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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와 탐무즈의 교훈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려는 유혹)

작성자자유하라|작성시간26.06.17|조회수33 목록 댓글 1

https://youtu.be/BDlPn8211ZE

제목: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려는 유혹
부제: 금송아지와 탐무즈의 교훈

1. 탐무즈는 균열을 보여주시는 달이다.
탐무즈(Tammuz) 월은 매우 독특한 달입니다.
니산은 구속의 달,
이야르는 치유의 달,
시반은 토라를 받은 달이라면,
탐무즈는 "시험과 균열의 달"로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탐무즈 17일에 금송아지 사건으로 돌판이 깨지고, 
솔로몬 성전에서 상번제가 중단되고 
예루살렘 성벽이 붕괴 등 
여러 비극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탐무즈에 들어가면 보통 이런 질문을 합니다.
"무엇이 무너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시는가?"

그래서 이스라엘은 탐무즈를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드러나는 달"
이라고 가르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균열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금송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은 하루아침에 우상숭배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마음속에 불신앙의 균열이 생겨 있었습니다.

탐무즈는 하나님께서 심판보다 
먼저 균열을 보여주시는 달입니다.

2. 코라흐 포션과 탐무즈가 만나는 지점
이번 포션은 코라흐입니다.
코라흐의 반역도 사실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비교, 시기, 불만, 원망, 자기 의
이것들이 마음속에 쌓여 있다가
어느 날 반역으로 폭발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코라흐를 읽으며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가장 위험한 균열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다" 라고 배웁니다.

3. 진실을 찾는 달이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전은 로마가 무너뜨리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 안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서 성전 파괴의 원인을
로마 군대보다 증오, 분열, 교만, 거짓, 불신앙에서 찾았습니다.

탐무즈는 그래서 누가 옳은가를 따지는 달이 아니라
무엇이 진실한가를 찾는 달입니다.
사람의 주장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달입니다.

4. 공의는 드러나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편(진리)에 서라고 가르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편에 섰고,
모세도 하나님의 편에 섰고,
예슈아도 아버지의 뜻의 편에 서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주님의 진리가 드러나게 하소서"입니다.

만일 거짓이 있다면 드러나야 합니다.
만일 불의가 있다면 심판받아야 합니다.
만일 조작이 있다면 밝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5. 눈이 미혹되는 달
성전 파괴 자체는 아브월 9일의 사건입니다.
탐무즈는 성전 파괴를 애도하는 달이라기보다,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주어지는 마지막 경고의 달"에 더 가깝습니다.

탐무즈를 이해하는 핵심은 금송아지 사건에 있습니다.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만든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탐무즈를 "눈이 미혹되는 달"로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탐무즈에 일어난 대표적 사건들이 모두
"보이는 현실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6.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꾼 사건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애굽에서 너를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다"
(출 32:4)

그들은 바알이나 라를 섬기겠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와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섬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적으로 금송아지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축소시킨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분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들은 불안했습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자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을 만들자"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는 우상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7. 왜 하필 송아지였는가?
히브리적으로는
애굽의 황소 숭배 문화와 연결하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송아지가
힘과 생산성과 풍요의 상징이었다는 점입니다.

즉 백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보다
자신들에게 유익을 주는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8. 금송아지 사건의 본질
십계명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의 "새기다"는 히브리어 페셀 (פסל)입니다.
이 단어는 "깎아내다" "조각하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을 조각할 수 없지만,
자기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조각한다."고 가르칩니다.

결국 금송아지 사건은
하나님을 없앤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꾼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어야 해."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해야 해."
"하나님은 내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해."
이것이 금송아지의 정신입니다.

9. 정탐꾼 사건
보통 탐무즈와 아브를 연결하여 묵상합니다.
정탐꾼들은 가나안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한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거인도 있었고
견고한 성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거짓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보다 현실을 크게 본 것입니다.

탐무즈는 "현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커 보이는 시험"의 달입니다.

10. 잘못된 시선
이번 토라포션이 코라흐인 것도 흥미롭습니다.
고라는 실제로 
"현실적으로" 보면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도 거룩합니다.
레위인도 구별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선택보다
자신이 보기에 공평한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에인 라임“ 즉, "잘못된 시선"이라고 부릅니다.
고라의 문제는 신학보다 시선이었습니다.

11. "무엇을 보고 있는가?"
금송아지 문제
모세가 안 보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정탐꾼 문제
거인이 보입니다.
그래서 약속을 잊었습니다.

고라 문제
자신보다 높은 자리가 보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잊었습니다.

