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 이태준(1904 ~ ? )
[줄거리]
괴팍한 문체로 독자에게 별 인기를 못 얻고 있는 작가인 ‘그'는 생활의 여유가 없다. 그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한적한 시골에 있는 친구의 별장을 빌려 겨울을 지내기로 한다. 그 별장 주위의 나무에는 많은 까마귀가 날아와 둥지를 틀고 있다.
어느 날, 별장 정원을 산책하던 중 폐병 요양 차 이곳에 온 한 여인과 만난다. 몇 번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그는 이 여인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그녀가 삶에 대한 미련도 없이 자포자기(自暴自棄)한 인물임을 알게 된다. 특히, 그녀는 거의 병적으로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싫어하며, 까마귀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까마귀의 뱃속에 아마 별별 귀신 딱지가 다 든 것처럼 무서워하고, 무슨 부적이 들고 칼이 들고 시퍼런 불이 들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이 여인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그녀의 애인이 될 것과, 까마귀에 대한 그녀의 공포를 덜어 주기 위해 까마귀를 잡아 그 내장을 직접 확인시켜 줄 계획을 세우고는 실제로 까마귀를 잡아 매달아 놓는다.
그러나 그녀는 며칠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고, 얼마 후 그녀의 상여가 나간다.
[등장인물]
*그 : 소설가. 폐병에 걸린 한 여인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노력한다.
*여인 : 폐병 환자. 시골의 어느 별장에 요양 차 와 있다.
*정자지기: 별장 관리인
[구성]
*발단 : 작가인 ‘그'는 겨울을 나기 위해 친구의 별장을 찾는다.
*전개 : 별장 부근에서 한 여인을 만나 가깝게 사귄다.
*위기 : 그는 폐병에 걸려 죽어가는 그녀가 삶에 대한 미련이 없고, 까마귀를 병적으로 싫어함을 알게 된다.
*절정 : 까마귀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그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실제로 까마귀를 잡아 그 내장을 확인시켜 줄 계획을 세운다.
*결말 : 그녀에게 까마귀의 내장을 보여 주기 전에 그녀는 죽고 만다.
[핵심 정리]
*갈래 : 단편 소설
*구성 : 단순 구성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배경 : 1930년대 어느 늦가을에서 겨울까지, 고풍스럽고 음습한 별장
*제재 : 폐병 환자인 아가씨와 까마귀
*특징 ①이 작품은 음습한 별장, 반복되는 까마귀의 울음소리, 폐병 환자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분위기의 묘사를 통해, 주인공인 ‘그'와 ‘그'의 문명(文名)을 사모하는 어떤 여인과의 만남을 그리면서,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②서술 태도: 죽어 가는 인물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서정적으로 투사되고 있다.
③감각적 묘사: 고색창연한 별장이 시각적 묘사와 까마귀 울음소리의 청각적 묘사를 통해 작품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특히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젊은 여인의 죽음을 암시하는 복선의 구실도 하고 있다.
④까마귀의 의미: 우울한 분위기를 조성함. 여인의 죽음을 암시함.
*주제 :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과 죽음
*출전 : 『조광(朝光)』(1936) 까마귀(1936년 <조광>)
*이태준(1904 ~ ? ) : 강원도 철원 출생. 호는 상허(尙虛). 동경 상지대학 예과 중퇴. 1925년 <시대일보>에 <오몽녀(五夢女)>로 등단. 이화여전 강사, <조선 중앙일보> 학예부장 역임. <구인회(九人會)> 동인. <문장>지 주관. 해방 후 <조선 문학가 동맹 중앙 집행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좌익 문학 운동을 하다가 1946년 월북함. 그는 탁월한 미학적 문체로 예술적 정취가 짙은 단편을 남겼다. 그는 이러한 서정적 작품 속에서도 시대정신을 추구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까마귀>, <달밤>, <사냥>, <제2의 운명>, <불멸의 함성> 등이 있다.
[이해와 감상]
1936년 <조광>에 발표된 단편 소설로, 주인공인 ‘그’와 죽음을 앞둔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죽음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까마귀 소리가 들리는 고풍스럽고 음습한 별장은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죽음의 문제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감각적 묘사가 돋보이는데, 별장에 대한 시각적 묘사와 까마귀 울음소리의 청각적 묘사를 통해 작품의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반복되는 까마귀 울음소리는 여인의 죽음을 예견하게 하는 복선 구실도 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서술자의 가난, 젊은 여인의 병, 여인과 정혼자의 사랑, 여인에 대한 화자의 감정을 모두 아름답게 그리면서 삶의 비극성을 역설적으로 미화시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까마귀는 불길한 새로 여겨지고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죽음을 연상하게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까마귀가 늘 가까이 있는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젊은 여인의 사랑과 죽음이 신비롭게 그려진다.
