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thschild Family. The House of Rothschild.
Concordia Integritas Industria
조화 성실 근면
1. 개요
유대계 대부호 가문. 로스차일드는 "붉은 방패"를 뜻하는 독일어 '춤 로텐 실트'(zum rothen Schild)를 영어식 발음으로 바꾼 것인데, "붉은 방패"라고 하는 그 뜻은 그들의 문장에서 따온 뜻이다. 19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이후 현재까지도 천문학적인 재산을 소유한 가문이다. 주된 사업 분야는 금융업이고, 그외 석유, 금, 레저, 와인, 광산업, 호텔 등 각종 분야에서 활동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떠오르게 된 사건들과 비밀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각종 음모론과 서브컬처에서는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등의 방법으로 비밀스럽게 세계를 지배하는 흑막으로 자주 지목받는다. 사실 이런 이미지가 생긴 이유는 유대자본이 현재까지도 미국 내에서 큰 영향이 있고, 실제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근대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유명한 벨푸어 선언이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와 로스차일드 가문 사이의 뒷거래로 성사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의 규모는 커지고, 금융 감독 시스템은 전례없이 정교해지고 있다. 록펠러 가문이 쪼개지면서 과거의 영향을 상실하였듯[1] 로스차일드 가문도 긴 세월동안 대규모 전쟁과 재산 분할 등으로 그 영향력이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줄어들었다. 로스차일드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RB) 등을 주무른다는 음모론이 있다. '화폐전쟁'의 저자 쑨훙빙 등이 대표적인 음모론자로 알려져 있다.
2. 재산
로스차일드 가문 재산 규모는 관련 기업들이 상장을 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무엇보다 19세기 후반부터 가문에서 소유했던 토지와 성들, 그리고 다수의 미술 작품들을 팔았기 때문에 재산을 측정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대중의 눈을 피해 사업의 규모를 차근차근 축소해온 정황을 고려하면 과거 전성기에 비해 재산의 규모가 줄어든 건 확실해 보인다. 무엇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7세기부터 시작해서 내려온 가문이기 때문에 재산이 100명이 넘는 후손들 사이에 나뉘었고, 각 국가마다 당주가 따로 존재한다. 여러 가문들 중 현재 가장 영향력이 강한 곳은 영국과 프랑스로, 영국 지부의 당주였던 에블린 드 로트실드(Evelyn de Rothschild)의 사유 재산은 2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에서는 미국 지부의 사유재산이 150억 달러(약 18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는데, 많긴 하지만 마치 세계 경제의 숨겨진 지배자처럼 알려진 세간의 이미지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액수다. 물론 음모론자 등은 포보스지의 발표를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인다. 참고로 페이스북 회장 마크 저커버그의 2014년 재산이 35조 원 가량이었고, 세계 최고의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우드 왕가의 재산이 약 1.5조 달러, 그리고 아부다비 왕가의 재산을 1조 달러 가량으로 추정한다. [2] [3]
또한 모든 로스차일드가 성공한 것은 아니다.나폴리의 로스차일드는 이탈리아 통일 이후 쇠락하다 1920년대 은행업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의 로스차일드는 철도 산업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안슐루스 당시 나치에 의해 재산이 몰수당하고 당주 루이 나탈니엘 폰 로트실트 남작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들이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1999년에 돌려받은 미술품의 가치만 1억 달러 이상. 못 돌려받은 현금과 현물이 얼마일지는(...). 또한 프랑스의 로스차일드의 은행업은 1981년 미테랑 정부의 은행 국유화로 큰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 영국의 로스차일드 가문과 다시 합류하면서 프라이빗 뱅킹에 눈을 돌렸다고 한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848년 혁명, 1930년대 대공황, 1940년대 나치즘이 전 유럽의 로스차일드에게 큰 타격이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야말로 로스차일드의 원수 중의 원수인 셈.[4]
3. 비밀주의
가문의 모든 요직은 반드시 가문 내부에서만 맡고, 철저한 기밀 유지가 특징. 그러나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원이 아닌 CEO가 임명되기도 하는 등 변화가 일어나고있다.
