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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삶

적그리스도는 유대인 가운데서 등장한다/ 손성무 목사

작성자정지윤|작성시간26.06.13|조회수50 목록 댓글 1

세상에는 진짜가 있고, 진짜가 있기 때문에 가짜가 있다.

아무도 가치 없는 것을 위조하지 않는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정교하게 위조하는 사람은 없다. 위조지폐가 존재하는 이유는 진짜 지폐가 있기 때문이다. 가짜 명품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진짜 명품이 있기 때문이다. 가짜 메시아가 등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참 메시아가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역사의 마지막에 한 악한 존재가 등장할 것을 여러 차례 말한다. 다니엘서는 그를 말하고, 복음서는 그를 암시하며, 바울서신은 그를 설명하고, 요한계시록은 그를 마지막 무대 위에 세운다. 성경은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적그리스도. 헬라어로는 안티크리스토스다.

 

‘안티’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대적한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대신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보통 첫 번째 뜻에 익숙하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존재다. 맞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적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것이 더 무섭다.

 

그는 완전히 낯선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누구나 보자마자 “저 사람은 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모습으로만 오지 않는다. 그는 어느 정도 그리스도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온다. 메시아처럼 보이고, 구원자처럼 보이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사람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안심할 것이다. 마치 오래 기다린 사람이 마침내 도착한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참 메시아가 아니다. 그는 가짜다.

 

자기 땅에 오신 참 메시아

요한복음 1장 11절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 한 문장은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슬픔이 흐른다.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셨다. 자기 백성에게 오셨다. 자기 집에 돌아온 주인처럼 오셨다. 그러나 그 집의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식탁은 차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은 낯선 사람처럼 취급받으셨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된 분으로 오셨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 선지자들이 기다리던 분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다. 그분의 족보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으로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런데 자기 백성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비극이 아니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더 큰 미혹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참 메시아를 거절한 자들이, 언젠가 가짜 메시아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어두운 예고다.

 

다른 이름으로 오는 자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4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참 이상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접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할 것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다른 자”는 누구인가?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오는 자다. 참 메시아가 거절당한 자리에 들어오는 가짜 메시아다. 자기 이름으로 오는 자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지 않고, 자기 이름으로 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취한다.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자기 높임의 길을 간다.

 

성경은 “다른”이라는 말을 여러 방식으로 사용한다. 헬라어에는 헤테로스가 있고 알로스가 있다. 헤테로스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말한다. 완전히 다른 종류다. 반면 알로스는 같은 종류 안에서 다른 것을 말한다. 모양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유사한 범주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른 자”는 전혀 무관한 어떤 이방의 괴물이 아니다. 그는 메시아적 기대 안으로 들어오는 존재다. 그리스도와 비슷한 옷을 입고, 그리스도와 비슷한 말투를 흉내 내며, 그리스도와 비슷한 자리에 앉으려는 존재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참 메시아가 유대인으로 오셨다면,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가짜 메시아는 어디에서 등장할 것인가?

 

조상들의 하나님을 버리는 왕

다니엘서 11장은 마지막 때 등장할 악한 왕을 말한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행한다. 스스로를 높인다. 모든 신보다 자신을 크게 여긴다. 신들의 신을 대적하는 비상한 말을 한다. 그리고 다니엘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가 모든 것보다 스스로 크다 하고 그의 조상들의 신들과 여자들이 흠모하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어떤 신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표현이 있다.

“그의 조상들의 신들”이다.

이 말은 가볍지 않다.

히브리어 표현으로 보면, 단순히 이방의 여러 신들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읽힐 수 있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로 엘로헤이, 곧 엘로힘과 같은 계열의 단어를 사용한다.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만일 이 인물이 이방인이라면 “그의 조상들의 신들”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인 다신교적 신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문맥과 마지막 때의 메시아적 흉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표현은 유대인의 조상들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악한 왕은 유대인의 혈통과 연결된 인물로 볼 수 있다.

그 왕은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을 돌아보지 않는다.

 

또한 “여자들이 흠모하는 것”도 돌아보지 않는다. 이 표현은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아의 약속과 연결해서 볼 수 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참 메시아에 대한 오래된 기다림, 그 갈망마저도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는다. 어떤 신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는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의 폭군으로만 등장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조상들의 하나님을 알 만한 배경을 가진 자, 메시아적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자, 유대인의 기대를 이용할 수 있는 자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단 지파라는 어두운 그림자

유대인들은 자신의 지파에 대한 의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바울도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이 베냐민 지파라고 말한다. 혈통과 지파는 단순한 행정적 분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체성이고 기억이며 언약의 자리였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가 유대인 가운데서 등장한다면, 그는 어떤 지파에서 나올 것인가?

