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르바나(Nirvana, 열반)
아라한(Arhat)에게 있어서 붓디계(buddhic plane)의 의식은 그가 여전히 육신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그의 것이며, 그는 잠자는 동안이나 트랜스(trance) 상태에서 육신을 떠나 열반 차원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 속으로 단번에 들어간다. 제 1 입문에서 순간적으로 붓디의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는 제 4 입문을 받을 때 열반의 의식을 적어도 한 번은 엿보아야 하며, 이제 그의 매일의 노력은 열반계 속으로 더 높이 이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과업이지만, 점차적으로 그는 형언할 수 있는 광휘 속으로 오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열반계(nirvanic plane)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꽤나 당황스러운 일이며, 들어갈 때의 첫 느낌은 생명의 강렬한 생생함을 가져와 이미 붓디계에 익숙한 그에게도 놀라움을 안겨준다. 하위 계에서 다른 상위 계로 처음 올라갈 때마다 그의 놀라움은 앞선 입문의 단계에도 있었다. 완전하고 맑은 의식으로 물질계에서 아스트랄계로 넘어갈 때에도 우리는 새로운 삶이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광대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내가 삶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나는 예전에 삶을 전혀 몰랐었네!“라고 외치게 된다. 그러다가 아스트랄계에서 멘탈계로 넘어갈 때에도 우리는 그같은 느낌이 두 배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스트랄계는 훌륭했지만 멘탈계에서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더 높은 멘탈계로 넘어갈 때도 다시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모든 단계에서 똑같은 놀라움이 다시 찾아오며, 그 어떤 생각으로도 새로운 경험을 미리 대비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나며,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의 삶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지복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동양학자들은 열반을 소멸이라고 번역했는데,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촛불의 불이 한 번의 숨으로 꺼지는 것처럼 번뇌의 불이 "꺼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실에 대한 이보다 더 완벽한 대조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확실하게 소멸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열반계에서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며, 인간 안에 존재하는 신, 다른 신들보다 비록 더 작지만 신들 중의 신이기 때문이다.
온 우주가 살아 있는 빛의 거대한 흐름으로 가득 채워져 구성되어 있고, 그 전체가 상대성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거침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광활한 빛의 바다이며, 엄청나게 집중되어 있지만 전혀 긴장이나 노력이 없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목적이 있는 빛(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의 우주를 상상해 보라. 처음에 우리는 그 빛의 행복감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 빛의 강렬함만을 보게 되지만, 점차 이 눈부신 밝기 속에서도 더 밝은 점(핵)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데, 더 낮은 계들에서도 지각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특성을 가진 그 빛을 통해 그곳의 거주자들은 이러한 도움 없이는 그 광채를 전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다음 점차 우리는 이 보조 태양들이 위대한 존재들, 행성의 영들, 위대한 천사들, 카르마의 신들, 드얀 초한들, 붓다들, 그리스도들, 마스터들, 그리고 우리가 그 이름조차 모르는 수많은 다른 존재들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며, 그들을 통해 빛과 생명이 낮은 차원으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경이로운 현실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우리가 비록 그들의 찬란함의 높이보다 훨씬 아래에 있지만, 우리가 그들과 하나라는 것, 우리가 그들 모두의 안에 계시는 분의 일부이라는 것, 우리가 그들 사이의 공간의 모든 지점에 존재하며, 우리 자신도 하나의 초점이며, 빛과 생명이 훨씬 낮은 수준의 우리를 통해 우리보다 더 멀리 아래에 있는 존재들에게로 (그분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존재들이 그분의 일부이고 다른 것은 없기 때문에) 흐르고 있음을 인식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깨달음으로써 그분을 이해하고 경험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