4. 역사
유대인면서, 신성로마제국의 공작이면서[5], 프랑스의 유력가이며, 영국의 세습남작인 매우 특이한 가문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이미지와 달리 본래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고물상 따위를 하던 흔해빠진 유대인 가문 R (...)에 불과했다.
본래, 유대인들은 유럽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은 금융업 뿐만 아니라 고물상(물론 꽤 값진 물건을 거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등을 하면서, 고물상의 경우는 물건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주고 본 가치에 비하면 똥값이지만 여전히 막대한 액수에 해당되는 금액을 부르는, 우리가 지금 아는 악덕상인 이미지와 달리 겸손하고 정직하며 신뢰할 수 있는 상인으로써 활동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먹고 살 돈을 벌긴 커녕 지나가던 귀족에게 밉보여 감옥행 혹은 추방이 기본이었기 때문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바로 이런 흔한 유대한 상인 중 하나에 불과했다. 나름 브루주아이긴 하지만 금수저는 커녕 은수저라고 하기도 좀 힘들고 잘나가는 동수저쯤 되는 가문이었던 것.
로스차일드 가문이 진짜 "Great House"라는 명칭을 억지로나마 쓸만한, 그냥저냥한 은수저 수준으로 격상된 것은 18세기 중반 마이어 로트쉴트가 환전상을 하며 프로이센 왕과 거래하게 되면서 은행 가문이 되면서 부터이다.
여기에 한가지 일화가 있는데, 마이어의 일솜씨를 마음에 들어한 프로이센 왕은 그에게 장부관리 업무를 맡겼다. 그러나 1806년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이 입성하자 프로이센 왕은 국외로 도피했다.
마이어는 자신의 가산이 프랑스에 의해 몰수당하면서도 '왕의 재산은 철저히 숨겨놓았고', 훗날 복귀한 프로이센 왕은 '동전 한닢까지 빼먹지 않고 보관해 놨던 마이어의 진실성에 감동하여 가문의 재산관리자로 임명한다.
마이어 로트쉴트는 다섯 아들들을 각각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스트리아 빈, 이탈리아 나폴리로 보내 국제적인 금융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것이 언제까지나 지나가던 유대인 가문 R (...) 따위에 불과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아 짧게나마 세계의 금권을 재패할 수 있게끔 한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로스차일드 가문은 "뭔가 이상하게 유럽 어딜가도 등장하는 좀 특이한 유대인 가문 R" (...)에 불과했다. 당대의 최고 금권은 베어링 가문에 있었고, 베어링을 대표주자로 하는 영국 토호들에 비하면 로스차일드는 여전히 금수저 반열에도 못 들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 때에 와서는 오히려 잠깐 날아오르나 했더니 지하실로 처박힐 뻔했다. 나폴레옹 전쟁때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한것을 보고 영국 금을 밀수해서 파는 사업을 했는대 나폴레옹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다시 망하면서 파산할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이때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가문의 운명을 건 승부수를 띄웠는대, 나폴레옹의 몰락이 확실하다 판단하고, (미래의) 승전국들의 국채를 가문의 자본을 모조리 끌어모아 싹 매수해버린 것이다. 이 승부수가 성공하면서 로스차일드는 간신히 파산 위기를 넘기고 이전보다 훨씬 많은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된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여전히 뭔가 좀 성공한 로스머시기하는 유대인 가문 수준에 불과했다.