 

오래전부터 교회가 주목해 온 지파가 있다. 단 지파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은 죽기 전에 아들들을 불러 예언한다. 그중 단에 대한 예언은 유난히 어둡고 의미심장하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다. 바깥에서 온 적이 아니다. 내부에 있다. 그런데 그가 그의 백성을 심판한다. 내부에서 백성을 흔드는 자처럼 묘사된다.

 

더구나 단은 뱀이다.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다. 성경에서 뱀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창세기 3장의 뱀은 인간을 미혹했다. 요한계시록은 옛 뱀을 마귀요 사탄이라고 부른다. 뱀은 미혹과 배반과 사탄적 지혜의 상징이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한다”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은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발꿈치를 무는 것. 뒤에서 넘어뜨리는 것. 배반과 기습의 이미지가 거기 있다.

 

야곱은 이 예언을 말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마치 어두운 밤길을 걷다가 멀리서 무엇인가를 본 사람처럼, 야곱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단 지파와 관련된 어떤 깊은 어둠을 본 것처럼 보인다.

 

우상숭배의 통로가 된 단

사사기 18장을 보면 단 지파의 어두운 역사가 나타난다. 단 지파 사람들은 라이스로 올라가 그곳을 점령하고 정착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미가의 집에 있던 우상과 제사장을 가져간다. 그리고 자신들의 땅에 우상숭배의 체계를 세운다.

 

이후 북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단은 우상숭배의 중요한 중심지가 된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단에 세운다. 단은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퍼져 나가는 문이 된다.

 

단은 이스라엘 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통로가 아니라 우상숭배로 이끄는 통로가 되었다. 내부에 있으면서 백성을 어둠으로 이끄는 지파가 된 것이다.

이 모습은 마지막 때 이스라엘 내부에서 등장해 백성을 미혹할 적그리스도의 그림자처럼 보인다.

 

요한계시록의 침묵

요한계시록 7장에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인침을 받은 14만 4천 명이 나온다. 각 지파에서 1만 2천 명씩 인침을 받는다. 그런데 그 명단을 읽다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단 지파가 빠져 있다.

대신 요셉과 므낫세가 들어간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유업을 대표하는 지파로 볼 수 있고, 므낫세가 따로 언급된다. 그러나 단은 없다.

 

성경은 왜 단이 빠졌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침묵한다. 그러나 성경의 침묵이 때로는 말보다 더 크게 들릴 때가 있다. 많은 초기 교회 해석자들은 이 침묵을 주목했다. 단 지파가 마지막 때 인침 받은 지파 명단에서 빠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들은 창세기 49장의 단 예언, 사사기 18장의 우상숭배, 요한계시록 7장의 단 지파 누락을 함께 보았다.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단 지파에서 나올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것을 절대적인 교리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매우 오래된 해석이며,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성경적 단서이다.

 

초기 교회가 보았던 것

이 가르침은 초기 교회 안에서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었다. 2세기의 변증가 이레니우스는 적그리스도와 단 지파의 관련성을 언급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히폴리투스도 이 견해를 발전시켰다. 히폴리투스는 초기 교회에서 적그리스도 연구와 관련해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후 암브로시우스와 같은 교부들의 흐름 속에서도 이 주제는 계속 언급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가르침은 점점 희미해졌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4세기에 기독교는 거대한 전환을 맞이한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었고, 380년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으며, 391년에는 이방 종교가 금지되었다. 박해받던 교회가 제국의 중심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로마 제국과 결합한 기독교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훗날 로마 가톨릭 체제로 발전했다.

 

문제는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이 로마 제국과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요한계시록 13장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말하고,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은 바벨론 음녀와 세상 권세의 결탁을 말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개혁자들은 이러한 본문을 로마 가톨릭, 특히 교황 체제와 연결해서 해석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과 결합한 교회는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자신들이 서 있는 체제 자체가 계시록의 심판 구조와 연결될 수 있다는 해석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점차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으로만 읽히기 시작했고, 적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해석도 약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적그리스도가 유대인, 특히 단 지파에서 나올 수 있다는 초기 교회의 해석도 점점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체계를 로마 가톨릭, 특히 교황 제도와 연결해서 보았다. 이후 근대와 현대의 성경 교사들 가운데서도 적그리스도가 유대인 가운데서 등장할 것이라고 본 이들이 있었다. 아더 핑크와 찰스 라이리 같은 이들이 그러한 흐름 속에 있다.

 

세부적인 해석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큰 흐름은 분명하다. 적그리스도는 단순히 교회 밖에서, 기독교와 전혀 무관한 방식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참 메시아를 흉내 낸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려 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들의 기대와 가까운 자리에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위조품은 진짜를 가리기 위해 존재한다

적그리스도는 위조품이다. 가짜 메시아다.