[지문]
“호―” / 새로 사온 것이라 등피(燈皮-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바람을 막고 불빛을 밝게 하기 위하여 남포등에 씌우는 유리로 만든 물건)에서는 아직 석유내도 나지 않는다. 닦을 것도 별로 없지만 전에 하던 버릇으로 그렇게 입김부터 불어 가지고 어스레해진 하늘에 비춰 보았다. 등피는 과민하게도 대뜸 뽀-얗게 흐려지고 만다. / “날이 꽤 차졌군…….”
그는 등피를 닦으면서 아직 눈에 익지 않은 정원을 둘러보았다. 이끼 앉은 돌층계 밑에는 발이 묻히게 낙엽이 쌓여 있고 상나무, 전나무 같은 상록수를 빼어 놓고는 단풍나무까지 이미 반나마 이울어서(점점 시들어서, 쇠약해져서) 어떤 나무는 잎이라고 하나도 없이 설멍하게(잎이 하나도 없는 나무, 아랫도리가 가늘고 길어 어울리지 않게) 서 있다. -묘사(보여주기) ‘무장해제를 당한 포로들처럼’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 쓸쓸한 나무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 묵묵히 서 있는 것을 그는 등피를 다 닦고도 다시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자기 방으로 정한 바깥채 작은사랑으로 올라갔다.
여기는 그의 어느 친구네 별장이다. 늘 괴벽(怪癖-괴이한 버릇)한 문체(文體)를 고집하여 독자를 널리 갖지 못하는 그는 한 달에 이십 원 남짓 하면 독방을 차지할 수 있는 학생층의 하숙생활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궁여의 일책으로 이렇게 임시로나마 겨우내 그냥 비워 두는 친구네 별장 방 하나를 빌린 것이다. 내년 칠월까지는 어느 방이든지 마음대로 쓰라고 해서 정자지기(별장 관리인)가 방마다 문을 열어 보이는 대로 구경하였으나 모두 여름에나 좋은 북향들이라 너무 음습하고 너무 넓고 문들이 많아서 결국은 바깥채로 나와, 상노(床奴-예전에 밥상 나르는 일과 잔심부름하던 아이)들이나 자는 방이라는 작은사랑을 치우게 한 것이다.
상노들이나 자는 방이라 하나 별장 전체를 그리 손색 있게 하는 방은 아니었다. 동향이어서 여름에는 늦잠을 자지 못할 것이 흠일까, 겨울에는 어느 방보다 밝고 따뜻할 수 있고 미닫이와 들창도 다갑창까지 들인데다 벽장문과 두껍닫이에는 유명한 화가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낙관(落款-글씨나 그림 따위에 작가가 자신의 이름이나 호[號]를 쓰고 도장을 찍는 일, 또는 그렇게 찍는 도장)이 있는 사군자(四君子-동양화에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그린 그림)며 기명절지(器皿折枝-여러 가지 그릇과 꽃가지, 과일 따위를 섞어서 그린 그림)가 붙어 있다. 밖으로도 문 위에는 추성각(秋聲閣)이라 추사체의 현판이 걸려 있고 양쪽 처마 끝에는 파―랗게 녹슨 풍경이 창연히 달려 있다. 또 미닫이를 열면 눈 아래 깔리는 경치도 큰사랑만 못한 것 같지 않으니, 산기슭에 나붓이 서 있는 수각(水閣-물가나 물 위에 지은 정자)과 그 밑으로 마른 연잎과 단풍이 잠긴 연당(연못)이며 그리고 그 연당 언덕으로 올라오면서 무룡석으로 석가산을 모으고 잔디밭 새에 길을 돌린 것은 이 방에서 내려다보기가 기중일 듯싶었다. 그런데다 눈을 번뜻 들면 동편 하늘이 바다처럼 트이고 그 한편으로 훤칠한 늙은 전나무 한 채가 절벽같이 가려 서 있는 것이다. 사슴의 뿔처럼 삭정이가 된 상가지에는 희끗희끗 새똥까지 묻어서 고요히 바라보면 한눈에 태고(太古-아주 오랜 옛날)가 깃들이는 듯한 그윽한 경치이다. -배경 묘사(보여주기)
오래간만에 켜보는 남폿불이다. 펄럭―하고 성냥불이 심지에 옮기더니 좁은 등피 속은 자옥하게 연기와 김이 서리었다가 차츰차츰 밝아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차츰차츰 밝아지는 남폿불에 삥―둘러앉았던 옛날 집안사람들의 얼굴이 생각나게, 그렇게 남폿불은 추억 많은 불이다.