진정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흥은 왕의 재산을 철저히 지켜낸 진실성을 또 다시 빛낸 사건으로, 신성로마제국 해체후 망명한 한 귀족 (누구인지 기억이 안나서 생략합니다. 수정바람)의 재산을 철저히 보호해내어, 그것으로 큰 신뢰를 사서 이전의 사례처럼 재산 관리를 전적으로 위임받은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전에 그러했듯이 이 재산을 한번도 까먹은 적이 없으며 제대로 불려서 주인에게 돌려줬다. 이 재으로 적극적으로 투자를 해서 세력을 불렸지만, 한편으론 그 재산을 절대로 까먹지 않기 위해 뼈저리는 노력을 하며 여러 유력 가들과 경쟁해야했고, 기어코 성공하여 제대로 재산을 불려서 되돌려줬다.
즉, 로스차일드 가문의 가장 큰 무기이자 오늘날까지 그 영광을 쭉 이어지게 만든 자산은 다름아닌 신용이었던 것이다.
어찌보면 진정한 의미의 노오오오오력을 보여준 가문이며, 요즘 여러 대부호에 비하면 정말 겸손하기 짝이 없는 유례를 가진 가문이다. 괜히 가문의 모토가 조화, 성실, 근면이 아닌 것.
로스차일드 가문은 근대사의 대부분을 동인도 회사로 대표되는 영국내 타 세력과 싸우는 것으로 보냈다. 거기다가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럽 전역에 퍼져있었고 큰 분파를 봐도 영국과 프랑스로 나뉘어진 상당히 희안한 형태였기 때문에 각 가문 분파들은 각 분파들의 현실에 맞춰 처신해야했고 그러다보니 분파별로 정책이 충돌하기도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사를 찾아볼때 매우 햇갈리기 쉬운 이유가 이것. 로스차일드 가문이 진정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던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세포이 항쟁으로 인한 동인도 회사 해체 때 정도는 가야한다.
이후 런던이 국제적인 금융 중심지가 되고, 베어링 가문으로 대표되는 영국 토호들의 구심점이었던 동인도 회사를 끝내 격파하고, 영국과 프랑스 양쪽 모두에서 세습가능한 귀족 작위 까지 받으면서 지금 우리가 아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되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수저를 가지고 엄청난 노오오오력까지 한 끝내 벌어들인 돈의 위력이 신분의 장벽까지 뛰어넘은 셈.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스식으로 '로쉴트'라 표기하는 경우가 많고, 와인 사업으로 현재도 유명하다.
체 게바라는 반자본주의적, 반미주의적인 그의 사상답게 로스차일드가문을 악마라 칭했다고 전해진다.
긴 시간을 동인도 회사 세력과의 경쟁으로 보낸 탓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과 일본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상당히 많은 문제점을 가지게 되었고[6], 이는 이후 록펠러 가문 대두와 함께 금본위주의 체제의 붕괴로 가문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역설적으로 세계의 금권을 장악한 전성기때, 과거의 교훈을 잊은 당대 당주 빅터 로스차일드의 독단적 행동이 이 쇠퇴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5. 음모론
5.1. 워털루 전투 음모론
나폴레옹 전쟁의 워털루 전투 결과에 대해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패밀리 네트워크를 통해 정부 전령보다도 빠르게 영국군의 승리 소식을 입수하여 정보를 교란해 시장에서 이득을 취했다"는 음모론이 있다. 대중에는 흔히 로스차일드가 영국 귀족들한테서 주식을 사다가 떼돈 벌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로스차일드를 연구했던 하버드의 교수 니얼 퍼거슨 같은 저명한 학자는 다르게 말하고 있다.
원래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이 내려진 사이 영국의 금을 프랑스로 밀수출하는 일을 해서 이득을 취했고,(프랑스로써도 영국의 금이 빠져나가면 이득이라 생각해서 막지 않은 모양)[7] 나폴레옹 전쟁이 터진 이후로는 패밀리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금을 영국군의 군자금으로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이후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 잘못 예상하였다.
그리고 금을 대량으로 매입하였는데, 워털루 전투로 인해 전쟁이 금방 끝나버리자 금값 폭락을 통해 손해를 크게 볼 위기에 처했고, 이때 로스차일드 가문이 아주 제대로 망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정도였다.
