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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한가운데를 유유히 흘러가는 네바강의 한복판, 전망이 좋은 이도시 대 표 호텔을 가까이서 마주보는 강변에 7천톤급 순양함 오로라호가 영구 정박되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17년 10월 25일 수병들에 의한 선상반란 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의 신호 탄을 발사함으로써 로마노프왕조의 제정러시아를 마감시키고 세계 역사를 바꾸게 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함정이다.
* 아래의 사진설명문은 순양함 오로라호의 역사적 역할에 관한 저서 <세계를 뒤흔든 10일-존 리드 著. 두레출판> 에서 발췌, 인용했음.
순양함오로라호의 이력 : 순양함 오로라는 극동에서의 러시아 해상 전력의 확장 프로그램 하에 1897년에 시작하여 1903 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새 해군본부에서 건조되었다. 1903년 11월 8일, 오로라 함은 해군 소장 A.A.Virenius의 지휘 하의 순양함 파견함대와 함께 극동으로 배치되었다. (아래에 계속)
오로라호는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대서양을 거쳐 홍해의 수에즈운하 통과를 시도했으나 일본과 우호관계에 있던 영국이 통과를 저지함으로써 남아공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대한해협에 도착,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엄청난 장거리 항해에 따른 후유증으로 인해 일본 연합함대에 의해 패전을 맛보고 퇴각한다. (아래에 계속)
아래 사진은 순양함 오로라호의 선수(船首)부분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대격변의 가장자리에 놓여진 러시아에서 경제는 피폐해져갔고 물자부족과 굶주림등에 의한 사회변화 의 욕구속에서 잉태된 1917년 러시아 혁명이라는 사건의 중심에 순양함 오로라가 놓여 있었다. 역사의 변혁기에 오로라호의 승조원들은 공장 노동자들과 접촉하면서, 혁명을 촉구하는 정치적 선동에 말려들었고 이들의 반란에 러시아 제국 정부는 무 능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아래에 계속)
오로라호의 마스트 부분
1917년 3월 12일, 오로라 함의 수병들은 세 명의 구속된 노동자 선동자들을 풀어달라며 지휘부의 장교들에게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를 진압하기 위하여 M.I.Nikolskiy 함장과 고급장교 P.P.Ogranovich는 권총을 발사했고, 그 덕에 여러명이 부상을 입었다. 1917년 3월 13일, 순양함 오로라의 승무원들은 혁명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에 승무원들 또한 오로라 함에 "붉은 깃발"을 게양한 뒤 노동자들과 함께 혁명에 참가했다. 지휘부서의 장교는 살해되었고, 상급 장교는 부상을 당하였으며, 승무원들의 대부분은 배에서 내려 혁명을 위한 시위에 참가했던 것이다. (아래에 계속)
<상갑판의 주포와 대공 화기들>
곧이어 "오로라 함 위원회"가 승무원들의 "민주적인 권리"를 실현한 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또한 발족되었다. 비밀투표에 의해 그것이 결정되었을 때, 민주적인 공화정 체제가 러시아에서 정부의 형태를 갖추어야만 했다. 1917년 봄-여름-가을 동안, 순양함 오로라에서의 정치적인 상황은 수병들과 장교들 양자 사이의 "(케렌스키가 세운) 임시정부"에 대한 신뢰를 점차 상실하는 것으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그 반작용으로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자당'(볼셰비키)가 떠올랐다. (아래에 계속)
순양함 오로라호가 정박해 있는 바로 건너편 상트 페테르부르그호텔 옥상에 설치된 삼성광고가 유난히 눈에 띈다.
