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 보면 우울한 얘기를 안 듣고 살 수는 없다.
일단 세상은 좋은 얘기보다는 좋지 않은 얘기가 확실히 더 많다. 다들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신문을 펼쳐서 기사 꼭지들을 살펴보면 완연히 파악할 수 있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로 슬픔은 손톱 자라는 것이고 기쁨은 발톱 자라는 것이라고 했는데 손톱 발톱으로 말하면 5:1쯤으로 슬픔과 기쁨이 빈도가 있는 것 같다.
근데 세상을 조금 더 오래 살면 이 슬픔과 기쁨의 비가 점점 더 한 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낀다. 슬픔 쪽으로 말이지. 뭐
어떤 이들은 기쁨이 더 많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 그런 사람들도 간혹 있겠지만 속 내막으론 믿고 싶지 않다. 그러고 그렇게 낙천적일 수 있는 가식이 밉다. 내가 가만 생각해 보니까 인류가 만들어진 이래로 슬픈 얘기는 하도 많아서 다 모았다면 지구의 무게보다 더 나가지 싶을 정도이다.
우선 나이가 드는 것 자체가 매우 우울한 일이다. 아마도 슬픈 일 중 최상층 부에 속하는 항목이지 않나 생각한다. 그래서 나이 드는 것을 아예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편할 듯 하지만 잊어버릴 수 절대로 없다. 거울을 보고, 내 또래의 사람들을 봐도, 신문에 실리는 이런 저런 기사에 관한 느낌에도 나이가 묻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나이가 드는 것이 더 슬픈 이유는 늙어감에 따라 병이 더 많아져 몸과 마음이 갈수록 더 괴로워지는 점이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죽음에 이름이다.
나이 듦에 따라 아픈 것은 그렇다고 하고, 젊은 나이에 병이 들어 괴로움을 당하면 슬픈 일 중의 슬픈 일로 단정지을 수 있다. 이 슬픔은 주위의 보는 이들조차도 함께 괴롭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내 어린 친구 중 하나가 그런 슬프고도 애닯은 아픔에 잠겨있는데 나는 그 슬픔에 다가갈 어떤 방도도 만들지 못한 채 그냥 이러하고 있다. 그 앞에서 차마 울지 못하고 방문을 열고 나가 한참 하늘을 쳐다본 적도 있다.

그 어린 친구는 삼중음성유방암이라는 악성유방암에 걸렸다.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하다가 드디어 제거수술을 받았다. 한쪽 가슴을 떼내는 것이다. 유방절제. 아! 아름다운 가슴. 어린 친구의 자존심 덩어리였지 않았을까. 한쪽 가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최상층의 우울한 얘기로 슬픈 스토리가 전개되지 않을 수 없다.
남자로 말한다면 거세(castration)에 해당될 수 있을까. 통째로 없애는 것이 아니고 한쪽 고환을 잘라내는 것. 근데 고환 하나 자르는 거는 외부에서 보면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는다. 반면 여성의 가슴은 여성의 여성다움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 존재의 의미는 여성에게만 끝나지 않고 그의 사랑하는 남성에게조차 막강 영향력을 끼친다. 또 생명의 씨앗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오히려 뇌의 한쪽을 떼내는 아픔이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그녀는 이제 한쪽 가슴으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나 같으면 그렇게 되지 못할 것 같다. 우선은 한쪽 가슴으로 미워하기부터 자동으로 배워질 것 같으니까.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이제야 슬슬 한 쪽 가슴으로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겠다 는 생각이 들지.
그렇지만 그 친구는 한쪽 가슴으로 미워하기 보다는 사랑하는 것만을 배우고 실천하고 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위해서 기도를 한다.
세상에는 오늘도 수많은 우울한 얘기들이 전해진다. 그렇지만 우울한 일들은 어쩌면 보다 더 소중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재료들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봤다. 씨줄날줄로 엮어진 우울한 얘기들이 하나하나의 올이 돼 아름다운 우리들의 사랑얘기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낙천적이고 종교적인 얘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