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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 왕의 개혁 (여로보암의 죄로 지옥에 가는 자들)

작성자자유하라|작성시간25.01.04|조회수34 목록 댓글 0

https://youtu.be/EunxeklnI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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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외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다. 그런데 왜 이런 끔찍한 것을 명령하셨을까? 만약 지금 여호와께서 당신의 첫아들을 번제로 불태워 바치라고 하면 그대로 순종하겠는가? 아브라함처럼 전혀 지체하지 않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불태워 죽임으로써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실행에 옮길 수 있겠는가? 물론 지금은 말씀도 비유로 해석하기 때문에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행동으로 순종하지 않고 정신 승리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한번도 행동하지 않는 정신승리를 말한 적이 없다. 우리 인생은 전쟁이다. 전쟁을 행동이 없는 정신 승리로 이길 수 있는가? 아무것도 안하면서... 그건 죽이고자 하는 적군의 새빨간 거짓말일 뿐이다.

아들을 불에 태워 바치게 하는 신은 몰렉이다.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몰렉과 같은 요구를 하셨는지 먼저 몰렉에 대해 알아보자.

2 불에 태워 드리는 제사가 관행이었다 (https://biblesecret.tistory.com/m/20 참고)
‘몰록’은 암몬족 신인데 '그모스'와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들을 인신제사로 바쳤던 신으로 제사 의식 중에 어린아이를 불 위로 걷게 하거나, 또는 불에 달군 기둥 위를 걷게 하는 잔인한 의식이다. 유대의 자료에는 ‘이 혐오스러운 종교적 관행은 매우 무시무시하게 진행되었음'이라고 기록하였다. 카르타고의 ‘타니트 신전’은 이 신을 섬기는 신전이었는데, 신전 안에서 제물로 바친 새끼 양이나, 염소의 제물 보다 많은, 어린 아이들을 태운 뼈를 담은 항아리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몰록’의 우상은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하였는데, 두 손을 펴고 직립하여 서 있거나, 단상에 걸터앉은 것도 있었으며, 그 몸과 단은 속이 비어있으며, 제전이 있을 때는 그 속에 불을 지펴서 그 몸체을 뜨겁게 달군 뒤에, 제사장은 어린아이의 아버지에게서 아이를 받아 우상의 두 손 위에 놓고 태워 죽게 하였으며, 이때 아이의 아버지에게 아이의 곡성이 들리지 않도록 북을 울리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모세 시대부터 바벨론 유수 기간까지 약 900여년간 선지자들이 경고 해 왔던 기록들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으며, 특별히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히 진멸하였던 가나안의 나라나 성읍들이 이러한 신들을 섬기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이러한 신들을 섬겼던 가나안 민족들을 처절하고 냉정하게 응징하였던 심판의 도구가 되었었으나, 그 후손들은 오히려 그 신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이 처절한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신에게 제사를 드렸던 곳이 후에는 죽은 짐승들의 사체를 버리고, 온갖 오물을 버리는 곳이 되어 이를 불태우는 연기가 밤낮 타오르게 되었으며, 구더기와 온갖 벌레들이 서식하고 악취가 풍기는 불쾌한 곳이 되었다. 제사지냈던 장소의 이름은 ‘게벤 힌놈’ 곧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란 뜻으로써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 ‘지옥’ ( 헬 : gevenna 게엔나 )으로 불렀던 곳이다.

3 몰렉 제사 힌놈의 골짜기 (지옥)
https://dongtanms.kr/board_HgTC69/108608
참조
힌놈의 골짜기는 구약에 나오는 지옥의 히브리어이다. 몰렉 제사를 힌놈의 골짜기에서 했는데 이를 통해 지옥의 유래를 알아보자.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 유다인들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자녀들을 불살랐다(대하28:1-3). 이 문화는 이방 문화로서 가나안 문화이고 페니키아 문화이고 바벨론 문화이다. 또한 유다 자손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 즉 '성전'에 가증한 것을 두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여 자녀들을 불살라 드렸다. 이런 제사는 여호와께서 직접 명령하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심지어 매장지가 없을 정도로 수많은 아기들이 죽임을 당했으므로 '죽임의 골짜기'라고 불리게 되었다(렘7:30-32).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여호와의 책망이며 당시 유다인들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는 유다인들이 성전에 가증한 것을 두고 몰렉을 예루살렘에 세울 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면 불법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기 때문에 더이상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마치 불법이 합법인 거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더 심각한 것은 성전에서 불법을 행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마치 그런 제사를 원하시는 것처럼 오해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친히 그런 제사는 원하지도 심지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고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헷갈리고 있는 참담한 상황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전혀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처럼 무감각한 양심과 낮은 분별력으로 수많은 아기들이 매장지가 없을 정도로 죽어갔고 이들의 죄악은 날로 심각해져 갔다.

