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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연구방

암 5: 24 정의를 물 같이 ( 1 )

작성자jung8h|작성시간26.01.06|조회수49 목록 댓글 0

 

암 5: 24 정의를 물 같이 ( 1 )                                                                      

                                                                                                             

             

암 5: 24 정의를 물 같이 - 오직 정의를 물 같이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 오직 공법을 물 같이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

 

본 절에 의하면, 백성들의 잘못된 예배는 정의와 공의의 결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회에 공의가 없었음을 보인다.

 

과연 이스라엘 사회는 정의가 없었고 불의와 불법이 가득하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절기들과 집회들이나 예배나 헌금이나 찬양이 아니고, 모든 죄를 버리고 계명을 지키는 경건한 삶과, 도덕적인 삶, 즉 거룩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삶이다.

 

 

1] 오직 정의를 물 같이,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킨다.

 

사 10: 22 -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아모스는 인간 사회에 구현되어야 할 원리로 보았다(7, 15. 6:12).

 

즉, 사회 질서와 관계있는 것으로 율법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사회구조 속에서 구현되고 정직하게 이웃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

 

 

2]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흐르게 할지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갈'(*)은 '굴리다'(roll)는 뜻의 '갈랄'(*)에서 온 나팔형 동사로 굽이치는 강물처럼 격렬하게 흐르게 하라는 명령형이다(BDB).

 

또한, 히브리어 원문에는 '끊임없는'(perpetual)이라는 뜻을 가진 '에이탄'(*)이라는 형용사가 있어서 그 강도를 더해준다.

 

그러므로 공법과 정의가 적극적이고도 계속적으로 흘러야만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가 의미가 있고 가치 있음을 보여준다.

 

24에서는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 무엇이 꼭 선결되어야 하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앞에 있는 세 가지즉 절기와 성회제물찬미와 같은 형식적인 예배행위를 가지고서는 소용이 없다.

 

오직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참된 경배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배는 예배자의 마음속에 정의와 공의가 자리잡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5:7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의를 무엇으로 변하게 했습니까?

곧 독이 있어 사람을 죽이는 쓴 쑥으로 변하게 했다그렇게 하지 말고 정말 정의의 참된 기능 그대로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원천이 되는 물같이 흘릴지로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또 "공의를 마르지 않은 강같이 흘릴지로다"고 하였다마르지 않은 강이라고 하는 것은 1년 사시사철 메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가는 강을 말한다.

 

이스라엘에는 "와디"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 와디는 우기에 비가 오면 물이 흘러내리다가 비가 오지 않은 건기에는 바짝 말라붙어 버리는 강이다여기서 말하는 하수는 그런 것이 아니다. 1년 내내 끊임없이 물이 계속해서 흘러넘치는 강을 의미한다.

 

정의와 공의를 한두 번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끊임없이 넘치도록 실현하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다.


종교의 형식만 가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정의를 소유하는 것만이,

그것도 넘치는 하수와 같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이와 비슷한 가르침들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호 6: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미 6: 6-8 –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 –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 4:23에 보면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령이라는 말은 형식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껍데기뿐인 예배가 되서는 안 된다.

 

신령은 인간 요소 중 가장 높고 가장 깊고 가장 고귀한 부분이다.

그런 것을 다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진정이란 참된 것이다거짓 것에 반대되는 것이다.

참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해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다.


롬 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과거에는 우리 몸이 더러움의 도구였다.

그러나 이제는 성결의 생활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이다.

