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더 높은 입문들
아르하트(Arhat, 아라한)
제 1, 2, 3 입문 이후의 단계 동안 후보자는 점차적으로 붓디 의식을 발전시키고 있지만, 네 번째 입문에서 인간은 니르바나(열반)계로 들어가며, 그 이후부터 인간 자아의 존재 기반인 다섯 하위계로 이루어진 그 분할을 통해서 또는 오히려 그 구분을 통해 꾸준하게 상승하게 된다.
이 입문은 어떤 면에서 중간 지점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보통 1 입문과 4 입문 사이에 평균적으로 일곱 번의 환생이 남아있고, 제 4 입문과 제 5 입문 사이에는 평균적으로 일곱 번의 (천상계의) 삶이 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 수치는 위아래로 줄거나 늘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천계에서는 막간이 없이 곧바로 연속적으로 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실제의 기간은 대개 그리 길지 않다.
제 4 입문을 통과한 사람을 불교에서는 아르하트(Arhat, 아라한)이라 부르는데, 이는 가치 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존경할 만한 사람, 완전한 사람을 의미하며, 동양의 서적에서는 그에 대해 매우 많은 아름다운 말을 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높은 수준의 진화를 이루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에서는 그를 ‘파라마함사((Paramahamsa)라고 부르는데, 그는 함사 위에 있거나 그 너머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기독교적 상징
기독교의 상징에서 제 4 입문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난, 십자가에 못 박힘, 그리스도의 부활로 나타나지만, 특정한 예비적 단계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난의 주간 동안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다양한 사건들로 더 완벽하게 상징될 수 있다. 이 시리즈의 첫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린 사건으로, 이 사건은 항상 종려 주일*전 토요일에 기념되지만 복음서에 따르면 이보다 한두 주 전에 일어났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성전에서의 연설, 수요일에는 가롯 유다의 배신, 목요일에는 성체 성사, 목요일과 금요일 사이 밤에는 빌라도와 헤롯의 재판, 금요일에는 십자가 처형이 있었다. 성 토요일은 감옥에 갇힌 영혼들에게 설교하는 데 보냈고, 토요일 자정 또는 일요일 아침에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원히 승리하였다.
*(역주) 종려 주일: 부활절 일주일 전 날로,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 그를 환영하는 사람들이 승리와 평화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구원자이자 왕을 환영하여 맞이한 날.
그리스도 드라마의 이러한 모든 세부 사항은 네 번째 입문과 관련하여 실제로 일어난 일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토요일에 나사로를 살리실 때 독특하고 놀라운 일을 하셨고,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모였기 때문에 곧 지상에서 한 번의 승리를 누리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를 기다렸고,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집에서 나왔을 때 박수와 큰 환호로 그를 영접했으며, 동방에서 지금도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그를 대접했기 때문에, 그는 큰 열정으로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갔고, 그 작은 지상의 인정을 얻은 그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가르칠 기회를 가졌으며, 성전에서 연설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입문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어느 정도 인기와 인정을 얻는다. 그런 다음 언제나 그를 배신하고 그의 말과 행동을 왜곡하여 악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배신자가 늘 존재한다. 루이스브룩(Ruysbroek)이 아래와 같이 말한 것처럼.
- 때때로 이 불행한 사람들은 지상의 좋은 것들과 자신의 친구들과 여러 인간관계들을 박탈당하고 모든 피조물로부터 버림받으며, 그들의 거룩함은 불신과 멸시를 받고,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모든 행위를 나쁘게 평가하고, 그들을 둘러싼 모든 사람에게 거부당하고 경멸을 받으며, 때로는 다양한 질병에 시달린다.
그 다음에는 욕설과 학대가 쏟아지고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가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장면이 나오고, 결국 그는 조롱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외침이 나온다.
블라바츠키 부인은 『비밀의 교리 Secret Doctrine』에서 그 말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설명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 저를 영예롭게(glorify) 하십니까!" 두 가지 번역 중 어느 것이 더 정확할지는 모르겠지만 두 가지 표현 모두에 큰 진실이 있다.
네 번째 입문의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이 완전히 홀로 남겨진다는 것이다. 먼저 그는 물질계에서 홀로 서야 하고, 모든 친구들이 어떤 오해로 그에게 등을 돌리는데, 바로 그 후 그 모든 것이 그에게 다가오지만 그 시간 동안 모든 세상이 그를 반대한다는 느낌으로 남겨진다.
