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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삶

시편 109편 저주의시

작성자보혈의피|작성시간16.05.21|조회수368 목록 댓글 2

죄를 지은 이후, 사람과 하나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절대로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노출하기를 극도로 꺼려합니다.
맨 모습과 정신으로 나서지 못합니다. 그것이 죄악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내 안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인간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어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 모습, 자기의 본능을 우리는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가릴 때가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가리는데 익숙합니다.

시편 109편은 시편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편입니다. 이른바 "저주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다른 시편의 내용이나 표현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이것을 지었을리가 없다고도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글이 왜 시편에, 성경에 올라와 있는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의 복음과는 확연히 다른 반 복음적인 내용을 담고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적인 기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즉 성가대와 함께 했던 회중노래로서 지어진 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함께 불러왔던 노래라는 것입니다. 실재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새 사도로 세울 때에 이 본문을 인용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다윗의 시를 보면 그의 인격에 의심을 품게 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지금 다윗이 이 누군가로부터 심히 괴로움을 당하고 있고, 그런 괴로움 중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차마 다윗의 기도라고는 믿기 힘든 저질적인 내용이고 저주의 내용으로 가득찬 내용입니다. 입에 담기 힘들정도로 악담을 펼쳐나갑니다.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시 109:6~8)

여기에 나온 다윗의 대적자가 다윗에게 어떤 말로 핍박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어 나온 다윗의 말도 그에게 모질게 토해냅니다.

7절에 보면 “그의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8절 “ 그 년수를 단축시키시고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고..
9절 가면 점점 노골적입니다.
“그 자녀는 고아가 되게 하시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는 유리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어찌보면 욕설과 저주가 가득한 장면을 우리는 다름아닌 다윗의 시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개인적인 내용을 하나님께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성가대와 함께 부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인도자가 앞에서 부르면 회중들이 따라 불렀읍니다. 따라 부르면서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 하겠읍니까.

서두에서 우리는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들 앞에 감추는 데에 익숙하다고 하였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감추지않고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그대로 밝혀서 나타내기를 주저하지 않읍니다.

우리가 알기에 다윗은 신중한 사람이고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주에 가까운 시편을 다윗을 통해 노래하게 하였읍니다.

물론 다윗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셨는지, 응답하셨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도 들으셨다는 것이고 다윗은 이런 기도 한 것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향해서 공동체적으로 이런 기도를 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꾸만 자기 포장을 잘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
하나님이 싫어하실꺼야.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그 사람이 비록 이러이러 하지만 난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것 같은 착각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의본성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어떤 기도라도 들어 주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고매하게 기도한다고 해도 우리의 본질이 바뀌진 않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교정하심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모습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일 것입니다.

자신을 감추고 가식적으로 기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항상 의로운척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 앞에서 위선자라는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미워하는 데 겉으로 사랑하는 척 마음을 속일 필요가 없읍니다.
모범답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직접 저주하면 그사람과의 관계는 끝장 납니다. 후폭풍이 심합니다. 뒷 감당하기 힘듭니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짤릴 수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아뢰면 그 분이 우리를 만지십니다.
분명한 것은 기도하는 나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만지시고 위로하신 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전 시편 109편을 보면 불편합니다.
이 기도가 불편한 것은 어쩌면 내 안에 여전히 숨기고 꾸미는 외식이 남아 있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척 하는 위선이 남아 있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다윗은 인간관계에서 부끄러움이 없던 자였습니다. 사울과의 관계에서도, 압살롬과의 관계에서도, 그를 저주했던 시므이와의 관계에서도 다윗은 언제나 인격적인 승자였습니다.
그가 원래부터 완전한 인격자이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시무이나 요압에대해 다윗이 죽기전에 솔로몬에게 전한 유언을 보면 뒤끝이 있읍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솔직하였읍니다.
그는 그 모든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가져 가서 하나님의 체휼하심을 경험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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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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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온누리~ | 작성시간 16.05.21 시편 109편에 대해서 잘 몰랐었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작성자ourdailybread | 작성시간 16.05.21 다윗의 기도는 다윗 자신의 원수들에 대해 말한 것이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재림 때의 악인들에 대한 저주를 말한 것입니다.
    시편은 전체적으로 대환란과 천년왕국에 대한 많은 예언들을 그런 식으로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무후천년, 역사적 전천년으로 신학의 단추를 꿴 사람들은 시편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윗같은 성군이 왜 그런 기도를 했는가? 그들의 신학 체계로는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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