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
- 김대규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8시 샘병원에서 발인하셨답니다. 선생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늘 나라에서 평안하소서~ - 오전 10.01
- 어라 진짜?- 오전 10.02
-24일 0 시에. ㅇㅇ 이가 신문서 보고 문자함- 오전 10. 03
막 중학동창들 모임에 나가려는데 카톡이 왔다. 언니가 보낸 것이다. 세상에! 돌아 가셨다고, 정말?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인터넷에다 '김대규 시인'을 치니 사실이었다.
오늘에사 알았으니 문상도 못 가고 언니가 보내 준 급보를 카톡으로 중학동창과 고교 동창들에게 전달했다. 모두들 황망해 하며 놀라워했다.
제일 친한 친구의 큰오빠이기도 한 선생님의 근황은 며칠 전에 듣기도 했다. "태정이가 연극을 했었지." 하시며 예전에 극본을 쓴 얘기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간 투병생활을 하시다 급성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향년 77세로.
김대규 선생님!
그 분은 60년대 중후반에 안양여중.고 전교생의 스타 같은 존재셨다. 키가 후리후리 하시고 얼굴은 시꺼멓고 잘 생긴 편은 아니나 호감형이셨다. 노래도 잘 하셨다. 특히 안다성의 노래를. 운동장에서는 농구 공을 드시고 펄펄 날으셨다. 연대 다니실 때 알바 형식으로 우리 고등학교 배구 코치를 하셨을 정도로 운동을 다 잘 하셨다. 게다가 박학다식하며 유머러스하시기까지한 우리의 국어 선생님! 그 분 인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찮아도 중.고 시절에 문학소녀 아닌 학생이 어디 있을까만, 특유의 지적이고 재치 있는 말솜씨로 문학적 향기를 듬뿍듬뿍 뿌리시는 바람에, 시 씁네~ 하는 꿈꾸는 문학소녀들이 우르르~
고등학교 언니들은 선생님을 흠모하시매 심지어 그 분이 언급한 전혜린을 좋아하기도 하고 시도 쓰는 등 문학활동이 활발했다. 가을이면 고운 낙엽들을 상자에 넣어 선생님께 소포로 보낸 선배도 있다고 들었다.
학교 신문 '목련지'를 창간하기도 하시고 중 3 땐 '목련 문학상'을 만들어 시와 수필 부문에 작품을 응모케 하여 교정에 글쓰기 열풍도 불러 일으키셨다.
나 또한 문학소녀로서 국어 시간의 과제인 일기쓰기는 물론 어줍잖게 시도 쓰기시작했다. 중 2 때 '추억'이라는 시를 쓴 게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동시 같은 것인데도 선생님께 불려가 '역시 시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 써야 하는 거야." 하고 과분한 칭찬을 듣는 바람에 잘난 척하고 혼자 끙끙대며 새로운 시어를 만들려고 애를 썼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건만 어린 나이에 뭐를 안다고.. 결국 '레코드'란 표지의 일기장에다 시를 습작하다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월남전을 배경으로 순정소설을 쓰기 시작 했다. 주인공을 죽였다 살렸다 하며 쓰는 재미에 푹 빠지기도 했다. 혼자 즐거워하다가 그도 끝낸 것 같다.
어쨌든 일찍이 시인의 꿈을 접어 유감(?)이었지만 선생님께서 예술제 때 '연극'에 캐스팅을 해주시는 바람에 참으로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고 1 때 '딸부잣집'에서 8명의 딸 중 6번째 딸인 '라'역을 맡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 합숙을 하며 대사를 외우고 어둠이 내려 앉으면 강당 무대에서 밤 늦도록 연습을 하던 거, 쉬는 시간이면 선생님께서 담배연기로 도나스를 몽글몽글 만들어 올려 주시던 거. 지금도 참으로 아득하면서도 행복한 추억이다.
'양지동 946 번지' 시집 제목이기도 했지만, 친구를 빌미로 집으로 놀러 가면 한 방 가득 해묵은 책들이 그득, 특유의 냄새에 취해 그 친구를 무지 부러워했던 것도 그립고 아련한 추억이기도 하다.
모두들 좋아했던 우리 선생님! 푸르른 시절에 문학의 세계로 빠져 들게 하여 곱고 아름다운 감성을 심어주셨던 우리 선생님! 어쩌면 선생님의 마지막 책인 ' 詩는 내게 과분한 축복이었노라'처럼 우리들에겐 '선생님은 꿈 많은 소녀들에게 과분한 축복이었노라'라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옛날 "자 그만!" 하면 신기하게도 바로 수업이 끝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 나오고, 이내 한 손을 들어 올리고 나가시던 그 모습으로, 선생님은 인생이란 무대에서 그렇게 퇴장하셨나 보다.
이제는 아픔 없는 그곳에서 편히 쉬시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