이때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영국 국채를 떼거지로 매입하는 최후의 승부수를 띄웠는데, 전후 영국 정부 차입이 감소해서 국채가 폭등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었다. 이 예상은 다행히도(?) 들어맞아 채권 가격이 폭등하여, 40% 쯤 상승한 고점에서 채권을 매각해서 현재 가치로 6억 파운드를 넘는 거액을 벌어 위기를 모면했다.
애초에 로스차일드는 정보를 조작한 적도 없고, 조작은 커녕 예상을 잘못해서 금으로 돈 벌려다가 엘바 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이 다시 빠르게 망해버린 바람에 가문 전체가 망할 뻔했다. 결국 음모 같은 것은 없었고, 예측 가능한 경제적 흐름을 절묘하게, 그것도 뒷북으로 (...) 이용하였을 뿐이라는 것이 음모론에 대한 퍼거슨의 반박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정보 조작을 했다는 "주작"을 벌인 당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음모론도 있다. (...) 음모론에 대한 음모론인 셈. 이 경우 나치 독일이 로스차일드 가문을 깎아내리려는데 국채 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아 주식으로 슬쩍 바꿔놓은 것이라 주장한다.
어쨌든 로스차일드 가문 대박 사건은 여러모로 제대로 잘못 알려져 있어서, 주식이 아니라 국채였음을 아는 사람들도 로스차일드 가문이 정보 조작을 했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근현대 역사 내내 베어링 가문으로 대표되는 동인도 회사 투자 세력과 대립했고,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동인도 회사가 공중분해 되기 전 까지는 대중이 흔히 상상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은 커녕 영국 내부 유력 세력들, 특히 베어링의 연고지인 스코틀랜드 쪽 인사들과 권력투쟁을 하던 판이다.
5.2. FRB 음모론
로스차일드 가문이 미국 달러를 생산하는 것에 개입하며 아직도 세계 경제와 정치를 좌지우지한다는 음모론이 있다. "1971년 닉슨 대통령 금태환 제도 폐지를 혜지하면서 기축통화는 달러가 되었는데, 이 달러를 생성하는 것이 바로 FRB(Federal Reserve Board/Banks)이다. 이곳은 미국의 중앙은행[8]이지만 민간은행이고, 이 민간은행의 최대 주주들이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매우 우호적인 기업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미국 대통령도 어쩌질 못하며, JFK 대통령이 이를 바로잡으려다 암살당했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1971년 닉슨 대통령 금태환제도를 폐지하면서 기축통화는 달러가 되었는데 이 달러를 생성하는 것이 바로 FRB(Federal Reserve)인데 이 곳은 미국의 중앙은행이지만 민간 은행이고 이 민간은행의 최대 주주들이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매우 우호적인 기업들이라는 것이다.
초기 FRB의 주주(총20만)
록펠러와 쿤롭의 뉴욕내셔널시티은행 3만
폴와버그의 뉴욕내셔널상업은행 2만1천
JP의 퍼스트내셔널은행 1만5천
로스차일드의 하노버은행(1만2천),체이스은행(6천),케미컬은행(6천) 총 2만4천
후에 이들 은행의 연준 지분은 조정되어 53%에 이르게 되고 현재는 약 70%대로 추정.
에이브러햄 링컨 - 중앙은행 시스템을 거부하고 그린백을 발행. 1865년 4월 15일 암살.
앤드루 잭슨 - "내가 은행을 죽였어"라는 유언을 남긴 대통령, 중앙은행 시스템을 거부. 암살시도가 있었으나 암살자의 권총 2발 모두 불발로 겨우 암살당하지 않는다.
존 F. 케네디 - FED를 배제하고 재무부에 화폐발행권을 넘겨줌. 1963년 11월 22일 암살.