그는 누워 너무나 고요함에 귀를 빼앗기면서 옛사람들의 얼굴을 그려 보다가 너무나 가까운 데서 까악― 까악― 하는 까마귀 소리에 얼른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바깥은 아직 아주 어둡지 않았다. 또 까악― 까악― 하는 소리에 쳐다보니 지나가면서 우는 소리가 아니라 바로 그 전나무 삭정가지에 시커먼 세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그러는 것이었다.
“까마귀!” / 까치나 비둘기를 본 것만은 못하였다. 그러나 자연이 준 그의 검음과 그의 탁한 음성을 까닭 없이 저주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그의 까마귀에 대한 태도(객관적으로 보고 있음) 마침 정자지기가 올라와서, / “아, 진지는 어떡하십니까?”
하는 말에, 우유하고 빵이나 먹고 밥 생각이 나면 문안 들어가 사먹는다고, 그래도 자기는 괜찮다고 어름어름하고 말막음(남의 나무람이나 성가신 말을 하지 못하도록 미리 어름어름 막음)으로, / “웬 까마귀들이……?” / 하고 물었다.
“네, 이 동네 많습니다. 저 나무엔 늘 와 사는 걸 입쇼.”
“그래요? 그럼 내 친구가 되겠군…….” / 하고 그는 웃었다.
“요 아래 돼지 기르는 데가 있습죠. 거기 밥찌꺼기 같은 게 흔하니까 그래 까마귀가 떠나질 않습니다.” / 하면서 정자지기는 한걸음 나서 팔매(돌 같은 작고 단단한 물건을 손에 쥐고 팔을 흔들어서 멀리 던지는 짓) 치는 형용을 하니 까마귀들은 주춤하고 날 듯한 자세를 가지다가 아래를 보더니 도로 앉아서 이번에는 ‘까르르……’하고 아래로 한없이 붙은 발음을 하는 것이다.
정자지기가 내려간 후, 그는 다시 호젓하니 문을 닫고 아까와 같이 아무렇게나 다리를 뻗고 누워 버렸다.
배가 고팠다. 그는 또 그 어느 학자의 수면습관설(睡眠習慣設)이 생각났다. 사람이 밤새도록 그 여러 시간을 자는 것은 불을 발명하기 전에 할 일이 없어 자기만 한 것이 습관으로 전해진 것뿐이요, 꼭 그렇게 여러 시간을 자야만 될 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 수면습관설에 관련하여 식욕이란 것도 그런 것으로 믿어 보고 싶었다. 사람은 하루 꼭꼭 세 번씩 으레 먹어야 될 것처럼 충실히 먹는 것이나 이것도 그렇게 많이 먹어야만 되게 되어서가 아니라, 애초에는 수요 적은 사람들이 넓은 자연 속에서 먹을 것이 쉽사리 손에 들어오니까 먹기만 하던 것이 습관으로 전해진 것뿐이요, 꼭 그렇게 세 끼씩이나 계획적으로 먹어야만 될 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람이 잠을 자기 위해서는 그처럼 큰 부담이 있는 것은 아니나 먹기 위해서는, 하루 세 번씩 먹는 그 습관을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얼마나 무거운 부담이 있는 것인가. 그러기에 살려고 먹는 것이 아니라 먹으려고 산다는 말까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인간의 관습과 습관에 대한 회의
‘먹으려구 산다! 평생을 먹으려구만 눈이 뻘개 허둥거리다 죽어? 그건 실로 인간의 모욕이다.’ /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지금 자기의 속이 쓰려 올라오는 것과 입 속이 빡빡해지며 눈에는 자꾸 기름진 식탁이 나타나는 것을 한낱 무가치한 습관의 발작으로만 돌려 버리려 노력해 보는 것이다.
‘어디선가 예술가는 빵 한 근보다 꽃 한 송이를 꺾는다고, 그러나 배가 고프면? 하고 제가 묻고는 그러면 그는 괴로워하고 훔치고 혹은 사람을 죽일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글쓰기를 버리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난 배가 고파할 줄 아는 얄미운 습관부터 아예 망각시켜 보리라. 잉크는 새것이 한 병 새벽 우물처럼 충충히 담겨 있것다, 원고지도 두툼한 게 여남은 축 싸여 있것다!’
그는 우선 그 문 앞으로 살랑살랑 지나다니면서 ‘쌀값은 오르기만 허구.……석탄두 들여야겠는데……’를 입버릇처럼 하던 주인마누라의 목소리를 십 리나 떨어져서 은은한 풍경 소리와 짙은 어둠에 함빡 싸인, 이 산장 호젓한 방에서 옛 애인을 만난 듯한 다정스러운 남폿불을 돋우고 글만을 생각하는 데 취할 수 있는 것이 갑자기 몸이 비단에 싸이는 듯, 살이 찔 듯한 행복이었다.
