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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연구방

율법의 변역과 멜기세덱의 십일조(히브리서를 중심으로)

작성자passover|작성시간15.04.18|조회수475 목록 댓글 2

 

신약에서 십일조를 고찰하려면 아무래도 히브리서 7장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구약에서 십일조의 유래였던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히브리서 7장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더러 그를 보충하고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 그리고 바울 서신에서 엿볼 수 있는 십일조에 대한 힌트들이 있다.

 

그렇게 중요한 십일조에 대해 바울이 구체적인 언급 없이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매우 의아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이유는 무엇이고 바울에게 있어서의 십일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히브리서 7장은 히브리서 1장부터 시작하여 전체적인 문맥(Context)의 흐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특별히 5장은 대제사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5장 11절은 7장을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가르쳐주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히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이 멜기세덱을 설명하고자 5장 12절부터 6장에 이르기까지 장황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 깨달음을 갖는 것은 마치 한 번 비췸을 얻는 것이며 하늘의 은사를 맛보는 것이요 성령에 참여한 바 되는 것이요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을 좋아하고 어디에 안주하고 있는가. 언제까지나 어머니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기를 좋아한다. 여전히 젖이나 먹고 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 편이 훨씬 쉽고 편한 안식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신앙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게으른 자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여전히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 멜기세덱에 관하여 해석한다는 것은 쇠귀에 경을 읽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십일조에 대하여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도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듣기가 둔하므로 들을 수 없는 까닭이다.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바친 십일조는 듣기가 둔한 이들에게는 결코 들려질 수 없는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여전히 멜기세덱의 십일조를 말하여도 레위의 십일조 곧, 율법에 속한 도의 초보에서 십일조를 이해하려 들기 때문이다.

 

미리 말한다면 히브리서의 언급대로 십일조는 분명 장성한 자의 것이며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의 몫이다. 이 말씀 또한 오해하지 말 일이다. 여전히 레위의 십일조를 가지고 장성한 자만이 십일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려한다면, 여전히 율법 아래의 돈 십일조이고 도의 초보를 동어반복하는 일일 따름이다. 

 

우리가 십일조라는 주제로 이 글을 진행하기 때문에 히브리서 7장을 곧바로 살펴보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시도 자체가 사실은 무리가 있다. 7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서 1장부터 철저히 살펴보아야 하고, 더구나 6장의 언급들을 조목조목 살펴보므로 우리의 귀를 청소하고 우리의 눈에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전제하에 글이 진행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고, 혹 듣기가 어려운 분들은 이 점이 참고되어야 할 것이다.

 

 

창세기 14장의 기사에 나타난 대로 멜기세덱과 아브라함과의 관계성에서 십일조는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이 십일조의 원형이다.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칭하고 있다. 살렘이라 함은 예루살렘의 옛 이름이요 팔레스타인의 한 도시 이름이다. 멜기세덱의 고향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히브리어로 ‘평화로운’ 혹은 ‘완전한’ ‘정다운’ ‘충만한’ ‘공평한’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최상급 표현으로 most high를 쓰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즉, 후에 나오는 레위 제사장과 이미 구분되는 제사장이며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벌써 레위 제사장에게 드렸던 십일조와 차별이 있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하면 임금들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를 축복했던 분이다.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주었던 바로 그 분이다. 곧 멜기세덱을 해석해 보면(혹은 번역해 보면) 의의 왕이요, 살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며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분이라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고 4절은 말씀하고 있다. 노략물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아크로디니온'이다. 이 단어는 신약은 물론이요 70인역에서도 이곳 밖에는 쓰여지지 않고 있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살펴보기가 쉽지 않다. 다만 그 어원을 보면 '아크론'(말단, 맨 끝, 가장 높은)과 '디스'(더미)의 합성어로 더미의 가장 높은 것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더미의 꼭대기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전쟁을 치루고 나서 빼앗긴 것을 찾아온 것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이라고 의역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순히 전리품이라거나 노략물이라고 단언 할 수는 없다.

