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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로의 터줏대감인 학림다방. 간판은 현대식으로 바뀌었지만 안에는 여전히 고전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다. 2 낙산공원에서 바라 본 대학로는 화려하기 보다는 번잡하다. 3 세월이 흘렀어도 혜화동부터 덕수궁에 이르는 돌담길은 연인들의 주요 데이트 코스가 되고 있다.
사라진 독다방, 그리고 잊혀가는 학림다방 “독다방? X세대인 풋내기에겐 어울리지 않는걸.” 졸업만 기다리며 말년 병장처럼 과방에서 늘어져 있던 86학번 선배가 새내기 후배에게 던진 말이었다. 대학생들 사이에 독다방으로 불리던 신촌의 명물 ‘독수리 다방’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읽은 이문열의 베스트셀러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통해서였다. 그때부터 환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5년이 흘러 대학에 서울에 입성하였을 때 독다방은 이미 70~80학번들이나 추억하는 퇴물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 후반은 대학 문화가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였다. 시와 소설을 읽고, 클래식을 감상하고, 통기타에 맞춰 풋풋한 사랑과 낭만을 노래하던 신촌의 문화는 ‘오렌지족’으로 대변되는 강남 문화에 매몰되면서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선 세대의 뜨거운 열정 덕분에 문화의 변화에 둔감한 나를 포함한 소수의 후배들은 잊혀가는 1970~1980년대 문화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수업이 없는 한낮이면 선배들과 독다방에서 커피와 클래식을 음미하며 낭만을 즐겼고, 해 질 무렵이면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와 소주를 들이켜며 민중가요를 불러댔다. 또 늦은 밤이면 과방과 하숙집, 자취방에 모여 앉아 민족과 민중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고, 주말이면 신촌역에서 출발하는 허름한 기차에 몸을 싣고 임진강까지 여행하며 젊음을 노래했으니까.
물론 이러한 변화가 신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당시의 대학 문화로 신촌과 쌍벽을 이루던 대학로는 이보다 더 큰 변화를 겪었다. 대학로는 본래 서울대학교가 있던 자리로 1980년대에 서울대가 캠퍼스를 관악산 자락으로 이전하면서 문화의 거리로 조성되었고, 마로니에 공원이 들어서면서 급속하게 소비적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까마득한 선배들은 대학로가 지금의 이화 사거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장충체육관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자리한 ‘학림다방’의 추억을 잊지 않고 있다. “예전엔 ‘학림’은 커피만 파는 곳이 아니라,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논쟁을 벌이는 장소였지. 그러다 쓰러지면 주인아저씨가 라면을 끓여주곤 했는데….” 학교를 떠나는 86학번 선배의 학림다방에 관한 추억, 그 추억은 그해 여름 내게도 이어졌다.
서울 소재 대학의 총투쟁이 있던 날, 각 대학은 학교와 총학생회, 단과대, 학과, 동아리를 상징하는 거대한 깃발을 나부끼며 마로니에 공원으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마로니에 공원만 차지했던 무리는 서총련과 동총련이 합쳐지며 우측 차선을 점령했고, 곧이어 북총련과 남총련 학생들이 가세하면서 마침내 이화 사거리부터 혜화 로터리까지 대학로 마로니에 길은 간만에 대학로라는 이름에 걸맞은, 꿈과 이상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한 거리가 된 것이다. 그때 민중가요의 가치를 제대로 느꼈다. 혼자 부르면 한없이 서글프지만, 수만 명의 목소리가 합쳐진 노랫소리는 거대한 힘이 되어 전율과 감동을 준다는 것을. 시위가 끝난 후, 우리 과 선배들은 학림다방에서 다시 뭉쳤다. 거기서 밤새도록 막걸리를 퍼 마시며 못다 푼 한을 다 털어냈다.