4 악한 왕과 함께 나라가 망한다
므낫새 왕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 즉 가나안의 가증한 일을 행하였다. 다시 말해 이방(이교도) 문화를 따랐다. 바알에게 제사하는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고 해달별에게 경배하고 심지어 성전에 이방 제단을 쌓고 몰렉 제사를 통해 자녀를 죽이고 점치고 신접한 자와 무당을 신뢰하고 성전에 아세라 목상을 세웠다(왕하21:2-7). 사실 이 모든 악은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고 절하기 말라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점치지 말고 신접한 자와 박수를 죽이라 명하신 율법만 지켜도 결코 그들을 신임하지 않았을 것이다(레20:27). 이처럼 율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으면 결국 죄악은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 성도가 이방사람보다 더 부패하게 만드는 것은 법이 사라졌을 때이다. 심지어 불법을 행하면서도 구원받았다고 믿으니 담력이 더 세지고 심지어 죄책감마저 없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언약을 주셨다. 그것은 그분의 모든 명령과 모세를 통해 준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 약속의 땅에서 거룩한 나라가 되어 영원히 번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고 므낫세 왕의 미혹을 받아 악을 행하여 이방의 여러 민족보다 더 부패하게 되었다. 이것을 보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왕만의 책임이 아니다. 왕은 미혹을 했을 뿐이고 거기에 넘어간 백성도 잘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왕이 아무리 악하고 불법으로 미혹해도 백성이 하나님 앞에 깨어있다면 결코 속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왕에 그 백성인 것이다. 다시 말해 왕이나 백성이나 하나님의 법을 버린 것을 같다. 그래서 이방 문화에 미혹당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법은 공의이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법을 모른다고 해도 공의가 그 마음에 있다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저절로 판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몰록이라는 신이 있고 문화적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신에게 자녀를 번제로 드리고 있다해도 공의가 살아있는 자라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법이 없기 때문에 망하는 거라고 말씀하시지만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안에 공의가 무너졌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없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영원한 거처인 성전에서 예배를 했다. 다만 이방 문화로, 이방인의 관례, 이방의 방법으로 드렸을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와 같이 속았을 수 있다. 여호와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가장 귀한 아들을 불에 태워 드렸다고,,, 여호와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를 성전에 있는 남창에게 드렸다고... 여호와를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에 어떤 의심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고... 너무나도 무서운 것은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믿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즉 방법에 대한 것이고 모두 법도에 관한 것이다. 방법이 틀렸다면 결과도 틀린 것이고 방법이 맞아야 결과도 맞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도이다.

이러한 왕과 백성의 죄악으로 인해 여호와께서는 나라를 원수의 손에 넘기기로 하셨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고 공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인보다 부정해진 자들을 노략거리로 삼으시고 겁탈거리로 삼으시는 것이다. 이들은 출애굽한 조상때부터 오늘까지 악을 행하여 진노를 일으킨 자들이다. 다시 말해 출애굽했을 때 모두가 이들과 같지 않았으나 거기에 이들의 조상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공의를 싫어하는 자들이 출애굽할 때에도 있었다.

또한 땅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리면 그 땅은 저주를 받고 노략당하는 곳이 된다. 왜 무죄한 자의 피가 심히 많이 흘리게 되는걸까? 왜냐하면 법이 무너지면 더이상 공의가 공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큰 소리치고 힘있는 자들이 우기고 거짓말하면 그들이 옳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진리를 외치던 자들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처럼 선악이 뒤집어지면 결국 그 땅은 전쟁으로 황폐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토라(법도)이다(왕하21:8-16). 그러니 악한 왕이 세워지는 것도 그 나라의 저주가 아닐까...