5.3. 비밀결사
음모론의 대부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에 엮이지 않으면 섭섭할지경. 비밀결사 음모론이 다 그렇듯 중구난방 날뛰는데, 비밀결사의 창설자이자 지도부라는 주장, 지도부의 일부라는 주장, 비밀결사의 하수인이라는 주장등 다양한 주장이 혼재되어있다.
하지만 정작 로스차일드 가문과 프리메이슨의 관계는 영 좋지 않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숙적이었던 베어링 가문의 연고지가 스코틀랜드 이고 베어링 파벌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것이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이다. (...) 일루미나티의 경우 프랑스 로스차일드 세력과 관계가 있긴 하나 이것 또한 여러 지역의 서로 다른 프리메이슨 세력들과 주변국 세력가들과 이해관계가 꼬여있어 딱히 로스차일드 가문에 일루미나티와 친했던 것도 아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본래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의 자금을 철저히 지킨 충의를 인정받아 출세하여 유럽 전역에 진출, 크게는 영국과 프랑스 분파로 구성되어있었기 때문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런 저런 세력과 조직에 어설프게 얽었다간 커다란 모순점이 생겨 뒤통수를 얻어맞기 쉽다.
그리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동인도 회사가 세포이 항쟁으로 완전히 망하고, 대중국 아편무역을 사순 가문이 독점하면서 경쟁 세력의 구심점이 깨지기 전까지는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고, 이후 브레튼우드 체제로 대표되는 금본위주의를 밀다가, 엄청난 역풍을 맞고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누린 황금기는 정말 짧다.
6. 매체
상기한 대로 각종 음모론 덕분에 로스차일드 가문의 서브컬처에서의 묘사도 비밀스럽게 세계를 지배하는 흑막으로 자주 등장한다. 물론 예외도 없지는 않지만...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시리즈에서 주인공 오토나시 사야를 지원하는 뒷빽(...)으로서 활동하는 조직인 "붉은 방패"로서 등장. 작품에 따라서는 조직을 이끄는 가문의 이름이 로스차일드가 아닌 다른 이름의 가문으로 나오기도 하는 등 [9] 직접적으로는 그 모티브인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연관성을 딱히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어찌되었든 이 시리즈에서 나오는 "붉은 방패"는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을 가리킨다. 아무튼 로스차일드 가문이 악역으로서 등장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라이트노벨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에서도 "세계"의 일원으로 등장.
폴아웃3의 동부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 구성원들 중 수석 서기란 사람들 중에 서기 로스차일드란 사람이 있다(메인퀘 관련 브리핑을 하거나 리버티 프라임 관련 의뢰를 주는 그 사람). 이 로스차일드가 그 로스차일드 가문과 관련이 있는지는 불명. 다만 하필이면 빨간 옷(상술했듯 로스차일드는 '붉은 방패'라는 뜻의 독일어 성씨를 영어로 번역한 이름이다)을 입은데다가(물론 빨간 옷은 이 사람만 입은게 아니고 서기나 엘더들도 입는 옷이긴 하다), 동부 브라더후드의 중요한 부분들을 관리담당하는 수석 서기라는 점 등등 현실의 로스차일드 가문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도시야월기담에서는 에티루스의 이야기에서 언급되는데, 워털루 전투가 발발하던 시기에 통신원을 매수하여 영국 증권 주식 대부분을 삼켰다고 한다. 에티루스 또한 이들에게 낚여 전 재산을 날렸었다고. 그러나 저택에 쳐들어 온 에티루스의 협박으로 주식 20%를 그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에티루스는 뭐든지 올 인은 좋지 않다는 교훈(...)을 얻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다룬 역사책으로 데릭 윌슨(Derek Wilson)의 '가난한 아빠 부자 아들'(Rothschild : A story of wealth and power)이 있다.
귀족 작위
1816년, 4형제는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1세에 의해 귀족 작위를 받았다. 네이선은 1818년에 작위를 받았다. 그들 모두 1822년 9월 29일 오스트리아 남작의 권리를 수여 받았다. 몇 명은 드 혹은 폰을 귀족의 증거로 인정했다. 1885년에 로트실트 은행 런던 지점의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 2세(1840–1915)는 귀족 직함을 수여받았다.