그러나 위조품이 있다는 것은 진짜가 있다는 뜻이다. 가짜가 존재한다는 것은 진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사탄은 가치 없는 것을 위조하지 않는다. 참 메시아가 계시기 때문에 가짜 메시아를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시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그 생명을 가리려 한다.

 

가짜의 목적은 단순하다. 진짜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대신 다른 이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 대신 영광을, 회개 대신 번영을, 순종 대신 자기실현을, 하나님 나라 대신 인간 왕국을 붙들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마지막 때의 핵심은 미혹이다. 미혹은 대개 노골적인 거짓말로 오지 않는다. 미혹은 진실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온다. 익숙한 단어를 사용한다. 성경적인 표현을 빌린다. 메시아적 기대를 이용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속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짜를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가짜를 분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짜를 끝없이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를 깊이 아는 것이다.

 

진짜를 만져 본 사람은 가짜를 안다

위조지폐 감별사들은 가짜 지폐만 연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진짜 지폐를 반복해서 본다. 만진다. 빛에 비추어 본다. 질감을 익힌다. 냄새와 무게와 촉감을 기억한다. 진짜에 익숙해진 사람은 가짜를 만났을 때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안다.

 

영적인 분별도 그렇다.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려면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가짜 메시아를 분별하려면 참 메시아를 깊이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음성에 익숙해야 한다. 예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길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예수님께 오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무서운 말씀이다. 성경을 읽지만 주님을 모를 수 있다. 교리를 알고, 예언을 알고, 마지막 때의 시나리오를 알고, 적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정작 예수께 가까이 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위험하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이다. 율법도 그리스도를 향하고, 선지서도 그리스도를 향하고, 시편도 그리스도를 향하고, 복음서와 서신서와 요한계시록도 그리스도를 향한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연구도 결국 그리스도를 더 선명하게 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가짜를 폭로하는 목적은 진짜를 사랑하기 위해서다.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

히브리서 12장 2절은 말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결국 우리의 시선은 예수께 머물러야 한다.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마지막 때의 미혹을 분별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우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참 메시아이시다.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셨지만, 동시에 온 세상의 구원자로 오셨다. 자기 백성에게 거절당하셨지만,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적그리스도는 자기 이름으로 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

적그리스도는 자기를 높인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셨다.

적그리스도는 십자가 없는 영광을 약속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다.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기에게 속하게 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가짜 메시아는 지배한다.

참 메시아는 구원한다.

가짜 메시아는 사람을 자기 왕국의 재료로 삼는다.

참 메시아는 자기 생명을 주어 사람을 살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언을 연구할 때도 예수께 더 가까이 가야 한다. 마지막 때를 말할 때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참 메시아이신 예수께 더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가짜 메시아의 시대에 참 메시아를 붙들라

마지막 때에는 많은 미혹이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려 등장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구원자처럼 포장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대신하려 할 것이다.

 

그는 유대인들이 영접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메시아적 기대를 이용하며, 참 메시아 대신 자신을 세우려 할 것이다. 다니엘서의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창세기 49장의 단 지파 예언, 요한계시록 7장에서 단 지파가 빠진 점, 초기 교회의 해석 전통은 모두 이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적그리스도 연구의 끝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그 끝은 예수 그리스도다. 가짜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진짜를 더 분명히 보기 위해서다. 어둠을 말하는 이유는 빛을 붙들기 위해서다. 미혹을 경고하는 이유는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다.

 

가짜가 있다는 것은 진짜가 있다는 뜻이다.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은 참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뜻이다.

미혹이 강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진리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야 한다. 성경을 단지 교리적으로만 읽지 말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예수님의 성품과 길과 십자가와 부활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야 가짜가 등장할 때 흔들리지 않는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가짜 메시아의 시대에 참 메시아를 붙들자.

적그리스도의 미혹이 강해질수록 그리스도께 더 깊이 뿌리내리자.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께 나아가자.

그분만이 참 메시아이시다.

그분만이 생명이시다.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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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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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백마 | 작성시간 26.06.13 [단 7:19-20,23-25]
    19 이에 내가 넷째 짐승에 관하여 확실히 알고자 하였으니 곧 그것은 모든 짐승과 달라서 심히 무섭더라 그 이는 쇠요 그 발톱은 놋이니 먹고 부서뜨리고 나머지는 발로 밟았으며
    20 또 그것의 머리에는 열 뿔이 있고 그 외에 또 다른 뿔이 나오매 세 뿔이 그 앞에서 빠졌으며 그 뿔에는 눈도 있고 큰 말을 하는 입도 있고 그 모양이 그의 동류보다 커 보이더라
    23 모신 자가 이처럼 이르되 넷째 짐승은 곧 땅의 넷째 나라인데 이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라서 온 천하를 삼키고 밟아 부서뜨릴 것이며
    24 그 열 뿔은 그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25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넷째 나라의 신원을 알면 작은 뿔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알면 이렇게 쉬운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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