5 선한 왕이 공의로 나라를 개혁한다
요시야왕은 성전에서 발견된 언약책을 읽고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다. 조상들이 흔히 하던 예배 방식, 대대로 해오던 보편적인 예배 방식이 잘못된 건 알았지만 지금까지 범한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요시야왕은 나라를 대표하여 여호와께 언약을 세웠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법을 지켜 언약을 이루리라 다짐했다. 므낫세 왕이 죄악으로 백성을 미혹한 것에 반에 요시야왕은 함께 그 언약을 따르도록 언약하게 했다. 그리고 성전에서 모든 우상들을 내어다가 불사르고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도 직분을 빼앗아 버렸다.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어다 불사르고 성전에 있는 남창의 집도 헐고 몰록에게 더이상 자녀들을 바치지 못하도록 도벳을 더럽혔다. 또한 성전에 들어가는 곳에 있는 태양 수레를 불사르고 몰록과 같지만 이름만 다른 그모스와 밀곰도 더렵히고 여러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 목상들을 모두 불살랐다. 그리고 우상의 제단위에 해골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더럽혔다. 그러다 한 비석을 발견했다. 그리고 요시야 왕이 이처럼 행할 것을 예언한 하나님의 사람의 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왕은 그것을 그대로 두게하고 산당의 제사장들은 모두 제단 위에서 죽이고 이제는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즉 법대로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는 완전한 개혁을 이루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악한 제사장들과 악하고 음란한 자들이 판을 치던 므낫세 시대에서 요시야 왕이 되었을 때는 완전히 역전되어 그들이 제단에서 불살라 죽임을 당하고 성경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폐하여 지고 당시 욕을 먹고 죽음의 위협을 받던 하나님의 사람은 오히려 영광을 받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되었다(왕하23:1-23).

이처럼 어떤 왕이 나라에 세워지느냐는 너무나도 다르다. 요시야 왕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지 알 수 있다. 아무리 나라가 이방 문화가 상식이 되었다 할지라도 성경적 문화로 바꾸는 것은 또는 공의로운 나라로 바꾸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다. 누구도 핑계될 수 없다. 모두가 그렇게 산다고 해서 그것이 옳아질 수 없다. 여기서 용기를 내어 개혁할 수 있는 사람이 나라의 재난을 막고 전쟁의 위기를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요시야 왕을 통해 볼 수 있다. 반대로 용기를 내지 않고 개혁하지 않는다면 재앙은 급속해질 것이다. 함게 불타는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다.

6 나라를 구하는 믿음을 가진 왕
요시야 왕은 율법을 이루기 위해 신접한 자, 점쟁이, 드라빔, 우상, 모든 가증한 것을 없앴다. 또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 돌이켰다. 이것이 온전히 여호와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여호와의 타오르는 진노를 늦추고 그가 살았있을 동안에는 나라에 재앙이 임하지 않았다. 유다인들이 보았을 때 요시야 왕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생각했을까? 조상들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여 아들을 불에 태워 드리고 자신의 아내를 남창에게 줄 정도로 헌신했는데... 이것을 통해 얼마나 사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의 문제임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방법은 순종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도 또한 순종으로의 돌이킴이다. 요시야 왕은 진정으로 조상들의 죄로부터 돌이켰다. 즉 회개했다. 이러한 법대로 하는 사랑과 회개가 나라를 위기로 부터 구하며 진노를 늦출 수 있다. 그렇다면 왕만 잘 세워지면 나라는 안전해질까? 그렇지 않다. 요시야 왕이 아무리 전무후무한 의로운 왕이었을지라도 지금까지 범했던 죄악으로 인해 정해진 진노를 돌이키지 못했다. 진노를 늦출 수는 있었다. 그러므로 우린 두려움으로 우리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법대로 사랑하고 법대로 믿고 법대로 회개해야 한다. 법이 곧 여호와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나 불법으로 사랑한다면 그건 죄일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왕하23:24-26).

7 법을 바꾼 여로보암과 법을 회복한 요시야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절기를 바꾸고 성전에 가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아무나 제사장으로 세움으로 하나님의 법을 바꾸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 그에게 와서 예언을 했다. 앞으로 요시야 왕이 일어나 제단위에 그가 임의로 세운 산당 제사장들을 제물로 바칠 것이며 (불태울 것이며) 사람의 뼈를 그 위에 불살라 더럽힐 것이다(왕상13:1,2). 그런데 법을 바꾼 여로보암으로 인해 제사장들이 제단위에서 불살라져야 했을 정도로 그리 큰 죄를 지은 것일까? 물론 이 말은 제단을 여호와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며 세워진 제사장들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이겠다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 큰 죄였을까?

