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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江」 / 임보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것네. ―「울음이 타는 가을江」전문
어떠한 연유 때문에 그리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울음이 타는 가을江」은 박재삼의 대표작인 것처럼 널리 알려져 있다. 중후한 시정을 담고 있는 문제작도 아니고 그렇다고 표현의 기법이 두드러진 가작이라고 할 수도 없다. 좀 심하게 말하면 사춘기적 감상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화자의 센티멘털한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작품의 내용을 각 연별로 대강 살펴보기로 하자.
제1연 : 마음도 안정감을 못 느끼고 뒤숭숭할 때 친구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생각하며(친구와 동행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가을 햇볕을 받고 걸어가면 어느 새 산등성이에 이르게 되고, 슬픔이 북받쳐 눈물을 쏟게 된다.
제2연 : (산등성이에 올라서면) 제삿날 큰집(화자의)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그보다도 석양의 노을빛이 타는 듯 붉게 물든 가을 강을 보게 된다.
제3연 : (강을 향해 감격함) 저것 봐, 네(실연한 친구)보담도 내(슬픔에 젖어 있는 나)보담도 (우리들의 문제는 별것도 아니라는 뜻인가 보다), 산골 물소리의 즐거움(첫사랑의 기쁨)도 사라지고, 사랑의 끝(비극)에 생긴 울음도 사라지고, 미칠 일(노을에 젖은 황홀한 강)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기쁨과 울음) (여러 고비를 다 넘기고 말년에 이른 인생을 생각게 함) 가을강을 처음 체험한다.
이 작품의 구조는 제1연은 친구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주도한다. 제3연은 해질녘의 가을강의 이야기다. 그 강을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울음’ 속에는 시적 화자의 슬픈 정조와 강이 지닌 소멸의 비극성이 공존하고 있다. ‘타는’은 그러한 비극성을 강물에 비친 놀빛을 통해 시각화하고 있는 은유적 구조다. ‘울음이 타는’은 이 작품에서 시적 성취도가 가장 높은 구절이라고 할 만하다. 이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이 구절이 지닌 매력의 소치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제2연이다. 화자가 산등성이에 올라서서 새롭게 전개되는 정황을 제시하고 있다. ‘제삿날 큰집에 모인 불빛도 불빛이지만’은 현실적인 정황 같지는 않다. 만일 현실적인 상황이라면 산등성이에서 바라다보는 마을의 조망이리라. 제삿날을 맞은 큰집에 여기 저기 걸린 등불이나 혹은 모닥불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적 배경이 ‘해질녘’이어서 아직 불을 밝힐 만한 시간도 아니고 또한 불빛이 드러날 만큼 어두운 저녁도 아니다. 그러니 이 구절은 현실적인 정황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화자가 과거에 겪었던 체험의 한 가닥을 끌어다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놀에 물든 가을 강의 정취를 그리기 위해 대비적으로 끌어들인 체험 속의 한 정경이다. 조부의 제삿날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큰댁에 후손들이 모여 제사 준비를 하노라고 분망한 저녁이다. 방과 부엌은 말할 것도 없고 마루와 뜰 마당 할 것 없이 많은 등불들이 환하게 걸려 있다. 그 등불들이 화자에게 어떤 애틋한 정감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강물의 놀빛을 보자 화자는 그 제삿날 불빛이 떠올랐던 것일까. 그래서 제삿날의 불빛도 무척 애잔하기는 하지만 저 놀이 물든 가을 강은 울음이 타는 것 같다고 말했으리라. 그러나 나의 이러한 해석은 어쩌면 견강부회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작자가 어떠한 의도로 제2연의 첫 구절을 그렇게 구사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떻게 이해해도 전후가 잘 조화롭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제2연은 제1연에서의 화자의 정조가 전환되는 하나의 분수령이다. 그것은 실제로 산등성이에 올라서면서 전개되는 황홀한 노을 강을 목도하면서 갑자기 겪게 되는 정서적 전환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은 독자에게 정서적 전환을 일으키는데 오히려 혼란을 야기하는 장애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 구절 대신에 차라리 제3연의 첫 구절인 ‘저것 봐 저것 봐’를 끌어다 쓴다면 정서적 전환이 보다 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저것 봐, 저것 봐/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것네//
아니면, 제2연을 아주 없애버리고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것네’의 구절을 작품의 맨 끝행으로 마무리지으면 어떻겠는가. 시의 클라이맥스를 작품의 끝에 설정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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