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Name MacArthur, Douglas Gender: M
born on 26 January 1880 at 18:30 (= 6:30 PM )
Place Little Rock AR, USA, 34n44, 92w17
Timezone LMT m92w17 (is local mean time)
Data source Conflicting/unverified Rodden Rating DD
출생시가 여러 가지 설이 있음. 로덴의 등급 : DD
출생시가 18:30, 10:13, 10:12, 10:37, 11:51, 등이 있으나 오전 시간은 전부 점성술사들이 추정한 것이고, 18:30은 맥아더 본인으로부터 나온 정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함. 필자는 경오시가 아닌가 추정함.
양력 : 1880년 1월 26일 18:30
음력 : 1879년 12월 15일 18:30
시 일 월 년
癸 甲 丁 己
酉 寅 丑 卯
83 73 63 53 43 33 23 13 3
戊 己 庚 辛 壬 癸 甲 乙 丙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子
子丑공망, 己土당령, 1964년(85세, 戊辰대운 甲辰년) 4월 5일 담즙성 간경변으로 사망함.
장군인 아버지 아더 맥아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맥아더의 어머니는 매우 엄격했고 항상 책임감을 강조했으며 완벽한 일처리를 몸에 익히게 했다. 맥아더가 군대에서 출세의 기반을 마련한 데는 필리핀 군정총독을 지냈으며 육군 참모총장 물망에까지 올랐던 아버지의 후광과 어머니의 유별난 치맛바람이 한몫했다.
아버지 : 아서 맥아더(Arthure MacAthur, Jr., 1845년 6월 2일 ~ 1912년 9월 5일)
어머니 : 메리 하디 맥아더(Mary Pinkney Hardy MacArthur, 1852년 3월 22일 ~ 1935년 12월 3일)
형 : 아서 3세 맥아더(1876년 - 1923년)
형 : 맬컴 맥아더(1878년 - 1883년)
1883년(4세, 계미년) 형 맬컴 맥아더 사망.
1899년(20세, 기해년) 6월 미육사 웨스트포인트에 입학.
1903년(24세, 계묘년)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0년 동안 부관과 하급부대 장교를 지내고 이어 4년을 일반참모로 복무했다.
1912년(33세, 임자년) 9월 5일 부친 사망.
1914년(35세, 갑인년)에는 멕시코의 베라크루스를 점령한 미군 부대에서 몇 달을 지냈다.
1917(38세, 정사년)~1919년(40세, 기미년)에 제42사단의 참모진에 배속된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전투작전과 뒤이은 라인 지구 점령군의 전투에 참여하면서 참모장·여단장·사단장 등으로 직책을 바꾸어가며 활약했다.
1918년(39세, 무오년) 준장으로 진급.
1919년(40세, 기미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취임, 역대 가장 젊은 교장이 되었다.
1922년(43세, 임술년) 부유한 이혼녀 루이스 크롬웰 브룩스와 결혼함, 아이를 갖지 못한 이 결합은 7년 후(1927년) 이혼으로 끝났다.
1923년(44세, 계해년) 형 아서 3세 맥아더 사망
1925년(46세, 을축년) 소장으로 진급,
1927년(48세, 정묘년) 루이스 크롬웰 브룩스와 이혼.
1928년(49세, 무진년) 미국 올림픽 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았다.
1930년(51세, 경오년) 육군 참모총장으로 발탁되면서 대장으로 승진되었다. 군의 최고수뇌로서 그 후 5년 동안 그가 주력한 사업은 대공황의 타격으로 약해져가는 미육군의 군사력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1932년(53세, 임신년) 그는 중엽 정규군 부대를 워싱턴으로 보내 '노병 보너스 군대'(Bonus Army of veterans)를 축출하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비폭력 시위대를 1000명의 병력으로 과잉 진압함
1935년(56세, 을해년) 12월 3일 모친 사망
1935~41년에 필리핀의 군사고문과 육군 원수로서 자금의 부족을 무릅쓰고 필리핀 방위군을 조직하는 데 전력했다.
1937년(58세, 정축년) 4월 30일 잔 페어클로스(1898년 12월 28일생~2000년 1월 22일몰)와 재혼했고, 이듬해 마닐라에서 외아들 아서(1938년 2월 21일 출생)를 얻었다.
1937년(58세, 정축년) 12월 31일 미 육군 현역에서 은퇴했다.
1938년(59세, 무인년) 2월 21일 외아들 아서를 출산함.
1941년(62세, 신사년) 7월 현역으로 소환된 맥아더는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영웅적인 전투를 수행했다.
1942년(63세, 임오년) 3월 남서태평양 전역 연합군 사령관직을 맡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소환되었다.
1943년(64세, 계미년) 1월 그는 곧 뉴기니에서 공격을 개시해 파푸아로부터 일본군을 몰아냈다.