 

 

3] 한국교회에 하나님이 계신가(암 5:21-24) / 권진관 교수 (새길 교회)


최근 한국 사회는 큰 위기의 상황에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 문제, 노 대통령의 후원회장이었던 사람 소유의 용인 땅 매매 문제,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맺은 합의 즉, 필요하다면 북한 제재를 위해 further steps(추가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한 것 등으로 나라가 죽 끓듯 혼란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경기가 불황의 늪으로 주저앉고 있어서 IMF 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 사회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하고 있는 위기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아무래도 북한의 핵문제일 것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분간해야 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분간한다는 것은 역사의식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며, 역사 속에서 무엇이 가장 필요한 과제인지를 분명하게 알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또 남풍이 불면 '날씨가 몹시 덥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를 말하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알지 못하느냐?"고 나무라시면서, 이 시대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선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시대의 징표, 즉 signs of the times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람들 중에 동학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자기의 이름이 원래 경상이었는데, 때 시(時)를 이름에 넣어 최시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때 시(時)자를 넣도록 해서 동학교도들은 이 시(時)자를 이름에 많이 넣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 교회는 어떻습니까? 때의 징표와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분석하고 이해하고 필요한 과제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교회의 두 배 성장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에 아모스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것을 오늘의 우리 교회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 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너희의 특별예배가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특별예배 때마다 바치는 온갖 종류의 예물과 찬양, 그리고 외양에 치우쳐 호화롭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위화감만 주는 예배당 건물과 그 치장이 이제는 역겹다.


주일마다 바쳐지는 헌금과 절기에 따라 바쳐지는 엄청난 특별헌금이 조금도 달갑지 않다. 그것들을 거들떠보기도 싫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나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살지게 하고, 목사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을 부유하게 하는 데에만 쓰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찬양대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찬양도 그리고 그것을 반주하고 있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도 이제는 듣기가 싫다. 집어치워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그 다음에 있습니다. "오직 정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여기에서의 핵심은 일상생활에서의 정의의 실천이 중요한 것이지 종교적인 예식이나 겉치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외양적인 예식 중심의 종교는 종교 자체의 멸망이 아니라, 그러한 종교를 가지고 있는 나라와 사회도 멸망해 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이 아모스서의 내용이다.

 

가식적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회 속에서 justice(정의)와 바름(righteousness)이 땅에 떨어져 있는데 그 책임은 결국 종교에 있다고 아모스는 보는 것입니다. 종교가 썩어 있다면, 당연히 사회도 썩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한완상 박사님께서 "한국교회는 왜 버림을 받고 있는가?"는 질문을 하셨는데, 저는 오늘 이 질문에 이어서 한국 교회에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뜻있는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즉, 성서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덕방과 같은 교회

 

제가 보기에 한국교회는 두 가지의 유형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첫 번째의 교회는 복을 빌려주는 교회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러한 교회를 "복덕방"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부동산 투기를 해 주는 곳이 복덕방, 떴다방인데, 복덕방과 떴다방과 오늘날의 교회가 전연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교회들로부터 나오는 설교는 한결같습니다. 누가 약간 더 기교 있게 잘 설교하느냐에 그렇게 잘 못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그 기본 내용은 같습니다.

 

교회가 잘 되고, 교인들의 생활이 잘 되어 가는 것을 위해 빌고 또 빕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러한 교회들의 모습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교회는 너무 많은 축복을 팔고 있습니다.

축복 찾아다니는 교인들은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1000개면 하나님도 1000개가 있어야 합니다. 각 교회마다 하나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교회의 하나님만이 진짜라고 하니까...


이런 교회는 축복 성회, 영성 훈련, 강청(强請) 기도, 통성기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교회 바깥의 문제, 사회의 문제는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에게 복되는 것과 교회가 살지는 것만을 위해서 열심히 통성기도하고, 성령 충만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교회들일수록 목사는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고, 신자들은 주인이 아니라, 종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에는 수많은 비리가 생기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목회자의 치부와 세습 그리고 제왕적 군림입니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역사적 예수의 삶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만이 중요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대속론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심으로 대신 죄를 짊어지셨다는 것만을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역사적인 삶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므로 그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오로지 대속의 피만을 믿고 복을 빌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보혈의 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은혜로 구원받고 복받는데, 그것은 교회에 충성하는 것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교인들이 아무리 교회에 충성을 다하고 열심히 복받기를 기도 드려 보아도, 일이 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 안에서 소외받고, 나아가서는 교회로부터 억압까지 받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 지는 사회적 구조적 문제를 간과하고 복만 빈다고 되는 것이 아니므로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성령충만해도 될 리가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교인들은 아직도 미몽에서 깨지 못하고, 더 큰 복을 준다고 약속하는 교회로 자리를 옮겨 봅니다.