저녁마다 그는 남포에 새 석유를 붓고 등피를 닦고 그리고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서 어둠을 기다리었다. 방 구석구석에서 밤의 신비가 소곤거려 나올 때 살며시 무릎을 꿇고 귀한 손님의 의관처럼 공손히 남포 갓을 들어 올리고 불을 켜는 것이며 펄럭거리던 불방울이 가만히 자리 잡는 것을 보고야 아랫목으로 물러나 그제는 눕든지 앉든지 마음대로 하며 혼자 밤이 깊도록 무얼 읽고 무얼 생각하고 무얼 쓰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이면 늘 늦도록 자곤 하였다. 어떤 날은 큰사랑 뒤에 있는 우물에 올라가 세수를 하고 나면 산 너머로 오정 소리가 울려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날은 무슨 무서운 꿈을 꾸고 그 서슬에 소스라쳐 깨어 보니 밤은 벌써 아니었다. 미닫이에는 전나무 가지가 꿩의 장북(긴 꼬리깃털)처럼 비끼었고 쨍쨍한 햇볕은 쏴― 소리가 날 듯 쪼여 있었다.(시각의 청각화-공감각적 표현) 어수선한 꿈자리를 떨쳐 버리는 홀가분한 기분과 여기 나와서는 처음 일찍 깨어 보는 호기심에서 그는 머리를 흔들고 미닫이부터 쫙 밀어 놓았다. 문턱을 넘어 드는 바깥 공기는 체온에 부딪히는 것이 찬물 같았다. 여윈 손으로 눈을 비비며 얼마나 아름다운 아침일까를 내어다보았다. 해는 역광선이어서 부신 눈으로 수각을 더듬고 연당을 더듬고 잔디밭 길을 더듬다가 그 실뱀 같은 잔디밭 길에서다. 그는 문득 어떤 여자의 그림자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여태 꿈인가 해서 다시금 눈부터 비비었다. 확실히 여자요, 또 확실히 고요히 섰으되 산 사람이었다. 그는 너무 넓게 열렸던 문을 당황히 닫아 버리고 다시 조그만 틈으로 내어다보았다.
여자는 잊어버린 듯 오래도록 햇볕만 쏘이고 서 있다가 어디선지 산새 한 마리가 날아와 가까운 나뭇가지에 앉는 것을 보더니 그제야 사뿐 발을 떼어놓았다. 머리는 틀어 올리었고 저고리는 노르스름한 명주빛인데 고동색 스웨터를, 아이 업듯, 두 소매는 앞으로 늘어뜨리고 등에만 걸치었을 뿐, 꽤 날씬한 허리 아래엔 옥색 치맛자락이 부드러운 물결처럼 가벼운 주름살을 일으켰다. 빨간 단풍잎 하나를 들었을 뿐, 고요한 아침 산보인 듯하다. / ‘누굴까?’
그는 장정(裝幀) 고운 신간서(新刊書)에처럼 호기심이 일어났다. 가까이 축대 아래로 지나가는 것을 보니 새 양봉투 같은 깨끗한 이마에 눈결은 뉘어 쓴 영어 글씨같이 차근하다. 꼭 다문 입술, 그리고 뾰로통한 콧봉오리에는 여간치 않은 프라이드(자부심)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인물묘사(보여주기) / ‘웬 여잔데?’
이튿날 아침에도 비교적 이르게 잠이 깨었다. 살며시 연당 쪽을 내어다보니 연당 앞에도 잔디밭 길에도 아무도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런지 붙들었던 새를 날려 보낸 듯 그는 서운하였다.
이날 오후이다. 그는 낙엽을 긁어다가 불을 때고 있었다. 누군지 축대 아래에서 인기척이 났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내려다보니 어제 아침의 그 여자다. 어제 그 옷, 그 모양, 그 고요함으로 약간 발그레해진 얼굴을 쳐들고 사뭇 아는 사람을 보듯 얼굴을 돌리려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서 있는 것이다. 이쪽은 당황하여 다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어섰다. / “×× 선생님 아니세요?” / 여자가 거의 자신을 가지고 먼저 묻는다.
“네, ×××입니다.” / “……”
여자는 먼저 물어 놓고 더 말이 없이 귀밑까지 발그레해지는 얼굴을 푹 수그렸다. 한참이나 아궁에서 낙엽 타는 소리뿐이었다.
“절 아십니까?” / “……”
여자는 다시 얼굴을 들 뿐 말은 없다가 수줍은 웃음을 머금고 옆에 있는 돌층계를 히뜩히뜩 올라왔다. 이쪽에서는 낙엽 한 무더기를 또 아궁에 쓸어 넣고 손을 털었다.