여로보암처럼 율법을 바꾸는 것은 지금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죄이다. 그는 절기를 한달씩 뒤로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만들었고 샤밧을 지켰다. 다만 성전으로 가지 않고 벧엘과 단에 있는 신상으로 가서 예배했고 레위지파를 제사장으로 세우지 않고 원하는 자를 세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여호와의 절기를 없애고 새로운 날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는 성경에 없는데 만들었고 부활절은 아예 다른 날로 지키고 있다. 그리고 다른 여호와의 절기는 알지도 못한다. 그리고 여로보암보다 못한 것은 샤밧조차 모른다. 다음 날로 대체하였다. 사실 이 모든 것은 가톨릭이 바꾼 법이고 다만 이 가톨릭의 법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즉 여로보암의 죄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법을 바꾸는 여로보암의 죄는 결국 다른 이교도들보다 더욱 부패하게 하는 죄악으로 발전했고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맞이하게 만들었다. 즉 불법한 교리를 만들어 모두를 미혹한 죄가 여로보암의 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돌이킬 수 없는 부패에서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은 요시야 왕의 방법이다. 요시야 왕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장로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백성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직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말씀하신 공의(법)대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법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것이 여호와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사랑이고 믿음인 것이다. 요시야 왕은 백성을 사랑했을까? 당시 원로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말을 들었을까? 오히려 백성이나 장로들은 요시야 왕을 반대했을 수 있다. 너무 독재자처럼 자기 마음대로 나라를 거의 뒤집다시피 한다고 반발했을 수 있다. 그러나 찬성하는 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의 결단이 불법한 나라를 공의로운 나라로 바꿀 수 있다면, 지금도 요시야 왕같은 사람이 일아나면 충분히 나라는 바뀔 수 있다. 우린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스스로를 말하지만 정말 요시야 왕같은 사람인지 돌아봐야 한다. 그는 적폐청산에 있어서는 다윗보다 칭찬을 들은 유일한 왕이었다.

8 말씀이 아닌 모든 것은 힌놈의 골짜기로 간다
요시야 왕을 통해 보여준 것이 있다. 말씀을 바꾼 여로보암 즉 법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 세운 제단이 불살라졌고 그 제사장들이 그 위에서 불살라졌으며 모든 산당들을 부수고 우상 숭배하지 않도록 신상들을 불사르고 남창을 없애고 점쟁이와 신접한 자를 없애고 유월절을 지내기 시작하면서 모든 율법을 세웠다. 여기서 불살라졌다는 것은 불법한 것들의 마지막은 결국 힌놈의 골짜기 즉 지옥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붙드느냐에 따라 우린 영생할 수도 있고 영벌을 당할 수도 있다. 영원한 말씀을 세우고 이룬다면 그것이 우리를 영생하도록 할 것이지만, 불법한 것을 세우고 이룬다면 개혁의 때에 불살라질것이다.

지금 세상은 불법이 문화가 되어 오히려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욕을 먹는 시대가 되었다. 굳이 힘들게 요시야 왕처럼 세상을 개혁하려고 일어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적당히 살다가 죽어도 구원받지 않을까? 죄송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법을 벗어난 모든 것은 불태워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물론 사실이다. 성경이 증언한다.) 목숨 걸고 세상을 개혁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진정한 나라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닌가? 그러므로 나라에 악한 법은 폐지하고 선한 법을 세워야 한다. 성경적인 공의로운 법을 세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교회에서는 여호와의 법도가 세워지도록 불법을 제거해야한다. 그것만이 교회를 굳게 세우고 나라를 굳게 세우는 방법이다. 나라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신 여호와께서는 지금 가나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신제사에 대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확증해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이삭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보이실 필요가 있었다. 즉 위대한 속죄는 사람을 번제로 드려서가 아니라 어린 양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음을 보이셨고 여호와께서 세우신 법도로 충분함을 보이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인신제사를 요구하는 분이 아님을 아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믿음이 되었고 그것은 야곱에게도 충분히 전달되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바탕으로 믿음을 논해야 한다. 법도를 벗어난 믿음은 큰 믿음, 대단한 믿음이 아니라 불법이기 때문이다.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깃발 제작 문의
https://cafe.naver.com/freeflag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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