이러한 교회에서 소외될 뿐 아니라 억압마저 받게 된다는 것을 한 예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지난 토요일 제 친구 딸이 결혼식을 한다고 해서 가보았습니다.

 

주례 목사가 사용한 성경 구절은 에베소서 5:22∼24의 말씀이었는데, 그 목사가 권면한 것은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여라, 결혼하면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을 이루는데 이제부터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므로 남편에 복종하며 살라,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듯이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주례 목사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남녀평등을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법도는 남녀의 불평등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런 말을 회심의 미소를 띄면서 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등골이 오싹하는 추위와 잔인함을 느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 더 가관이었습니다.

 

주례 목사의 교회에서 신부에게 면사포를 주었는데, 그 의미를 주례 목사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이 면사포를 머리에 쓰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머리에 이 면사포가 얹혀지면, 이제 그 머리는 더 이상 없는 것이며, 이제부터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므로 남편이 하는 일에 복종하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하는 사람들이 매우 조심해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주례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딸 가진 아빠로서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감리교회 총회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면, 이런 말이 전면에 나옵니다. "다시 일어나 빛을 발하는 감리교회" 그리고 그 아래 이런 말이 나옵니다. "감리회 300만 총력 전도 운동." 다시 일어나 빛을 발한다는 말에 기대를 걸고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그것은 총력 전도 운동을 위해 다시 일어나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라가 어떠한 위기에 빠지건 말건, 오직 교회가 커지는 일에만 정신을 쏟고 있습니다. 현재 감리교회는 140만이 약간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몇 년 내에 2배 이상으로 불린다는 것인데, 이러한 계획이 성취될 수 있을지는 고사하고, 이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여러 가지 무리한 일들 때문에 교인들이 더 환멸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300만 명이 되어가면서 그리스도의 빛은 교회 안에서 점점 흐려질 것이고 결국 꺼지고 없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300만이 되기도 어렵겠지만, 빛을 발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이렇게 볼 때, 새길교회는 앞으로 더 잘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교인들이 우리 교회로 몰려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로 목사에게 데어서 우리 교회로 온 것이라고 보여지는데, 300만을 만들기 위해서 목사들이 무리한 일들을 벌일 때,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교인들을 배가할 수 있을 겁니다.

 

감리교회가 배가 운동하는데 왜 새길교회가 왜 배가될까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아이러니한 진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일수록 교인들을 피동적인 존재로 만듭니다. 교회의 비리에 대해서 아무 말 못하는 사람들로 만듭니다. 교수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수 많은 지성인들이 이러한 교회에 다니지만, 권위주의, 더 나아가서 이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온갖 비리에 대해서 아무 말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를 옹호하기까지 합니다. 교인들은 교회 당국에 무조건 복종하고 충성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러한 가르침에 교인들은 충실하고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우리에게 절대로 노예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율법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오늘날에는 권위주의적인 교회에 평신도들이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복받기 위해서 복에 노예 되고, 교회에 노예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자유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교회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일하는 것입니다.

 

수동적으로 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뒤를 따라 은혜의 해를 이 땅 위에 선포하는 것이고, 그러한 사회를 위해 투신하는 것입니다.