“문간에 명함 붙이신 걸루 알았에요.” / “네……”
“저두 선생님 독자예요. 꽤 충실한……” / “그러십니까? 부끄럽습니다.”
그는 손을 비비며 여자의 눈을 보았다. 잦아든 가을 호수와 같이 약간 꺼진 듯한 피곤한 눈이면서도 겨울 별 같은 찬 광채가 일어났다.
“손수 불을 때시나요?” / “네.”
“전 이 집 정원을 저이 집처럼 날마다 산보 와요, 아침이문……”
“네! 퍽 넓구 좋은 정원입니다.” / “참 좋아요……. 어세 때세요.”
“네, 이 동네 계십니까?” / “요 개울 건너예요.”
이날은 더 이야기가 나올 새 없이 부끄러움도 미처 걷지 못하고 여자는 돌아가고 말았다. / 그는 한참 뒤에 바깥 한길로 나와 개울 건너를 살펴보았다. 거기는 기와집, 초가집 여러 집이 언덕에 층층으로 놓여 있었다. 어느 것이 그 여자가 들어간 집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이날 저녁에 정자지기를 만나 물었더니,
“그 여자 병인이올시다.” / 하였다. 보기에 그리 병색은 아니더라 하니,
“뭐 폐병이라나요. 약 먹느라구 여기 나왔는데 숨이 차 산엔 못 댕기구 우리 정자루만 밤낮 오죠.” / 하였다. -정자지기의 대사를 통해 그 여자에 대한 정보가 드러남
폐병! 그는 온전한 남의 일 같지 않게 마음이 쓰였다. 그렇게 예모(禮貌-예절에 맞는 몸가짐) 있고 상냥스러운 대화를 지껄일 수 있는 아름다운 입술이 악마 같은 병균을 발산하리라는 사실은 상상만 하기에도 우울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부터는 정원에서 그 여자를 만나 인사할 수 있는 것이 즐거웠고, 될 수만 있으면 그를 위로해 주고 그와 더불어 자기의 빈한한(살림이 몹시 가난한) 예술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자기의 방문 앞으로 왔을 때는 몇 번이나,
“바람이 찹니다.” / 하여 보았다. 그러나 번번이,
“여기가 좋아요.” / 하고 여자는 툇마루에 걸터앉았고 손수건으로 자주 입과 코를 막기를 잊지 않았다. 하루는,
“글쎄 괜찮으니 좀 들어오십시오.”
하고 괜찮다는 말에 힘을 주었더니 여자는 약간 상기가 되면서 그래도 이쪽에 밝히 따지려는 듯이, / “전 전염병 환자예요.” / 하고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글쎄 그런 줄 압니다. 괜찮으니 들어오십시오.”
하니 그제야 가벼운 감격이 마음속에 파동 치는 듯, 잠깐 멀―리 하늘가에 눈을 던지었다가 살며시 들어왔다. 황혼이었다. 동향 방의 황혼이라 말할 때의 그 여자의 맑은 눈 속과 흰 잇속만이 별로 또렷또렷 빛이 났다.
“저처럼 죽음에 대면해 있는 처녀를 작품 속에서 생각해 보신 적 계세요, 선생님?”
“없습니다! 그리고 그만 정도에 왜 죽음을 생각허십니까?”
“그래두 자꾸 생각하게 되어요.”
하고 여자는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으로 천장을 쳐다보았다. 한참 침묵 뒤에,
“전 병을 퍽 행복스럽다 했어요. 처음엔……” / 하고 또 가벼이 웃었다.
“……” / “모두 날 위해 주구 친구들이 꽃을 가지구 찾어와 주구, 그리구 건강했을 때보다 여간 희망이 많지 않어요. 인제 병이 나으면 누구헌테 제일 먼저 편지를 쓰겠다, 누구헌테 전에 잘못한 걸 사과하리라 참 벨벨 희망이 다 끓어올랐에요……병든 걸 참 감사했어요. 그땐.……” / “지금은요?”
“무서워졌에요. 죽음두 첨에는 퍽 아름다운 걸루 알었드랬어요. 언제든지 살다 귀찮으면 꽃밭에 뛰어들 듯 언제나 아름다운 죽음에 뛰어들 수 있는 걸 기뻐했에요. 그런데 이렇게 맞닥뜨리고 보니 겁이 자꾸 나요. 꿈을 꿔두……”
하는데 까악― 까악― 하는 소리가 바로 그 전나무 삭정가지에서인 듯, 언제나 똑같은 거리에서 울려 왔다. -복선(여자의 죽음) / “여기 나와선 까마귀가 내 친굽니다.”