그것이 그다지 큰 시련은 아닐지 모르지만 거기엔 또 다른 내면적 시련의 측면이 있다. 그는 잠시 동안 아비치(Avichi)라는 상태를 경험해야 하는데, 이는 "파동이 없는(waveless)", 즉 진동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아비치의 상태는 흔히 생각하는 (종교에서의) 지옥은 아니지만, 우주에서 절대적으로 홀로 서서 모든 생명, 심지어 로고스의 생명과도 단절된 느낌을 받는 상태이며 의심할 여지 없이 모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경험이다. 그것은 한 순간 동안만 지속된다고 말하지만, 그 극도의 공포를 느낀 사람들에게는 영원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 수준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이 끔찍한 시련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입문의 후보자는 아비치가 자신의 카르마의 결과로 자신에게 온다는 것에 충분히 공감할 수도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로고스와 고립되었다는 느낌으로 인한 압도적인 경악감이 사실은 환상과 유혹에 지나지 않으며, 그가 로고스와 하나라는 것을 완전한 확신으로 의기양양하게 자신이 외부의 모든 것과 완전히 분리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끔찍한 시험 앞에서 쓰러져 되돌아가서 입문을 향한 등반을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이 끔찍한 악몽을 뚫고 굳건히 일어설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이 시련 자체가 참으로 무시무시한 경험이기 때문에, 시련에 대해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해석이 적용될 수 도 있지만, "주님께서 참으로 저를 영예롭게 하시는군요“라며 시련에서 승리하고 나오는 사람의 느낌을 표현할 수도 있다.
이 입문은 고통과 승리라는 기묘한 이중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입문들과는 다르다. 이전의 각 입문은 그리스도교 체계에서 탄생, 세례, 변모라는 하나의 명확한 사실로 상징되었지만, 이 네 번째 입문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사건이 필요하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힘과 그 정점에서의 모든 다양한 고통들이 이 입문의 한 측면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고, 죽음을 이겨낸 부활은 또 다른 측면을 나타내었다. 이 단계에는 항상 육체, 아스트랄, 멘탈의 고통이 있으며, 항상 세상의 비난과 명백한 실패가 있으며, 항상 더 높은 차원에서의 화려한 승리가 있지만 외부 세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 입문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독특한 유형의 고통은 입문자의 앞길을 가로막는 카르마의 지체를 제거해준다. 그리고 그가 이 역경을 인내하고 기쁨으로 견뎌내는 일은 그 자신의 인물됨을 강화하는 데 큰 가치가 있으며, 앞으로의 일에서 그가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따라서 실제 이 입문을 상징하는 십자가와 부활은 고대 이집트의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묘사된다.
- 그리고 나서 입문의 후보자는 나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묻히고 나서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가 사흘 뒤에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사흘 밤낮을 맑게 지내고 사흘이 지난 후에야, 그 고대의 아직 넋이 나간 후보자는 그가 누워 있던 석관에서 일어나 피라미드나 신전의 동쪽의 바깥 대기에서 다시 태어나 떠오르는 태양의 첫 광선이 그의 얼굴에 떨어지자 긴 잠에서 깨어났다.
옛 속담에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고 했는데, 인간이 물질계로 내려가 물질의 십자가에 매이지 않았다면 부활을 얻고 영광의 면류관을 쓰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그 한계와 슬픔과 수난을 통해 승리를 얻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우리가 그 부활을 묘사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단어는 그 부활의 영광을 더럽히는 것 같고 그것을 묘사하려는 모든 시도는 거의 신성 모독으로 보이지만, 모든 슬픔, 고난과 어려움, 유혹과 시련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얻었고 지식과 내면의 힘으로 정복했기 때문에 그것들은 영원히 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붓다께서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선포했는지 기억해보라.
수많은 삶의 터전들
나는 슬픔 투성이의 감각의 감옥들을 초래한
그를 찾던 중에 그는 나를 붙잡아주었습니다.
나의 끊임없는 투쟁은 너무나도 극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예배의 장막을 지은 당신!
나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 고통의 벽을 쌓지 마시고,
기만의 집을 세우거나
진흙 위에 새로운 들보를 놓지 마시기를!
당신의 집은 무너졌고, 대들보는 갈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망상이 지어낸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안전하게 지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