1943~44년의 일련의 작전으로 맥아더군은 라에에서 샌사포어까지 뉴기니의 전략지점들을 장악하고, 애드미럴티 제도와 뉴브리튼 서부를 점령했다. 맥아더가 지휘하는 솔로몬 제도의 남태평양군은 일제히 북진해 라바울 시를 제압하고 많은 일본군 부대를 우회했다.
1944년(65세, 갑신년) 가을 다음으로 타이완보다는 필리핀으로 진공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시킨 맥아더는 모로타이·레이테·민도로를 공격했다. 레이테 작전이 시작되고서야 전폭적인 병참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이전의 계획들은 태평양함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인원과 장비의 빈곤을 무릅쓰고 수행되었다. 맥아더는 태평양전쟁보다 유럽 전쟁을 우선시하고 자기가 담당한 남서태평양지역보다 중부태평양 전역을 우선시하는 상부의 결정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1944년(65세, 갑신년) 12월 육군 원수로 승진되고, 4개월 후 태평양지역의 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66세, 을유년) 그가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최대의 작전들은 1945년의 7개월간에 걸친 루손 전투에서 벌어졌다. 그해 봄에 그는 남부 필리핀과 보르네오의 재정복에 나서기도 했다. 그동안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의 어려운 소탕작전은 오스트레일리아군에 일임했다.
1945년(66세, 을유년) 9월 2일 그는 도쿄 만[東京灣]에서 항복 조인식에 승전국의 대표로 참석했다.
1945(66세, 을유년)~1951년(72세, 신묘년)에 일본 점령 연합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일본군의 해산, 군국주의자들의 제거, 경제복구, 자유주의 헌법의 기초(起草) 등을 독재적인 면은 있었으나 효과적으로 지휘했다. 또한 토지 재분배, 교육, 노동, 공중위생, 여성의 권리 등에서 상당한 개혁을 이루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 맥아더는 극동군 총사령관직도 맡았다.
1950년(71세, 경인년) 6월 25일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즉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부산 근방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한 후 9월 15일에 대담한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10월에 북한으로 진격했다. 북한군은 급속히 붕괴되어갔다. 하지만 11월 대규모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38선 이북에서 양단된 맥아더군은 서울 이남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2개월 후 맥아더가 지휘하는 부대들은 공세를 전환하여 북쪽으로 재진격했다.
1951년(72세, 신묘년) 4월 11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이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제한전을 수행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귀국한 맥아더는 처음에는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해임에 관한 상원의 공개청문회가 있은 후 그 열광은 가라앉았다.
1944(65세, 갑신년), 1948(69세, 무자년), 1952년(73세, 임진년)에 공화당의 보수세력은 연이어 맥아더의 대통령후보 지명을 따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1952년(73세, 임진년) 맥아더는 레밍턴랜드사(社)의 이사회 회장직 제의를 수락했으며, 그 후 회장의 직무를 보는 일 외에는 어쩌다 한 번씩 공개석상에 나타날 뿐 뉴욕 시에서 은거생활을 보냈다.
1960년(81세, 경자년) 2월 2일 요도 질환으로 레녹스 힐 병원에 입원했다. 3월 19일 전립선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4월 5일 63일 만에 퇴원하였다
1964년(85세, 戊辰대운 甲辰년) 4월 5일 워싱턴 D. C.에서 담즙성 간경변으로 타계하여 버지니아 주 노퍽에 묻혔다.
인격적인 면에서 맥아더는 불가사의했고 모순적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고압적이고 도도하며, 이기적이고 잘난체하는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 특히 그의 사령부 직원들이 보기에는 다정하며 용기있고 가식이 없으며 겸손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가 우수한 지능과 보기 드문 통솔력을 갖추었고 의무·명예·조국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마흔이 넘어 애가 둘 달린 이혼녀와 결혼한 일은 어머니의 지지를 받지 못하다가 파국을 맞았고, 이후 서른 살이나 어린 필리핀계 혼혈여성과의 애정행각 역시 어머니 눈총이 두려워 돈으로 마무리됐다. 마마보이로 보일만큼 끈끈했던 어머니 핑키와의 관계, 부유한 이혼녀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와의 결혼과 이혼, 필리핀 혼혈 엘리자베스 이자벨 쿠퍼와의 연애, 그리고 마지막 아내 진 페어클로 등 그의 옆을 스쳐간 여자들의 이야기가 평전에 언급되긴 하지만 분량은 미미하다.
묘목 겁재가 기토 정재 밑에 있어서 첫 여자가 이혼녀, 축대운 4년간만 은퇴하였고, 72세까지 30년 이상을 장군으로 전장을 누빔... 오대운에 은퇴...금대운에 승승장구한 것을 보면 필자는 경오시로 추정하여 시상일위 편관격으로 추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