하는 목록을 외치는 것뿐이다. 그것도 큰소리로 외치면 들어주실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기도회에서 하는 설교들은 대개 ‘구하면 주실 것이다.’ ‘혹은 믿는 대로 된다.’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다.’ 등의 성경말씀을 동원하기 일쑤이다. 그런 설교를 듣고 열광적인 분위기에서 기도하면 꼭 들어주실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들어주신다고 했지,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동반해야 들어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런 기도행위는 장난감을 사달라고 부모를 윽박지르고 생떼를 쓰는 어린아이를 연상케 한다. 어쨌든 그런 기도회에 참석했다고 믿음이 성장하며 성품이 변화되고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 있는 기도를 하게 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교회에서 이렇게 각종 악기를 동원하여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기도회를 갖는 이유는 정작 기도의 열매가 없어서가 아닌가? 온갖 예배행위와 각종 기도회, 교육프로그램을 돌려도 자신의 교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초조해하며 외형적으로 무언가 있는 교회처럼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그런 것을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교회에서 이런 행사를 하니까 안 하면 교인들이 빠져 나갈 것 같은 불안감이 들기에 무작정 따라하는 것은 아닐까? 분명한 것은 그러한 기도회는 성경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외형이 중요하지 않다. 골방에서 조용히 기도하든, 소리를 지르며 통성으로 기도하든, 기도원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든 상관없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의 상태를 보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도회는 성령에 몰입되어 깊고 친밀하게 교제를 나누는 기도는 분명 아니다.
예전에 성령께서 영음으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록음악에 빠진 자들은 모두 사탄의 자식이다.’ ‘악기를 동원한 기도회는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지옥이다.’라고 말이다. 록음악이 음란하고 비도덕적이어서 사탄의 음악이라는 말은 예전부터 들어왔던 터이지만, 악기를 동원한 기도회가 왜 주리고 목마른 영혼에게 지옥이라고 하신 것은 충격적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유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영혼이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하나님을 만나 성령의 충만을 경험해야 배가 부르며 해갈이 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깊이 성령에 몰입되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쿵쾅거리는 악기를 동원한 기도회는 경건한 마음으로 영혼과 마음과 뜻을 다해 기도하는 기도가 아니다. 그래서 아무런 성령의 열매가 없는 이유이다. 이런 행태는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의 습관을 가르치지 않는 작금의 우리네 교회와 맞닿아 있다. 성경적인 기도를 가르치지 않고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에 대해 무지하기에, 외형적인 기도회의 허상에 빠져드는 것이며, 이런 기도회의 배후에는 악한 영의 계략이 숨어있다. 악한 영들은 교회에 아주 많이 있으며, 교회 지도자들의 머리에 앉아 그들의 생각을 속이고 지배하고 있다고 성령께서 말씀해 주셨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래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집요한 공격을 하는 것이다. 6,70년대의 우리네 교회는 방방곡곡 기도소리가 넘쳐났다. 전쟁의 피해로 삶에 희망이 사라진 우리네 부모들은 교회로, 교회로 몰려들었다. 가난하고 힘겨운 삶에 유일한 의망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그러나 과거에 열정적으로 기도했던 젊은 부모들이 이제 늙어 노인이 되었지만 예전의 열정적인 기도를 잊어버린 지 오래이다. 더 이상 가난하지도 않고 자식들도 성장해서 떠나버린 지금은 기도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네 교회에서 기도회를 하자고 하면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 그래서 불안하고 초조해진 교회지도자들은 세상의 문화를 교회 안에 들여오고 세상 음악과 흡사한 빠르고 격정적인 교회음악을 만들어 쿵쾅거리는 악기를 동원하여 각종 예배와 기도회에 사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어 실망하고 좌절하며 삶의 힘과 영적인 기쁨이 없는 교인들이 교회를 빠져나갈까봐, 형식적인 예배의식으로 천국을 약속하고 말의 성찬뿐인 설교와 악기를 동원하여 눈과 귀를 만족하는 기도회로 대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도회의 행태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을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악한 영의 계략이다.
성령을 만나는 기도는 쉽지 않다.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성령이 내주하려면 통상 두어 달 이상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습관을 작정하고 시작하여도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이 생겨나곤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말인가? 성경의 위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놀라운 능력으로 새로운 세상을 살다 이 땅을 떠나 천국에 들어갔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영적인 능력을 소망한다. 그러나 정작 그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 쿵쾅거리는 악기를 동원하는 콘서트장 같은 기도회에서 소리를 지르며 기도함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지 몰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능력과 형통한 삶 그리고 천국의 자격은 꿈도 꾸지 말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쉽고 편안한 신앙행위로 세상적인 복과 성공, 그리고 천국의 자격을 얻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런 일이 절대로 없다. 그래서 이 칼럼의 마무리는 성령께서 해주신 말로 대신하고 싶다. ‘세상에는 공짜가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공짜가 없다.’고 말이다
출처 : 다음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쉰목사
* 예전에 올린 칼럼이지만, 생각이 나서 다시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