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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At One Moment

고린도전서 11장 "왜 바울은 여성에게 머리를 가리라고 했을까요?” - 배경락, 교회는 평등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작성자박규택|작성시간26.06.15|조회수26 목록 댓글 0

바울은 정말 여성을 억압했는가?

 

Joseph Bae | Biblical Humanities & History

5시간 전

 

 

 

여러분은 교회에서 이런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왜 바울은 여성에게 머리를 가리라고 했을까요?”

어쩌면 이 질문은 오랫동안 불편한 침묵 속에 묻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여성 신자들은 이 구절 앞에서 왠지 모를 거북함을 느끼고, 남성 신자들은 어색한 미소로 화제를 돌리며, 목사님들은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로 서둘러 지나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한 지점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진지하게 멈추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을 제대로 읽으려면, 먼저 바울의 편지를 받아 읽었을 사람들이 살던 세계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식민 도시였습니다. 그곳의 광장 중앙에는 황제의 석상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 황제는 머리를 가린 채 제사장의 위엄을 뽐내었습니다. 황제가 머리에 베일을 두르고 있는 모습은 그것이 그 사회에서 결코 단순한 복식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분의 언어였고,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베일은 시민권을 가진 고위층 여성이 공적인 자리에서 착용할 수 있었습니다. 베일은 그녀가 누군가의 아내이며, 법적으로 보호받는 존재임을 온 사회에 선언하는 표시였습니다. 반면, 노예 여성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짧게 깎은 채 다녀야 했고, 그 짧은 머리는 그녀가 누군가의 소유물이며, 결혼할 권리조차 없는 존재임을 표시하는 낙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고위층 남성들, 특히 제사장 계급은 종교 의식에 참여할 때, 머리를 가림으로써 자신의 권위와 신성한 지위를 과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의 풍경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을 다시 읽으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모든 여성에게 베일을 쓰도록 가르쳤습니다. 이 말은 당시 사회 언어로 번역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이 예배당 안에 있는 모든 여성은, 그녀가 귀족이든 노예이든, 시민권자이든 외국인이든, 동일하게 존엄한 존재다." 노예 여성이 베일을 쓰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머리 깎인 노예로 수치스러운 신분이 아니라, 권위와 존엄을 지닌 한 인격체로 그 공동체 안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복식 규정이 아니라, 공동체의 시각적 혁명이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남성이 베일을 쓰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고위층 남성들이 종교 의식에서 머리를 가려 자신의 권위를 표현하던 관습을, 바울은 예배 공동체 안에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머리를 가리지 말라"는 이 한 마디는, 세상에서 누리던 신분적 특권을 예배당 문 앞에 내려놓으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신학자 자넬 피터스(Janelle Peters)는 이 구절을 탁월하게 분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모든 여성이 상류층의 방식으로 베일을 착용하도록 하였고, 동시에 남성은 그러한 영예를 취하지 못하도록 제한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사회경제적으로 신분과 성별을 가로질러 하나가 되도록 이끌었다고요.

이것이 바울의 의도였다면, 우리는 이 구절을 '여성 억압의 근거'로 읽어온 2천 년의 독법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물론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적용해온 전통도 존재합니다. 가톨릭의 미사포 관습이 대표적이며, 일부 보수적 교단들 역시 이 구절을 들어 여성의 종속이나 특정 형식의 준수를 강조해왔습니다. 그 전통 안에서 경건하게 살아온 신자들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그 신앙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형식이 마음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하나의 신앙적 언어임을 우리는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개신교 신학의 핵심 유산에 대해 솔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의 문자를 시대와 맥락을 초월하여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루터와 칼뱅, 그리고 그들 이후의 개혁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은, 성경 본문이 쓰인 자리(Sitz im Leben)를 정직하게 탐구함으로써, 그 본문이 담고 있는 복음의 본질적 정신을 되살려 현실을 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고린도전서 11장의 베일 규정은 바로 이 선언을 고린도의 예배 공동체 안에서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구현하려는 목회적 시도였습니다. 베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베일이 담아내야 했던 평등과 존엄이 본질이었습니다.

문자에 집착하여 베일을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바울이 싸웠던 신분 차별의 논리를 다른 형식으로 되살리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Reformed)된 교회란, 성경의 문자를 반복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의 정신이 오늘의 현실 속에서 새롭게 살아 숨쉬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갱신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면에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질문해야 할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하려 했던 일은, 세상의 신분 질서가 예배 공동체 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황제의 언어, 귀족의 언어, 계급의 언어가 교회 안에서 반복되는 것을 막고, 오직 그리스도의 언어만이 공동체를 규정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 공동체에는 어떤 세상의 언어가 들어와 있습니까? 학벌이, 직업이, 경제력이, 성별이, 나이가 여전히 교회 안에서 누군가의 입을 막고 누군가의 자리를 제한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2천 년 전 고린도의 베일 문제를 통해 물었던 질문은, 오늘 우리를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예배당 안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동등한 존재로 서 있습니까?"

베일은 사라졌지만, 그 베일이 담아내려 했던 정신은 여전히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은, 2천 년 전의 텍스트가 오늘도 살아 있는 질문을 던진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그 텍스트를 박물관의 유물처럼 모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품고 있는 해방과 평등과 사랑의 불꽃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다시 켜는 일, 그것이 아마도 바울이 우리에게 바랐던 것일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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