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포스의 직분강화
헤르메스와 아폴론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두 신의 사이는 누가 보더라도 부러워 할 정도까지 되었으나 아폴론의 마음은 불안했다. 언제 또 헤르메스의 실력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제우스가 헤르메스에게 도둑의 신이라는 직분까지 주었기 때문에 이제는 거리낌없이 타고난 소질을 유감 없이 발휘하게 되었다.
"허, 참! 고거 참!" → 아폴론의 생각
아까부터 아폴론은 뭔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대체 어떤 근심거리가 있다는 말인가! 올림포스의 권력자이며 신탁을 주관하며 제우스의 총애를 받는 실세가 아닌가?
그건 바로 새로 들어온 헤르메스 때문이었다. 비록 화해하고 앞으로 친하게 지내기로 약속하면서 손가락
걸고 도장찍고 복사, 코팅까지 하였지만, 만약 헤르메스의 마음이 바뀌어 리라를 다시 훔쳐가거나 델포이 신전의 세 발 달린 솥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보물을 훔쳐간다면 그야말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복수와 질투의 화신 헤라까지도 마음을 바꾸어 놓아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수완도 가지고 있었다. 제우스가 마이아와 바람을 피워 얻은 아들이 바로 헤르메스가 아니던가 말이다. 때문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다가는 나중에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아폴론은 하르메스를 자기편으로 확실하게 묶어두자는 의미에서 앞으로 절대 아폴론을 속이거나 물건을 훔치지 않겠다는 것을 제우스의 이름으로 맹세토록 하는 대신에, 아폴론은 헤르메스를 올림포스의 그 어느 신보다도 확실하게 거두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그에 대한 믿음의 증표로 자신의 황금 지팡이를 주었다. 이것은 제우스의 전령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헤르메스는 도둑의 신이면서도 제우스의 전령으로서 신화세계의 주요 배역을 맡아 활발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폴론이 한 가지 양보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탁에 관한 것이었다. 아폴론이 다른 신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남들이 하지 못하는 전문직종인 신탁이다. 그런데 이것까지 헤르메스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은 자신의 라스트 카드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제우스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보의 분산으로 생길 수 있는 올림포스 체계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헤르메스가 이를 섭섭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헤르메스에게 완전히 코를 꿴 아폴론은 그에게 신탁의 능력을 가르쳐주지 않음을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그 대신에 파르나소스 산의 계곡에 살고 있는 '세 명의 날개 달린 처녀들'에게 신탁을 알아내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헤르메스, 신탁은 잊거라. 대신 꿩 대신 닭이라고 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내가 말한 그 처녀들은 야생벌들의 꿀로 살고 있는데, 꿀을 실컷 먹고 배가 부르면 신탁에 응하여 바른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 처녀들을 이용해서 신탁을 알아내었다가 인간들이 신탁의 내용을 물어올 때 그것을 써먹도록 하거라. 네 솜씨라면 이 세상의 꿀들은 몽땅 훔쳐낼 수 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자알 잘알겠습니다요, 행님!"
◆ ◆ ◆
'뭐셔, 행님? 형님을 행님이라고 삐딱하게 말하네… , 저 녀석이 그래도 쪼까 삐졌나?…'
'잘 알겠다'고 나가려는 헤르메스을 아폴론이 다시 불러 세웠다.
"이보게, 내가 깜박했네. 자네 앞으로 모든 짐승들을 돌보는 직책과 죽은 자들의 영혼을 인도하는 직책을 맡아주게나. 적임자가 없어서 말일세!"
이로써 헤르메스는 죽은 자의 나라, 즉 명계(冥界)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죽은 사람의 영혼을 인도하여 지하세계로 내려가 스틱스 강까지 인도한다. 이때 헤르메스는 '영혼의 안내자'라는 뜻을 가진 '프쉬코폼포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며 그의 안내 임무는 그곳에서 끝나는데, 강을 건네주는 일은 저승의 뱃사공 카론이 알아서 건너편 언덕까지 영혼을 데려다 준다.
이렇게 아폴론은 최대한으로 헤르메스를 위해서 종전에 자신이 맡고 있었던 직책에서 거품을 몽땅 빼내 버리고 그 감투를 헤르메스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생각하지도 않은 여러 감투를 받은 헤르메스는 이렇게 아폴론의 비호와 제우스의 묵인 속에서 올림포스의 비중 있는 신이 되었고, 제우스의 전령으로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면서 인간 세상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게 되었다(그림:저승의 배사공 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