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육>에서 다큐와 판타지는 한 몸이다. 교권보호국은 고구마같은 현실을 매번 초법적인 권력과 폭력으로 해결한다. 보는 사람은 이런 사이다같은 해결방법이 현실에 없는 판타지인 것을 안다. 그러나 드라마를 호의적으로 보든 아니든, 드라마가 보여주는 현실이 다큐라는 것은 대체로 인정한다. 많은 교사들의 공감이 그 증거다.
폭력적 응징은 답이 아니라는 비판에 <참교육>은 '사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는데' 응답하는 듯하다. 드라마를 끝까지 본 사람은 알겠지만 가해자 중에 단 한 사람도 회개하지 않는다. 처절하게 거울치료를 받았어도 가해자들은 끝까지 피해자의 고통은 외면하고 자기 입장을 정당화하며 복수를 계획한다. <참교육>은 "사람은 변하지 않아, 나쁜 놈은 끝까지 나쁜 놈이야. 이런 현실에서 참교육이 뭐야?" 묻는다. 인간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비관적인 인간관을 가진 <참교육>은 '어떤 인간은 절대 선하다'는 초인적인 세계관을 공유하며 선한 사람이 더 강해져야 한다는 영웅주의로 유혹한다. 좀 거창하지만 이 유혹에 어떤 답을 찾는냐가 시대의 과제같다.
일주일 전 대전 시내버스 안에서 고등학생이 중학생의 목을 칼로 찌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흉폭한 사건의 전말에 대해 지역사회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드라마보다 더 복잡하고 어두운 현실이 있다. 사건 발생 후 교육청에서 마련한 대책은 대부분 재탕, 삼탕이다. 이건 교육 전문가들이 어리석고 게을러서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합의한 범위 내에서는 더 이상의 방법을 찾아낼 수 없기때문일 것이다. 어른들은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인식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면밀히' 검토하고, 기존의 대책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앤서니 버지스의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를 떠올렸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로 더 유명한 이 소설은 열다섯살 알렉스가 주인공이다. 알렉스는 친구들과 어울려 마약을 하고 절도, 폭행, 강간과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죄의식이 없다. 정부는 갱생이 불가능한 소년 알렉스를 인간 개조의 실험대상으로 삼는다. 세뇌로 악에 대한 의지를 아예 제거한 것이다. 국가 권력이 악한 개인을 폭력적으로 제압한다는 점에서 <참교육>과 비슷한 설정이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소설과 영화의 결말이 다르다. 소설은 알렉스가 청소년기를 지나 철이 드는듯한 희망을 암시하며 끝나는데, 영화는 알렉스가 예전의 폭력성을 다시 찾는 것으로 끝난다.
결국 문제는 회개의 가능성이다. '죄인은 정말 회개하는가?' 오래된 질문이다. 회개와 용서는 오히려 약자와 피해자의 몫이고, 하나님은 악한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보다 착한 사람을 더 착하게 만들어 세상을 유지하는 것 같아 불만이다. 그런데 이게 현실이고 하나님의 방법인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비관으로 세상을 보자. 호의를 배신하고, 기회를 악용하고, 약자를 조롱하는 악인은 언제나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법을 바꿔야하면 바꾸고, 시대에 뒤떨어진 참교육 간판을 내려야하면 내리자. 그러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비관적 경험에도 아이들은 성장하고 달라진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어른이다. 권리와 자유를 악용하는 학생과 학부모를 법에 위탁해 제거하는 것보다 타인을 존중하는 학생을 한명이라도 더 길러내려는 희망이 교육이다. 이런 믿음과 희망을 가진 어른의 교육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신 방법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