3월 13일과 14일에 벌어졌던 "피를 흘려야했던 사건들" 이후, 오로라 함의 '위원회'와 장교들 사이의 관계는 되려 "정상적인 것이" 되었다. 장교들은 정치적 견해 등과 관련하여 수병들과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 '오로라 함 위원회' 또한 근무라든가, 함내의 질서, 그리고 함내에서의 일반적인 작업 등과 관련하여 장교들의 행위를 방해하거나 하지 않았다. (아래에 계속)
<오로라호 선상에서 바라다 본 삼성 광고>
유유히 흐르고 있는 네바강을 향하고있는 오로라호의 주포들
1917년 10월에 러시아의 정치적인 상황이 다시금 악화되고 또한 "임시정부"와 "노동자 의회" 사이에서 마찰이 발생하며, 농민들과 군인들의 위원회들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또한 오로라 함의 승무원들 중 대부분도 볼셰비키 당 쪽으로 기울었다. (아래에 계속)
<함정 상갑판 앞부분의 주포와 이를 관람하고 있는 루스카야들>
'발틱 함대 중앙 위원회'의 결정 하에 상당한 수리를 받던 오로라 함은 페트로그라드에서 머물고 있었으며, 또한 '페트로 그라드 의회'의 통제 하에 있었다. 순양함 오로라의 수병들은 니콜라예브스키 다리로 배를 끌고가서 1917년 11월 7일(일반 적인 달력. 당시 러시아 달력으로는 10월)에 페트로그라드에서의 "10월 혁명" 때 일익을 담당하였다. 뒤이어 오로라 함은 "임시정부"가 소재하고 있던 "겨울궁전"을 지키던 자들의 사기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선수(船首)의 함포에서 공포(空砲)를 발사하였다. (아래에 계속)
11월 11일까지 수리를 받은 순양함 오로라 함은 제2순양함대로 돌아갔다만, 얼마 안있어 승무원들의 대부분이 옛 제국 해군 의 해산과 새로운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함대 조직'을 위한 새로운 정부의 명령에 따라 전역해야 했다. 오로지 약 40명 정 도의 수병들만이 오로라 함의 경비와 최소한의 업무를 위하여 남겨졌다. (아래에 계속)
< 함포 조종간 내부>
1918년 "적백내전"이 발발했다. 1918년 여름, 오로라 함은 크론슈타트로 다시 이동되어 보존조치 됨으로서 전쟁에 다시 사용 될만한 가능성이 없어졌다. 오로라 함의 6인치 포들은 철거되어 "붉은 볼가 강 & 카스피안 해海 함대"의 부유포대(浮留砲臺 - 자체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물위에 걍~ 떠있기만 하는 포대)들을 무장시키기 위해 아스트라한으로 보내졌다. 오로라 함 승무원들의 상당수 또한 적백내전에 참가하거나 혹은 "집으로" 돌아갔다. 1922년에 오로라 함은 (도크 안에 들어앉은 상태로) 장기간 지속 보존을 위해 크론슈타트 항에 넘겨졌다. (아래에 계속)
<갑판에 매달린 구명보트들>
* <군대위원회>(Army Committees) - 군대위원회는 구체제 장교들의 반동적인 영향력과 싸우기 위해 병사들에 의해 전선에서 조직된 것이다. 모든 중대, 연대, 여단, 사단, 군단에 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그 위에 <군대위원회>가 선출되었다. <중앙군 대위원회>는 참모부와 협력하였다. 혁명에 수반되는 군대 내의 행정적 붕괴는 <군대위원회>로 하여금 병참부의 일을,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부대의 지휘까지도 떠맡게 하였다.
<옆에서 본 오로라호>
오로라호의 두 번째 삶
새로운 훈련 여행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 1922년, 소비에트 러시아 해군의 회복이 시작되면서, 1916년에서 1917년에 이루 어진 오로라 함의 주요 수리작업 때문에 훈련용 함선으로 복구하기로 결정되었다. 1922년에서 24년까지 복구를 위한 정비와 보존조치 후에 순양함 오로라는 10문의 130밀리 포와 2문의 3인치 대공포를 장비하였다. (아래에 계속)
<수병들의 침실>
1924년에서 30년까지 순양함 오로라는 고등 해군 학교의 생도들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친 훈련 항해를 하였다. 아직 생긴지 얼마안된 소련 해군을 위하여 유능한 인재들의 교육에 있어서의 오로라 함의 가치는 아주 대단하였다. 혁명 10주년에 오로라 함은 "붉은 기(旗) 훈장"을 수여받았다. 1933년에 오로라 함은 두 번째 기회를 위하여 점검 및 정비를 결정받았다. 그러나 1935년에 조선소에 너무 과한 책임이 부과되다보니 결국 정비는 중단되었다. (아래에 계속)
<선내에 비치된 군기, 훈장및 오로라함 순방 외국귀빈 기념패들>
대한민국 국방부 요원의 '한,러군사우호증진 친선방문 기념패'도 비치돼 있다.
<아래사진 가운데에는 '조선인민군'의 페넌트도 걸려있다.
오로라 함은 레닌그라드의 고등 해군 학교의 1년차 생도들을 위한 "스스로는 못 움직이는 훈련 지원함"이 되었다. 겨울에 순양함 오로라는 잠수함 지원함으로서 사용되었다. 그렇기에 결국 오로라 함은 퇴역조치가 예정되어 있었다. <끝>
<함선내에 비치된 현역 당시의 그림>
네바강과 오로라호를 찾는 세계각국의 관광객들에게 말없이 국위선양을 하고 있는 삼성의 대형광고탑
"우리나라도 언제쯤 남해 해저에 잠들어있을 '거북선'을 인양하여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꿈을 그리며 순양함 오로라호 갑판을 어슬렁거리는 '두리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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