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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계 동정

[스크랩] 왜 견인의 교리를 반드시 바르게 알아야만 할까요? VII (변승우 목사님의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 중에서)

작성자광화문|작성시간26.06.08|조회수5 목록 댓글 0

  ■ 왜 견인의 교리를 반드시 바르게 알아야만 할까요?

 

  (3) 구원의 확실성과 버림받을 수 있다는 진리는 충돌을 일이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9장 27절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며, 구원 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로마서 8장 31-39절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고 묻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분명 신자의 안전과 구원의 확신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가 설명한 것과 충돌을 일이키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1) 성경에는 분명히 신자의 안전과 구원의 확신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로마서 8장 31-39절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살펴보기 전에 5장 9-10절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짧지만 같은 내용의 예비적인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 구절은 랍비들이 칼 와요메르("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라고 부르고, 서방 전승에서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a minori ad maius)라고 부르는 점증적 논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사용된 '더욱'이라는 단어는 논증이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이행됨을 시사합니다. 즉 하나님이 무가치한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어려운 일을 이미 하셨다면, 그들을 종말론적 진노로부터 구하시는 '그보다 쉬운'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더욱 믿을 수 있지 않겠느냐? 는 내용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첫 구원이 '그 피를 인하여' 이루어졌듯이 궁극적인 구원도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10절의 병행구인 '그의 살아나심을 말미암아'에 비추어볼 때, 부활에 근거하여 권세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롬 1:4, 8:35)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를 의미함이 분명합니다. 그것 때문에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10절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전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것을 말한 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화목하게 되었은즉"으로 대체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홍인규 교수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5:10에서 '화목'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의 적대적인 관계를 전제한다. 하나님은 원수인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주심으로써 인간에 대한 적의를 종식시키셨다. 믿는 자는 이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롬 5:1). 그리고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갈 4:6, 롬 8:15). 말하자면, 믿는 자는 이제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것이다."

 

  '의롭다 하심'은 법정적인 용어인 반면, '화목'은 대인 관계와 관련된 용어입니다. 소원해진 또는 적대적인 두 당사자를 가까워지게 하다 또는 화해시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려운 일인 원수 된 자를 자기와 화목하게 한 일을 하셨기 때문에, 비교적 쉬운 일인 마지막 날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하실 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전처럼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녀이며,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하실 것이므로 우리의 구원은 더욱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제, 로마서 8장 31-39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런즉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고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가진 확신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과 변치 않는 신실하심입니다. 로마서 5장 9-10절에서도 확신의 근거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려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5)

 

  여기서 '소망'은 구원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가진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소망은 표준새번역이 잘 번역한 대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로마서 5장 5-8절에 의하면 그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구절을 포함한 9-10절에 대해 권연경 교수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현재적 칭의와 화목을 미래 구원의 근거로 내세우는 바울의 논리는 칭의의 근거인 십자가가 하나님의 불가해하면서도 단호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가 소망하는 구원이 확실한 것은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5:5).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을 가리킨다(5:8). 바울은 이 십자가의 시점, 곧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아직 '연약한' 자, 곧 죄인이요 원수였을 때 드러났다는 사실에 주목한다(5:6-8).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의 정도를 말해주는 근거로 십자가 사건의 시점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6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8절)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10절)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마저도 사랑하는, 그러니까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수준의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인해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로 그와 더불어 평화를 누린다(5:1, 10).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 말할 수 있다. 원수를 위해 아들을 내어줄 정도의 사랑이라면, 이미 화목케 된 자들을 마지막 구원에 이르기까지 지키시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강렬한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면, 비록 현재의 삶은 여전히 잠재적 두려움과 불확실함의 요인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8:35-37), 우리의 미래에 대해 강렬한 확신을 갖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5:2, 11, 8:32-34)"

 

  이처럼 바울이 피력한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31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이 일'은 단지 28-30절에서 말한 것 혹은 8장 전체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5-8장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속한다고 한 모든 축복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을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이라는 간단한 진술로 요약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편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고, 끝날까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2절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홍인규 교수님은 이 구절에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해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거절하지 않고 후하게 주신다"고 썼습니다. 무는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 의미를 그렇게 구원에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도상에서 필요한 - 영적이고 물질적인 - 모든 축복을 포함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므로, 우리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거절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저자의 권면은 매우 적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6)

 

  뿐만 아니라, 주님은 심판 날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변호해주실 것입니다. 심판 때 의롭다는 평결이 우리에게 확실히 적용되게 하실 것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3-34)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궁극적인 구원을 확신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든 말든, 성경에는 구원 받은 자가 버림받을 수 있다는 진리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진리도 나옵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진리가 모두 나옵니다. 그것도 자주 한 책에 두 진리가 함께 나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린도전서 1:8)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27)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

 

  로마서에도 두 가지 진리가 함께 나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5:9-10)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의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5-16)

 

  심지어 로마서 8장에는 한 장에 두 진리가 함께 나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로마서 8:12-13)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이처럼 성경에는 두 진리가 모두 나옵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구원의 확실성을 표명하는 구절들은 초점이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사랑에 맞춰져 있고, 버림받을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구절들은 우리 혹은 우리의 의무에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과 행위를 말할 때는 견인과 궁극적인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 선언합니다. 또 우리의 의무를 깨우칠 때는 버림받을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잘못으로 사람이 버림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촛점을 맞출 때 궁극적인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의무가 주제일 때는, 자유의지가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으므로 버림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인식하고 경각심을 가져야 당연합니다. 더구나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지만, 로마서 8장 31-39절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은 명목상의 신자가 구원받은 신자들, 그것도 죄를 심상히 여기는 신자들이 아니라 근신하는 신자들만 포함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신자가 궁극적인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확신하는 것은 조금도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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