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진보의 조건
영적 진보에서 필수적인 것 중 하나는 자신이 받은 것을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한 줌이 없이는 진정한 성장이 있을 수 없다. 지식의 축적은 있을 수 있으나, 그 지식에 의지하여 난관을 헤쳐 나가려는 사람에게, 평생에 걸쳐 금전을 모은 것이 사막에서 홀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당장 빵과 물도 조금도 주지 못하는 것처럼, 그 축적된 지식이 무가치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는 것이다.
영적 성장은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여 소유한 사람이 신비적 지식에 정통하다고 느낄 때까지 계속 사실 위에 사실을 보태는 방식을 통해 결코 단지 오컬트 정보의 축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보다 생생하게 사는 것이며, 보다 큰 삶의 능력을 갖는 것이다.
많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과 영적 진보를 이루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들이라기보다는 살고, 사랑하고,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을 아는 능력이다. 비유하자면, 태어난 지 일주일 된 유아가 오감과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을 구비하고 있지만, 현재 살고 있는 것보다 더 풍요로운 삶의 향유에 활용될 수 있는 육체적 존재의 단계까지 아직 발전하되지 못한 것과 같다.
따라서 물질적 존재에서 다양한 즐거움을 발견하는 건강한 성인의 더 넓고 더 강렬한 삶을 살 수 없고, 그 폭넓은 삶을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살아가는 능력의 차이일 뿐이다. 영적으로 미발달한 사람과 우주의 고차원적 기쁨을 아는 능력으로 진화한 사람 사이의 차이는 훨씬 더 크다.
한쪽은 내재하지만 잠재된 능력을 가진 영적 유아이다. 다른 한쪽은 영적 성인이며, 그의 발달된 능력은 세상의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살고 삶을 즐기는 능력을 부여한다. 요람 속의 아기에게 문학, 예술, 음악의 즐거움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처럼. 아기는 성인과 같은 세계에 거주하며 정확히 같은 광경과 소리가 그 주위에 있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삼을 능력을 아직 갖고 있지 않다.
그가 거주하는 바로 그 집에 선별된 문학의 도서관과 절묘한 아름다움의 예술적 보물이 있을 수 있고, 어떤 거장의 음악가가 가장 신성한 화음으로 그 소리를 듣는 모든 이를 전율케 하는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기에게는 단순히 존재하지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토록 충만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한 사람의 삶의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이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의 잠재된 능력을 개발하고, 의식의 지평을 넓히고, 우주를 관통하여 맥동하는 생명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정보나 다른 무엇을 축적하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흐름을 막는 장애물, 즉 우리를 우주적 생명 리듬으로부터 차단하고, 보편적 생명 조류가 우리를 관통하지 않고 우리 주위로 흐르게 만드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영적 지식을 얻고 보유한다는 것은, 영적 성장의 방법이 되기는커녕, 영적 성장의 방법이 아니라, 생명 흐름을 차단하는 장애물 중 하나이다. 발견된 진리는 널리 전해진 진리가 되어야 한다. 더 많이 받고자 한다면 그 사상을 전달하라. 지혜의 원천에서 끊기고 싶지 않다면 어떤 영적 지식도 개인의 소유물, 개인의 보물처럼 쌓아 두지 말라.
생명의 흐름(lifestream)이 자신을 통해 타인에게로 가장 많이 흘러갈 때, 그 사람은 영적으로 가장 크게 성장한다. 가지고 또 붙들어 두려고만 하는 자는 빠져나갈 출구가 없는 연못과 같아서, 불순한 녹색 이끼로 뒤덮여 있는 것과 같다. 그는 영적인 정체(지체 spiritual stagnation)를 드러내는 것이다. 받고 또다시 주는 자는, 그로부터 고귀한 시냇물이 솟아나 저 너머 메마른 들판의 갈증을 풀어주는 호수와도 같다. 호수는 연못에 대하여, 햇빛이 그림자에 대한 것과 같고 건강이 질병에 대한 것과 같다.