하고 그는 억지로 그 불길스러운 소리를 웃음으로 덮어 버리려 하였다.
“선생님은 친구라구꺼정! 전 이 동네가 모두 좋은데 저게 싫어요. 죽음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구 자꾸 깨쳐 주는 것 같어요.”
“건 괜한 관념인 줄 압니다. 흰 새가 있듯 검은 새도 있는 거요. 소리 맑은 새가 있듯 소리 탁한 새도 있는 거죠. 취미에 따라 까마귀도 사랑할 수 있는 샌 줄 압니다.”
“건 죽음을 아직 남의 걸로만 아는 건강한 사람들의 두개골을 사랑하는 것 같은 악취미겠지요. 지금 저헌텐 무서운 짐승이에요. 무슨 음모를 가지고 복면허구 내 뒤를 쫓아다니는 무슨 음흉한 사내같이 소름이 끼쳐요. 아마 내가 죽으면 저 새가 덥석 날러와 앞을 설 것만 같이……” / “……”
“죽음이 아름답게 생각될 때 죽는 것처럼 행복은 없을 것 같어요.”
하고 여자는 너무 길게 지껄였다는 듯이 수건으로 입을 코까지 싸서 막고 멀―거니 어두워 들어오는 미닫이를 바라보았다.
이 병든 처녀가 처음으로 방에 들어와 얼마 안 되는 이야기를 그의 체온과 그의 병균과 함께 남기고 간 날 밤, 그는 몹시 우울하였다.
‘무슨 말을 하여야 그 여자를 위로할 수 있을까?’
‘과연 그 여자의 병은 구할 수 없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 여자에게 죽음이 다시 한 번 꽃밭으로 보일 수 있을까?’ -그는 그 여자가 건강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임.
그는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이것을 생각하다가 머릿속에서 무엇이 버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가만히 이마에 손을 대니 그것은 벽장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는 벽장을 열고 두어 마리의 쥐를 쫓고 나무때기처럼 굳은 빵 한쪽을 꺼내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뒷산에서 주워 온 그 환약과 같이 동그라면서도 가랑잎처럼 무게가 없는 토끼의 배설물을 집어 보면서 요즘은 자기의 것도 그렇게 담박한 것이 틀리지 않을 것을 미소하였다. ‘사람에게서도 풀 내가 나야 한다.’ 한 철인(철학자) 소로의 말이 생각났으며, 사람도 사는 날까지 극히 겸손한 곤충처럼 맑은 이슬과 향기로운 풀잎으로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그 운명이 슬픈 생각도 났다. / ‘무슨 말을 하여 주면 그 여자에게 새 희망이 생길까?’
그는 다시 이런 궁리에 잠기었고 그랬다가 문득,
‘내가 사랑하리라!’ / 하는 정열에 부딪히었다.
‘확실히 그 여자는 애인을 갖지 못했을 거다. 누가 그 벌레 먹는 가슴에 사랑을 묻었을 거냐.’ / 그는 그 여자의 앉았던 자리에 두 손길을 깔아 보았다. 싸―늘한 장판의 감촉일 뿐 체온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슬픈 아가씨여, 죽더라도 나를 사랑하면서 죽어 다오! 애인이 없이 죽는 것은 애인을 남기고 죽기보다 더 슬플 것이다……오래 전부터 병균과 싸워 온 그대에겐 확실히 애인이 있을 수 없을 게다.’
그는 문풍지 떠는 소리에 덧문을 닫고 남포(램프)의 불을 낮추고 포―의 슬픈 시 ‘레이번’을 생각하면서, / “레노어? 레노어(에드거 앨런 포의 시 ‘갈가마귀’에 나오는 성스러운 소녀의 이름)?” / 하고, 포가 그의 애인의 망령을 불렀듯이 슬픈 음성을 소리쳐 보기도 하였다. 그 덮을 것도 없이 애인의 헌 외투자락에 싸여서, 그러나 행복스럽게 임종하였을 레노어의 가엽고 또 아름다운 시체는, 생각하여 보면 포의 정열 이상으로 포근히 끌어안아 보고 싶은 충동도 일어났다. 포가 외로운 서재에 앉아 밤 깊도록 옛 책을 상고(詳考-상세히 참고하거나 검토함)할 때 폭풍은 와 문을 열어 젖뜨렸고 검은 숲 속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까마귀가 울면서 머리 풀어헤친 아름다운 레노어의 망령이 스르르 방 안 한구석에 들어서곤 하였다. / ‘오오! 나의 레노어(폐병환자인 그 여자를 말함)! 너는 아직 확실히 애인을 갖지 못했을 거다. 내가 너를 사랑해 주며 내가 너의 주검을 지키는 슬픈 애인이 되어 주마.’