 

격화소양(隔靴搔양) 하는 교회

 

두 번째로 오늘날 한국교회는 격화소양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발바닥이 가려우면, 직접 발바닥을 긁어야 하는데, 신발바닥을 긁으며 하는 시늉만 한다는 말입니다. 발바닥이 가려운데 신발바닥을 긁는 교회를 말합니다. 하는 시늉만 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한 예로, 무직자, 노숙자들에게 점심을 주는데, 교회에 예배를 드려야 식권을 주는 경우가 그러한 경우입니다. 노숙자들을 돌보는 일은 그 자체가 복음적인 일이고, 그 자체가 기독교적인 의미를 가진 예수 따르미의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사람에게만 식사를 주는 것은 이들의 인간적인 자존심을 더욱 짓밟는 일이 아닐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들을 영적인 시험에 빠뜨리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식사를 하기 전후로 자연스럽게 교회에 들어와 예배드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려야 식권을 준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도 볼 수 있지만 한국교회는 결코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고민하거나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시혜적으로, 그리고 교회의 확장을 위한 방편으로 사회적인 일에 개입합니다마는 그러나 결과는 매우 부정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왜 한국교회는 교회주의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왜 한국교회는 이 교회라고 하는 장벽을 뛰어넘어 사회 속으로 예수의 정신을 확장하지 못하는 것일까?

 

저는 이 문제가 바로 한국 기독교, 개신교가 가지는 가장 어려운 질문이요 뼈아픈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는 이러한 교회주의의 장벽을 넘지 못하는가?


한국 기독교의 특징은 기독교의 사회이론, 사회사상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자들 중세서 사회적인 문제를 심도 있게 신학적인 기초를 가지고 접근해 들어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고 그러한 저서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한스 큉이 한국에 와서 강연했습니다. 강연 제목은 "국제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는데, 독일을 비롯하여 서구 기독교에서는 사회적인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습니다.

 

서구 교회가 죽어간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서구 교회는 적어도 교회적으로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것들을 해결해 보려고 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왜 미국에서 인문학적, 신학적인 거인이 나오지 않는 것인가? 왜 한국에서 한스 큉과 같은 신학적 거인이 나오지 않고 있는가를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은 너무 자기 나라에 자족해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 살다보면 세상을 모르게 되며, 한국은 너무 좁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래서 한국의 신학계는 로칼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향해서 자꾸 열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 교회는 이 전체 세계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나라의 사회에 대해서도, 담벽을 쌓고 있으니, 서구 교회, 미국 교회보다도 못합니다.

 

한국의 신학자들은 고립 분산되어 작업하고 있습니다. 교단이 갈라놓고 있고, 학교들이 갈라놓고 있고, 진보, 보수로 갈라놓고 있어서 연합하여 일을 하기가 너무나 힘든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속에서 교회는 신학을 진작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좀 앞서 나가는 신학자들을 탄압하고 교회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입에 자갈을 물리는 일에 바쁠 뿐입니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격화소양하는 교회입니다.

 

가려운 부분이 교회 바깥, 사회의 불의한 구조에 있는데, 그것을 touch하고 그곳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우리가 신앙이 없어서 그런 것이고, 우리가 영적으로 더 기도를 드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자세와 준비가 안 되어서 그런 것이라고 하면서 정말 문제 있는 곳에 손을 대지 않고, 다른 곳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사회를 다루어야 하는데, 교회와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것이 우리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격화소양합니다. 환부는 다른 곳에 있는데, 교회 안과 인간의 영혼에 있는 것처럼 격화소양합니다.

 

교회가 잘 되면, 모든 게 잘 풀린다고 주장하는 것이 격화소양입니다. 맑스가 종교비판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억압받고 있는 피조물들의 한숨이요, 심장이 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이 없는 곳에서의 영이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그리하여 맑스는 안타깝지만 민중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민중의 환상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복덕방과 같은 교회, 격화소양하는 교회로부터 진정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의 교회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대속의 교리에만 치우쳐서 교인들을 교회 안에 가두어 놓고, 자기는 아무 일 하지 않은 채 구주의 보혈로 축복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동적인 교인들로 만들어 놓는 그러한 교회를 이제는 청산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삶이 전사회적인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 기독교적인 사명이 전사회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는 교회주의적 교회, 교회와 사회의 벽을 높고 두텁게 쌓고 그 담을 못 넘는 한국 교회에 아모스는 그러한 교회에서 드리는 어떤 예배도 아편이 타는 냄새처럼 역겨운 것일 뿐이라고 그야말로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모스의 명언을 다시 읽습니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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