연못에도 어떤 형태의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썩은 물속에는 무수한 미생물이 우글거리고, 악취 나는 수면으로부터 열병의 독기가 피어오른다. 그것은 해로운 종류의 삶 — 자기 자신에게로 안쪽으로 돌아선 개별적 삶이다. 외부적 활동 없이는 진정한 삶이 있을 수 없다. 삶과 활동은 분리될 수 없다. 대양은 고인 연못의 정반대이다. 대양은 셀 수 없는 강들로부터 받는 모든 것을 하늘에 되돌려 준다. 그것은 이기심과 무활동 모두에 대한 영원한 질책이다. 대양의 끊임없는 조수와 해류는 건강의 율동적 맥박이다. 육지로부터 받고, 정화하고, 선물을 돌려준다. 인색한 연못은 일주일이면 고이지만, 관대한 대양은 결코 고여서 정체되지 않는다.
빛의 전파
영적 성장이 시작되고 지속되려면 빛의 흐름이 마음을 관통하여 흘러야 하며,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선물을 전달하고, 빛이 비추게 하고, 타인의 깨우침을 위한 도구가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무도 대가 없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없으며 (비록 어리석게도 그럴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지만), 돕지 않고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이미 약간의 빛을 받았다면, 그것은 단지 자연에 대한 청구권이 있어서 그것이 갚아진 것일 뿐이다. 그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 없이 이루어질 수 있으나, 그것은 그에게 당연한 것이었고 지불은 불가피했으며, 해가 뜨거나 여름이 오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약간의 빛과 도움이 우리에게 왔다고 해서 그 사실이,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다른 사람들과 상관없는 자신만의 개인적 소유물로 여겨진다면, 자신에게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영혼은 중요하며,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누구든 영적 진리가 그를 통해 받을 수 있는 다른 여러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상상하는가? 통상적인 절차와 규칙을 뒤집는 놀이가 있으니, 그것은 자기가 쥐고 있는 모든 점수를 먼저 버릴 수 있는 자가 승자로 간주되는 게임이다. 영적인 것에서도 그러하다.
영적 진보는 물질계의 통상적인 절차와 규칙의 역전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움켜쥠으로써가 아니라 줌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으며, 마침내 승리한다. 주는 과정에 의해서만 열망자는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이 받은 영적 진리를 타인에게 주기 전에는 우리는 그 진리의 온전한 혜택을 얻을 수 없다. 더 많이 줄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타인에게 지식을 전달하면서 그 자신이 더 많은 지혜를 얻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을 깨우치려는 노력이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증가시키며, 더 많이 줄수록 더 많이 받는다. 타인을 돕는 작업에서 자기 자신을 잊는 바로 그것이 그의 빠른 진보를 보장하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물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신지학을 말하여 귀찮은 존재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여기서 판단력과 분별력이 그를 인도해야 한다. 말에게 풍경의 아름다움을 역설하는 것만큼이나 적은 소득으로 신지학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피지 섬 원주민이 철도와 도서관의 필요성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추상적으로 신지학을 받아들이고 그 진리의 가르침에 따라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그들에게 불가능하다. 원주민이 문명이 무엇인지조차 이해하기 전에 먼 길을 오랫동안 진화해야 하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적 존재의 목적을 조금이라도 보기 시작하고 물질적인 추구에 중점을 두지 않는 삶이라는 것이 있음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대부분 많은 쓰라린 경험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모든 공동체 안에 신지학을 있는 그대로 또는 삶의 철학으로서, 혼의 과학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며, 한편 거의 모든 사람이 간접적으로는 이를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신지학"이라는 이름표가 붙지 않더라도, 그들의 그간 확립해온 관념을 갑자기 뒤엎는 새롭고 낯선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려는 어떤 노력도 수반되지 않을 때, 무의식적으로 그 원리의 일부를 받아들이게 할 수도 있다.
어디에나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춰줄 기회는 항상 존재한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문제로 고군분투하고 있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 사람에게 철학 전체의 빛을 줄 수는 없다고 판단되더라도, 대개는 적어도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친구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고 맹목적이고 어리석게도 “복수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복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며 분노를 꾹꾹 억누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적어도 우리는 그러한 행보가 어리석다는 생각을 밝히고, 친구가 받은 개인적인 모욕을 묵과할 수 있는 관대함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며 전달할 수는 있다. 편협함이 있는 곳에서는 관용을, 억압이 있는 곳에서는 정의를, 잔혹함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자비를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신념을 독단적으로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상황이 오면 우리가 신지학을 탐구하는 자임을 조용히 알리고, 기회가 닿을 때마 우리가 보는 진리를 겸손하지만 주저함 없이 옹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빛을 타인에게 기꺼이 나누어 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는 그 도움의 마음 상태에 우리가 항상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니, 그것이 완전한 깨달음의 목표를 향한 한 걸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