그는 밤이 너무나 긴 것을 탄식하며 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었다.
그러나 밝는 날 아침의 하늘은 너무나 두껍게 흐려 있었고 거친 바람은 구석구석에서 몰려나오며 눈발조차 희끗희끗 날리었다. -우울한 작품 분위기(초겨울 날씨, 까마귀 울음소리) 온실 속에서나 갸웃이 내어다보는 한 송이 온대지방 꽃처럼, 그렇게 가냘픈 그 처녀의 얼굴이 도저히 나타나기를 바랄 수 없는 날씨였다.
‘오, 가엾은 아가씨! 너는 이렇게 흐린 날, 어두운 방 속에 누워 애인이 없이 죽을 것을 슬퍼하리라! 나의 가엾은 레노어!’
사흘이나 눈이 오고 또 사흘이나 눈보라가 치고 다시 며칠 흐리었다가 눈이 오고 그리고 날이 들고 따뜻해졌다. 처마 끝에서 눈 녹은 물이 비 오듯 하는 날 오후인데 가엾은 아가씨가 나타났다. 더 창백해진 얼굴에는 상장(喪章-거상(居喪)이나 조상(弔喪)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옷깃이나 소매 따위에 다는 표) 같은 마스크를 입에 대었고 방에 들어와서는 눈꺼풀이 무거운 듯 자주 눈을 감았다 뜨면서,
“그간 두어 번이나 몹시 각혈을 했어요.” / 하였다. / “그러나……”
“의사는 기관에서 터진 피래지만, 전 가슴에서 나온 줄 모르지 않어요.”
“그래두 의사가 더 잘 알지 않겠어요?”
“의사가 절 속여요. 의사만 아니라 사람들이 다 날 속이려구만 들어요. 돌아서선 뻔―히 내가 죽을 걸 이야기허다가두 나보군 아닌 체들 해요. 그래서 벌써부터 난 딴 세상 사람처럼 따돌리는 게 저는 슬퍼요. 죽음이 그렇게 외로운 거란 걸 날 죽기 전부터 맛보게들 해요.” / 아가씨의 말소리는 떨리었다.
“그래두……만일 지금이라두, 만일.……진정으루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말만은 곧이들으시겠습니까?” / “……” / 눈을 고요히 감고 뜨지 않았다.
“앓으시는 병을 조곰도 싫어하지 않고 정말 운명을 같이 따라 하려는 사람만 있다면?” / “그럼 그건 아마 사람이 아니겠지요. 저헌테 사랑하는 사람이 있긴 있어요.……절 열렬히 사랑해 주어요. 요즘두 자주 저헌테 와요.” / “…….” -자신의 착각에 대한 실망감
“그는 정말 날 사랑하는 표루 내가 이런, 모두 싫어허는 병이 걸린 걸 자기만은 싫어허지 않는단 표루 하루는 내 가슴에서 나온 피를 반 컵이나 되는 걸 먹기까지(헐, 대박, 무모한 걸∼∼) 한 사람이야요. 그렇지만 그게 내게 위로가 되는 줄 아세요?”
“……” / 그는 우울할 뿐이었다.
“내 피까지 먹구 나허구 그렇게 가깝게 해두 그는 저대로 건강하구 저대루 살아가야 할 준비를 하니까요. 머리가 조흐면(길면) 이발소에 가고, 신이 해지면 새 구둘 맞추구, 날마다 대학 도서관에 다니면서 학위 받을 연구를 하구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저허군 길이 달러요? 전 머릿속에 상여, 무덤 그런 생각뿐인데……”
“왜 그런 생각만 자꾸 하십니까?”
“사람끼린 동정하구퍼두 동정이 안 되는 것 같어요.” / “왜요?”
“병자에겐 같은 병자가 되는 것 아니곤 동정이 못 될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맘대루 같은 병자가 되며 같은 정도로 앓다, 같은 시각에 죽겠습니까? 뻔―히 죽을 사람을 말로만 괜찮다, 괜찮다 하구 속이는 건 이쪽을 더 빨리 외롭게 만드는 거예요.”
“어떤 상여를 생각하십니까?” / 그는 대담하게 이런 것을 물어 주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아가씨의 세계에 접근하는 것이 될까 하였다.