 

앞서 살펴본 대로 전쟁은 전쟁이로되 그돌라오멜의 것들이 탐나서 치룬 전쟁이 아니었으며 빼앗긴 것을 찾아 오는 전쟁이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이스라엘, 곧 잃어버린 하나님의 것을 찾아 그 중 가장 좋은 것을 구별해 놓는 작업이 십일조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7장의 별칭은 일반적으로 십일조장이라고 부르기 쉬우나 사실은 대제사장의 장이다. 십일조는 제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며, 이는 곧 제사장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취하고서 이루는 일이 무엇인가.

 

사실 6절은 2절과 비교하면서 헬라어 문장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절은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나누고 있는 장면이라면 6절은 멜기세덱이 십분의 일을 받고(바치고) 있는 장면이다. 우리말 성경은 그것을 아브라함에게서라고 하고 있지만 헬라어 문장은 아브라함을 그가 십일조로 받는다(혹은 바치다)로 표현하고 있다. 헬라어 문장을 직접 살펴보자.

 

   호 데 메 게네아로구메노스 엑크스 아우톤 데데카토켄 아브라암 카이 톤 에콘타 타스

   에팡겔리아스 유로게켄

 

 

헬라어는 영어에서 사용하는 간접목적어를 여격으로 표시하는 것이 관례다. 만일 ‘아브라함에게’라고 하려면 여격을 사용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목적격을 취하고 있다. 십분의 일을 취한다는 어휘는 하나의 동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데카토오'라는 동사는 신약에서 두번 사용되고 있는데 이 단어는 '데카테'(십분의 일)에서 유래한 동사다. 그 단어 자체가 십분의 일을 취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혹은 열번째를 드리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동사는 두 가지의 견해를 갖게하는 동사다. 즉, 십일조를 ‘바치다’ 라고도 할 수 있고 ‘취하다’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바친다고 보아도 되고 받는다고 보아도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것은 독자의 판단 여하에 따라서 취할 수 있다. 나는 ‘십일조를 바치다’의 의미를 따르고 싶다. 그 이유는 후에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7장 6절의 본문은 멜기세덱을 선행사로 취하고 있는 독립관사 혹은 관계대명사로 볼 수 있는 '호'가 주어다. 그리고 본동사는 '데데카토켄'(동사,직설법,완료,능동태,3인칭 단수), 그리고 목적어는 '아브라함'이다. 이를 해석하면 ‘그러나 레위족보에 들지 아니한 그가(멜기세덱) 아브라함을 십일조로 바치다(받다)’의 의미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가 약속들을 얻은 자를 축복하였다’가 된다.

 

2절은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나눠주고 있는 장면인데 반하여 6절은 그 아브라함이 십일조로 받쳐지고 있다. 누가 바치고 있느냐 하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십일조로 바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십일조로 받는다고 보아도 문제될 것은 없다. 그가 곧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분이기에 받는 분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결국 십일조를 바치는 행위는 자신이 십일조로 드려지는 행위와 동일한 결과를 가져온다.

 

자신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을 하나님께 어떻게 드린다는 말인가. ‘이 몸을 주께 바치옵니다’는 말처럼 추상적인 말이 없다. 어떻게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인가. 그리고 드려진다는 것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인가. 그렇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바친 적이 없다. 다만 노략질당한 것을 되찾아와서 그 중에서 십분의 일을 취하여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 뿐이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십일조로 받고 있으며 바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다.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 원리이기도 하다. 레위의 경우를 보자. 7, 8절은 좀 더 후에 살펴보고 우선 9절을 살펴보자.

