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인성의 소통
그러나 인성(하위자아)은 절대적으로 자아(혼)의 일부이고, 그 안에 있는 유일한 생명과 힘은 자아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성은 종종 그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완전히 별개의 독립체로 여기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물질계에서 일하게 된다. 인성은 항상 자아와의 의사소통의 통로(우리는 종종 그것을 안타카라나라고 함)를 가지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을 사용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연구한 적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 그의 인성은 그 사람의 모든 의도와 목적에 따르며, 그의 자아(혼)는 매우 드물고 부분적으로만 나타난다.
초기 단계에서 인간의 진화는, 이 자아와의 소통의 통로를 열어 그를 통해 자아가 점점 더 자기주장을 할 수 있게 되고, 마침내 자아가 인성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게 됨으로써 자아와 인성이 별도의 생각이나 의지를 갖지 않고 하위 삼계에 자아를 표현하는 데에 있다.
물론 상위 차원에 속해 있는 자아는 결코 여기서 자신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가장 큰 바램은 인성이 자아(혼, 참나)가 의도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포함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인데, 즉 자아가 이 하위 세계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만큼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의 인성은 자아와의 소통이 거의 없지만, 입문자는 인성과 자아가 완전한 소통을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 자아와 인성 두 극단 사이의 모든 단계에 우리 인간들이 위치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아 자신은 발달 과정에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매우 다른 발달 단계에 있는 자아들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쨌든 자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인성보다 훨씬 더 큰 존재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자아는 모나드의 한 조각에 불과하지만, 아직 힘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신의 원인체 안에서 자아로서 그 자체로 완전한 반면에, 인격 안에는 자아의 삶의 일부분만이 반영될 뿐이다.
또한 자아 수준의 삶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땅의 삶보다 훨씬 더 크고 생생한 것이 사실이다. 인격이 자아를 더 완전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진화인 것처럼 자아도 모나드를 보다 온전히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진화인 것이다. 발달되지 않은 인성은 이러한 자아와의 관계를 모두 망각하고 자신이 매우 독립적이라고 느낀다. 반면 그보다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자아가 모나드와의 연결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확실히 어떤 자아는 다른 자아보다 자신의 진화의 필요성에 대해 훨씬 더 깨어 있는데, 이는 오래된 자아(old soul)와 젊은 자아가 있고 오래된 자아가 자신의 잠재된 가능성을 펼치기 위해 더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다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자아가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단지 하나의 작은 일련의 자질들과 관련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내가 『인간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자세히 설명했듯이 야만인의 원인체는 거의 색깔이 없다. 인간은 자신의 진화 과정에서 원인체의 질료에 상응하는 진동에 해당되는 선한 자질들을 발전시킴에 따라, 그 자질들에 표현하는 색깔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 때 그의 원인체는 비어있지 않고 대신 활발하게 맥동하는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제 자아는 그것을 통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그 크기가 엄청나게 커질 수밖에 없으며, 자신 안에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을 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육체의 중심에서 점점 더 밖으로 멀리 확장되어 선함을 위한 광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훌륭하지만 그것은 자아라는 혼의 발전된 한 측면일 뿐이다. 혼에게는 우리가 이 땅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발전의 측면이 있다. 자아는 다른 동료 자아들 사이에서, 위대한 아루파 데바들(Arūpa Devas, “형태 없이 빛나는 존재들”의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신지학에서는 멘탈계의 세 상위계들의 존재를 가리킨다.)과 온갖 종류의 훌륭한 천사들 사이에서,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다. 아직 어린 자아는, 아마도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관심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아직은 그 모든 영광스러운 삶에 대해 거의 깨어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식이 점차적으로 펼쳐지면서 그는 이 모든 장엄함에 눈을 뜨고 그 생생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이 영광스러운 대상이 되어 우리 인간에게 처음으로 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생각을 알려준다. 그러한 존재들 사이에서 우리 인간의 생각들은 더 이상 낮은 수준의 염체를 취하며 이리저리 떠돌지 않고 번개가 번쩍이는 것처럼 움직인다. 여기서 우리 인성은 새로운 매개체를 얻지 않고도 점차 혼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고 내면의 혼을 표현하는 법을 다소 미약하게나마 배우지만, 우리는 언덕보다 더 오래된 하나의 몸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 몸은 언제나 우리 인성의 배후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을 통해 점차 힘을 펼치며 더욱 더 빛을 발하는 신의 영광을 실제로 표현하고 있는 것다.
여기서 우리는 더 이상 외형적인 형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표현 뒤에 숨어 있는 실재(Reality) 그 자체를 본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이며, 그것들의 통일성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추상적인 것을 위해 구체적인 것에서 떠났으며, 더 이상 다양한 형태가 아니라 그 모든 형태 뒤에 숨어 있는 관념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더 이상 세부적인 것을 연구하지 않고, 더 이상 어떤 주제를 둘러싸고 이야기하거나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체스를 둘 때 말을 움직이듯 우리는 대상의 본질이나 관념을 취해 전체적으로 움직인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체계가 있고 많은 책들이 필요하지만, 하나의 명확한 대상, 즉 테이블 위에 카드를 던질 때 던져질 수 있는 한 생각이 있을 것이다. 오페라나 오라토리오를 표현하는 데 몇 시간 동안 천체 오케스트라를 가득 채울 수 있는 하나의 강력한 화음이 있고, 미술 학파들의 방법들이 하나의 장엄한 관념으로 응축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관념들은 자아가 서로 대화할 때 사용하는 지적인 장치에 해당된다.
자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물리적인 말로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자아들의 차이는 여러 면에서 우리가 이곳에서 익숙하게 알고 있는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비유는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고도로 진보된 자아는 지혜와 친절로 가득 찬 위엄 있고 위풍당당하며 가장 예의 바른 외교사절인 대사를 연상시키는 반면, 덜 발달한 자아는 허풍이 많고 마음씨 좋은 시골 농노를 연상시킨다고 표현하게 되면, 그런 자아들과의 교류를 통해 내가 받은 인상을 희미하게나마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빛의 길을 가면서 거의 아데프트에 근접해 있는 자아는 위대한 천사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엄청난 힘의 영적 영향력을 발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