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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들과 길 - 제 10장 더 높은 입문들 (3) 니르바나(열반) #2

작성자허공|작성시간24.10.08|조회수23 목록 댓글 0

블라바츠키 부인은 종종 니르바나 의식에 대해 “그 중심은 어디에나 있고 둘레는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파스칼(Pascal), 쿠사(Cusa) 추기경, 조하르(Zohar)에서 다양하게 기인한 심오하고 암시적으로 표현된 것이지만, 그것은 당연히 헤르메스 서적들에 속하는 문장이다. 실제로 그 의식은 소멸과는 거리가 멀며, 그 의식에 도달한 입문자는 자신이 "나"라는 감각을 조금도 잃지 않았으며, 그의 기억은 완벽하게 연속적이며, 그는 같은 사람이지만,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이제 “나”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나는 나다(I AM I)”라고 말할 수 있다.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 )경은 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했다:

 

   ... 그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얻는다;

   자아(self, 하위자아)를 포기하면 우주가 “나(참나)”를 성장시킨다.

   누군가 열반이 멈춰버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그런 이들에게 그것은 거짓이라고 말하라.

   누군가 열반이 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그들이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그들은 자신의 깨진 등잔 너머에 어떤 빛이 비치고 있는지,

   생명도 시간도 없는 지복이 존재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말하라.

 

죽었다는 의미에서 생명이 없음이 아니라, 그는 바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생생한 생명의 표본이자 표현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없다는 것은 그가 삶과 죽음을 모두 초월하여 영원히 윤회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지옥은 신이 없는 시간으로 정의되었고, 천국은 시간이 없는 신으로 정의되었지만, 분명 후자의 설명이 열반에 더 적합할 것이다.

 

열반에 대해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어떤 설명도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어떤 말들도 그러한 경험에 대한 최소한의 관념조차 제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에 익숙한 모든 것이 그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 오래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 수준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영(Spirit)을 위한 덮개가 있는데,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원자처럼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체(whole plane)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자신의 내면 어디든 집중할 수 있으며 잠시 동안 힘의 분출이 줄어드는 곳 어디에서든 그에게는 그것이 바로 그의 몸이다.

 

열반의 형언할 수 없는 찬란함은 필연적으로 모든 물리적 이해를 넘어서 있으며, 결과적으로 열반을 묘사하려는 가장 시(詩,poem)적인 시도조차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은 저마다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놓친 어떤 부분에 기여할 수 있다. 나는 이미 내 나름대로 받은 인상을 전달하려고 노력했지만, 이제 내 평생 친구이자 형제 주교인 조지 시드니 아룬데일(George Sydney Arundale) 주교가『열반, Nirvana』이라는 책에서 전달할 수 없는 것을 전하기 위해 매우 놀랍고 용감하게 노력한 내용을 인용해 보겠다. 물론 우리 모두가 묘사에 실패하지만, 나는 그가 열반의 전달에 있어 나보다 더욱 성공적인 성취에 접근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의 첫 번째 기억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모습의 쿠트후미 대사를 본 것이다. 그분은 언제나 빛나고 지극한 광채  가  나지만 그때 그분은 광채 그 이상이었으며, 내가 첫 번째 열반 의식의 섬광을 가지고 그분을 인식했을 때 그것을 묘사할 단어를 찾을 수는 없다. 장엄하고 눈부시다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나는 한동안 그에 압도 당했기에 "눈이 부시다"는 표현이 아마도 더 잘 어울릴 것이다. 나는 눈이 부셔 얼굴을 가려 보지 않으려 했지만, 그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고, 그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였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분은 왕이신 (마이뜨레야) 그리스도보다 덜 영광스러웠지만, 당시에는 그보다 더 큰 영광을 상상할 수 없었다.