세 사건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12. 무너짐조차 하나님의 공의 안에 있다
많은 사람은 탐무즈를 "슬픔의 달"로만 이해하지만,
단순히 "우리가 당한 비극"으로 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는가?"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원망할 것인가, 
아니면 그분의 공의를 인정할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13. 코라흐 사건도 마찬가지다
고라의 반역 이후 땅이 입을 열어 고라와 그 무리를 삼켰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다." (민 16:41)

놀라운 것은 그들이 모세를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심판하신 분은 모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셨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책임을 사람에게 돌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장면을 읽으며 이렇게 묵상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는 것을 더 어려워한다.

14. 탐무즈의 질문
탐무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너진 것을 보며 누구를 원망하는가?"

성전이 무너졌을 때
이스라엘은 로마를 원망했습니다.
고라가 심판받았을 때
백성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계속해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만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공의로 다스리시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15. 공의로 다스림을 받는 자는 복되다
시편 119: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불의가 아니라 성실하심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94:12 "여호와여 주께서 징벌하시는 자,
곧 주의 율법으로 교훈하시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히브리적으로는
징계와 가르침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분노의 폭발이 아니라 아버지의 교육입니다.

시편 19: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다윗은 하나님의 판단이 언제나 옳다고 고백합니다.

16. 히브리적 묵상
이스라엘에는 이런 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너뜨리시는 것은 미워해서가 아니라 회복시키기 위해서이다."

예루살렘 성전도 영원히 버림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판 후에 회복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고라의 사건도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심판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고라를 심판하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무너졌을 것입니다.

때로는 한 부분을 제거하심으로
전체를 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17. 오늘날 우리의 적용
우리는 종종 축복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 말하면서,
심판은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고는 다릅니다.
축복도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징계도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욥은 말했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이도 여호와시니."

탐무즈는 우리에게 심판을 기뻐하라고 가르치는 달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라고 가르치는 달입니다.
무너지기 전에 회개해야 하고, 무너졌다면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공의는 끝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시작입니다.

성벽을 무너뜨린 것은 적군이었지만, 
무너짐을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탐무즈는 사람을 원망하는 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서는 달입니다.

18. 비유 이야기
"왕의 초상화"

옛날 어느 나라에 위대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백성을 사랑했고,
백성도 왕을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전국을 다스리느라 자주 궁을 비웠습니다.
어느 날 왕이 먼 전쟁터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떠나기 전 왕은 말했습니다.
"내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너희의 왕이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나의 법을 따라 살라."

처음에는 모두 왕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불안해졌습니다.
"왕이 정말 돌아올까?"
"왕이 우리를 잊은 건 아닐까?"

그러던 중 한 사람이 제안했습니다.
"왕이 보이지 않으니
우리가 왕의 모습을 만들어 놓자."

사람들은 금과 은을 모아 거대한 왕의 초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 초상화는 아름다웠습니다.
백성들은 기뻐했습니다.
"이제 왕이 보인다!"
"이제 안심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왕의 법보다 초상화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말했습니다.
"왕이라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줘야지."
"왕이라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허락해야지."
"왕이라면 이렇게 해야지."

결국 그들은 왕의 뜻을 따르는 대신
자신들이 원하는 왕을 만들어 섬기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왕이 돌아왔습니다.
왕은 광장에 세워진 거대한 초상화를 보았습니다.

백성들은 기뻐하며 외쳤습니다.
"왕이시여!
우리는 당신을 위해 이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얼굴은 슬펐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너희 자신을 만든 것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한 것이 아니라
너희 욕망을 금으로 입혔을 뿐이다."

왕은 초상화를 무너뜨리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울며 말했습니다.
"왕이 너무 가혹합니다."

그러자 왕이 대답했습니다.
"가혹한 것은 내가 아니다.
왕을 잃어버리고도
왕을 잃어버린 줄 모르는 것이 더 두렵다."

교훈
금송아지의 죄는 우상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기 욕망에 맞게 바꾸려 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화가 나서 내리는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바꾸어 놓은 왜곡을 바로잡는 공의입니다.

19. 탐무즈의 묵상
탐무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고 있는가?
나는 말씀에 나를 맞추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내 생각에 맞추고 있는가?

금송아지의 심판은 우상을 깨뜨리기 위한 심판이기 전에,
왜곡된 하나님상을 깨뜨리기 위한 공의였습니다.

금송아지는 하나님을 버린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린 죄였습니다. 
심판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한 공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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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광화문 | 작성시간 26.06.17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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