지금의 ‘콩다방’과 ‘별다방’처럼, 그 시절에는 ‘독다방’과 ‘학림’이 있었다. 그리고 2007년 현재, 독다방은 2년 전 문을 닫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학림은 주인이 바뀌고 레노베이션을 거친 후 다방 대신 커피숍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다. 또 기념물로 변한 옛 신촌역 뒤쪽은 종합 쇼핑센터로 꾸며진 현대식 신촌역이 새로 들어섰으며, 순수한 이상의 집결지였던 대학로는 군중집회 대신 각종 공연이 난무하는 유희의 공간이 된 지 오래다. 그것이 변화인지, 변질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대학 문화의 메카인 신촌과 대학로에 학교 교재가 아닌 인문과 사회, 문학 서적을 파는 서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면 역시 변질에 가까운 것은 아닐는지.
 1 달동네였던 낙산공원은 예술가의 길로 변화 중이다. 2 학림다방의 외관은 변했지만, 인테리어는 여전히 80년대를 기록하고 있다. 3 낙산 아래에서 만난 1960년대의 풍경. 4 성북동은 사라져가지만, 이곳 사람들의 마음은 늘 풍성하다.
메트로폴리탄 서울, 그 이면에 남겨진 흔적 86학번 선배의 졸업식이 있은 후, 밤새도록 축하주를 마시던 선배는 마지막까지 나를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줄 선물이 있다. 따라와라.” 그렇게 우리 둘은 채 가시지 않은 새벽어둠을 가르며 삼청공원을 지나 혜화 로터리로,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알 수 없는 동네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산자락을 따라 올라가니 낡고 허름한 판잣집들이 나타났다. TV로만 보던 1960년대의 달동네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사람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알 수조차 없는 거미줄같이 이어진 골목, 그 골목을 따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다 스러져가는 담벼락, 그리고 여기저기서 풍겨오는 퀴퀴한 냄새들. 1시간 남짓 그 골목을 헤매며 오르자 풍경은 백팔십도로 바뀌기 시작했다. 거대한 건물과 현대식 가옥들, 그리고 그 경계를 만들어주는 5미터 높이의 담벼락은 앞서 본 풍경과 너무도 달라 기가 질릴 정도였다. 미로 같은 골목골목은 앞 동네와 다르지 않았지만, 폭이 좀 더 넓은 것과 쾌적한 산 공기가 앞 동네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심지어 모든 굽이마다 경비 초소가 있어 우리가 지나가면 으레 초소에서 사람이 나와 우리를 예의 주시했다. 너무나 못 사는 동네와 너무나 잘사는 동네. “성북동이야. 이게 바로 서울의 본질이지.”
다시 길을 재촉한 선배는 이번에는 마로니에 공원을 관통하여 언덕을 올랐다. 이곳은 성북동과 반대였다. 아래쪽에 자리한 번화한 거리와는 달리 위로 올라갈수록 판잣집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집이 끝나는 지점에 오래된 성벽이 나타났다. “그 옛날 이 성벽은 삼청동과 성북동, 낙산을 따라 북문과 동대문, 남대문, 서대문으로 이어져 서울의 경계를 만들었다. 현재 많은 성벽이 허물어졌지만, 이 공간이야말로 나와 네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실제적인 서울인 것은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 나는 낮은 곳에 위치한 성북동을 노래해왔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높은 곳에 위치한 성북동을 좇아야 할 것 같아. 하지만 기억하자. 낮게 살아도 이곳에서처럼 넓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이것이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자본은 모든 것을 희생시킨다. 자연도, 문화도, 사람도. 심지어 기억해야 할 우리의 흔적마저도. 세대를 넘어 문화를 대변하던 다방은 글로벌 시대에 따라 트렌디한 카페로 대체된 것처럼, 우리의 발전과 성장의 초석이 되었던 고통과 애환의 흔적은 거의 다 사라져가고 있다. 그리고 조만간 이러한 기억과 흔적은 역사책 한 귀퉁이에나 남게 될 것이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당신의 젊은 날의 추억이 담긴 장소를 찾아보길 권한다.
 1 삼청공원 주변은 시골집 같은 느낌이다. 2 대학로의 붉은 벽돌 건물은 옛 서울대학교의 흔적이다. 3 서울의 옛 기억들은 개발이라는 논리에 밀려 설자리를 잃고 있다. 낙산에서 바라본 미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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