 

용기를 내어 나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나는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꼈다 : "그대가 정복하는 법을 배워야 할 새로운 왕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분의 힘으로 내 의식이 펼쳐지고 나는 문턱을 넘어 열반으로 나아간 듯했다. 아무리 아름답고 장엄한 단어와 문구라도 그곳의 상황을 묘사하려고 애쓰다 보면 오히려 그 신성함을 더럽히기 일쑤이다. 이 고상한 차원에 대한 첫 경험의 희미한 접촉조차 입문 전수자 한 분의 현존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제외한 다른 모든 차원에서의 모든 경험들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나는 대백색형제단의 대열에 처음 들어섰을 때 붓디계를 엿본 것을 기억한다. 나는 지금까지 붓디체를 입고 있는 마스터의 모습을 보고 경탄했던 것을 기억하며, 그 후 며칠 동안 모든 것들, 나무와 꽃들과의 놀라운 일체감, 그 모든 것들과 함께 느끼고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성장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받고 기뻐하는 그 통일감을 잘 기억한다. 나는 또한 오랜 친구인 인과체(코잘체, 혼)의 몸을 벗어던지는 순간을 기억하며, 새로운 왕국을 엿보기 전과 후가 생생하게 갈라지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마스터는 내가 어린아이로서 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왕국의 영광을 두른 옷을 입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분으로 보였다. 새로운 의식이 나를 감싸고 순식간에 내 세계는 새롭고 낯설고 영광스러운 가치들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이 같으면서도 지극히 다르다. 새로운 신성이 내 눈에 열리고, 내 시선에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목적이 펼쳐진다. 그것은 초월되고 영광스러운 붓디의 통일성 즉 더욱 놀라운 통일성이며, 어떤 경이로운 방식으로 더 광대하고 더욱 엄청난 상태로 합쳐진다. 통일성보다 더 진실하고 더 진정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러하다.

 

붓디의 영광조차도 제한된 것에 지나지 않는 그것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 말은 끔찍할 정도로 진부하게 들린다. 나는 그것을 초월적인 빛의 영광, 즉 하느님 자신의 영원성의 형상인 빛의 세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분의 권능의 때 묻지 않은 거울과 그분의 선하신 형상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거울이자 형상은 끝없이 펼쳐진 빛의 바다이며, 그 아래 계에서 나는 하나됨의 절정에 의해 그 바다의 일부(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미 그 일부가 되었지만)가 된다. 그것은 바깥 세계에서는 형제단이며, 붓디계에서는 하나의 통일체이며, 열반계에서는 초월적인 빛이다.

 

이 초월적인 빛은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엄청난 사실로 보였던 붓디의 통일성보다 더 실재에 가깝다. 그것의 시작도 빛이고, 그것이 가는 길도 빛이며, 그것의 미래도 빛이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하셨고, 거기에 빛이 있었고 지금도 형용할 수가 없는 빛이 존재한다. 세상의 빛이 아름답지만, 그 빛은 단지 이 실재의 영역에서 승리하신(왠지 이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빛의 희미하고 연약한 이미지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내려오기 전의 태양의 빛이다. 그것은 형태를 가진 정화된 빛이다. 그 빛은 형태를 가진 생명이다. 그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불멸성을 암시"하는 빛이며, 현재 안에 있는 미래이지만 그럼에도 영원하다. 그 빛은 우리가 ’그(the)’를 붙여 말하지 않고 우리가 알고 있는 빛의 절정이자 본질의 빛이다. 가장 경이로운 새벽의 모든 영광(완벽한 동양의 새벽보다 더 멋진 것은 없다고 느낀다)은 열반이라는 정오에서 영광스러운 결실과 찬란한 완벽함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빛은 하나님이며, 사람도 빛이고 모든 것이 빛이니, 고대 이집트의 다음과 같은 권고에 새로운 의미가 들어 있다. "빛을 찾으라! 빛을 따르라! 모든 것들에서 하나님의 빛과 하나가 되는 법을 인식하고 배우도록 하라." 나는 세상을 바라본다. 나는 빛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하나님의 빛은 인간의 빛, 바위의 빛, 나무의 빛, 생물의 빛으로 현현된다. 모든 것은 빛이며, 그 중심부에는 눈부신 영광이 있고 그것이 주변으로 발산되면서 색깔이 바뀐다. 모든 자연의 왕국들에 있는 각각의 사물 안에는 미래의 불꽃 씨앗(blazing seed)인 하나님의 빛, 눈부신 영광이 어디에든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의 씨앗들은 자신의 순백색(whiteness)을 스펙트럼의 색들로 분광된다.

