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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At One Moment

높은 담장의 교회 - 김동은

작성자박규택|작성시간26.06.19|조회수23 목록 댓글 0

김동은

13시간 ·

 

<높은 담장의 교회>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 과연 그럴까?

맞는 말 같지만, 절반만 맞다. 우리 교회는 담장이 높다. 그리고 나는 이 높은 담장이야말로 교회를 교회되게 만드는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오해부터 빨리 풀자. 담장이 높다는 건 “거룩한 사람만 골라 받는 폐쇄적인 모임”이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죄인을 막는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의 담장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향해 높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의 정체성’이 흐려지지 않도록 높은 것이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1. 담의 기준은 ‘거룩’이 아니라 ‘주권’이다

세상은 묻는다. “너는 얼마나 깨끗하냐. 자격이 되느냐.”

그러나 우리는 단 하나를 묻는다. “네 인생의 주인이 누구냐.”

도덕적으로 흠 하나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여전히 자기 인생의 왕좌에 자기가 앉아 한 주 살아갈 은혜만 소비하러 온 종교 소비자라면 그는 담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반대로 삶이 처참하게 무너진 죄인이라도, 그 왕좌에서 내려와 하나님께 주권을 넘기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교회는 활짝 열려 있다. 그러니 우리의 담은 죄인을 막는 벽이 아니다. 주인 자리를 끝내 내려놓지 않으려는 자를 거르는 문이다.

2. 사실, 담장이 가장 높았던 교회는 초대교회였다

이건 우리가 새로 세운 기준이 아니다.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처음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예수를 믿고 교회의 성도가 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값을 치르는 일’이었다.

"예수는 주(主)시다"라는 신앙고백은, 황제가 주인이라 외치던 세상 한복판에서 내 인생과 이 세상의 주권자는 로마황제도 내 자신도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핍박이 늘 눈앞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국 차원의 조직적 박해는 간헐적이었고, 그 사이엔 평온한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 고백에는 언제든 고발당하고, 가족과 생계와 때로는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는 위험이 늘 함께 있었다.

그래서 그 시대엔 가짜 신자, 적당히 취미로 종교를 소비하려는 자들이 감히 교회의 문턱을 넘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내 삶의 주권을 완전히 하나님께 양도한 진짜 거듭난 성도들만이 그 비용을 감수하고 담장을 넘어와 한 몸을 이루었다.

오해는 말라. 고난이 그들에게 자격을 준 것이 아니다. 고난은 다만 누가 정말 주권을 내려놓았는지를 드러냈을 뿐이다. 사도행전의 폭발적인 역사와 역병 같은 복음의 번짐은, 바로 이 높은 기준을 통과한 순도 높은 성도들이 모였기에 가능했던 실재다.

지금은 다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아무도 매질하거나 감옥에 가두지 않는다. 믿는다 말하는 데 잃을 것이 없어진 순간, 담장은 무너졌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무나" 교회로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부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담장을 다시 높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핍박이 사라진 시대에, 무엇으로 진짜 주인을 바꾼 자를 분별할 것인가. 답은 단 하나, 교회 스스로가 "주권 이양"이라는 담장을 쳐서 종교 소비자와 진짜 성도를 분별해 내는 것이다. 이 담이 없다면 교회는 순식간에 종교 소비자들의 모임으로 전락하고 만다.

3. 담이 낮으면, 몸이 병든다

왜 굳이 담을 높이는가. 그냥 누구나 들어오게 두면 더 따뜻하고 더 부흥하는 교회가 되지 않는가. 실제로 많은 이들이 교회를 개척한다고 하면 가장 먼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많이 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문턱을 낮추고, 인테리어를 세련되게 바꾸고,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종교적 색채를 최대한 덜어내는 마케팅에 열을 올린다. "우리 교회는 누구나 올 수 있는 편안한 곳입니다"라고 광고하는 것이 이 시대 개척의 정석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그렇게 담을 낮추면 주권은 그대로 쥔 채 종교 서비스만 향유하려는 소비자들이 몰려들기 쉽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지만 머리의 뜻대로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각자 소비자로서 권리를 주장할 뿐이다. 이 기생이 깊어지면, 그들은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을 자기를 위해 소진시키는 암세포가 된다.