로트실트 은행 사업은 유럽의 산업화 동안 국제적 융자로 높이 발전했고 세계 전역을 걸쳐 철도사업을 후원할때 철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 계획을 지지하여 공장에 자금조달을 해주었다. 대다수의 사업은 직접적으로 로트실트 가문의 해상보험을 포함한 자본으로 이루어진다.(1824년)
시오니즘
로트실트 가문은 이스라엘의 후원자이다. 에드몽 자크 드 로쉴드 남작은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리숀레지온의 첫 번째 이민 후원자이다. 1917년, 월터 로스차일드는 밸푸어 선언의 수신인이었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영국 정부로부터 약속받았다.
제임스 아먼드 드 로스차일드는 이스라엘에 많은 자금을 조달했다.
이스라엘의 지방법원건물은 도로시 드 로스차일드가 후원하였다.도로시 드 로스차일드가 새 지방법원 건물 건축을 후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려고 국무총리 피러스에게 썼던 편지가 국외 대통령 회의실에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 지점
막내 아들 자크 메이어 드 로쉴드(1792–1868)는 파리에 지점을 세웠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그는 대다수 철도 건설과 채광 산업의 자금조달 역할을 했다. 자크의 아들 귀스타브 드 로쉴드와 알퐁스 자크 드 로쉴드는 은행 사업을 계속했고, 모은 돈을 프로이센 왕국이 1870년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점령한 땅의 반환을 요구하는데 사용하였다. 다음 파리의 로쉴드 가문 세대는 여전히 가문 사업에 집착했고 국제적 투자 은행의 거장이 되었다. 로트실트는 투자 뱅킹 합병 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획득 계약의 톰슨 금융 업계를 이끌었다. 미국에선 그들의 합병 뱅킹 리스트럭처링 그룹은 미국 항공과 델파이의 재정이 곤란할 것 같은 거래를 하였다. 로트실트는 2003년년에 영국 친척이 개인의 탄탄한 회사를 창설하기 위해 공적으로 소유한 프랑스의 로쉴드 뱅킹 하우스가 기인됐다는 사실로 매각한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EU의 공적인 상업 뱅킹 거장들로부터 경쟁의 맹습을 받았다.
두 번째 프랑스 지점은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에 의해 창설되었다.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가문의 영국 지점의 소유주인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 의 4번째 아들이었다. 1850년에는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가 파리로 옮겨왔고, 표면상 그의 삼촌과 자크 메이어 드 로쉴드와 함께 일했다. 그런데 1853년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는 지롱드 주의 보르도 포도주의 생산 양조장인 샤토 무통 로쉴드를 획득했다.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는 사유지를 개명했고, 샤토 무통 로쉴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상표중 하나가 되었다. 너세니얼의 삼촌 자크 메이어 드 로쉴드는 샤토 라피트 로쉴드 양조장을 획득했다.
파리 사업가들은 1982년에 프랑수아 미테랑의 사회주의적 정부가 그것을 Compagnie Européenne de Banque라고 개명했을때 죽음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다비드 드 로쉴드 남작이 39세에 오직 세 명의 직원과 자산의 100만 달러로 새로운 Rothschild & Cie Banque의 재건축과 창조를 결정했다. 오늘날 파리의 은행은 글로벌 사업에 상당수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해서 22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다.