 

카이 호스 에포스 에이페인 디 아브라암 카이 레위 호 데카타스 람바논 데데카토타이

 

9절도 번역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문장이다. 의역을 하면 ‘말하자면 십분의 일을 취한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일조로 드려졌다’가 된다. 이 문장에서의 주어는 ‘레위’다. 그리고 동사는 '데데카토타이'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 3인칭단수)이다. 이 문장에서도 중요한 것은 레위가 십일조로 드려졌다는 사실이다. 이 문장은 능동태 문장이 아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레위가 드려진 것이다. 레위는 십일조를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어느덧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드려졌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십일조는 제사장적 삶에서 엮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7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의 원리대로 낮은 자는 높은 자에 의해서 십일조로 드려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8절 문장은 이렇다. “또한 여기서는 죽은(현재분사,능동태) 자들이 십일조를 받으나(현재시제) 그러나 저기서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는다”

 

 

11절부터는 십일조의 이야기가 갑자기 제사장의 문제로 넘어가고 있다. 십일조는 제사의 문제다. 동시에 중요한 것은 어떤 제사장이냐 하는 점이다. 따라서 십일조의 문제가 제사장의 문제와 같이 진행되는 것이다.

 

레위의 제사장과 멜기세덱의 반차를 비교하면서 언급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레위 계통이라는 것은 율법 아래에서의 십일조요 제사직분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율법적 제사와 십일조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 있으니 이 제사장에 의해서 제사직분이 집행된다.

 

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이 제사장의 일이다. 율법 아래에서 세움 받은 레위 제사장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 11절 이후 8장에서 10장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제사에 대한 말씀이 언급된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세우심 받은 대제사장 곧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다고 하고 있다.

 

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심하게 살펴보면 십일조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다.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아브라함을 십일조로 바쳤듯,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하시는 일 또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낮은 자가 높은 자의 복빎을 받는 원리대로 낮은 자를 축복하고 결국 그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자로 빚어서 하나님의 것으로 삼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인간을 자기 백성들로 삼고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께 드려지도록 하고 계신가. 이 대제사장의 하시는 일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장차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고자(히 9:28)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언급되고 있는 것과 십일조를 분리해서 생각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지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새롭게 세운 대제사장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히 5:7~10)

 

대제사장이 되어 구원의 근원이 되었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바로 구원의 근원이라 함은 그를 좇는 모든 이들도 동일하게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되셨다 함이요 여기서 결국 십일조의 문제도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여러가지 율법 조항들 중에 속해 있는 하나의 조항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전부를 일컫는 것이다. 율법은 반드시 변역하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죽은 자에게 바치던 십일조도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에게 드리는 것으로 변역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다.

 

복음서에서 이러한 대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사건을 살펴보자. 이는 매우 시사적이며 암시적인 사건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17:11~19)

 

 

이 기사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열 문둥병자의 이야기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가는 중에 깨끗함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 누가복음 5장 12절 이하의 기사를 보면 온 몸에 문둥병 걸린 사람이 예수의 고침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눅5:13~)

 

이곳에서는 간단하게 나와 있다. 문둥병이 낫게 되면 반드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증거하는 것이 율법의 관례다(레14:1~20). 그 중에서 속건제물은 속죄 제물과 일례로 제사장에게 돌리라고 한다. 이는 거룩한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다시 열 문둥이의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그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가는 중에 깨끗함을 받았다. 그러나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은 이미 너희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선언이나 진배 없다. 다만 그것을 가다가 확인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어떻든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시던 말씀대로 문둥병자를 고치고 계신 것이다. 문둥병자는 깨끗함을 입고 제사장에게 가고 있지만 정작 놀라운 사건은 아홉 문둥이들이다. 그들에 대한 기사는 더이상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고 깨끗함을 입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깨끗함이 구원은 아니다. 그들은 레위에 속한 제사장만 알았지 율법이 변역한즉 제사직분도 변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중에서 한 사람만 이러한 사실을 알고 변역되어 세워진 영원한 대제사장에게로 몸을 보이러 온 자가 있었으니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는 죽지 아니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에게 자신의 몸을 드리고 있는 것이요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에게 드리는 십일조(레위의 십일조)와 산자에게 드리는십일조가 여기서 극명하게 나뉜다. 아홉 문둥이 곧 다수가 가는 길이 있고, 한 문둥이, 곧 하나가 가는 좁고 협착한 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둥이는 제사장에게 몸이 깨끗해진 것을 보여야 비로소 격리되었던 곳에서 사회구성원으로 다시 참여할 수 있고, 제사장은 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17:18-19)

