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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계 동정

[스크랩] 왜 견인의 교리를 반드시 바르게 알아야만 할까요? V (변승우 목사님의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 중에서)

작성자광화문|작성시간26.06.05|조회수6 목록 댓글 0

  ■ 왜 견인의 교리를 반드시 바르게 알아야만 할까요?

 

  (2) 장구한 견인의 교리 논쟁을 끝낼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

 

  2) '상'의 의미

 

  달음질이 비유면 당연히 함께 사용된 '상'도 비유입니다. '상'은 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상'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린도전서 9:25)

 

  여기서 '그들'은 이스트미아 경기(Isthmian Games)의 참가선수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과 신자들입니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상'은 '썩을 승리자의 관'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것과 달리 '우리'의 목표는 '썩지 않는 면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요?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바울은 우리의 목표를 '썩지 않는 면류관'이라고 쓰지 않고 '썩지 아니할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상의 의미를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썩지 아니할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무책임하게 추정하지 말고 성경을 통해 그 의미를 추적해봅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8)

 

  여기서 '썩어질 것'의 반대가 영생임에 주목하십시오. 따라서 '썩지 아니할 것'은 영생을 뜻합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로마서 2:7)

 

  이 구절은 '썩지 아니함'이 영생을 표현한 것이고 영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디모데후서 1:10)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 이 둘을 하나로 줄이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영생이지요! 이처럼 '썩지 아니할 것'은 영생을 뜻합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린도전서 15:52)

 

  이 구절에서는 '썩지 아니할 것'을 부활에 참여하는 것, 즉 궁극적인 구원에 참여하는 것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역시 영생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디모데전서 1:17)

 

  이 구절에서 바울은 '영원하신 왕'이신 하나님을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썩지 않는 것은 하나님처럼 영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김세윤 교수님도 고린도전서의 이 단락을 강해하면서 상을 '구원'이라 했고 '그리스도인의 썩지 않는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달리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말한 '썩지 않을 것'은 상이나 면류관이 아니라 영생 혹은 궁극적인 구원을 뜻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 혹은 면류관을 의미한다고 해도 (실제로 그렇지는 않지만) 그 의미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상과 면류관이 영생과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2-14)

 

  이곳에 나오는 "위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상이라고 생각하시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무엇을 얻으려고 그렇게 달려갔습니까? 방금 소개해드린 구절의 바로 전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립보서 3:10-11) 

 

  그러므로 바울이 좇아간 상은 부활에 참여하는 것 즉 궁극적인 구원이었습니다. 김세윤 교수님도 빌립보서를 강해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다하여 도달하는 푯대는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받는 지점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올림픽 경기에서 본부석에 앉아 있는 왕이 승리자에게 '다소 출신, 누구누구의 아들, 바울은 위로 올라와 상을 받으라'고 부르는 시상식 모습을 빌려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 때 이와 같이 자신을 위로 불러 상(완성된 구원)을 주실 것을 바라면서 그 지점까지 자신의 믿음의 경주(성화와 사도직의 수행)를 일편단심으로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 4:6-8)

 

  여기 나오는 '의의 면류관' 역시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달리 궁국적인 칭의를 뜻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구절 뒤에 의의 면류관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으니" 이런 순서로 말해야 옳을 것 같은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양심대로 삶으로 믿음을 파선되게 하지 않고 지킨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의의 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서 바울이 자신에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든 참된 신자가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 이런 의문을 가져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왜 목회자들이 목회를 잘했을 때 받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과 달리 어떤 면류관은 '생명의 면류관' 그리고 '의의 면류관'일까요? 저는 과거에 '면류관의 이름이 뭐 이래?'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는 자는 모두 영생을 얻지 않습니까? 그런데 웬 '생명의 면류관'일까요? 천국에 가는 사람은 모두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웬 '의의 면류관'일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상급이 아니라 영생과 궁극적인 구원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존 스토트는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이 기대하는 면류관을 그는 '의'라고 부르고 있다. 그의 펜으로 쓰여진 그 단어는 아주 자연스럽게 칭의를 의미했을 것이다. ... 의의 면류관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시상되는데, 이것이 채택할 수 있는 공로적인 태도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칭의의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바울은 상급이 아니라 영생 즉 궁극적인 구원을 목표로 달려갔습니다. 구원은 그만큼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구원을 따놓은 당상으로 여기고 제멋대로 사는 목사와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여러분은 절대로 그들의 뒤를 따르지 말고 바울의 뒤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바울과 함께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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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주사랑,주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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