담을 낮춰 "많은 사람"이 모일 수는 있으나, 머리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병든 몸"이 된다. 병든 몸으로는 전쟁에 나가 승리할 수도, 생명을 낳을 수도 없다.

4. 그럼, 그 이전까지는 어디서 제자화되는가

"그렇게 교회의 담장을 높여놓으면, 아직 예수를 모르거나 거듭나지 못한 초신자들은 도대체 어디서 복음을 듣고 어디서 제자화가 된다는 말인가."

그 해답은 바로 "흩어진 성도들의 삶"에 있다. 이 지점이 우리 교회의 핵심이다.

우리는 그들을 교회 "건물 안"에서만 제자화하지 않는다. 건물 밖, 흩어진 성도들의 삶 속에서 제자화한다. 성도들의 일터에서, 성도들의 식탁에서, 성도들의 평범한 일상에서 제자화를 통해 한 사람이 거듭나 주권이 이양되는 역사들이 일어나야 한다.

생각해 보라. 성도들을 건물 안으로 끌어모아 머물게 하는 데만 집중하면 진짜 제자화는 불가능하다. 성도들이 원래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 삶의 현장으로 가야만 가능하다. 이것이 높은 담장의 역설이다. 담이 높을수록, 성도는 세상으로 더 깊이 흩어진다. 그렇게 삶의 현장에서 한 영혼이 거듭나고 변화되는 전 과정,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짜 "제자화"다.

5. 이것은 "성경적인 구조"다

담 낮은 교회의 성도는 편하다. 사람을 그저 건물로 "데려오기"만 하면 자기 역할이 끝나고, 거듭나게 하는 책임은 사역자에게 떠넘긴다. 그렇게 교회는 다른 교회 성도가 옮겨오는 수평 이동으로 규모를 유지한다.

그러나 담이 높은 우리 교회의 구조는 명확하다. 성도들이 삶 속에서 직접 "성직"을 감당하지 않으면, 결코 재생산되지 못하는 배수의 진을 쳤다.

기성 교회처럼 주차장 크게 짓고, 화려한 프로그램 돌리고, 설교 마케팅을 해서 교인들을 수평 이동시켜 덩치를 키우는 전략은 우리 교회의 교회론에서는 불가능하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삶에서 피 흘려 스스로 한 생명을 낳지 못한다면, 우리 공동체는 그 즉시 성장이 멈출 수밖에 없다.

교회의 본질 기능은 생명이 생명을 낳는 "재생산"이다. 전도는 사람을 건물로 데려와 목사에게 양육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방임이 아니다. 내가 만난 예수를 내 삶으로 전염시켜 또 다른 성도를 낳는 거룩한 과정이다.

6. 우리가 세워갈 교회

우리가 가고자 하는 〈높은 담장의 교회〉는 세련된 트렌드나 어떤 교회개척 방법론이 아니다. 사도행전이 증명했고 성경이 선포했던 교회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진검승부다.

이 길은 몹시 불편하고 외로운 길이다. 내 이익을 포기해야 하고, 세상의 편안함 대신 복음의 야성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식으로만 이 글을 읽는 자들은 결국 "이상적일 뿐 현실적이지 않다"며 중간에 거절하고 도망칠 것이다.

그러나 진짜 교회가 되기 원하는, 성직을 감당하는, 거듭나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에게는 이보다 가슴 뛰는 부르심은 없을 것이다.

안전한 교회 건물 안에서 머물며 은혜를 쇼핑하는 종교 소비자의 삶을 이제 끝내자. 주중에 내 모든 것을 갈아 넣어 직접 영혼을 재생산해 내는 진짜 교회가 되자.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성도가 재생산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간판을 달고 건물을 얻은들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자, 이 높은 담장 안으로 들어와 진짜 교회로 살겠다는 마음이라면, 댓글로 “교회가 되겠습니다”라고 남기자. 교회는 이미 당신을 향해 열려 있다. 단 하나, 당신 손에 쥔 주권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들어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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