 

자연의 각 왕국에는 일곱 가지 큰 색채의 경로가 있고, 각 경로에는 처음에 잠재력이 있다가 마지막에는 영광스러운 결실로 펼쳐진다. 우리는 광물계의 왕들인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가 각자 자신의 그 완벽한 색채를 뽐내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그 영광들이 내재된 채 갇혀 있다가 오랜 진화의 과정을 통해 서서히 풀려나 광물계의 보석으로 자유롭고 찬란하게 서 있다. 모든 왕국들에서 그것이 똑같이 적용된다. 자유로운 존재들이 더욱 강력하고 찬란한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 다시 한번 그 다음 상위 왕국에서 갇혀있는 것이다.

 

열반이라는 고요한 번개에 몸을 담근 나는 만물 속에 갇혀 있는 번개를 감지한다. 나는 둔한 빛인 야만인과 밝은 빛인 진화된 인간, 영광의 빛인 초인 즉 마스터를 감지한다. 나는 변형과 영광, 초월의 과정에 있는 어디에서든 색을 본다. 빛의 부정이라는 의미에서 어둠은 어디에도 없다. 신께서 말씀하셨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모든 곳에 빛이 있었고 지금도 빛이 존재한다. "그분의 빛은 우리의 어둠 속에서도 빛난다."

 

열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의 빛이다. 나는 잠시 동안 니르바나의 가장 낮은 층과 가장 밀도가 높은 층을 만지고 있다. 이 열반의 영광은 여기 아래 세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지상에 돌아와서 나는 그 실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내 안에 남긴다. 나는 실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세상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대한 동지애 즉 더 심오한 정체성과 더 영광스러운 기원과 더 영광스러운 방식과 목표가 있다. 언제 어디서나 신의 햇빛 메신저들이 함께하고 있다. 모든 색깔이 그분의 말씀과 음성을 전하고 모든 형태들이 그분의 목적을 숨쉬고 있다. 나는 햇빛 속의 먼지이지만 그 일부이며, 태양을 올려다보면서 내 자신만의 신성한 징표와 나의 궁극적인 성취에 대한 구체화된 약속을 본다. 태양이신 우리 주님이 그러하듯이 우리 모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렇게 되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빛은 언어이고 생각이며, 의복이고 매체이다. 빛의 섬광은 우리에게 모든 철학을 전달한다.

 

빛은 태양의 의지, 태양의 지혜, 태양의 사랑이다. 열반은 행복이라고 책에 적혀 있다. 가장 외진 바깥 지역에도, 변경 지대에도 열반이 무한하게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최전선인 곳, 국경에서도 나는 열반이 무한히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 한 번만 엿보는 것으로도 내 안과 밖의 모든 것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지만 완전히 변화했고,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재평가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모든 것이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든 왕국의 모든 사물은 어떤 의미로는 실재보다 훨씬 더 실재(Reality)의 그림자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빛의 반사가 얼마나 미약하고 불충분한지 인식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미약하다는 것을 전에는 몰랐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모든 사물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실재하는 것이며, 훨씬 더 실재의 그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형태라는 감옥의 기회를 보고 그림자를 인식한다. 나는 영원한 빛의 찬란함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실재를 인식한다. 이 열반의 세계에 비하면 다른 모든 세계는 그림자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들은 이 열반의 세계로 인해 더 실재적인 세계들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만물에 설정되어 있는 신의 목적이라는 봉인을 인식하고 있으며, 전보다 훨씬 더 깊이 만물을 경외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순수한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순수한 존재가 무엇인지 감지할 수 있는 듯한데, 그것은 내가 순수한 존재와 접촉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다른 모든 의식 상태보다 순수한 존재에 덜 미치는 것들과 접촉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경우 언어가 생각과 의미를 숨긴다는 것은 참으로 진실된 것이다. 내가 열반적인 것들의 의미를 전달하려면 열반적인 언어가 필요하다. 마이어스(Myers)가 다음과 같이 매우 아름답게 말했듯이:

 

  오,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당신들은 확실히 그것을 믿을 겁니다 !

  오, 내가 본 것만 말할 수만 있다면 !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전달 받을 수 있나요?

  내가 가봤던 곳으로 당신을 데려다 줄 때까지, 어떻게요?

 

위에 제시된 인용문은 전체와 단절된 일부 발췌문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 저명한 저자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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