 

 

이것이 비록 깨끗함을 받았지만 구원을 받지 못하고 각기 제 갈길로 흩어지는 아홉 문둥이의 사건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도 레위 제사장 아래에 속하여 살았을 것이며, 영원한 대제사장을 앞에 두고도 그를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레위에 속하여 있기를 좋아한다. 율법은 일면 편하게 해주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적당한 만족을 주며 적당한 쉼을 얻게 해준다. 거기에 속한 구성원의 일원, 곧 멤버쉽을 통해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그러나 마침내는 죄의 구렁에서 사슬로 서로의 목을 꽉 조여 매는 것이 율법이다. 우리는 왜 이러한 기사가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사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 중에서 한 사람, 그야말로 열명 중에 한 사람이 있었으니 십일조를 비유하는 게 아니라면 무엇인가.

 

성경은 이와 유사한 기사가 곳곳에 나타나 있다. 마태복음 22장은 천국의 혼인잔치 비유를 통해서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청함 받은 자는 많되 택함 받은 자는 적다는 안타까움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란 어떠한 경우인가. 이 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무엇이며 십일조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바울의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는 구원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허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2:15-17)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이 십일조가 아니고 무엇인가. 아니 물질의 십일조 혹은 소득의 십일조가 과연 십일조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가.

 

바울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한다. 곧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사,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진정한 십일조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이러한 것이며 그것만이 쭉정이와 구분되는 알곡이다. 이러한 열매가 드려질 때 그것은 곧 향기나는 제물이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받으실 만한 예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것이 폐해진 후에 둘째 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참조)’는 말씀을 성취케 하려는 것이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혹자는 산 제사로 우리의 몸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그것이야 말로 참으로 추상적인 말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분이 계시리라.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제사장의 삶을 이해하여야 한다.

 

대제사장이신 예수의 발자취를 알아야 하고 중보자 되심을 이해해야 하며 동시에 그를 주로 삼고 사는 이들은 같은 자취를 걸어갈 때만 십일조의 삶이 전개되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깨달아야 한다. 왕같은 제사장적인 삶이다. 이것이 곧 십일조를 드리는 삶이요 의로운 제물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 글의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를 상기해 보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노략질당한 것을 찾아와서 그것 중에 십일조를 드렸는데 멜기세덱은 바로 아브라함을 십일조로 바치고 있는 모습을 기억하면 산 제사로 우리 몸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는 말씀대로 전쟁터에 나가서 잃어버린 자를 다시 찾아다가 회복시키는 제사장적 삶을 사는 것이요 그것은 곧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피흘림이요 죄를 사하는 권세요 사랑하며 사는 삶의 모습이다. 그것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매우 구체적이며 피나는 전쟁터의 삶이요 평화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이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온전한 십일조다.

 

이것이 어떻게 율법으로 가능한 세계이겠는가. 어떤이들은 여기서 또 다시 이 말씀을 율법으로 들으려 한다.

 

복음 전하는 삶, 생명과 사망의 냄새로 사는 삶을 율법으로 진행하려 한다면 여전히 멜기세덱에 대하여 조금도 듣지 못한 까닭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첫 번째 것을 폐하고 두 번째 것이 세워져야 한다. 첫 번 것이 폐해지기 위해서 금을 연단하는 불이 필요하다. 이러한 삶 가운데 주어지는 축복이 말라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약속들이다. 말라기서는 히브리서에서 해설해주고 있는 멜기세덱의 관점에서 읽고 해석되어야 한다.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늘 그것이 관건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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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passov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4.20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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