오스트리아 지점
빈에선, 살로몬 마이어 폰 로트실트가 1820년대에 은행을 청설했고 가족은 존경받는 시민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로트실트 가문은 그들의 서비스 때문에 후에 오스트리아 황제에게서 귀족 작위를 받는다.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나 루이스 폰 로트실트 남작과 오스트리아의 가장 큰 은행은 은행의 파산을 막기위해서 미수의 크리 디트 안시 탈트를 떠받쳤지만 제2차 세계대전동안 나치에게 그들의 은행을 내어주고 나라에서 도망쳤다. 그들의 로트실트 궁전들은 나치에 의해 압수되고 약탈당했다. 그들 중 몇명은 미국에 안식처를 찾았다. 1999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나치에 의해 빼앗겼던 250개의 예술품과 전리품을 로트실트 가문에게 돌려주는 것에 승인했고 예술품과 전리품은 박물관에 보내졌다.
이탈리아 지점
1861년 이탈리아 통일로 마침내 로트실트 가문은 나폴리 은행사업을 종결했다.
현대 사업
2003년 7월에 런던과 파리의 은행들이 한 David René de Rothschild의 공동 의장 밑의 Concordia BV라는 마스터 소유 회사를 통해 통합되었을 때 새로운 로트실트 사업 조직의 상관이 재편성 되었다. 이 주장에는 Rothschild et Cie Banque가 로트실트 가문이 다른 어떤곳에서도 N M 로트실트와 런던에 있는 그의 아들을 포함한 AG 은행 통제를 연속적으로 잡고 있을 동안 프랑스와 유럽 대륙의 뱅킹 사업을 컨트롤 한다는 것이다.[3] 로트실트가 2005년에 연속적으로 가지고 있던 AG를 홍콩의 자딘 메서슨의 보조였던 자딘 스트레직에게 파는 확률은 20%였다. N M Rothschild & Sons는 사업의 대부분을 기업 인수 합병을 해주는 전문가로 일을 하였다. 2006년, 그는 전체적으로 104.9억 달러로 영국 인수합병에서는 2위가 되었다.2006년 그는 5.5억 파운드 자산 총계와 83.2만 파운드의 세금이익을 기록했다.
자크의 또다른 자손인 에드몽 아돌프 드 로쉴드는 오늘날 세계의 15개국과 교류할 수 있는 제네바에 LCF 로트실트 연합을 창설했다. 연합의 Banque Privée Edmond de Rothschild S.A, La Compagnie Benjamin de Rothschild S.A를 포함한 수위의 사업은 비록 이 그룹이 본래 금융 그룹이지만 특별하게도 자산관리와 개인 뱅킹과 또한 양조 보험을 했고 (아르헨티나, 남아프리카에 보르도 양조장을 가지고)농장경영, 아름다운 호텔들과 요트 레이싱도 같이 했다. LCF 로트실트 그룹은 일반적으로 에드몽 남작의 아들인 벤야민 드 로트실트에 의해 통솔되었다.
메이어 암셀 로트실트의 중요한 자손들
- 알폰스 제임스 드 로트실트(1827–1905)
- 경 안토니 로트실트(1810–1876)
유명한 문화 주석
로트실트 가문 이야기는 영화의 한장면 같다. 《로트실트의 집》이라는 제목의 1934년 할리우드영화는 George Arliss 와 Loretta Young이 주역이고 메이어 암셀 로트실트의 생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국가 사회주의자(나치) 선전 영화인 불변의 유대인이라는 영화와 1940년에 다른 독일 영화인 Erich Waschneck에 의해 만들어진 죽어라 로트실트(또한 Aktien auf Waterloo라고도 부른다)를 인용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로트실트》는 1818년에 패밀리 부흥역사로 만들어졌고 1971년 토니 상을 수상했다.
프랑스에선 로트실트가 여전히 전통적인 관례로 위험한 건강에 걱정했다. 가문은 또한 가문의 이름을 르네상스 궁전, 금과 돈의 엄청난 사용, Victorian horror vacui의 센스와 미술의 걸작들을 포함한 장식예술의 예술가인 매우 매혹적인 생활 스타일을 사는 le goût Rothschild에게 빌려주었고, Le goût Rothschild는 내국의 로버트 데닝, 비센트 가브리엘 Fourcade와 같은 디자이너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