“조선 상여는 참 타기 싫어요. 요즘 금칠 막 한 자동차(영구차)두 보기두 싫어요. 하―얀 말 여럿이 끌구 가는 하―얀 마차가 있다면……하구 공상해 봤어요. 그리구 무덤두 조선 무덤들은 참 암만해두 정이 가질 않어요. 서양엔 묘지가 공원처럼 아름답다는데 조선 산수들이야 어디 누구의 영―원한 주택이란 그런 감정이 나요? 곁에 둘 수 없으니 흙으루 덮구 그냥 두면 비에 패니까 잔디를 심는 것뿐이지 꽃 한 송이 심을 데나 꽂을 데가 있어요? 조선 사람처럼 죽은 사람의 감정을 안 생각해 주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아요. 괜―히 그 듣기 싫은 목소리루 울기만 허고 까마귀나 모여들게 떡 쪼가리나 갖다 어질러 놓구…….” / “……” / “선생님은 왜 이렇게 외롭게 사세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여자에게 애인이 없으리라 단정한 자기의 어리석음을 마음 아프게 비웃었고 저렇게 절망에 극하여 세상 욕심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거룩한 여자를 애인으로 가진 그 젊은 학도가 몹시 부러운 생각뿐이었다.
날은 이미 황혼에 가까웠다. 연당 아래 전나무 꼭대기에서는 아직, 그 탁한 소리로 울지는 않으나 그 우악스런 주둥이로 그 검은 새들이 삭정이를 쪼는 소리가 딱― 딱― 울려 왔다. / “까마귀가 온 게지요?” / “그렇게 그게 싫으십니까?”
“싫어요. 그건 뱃속엔 아마 별별 귀신 딱지가 다 든 것처럼 무서워요. 한번은 꿈을 꾸었는데 까마귀 뱃속에 무슨 부적이 들구 칼이 들구 시퍼런 불이 들구 한 걸 봤어요. 웃지 마세요. 상식은 절 떠난 지 벌써 오래요(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상식적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의 아가씨)…….” / “허허……”
그러나 그는 웃고, 속으로 이제 까마귀를 한 마리 잡으리라 하였다. 그 배를 갈라서 그 속에는 다른 새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내장뿐인 것을 보여 주리라. 그래서 그 상식을 잃은 여자의 까마귀에 대한 공포심을 근절시키고, 그래서 죽음에 대한 공포심까지도 좀 덜게 해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이 아가씨가 간 뒤에 그 길로 뒷산에 올라 물푸레나무를 베다가 큰 활을 하나 메었다. 꼿꼿한 싸리로 살을 만들고 끝에다는 큰 못을 갈아 촉을 박고 여러 번 겨냥을 연습하여 보고 까마귀를 창문 가까이 유혹하였다. 눈 위에 여기저기 콩을 뿌리었더니 그들은 마침내 좌우를 의뭉스런(겉으로는 어리숙한 것 같으나 속은 응큼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면서도 내려와 그것을 쪼았다. 먼 데 것이 없어지는 대로 그들은 곧 날 듯 날 듯이 어깨를 곧추세우면서도 차츰 방문 가까이 놓인 것을 쪼며 들어왔다. 방 안에서는 숨을 죽이고 조그만 문구멍에 살촉을 얹고 가장 가까이 들어온 놈의 옆구리를 겨냥하여 기운껏 활을 당겨 가지고 쏘아 버렸다.
푸드득 하더니 날기는 다 날았으나 한 놈이 죽지에 살이 박힌 채 이내 그 자리에 떨어졌고 다른 놈들은 까악까악거리면서 전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는 황망히 신을 끌며 떨어진 놈을 쫓아 들어가 발로 덮치려 하였다. 그러나 까마귀는 어느 틈에 그의 발밑에 들지 않고 훌쩍 몸을 솟구어 그 찬란한 핏방울을 눈 위에 흩뿌리며 두 다리와 한 날개로 반은 날고 반은 뛰면서 잔디밭 쪽으로 덥풀덥풀 달아났다. 이쪽에서도 숨차게 뛰어 다우쳤다(다그쳤다). 보기에 악한과 같은 짐승이었지만 그도 한낱 새였다. 공중을 잃어버린 그에겐 이내 막다른 골목이 나왔다. 화살이 그냥 박힌 채 연당으로 내려가는 도랑창에 거꾸로 박히더니 쌕― 쌕― 하면서 불덩어리인지 핏방울인지 모를 두 눈을 뒤집어쓰고 집게 같은 입을 딱딱 벌리며 대가리를 곧추들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는 다른 놈들이 전나무에서 내려와 까악거리며 저희 가족을 기어이 구하려는 듯이 낮게 떠돌며 덤비었다.
그는 슬그머니 겁이 나기도 했으나 뭉어리돌을 집어 공중의 놈들을 위협하며 도랑에서 다시 덥풀 올려 솟는 놈을 쫓아 들어가 곧은 발길로 멱투시(멱살)를 차 내던지었다. 화살은 빠져 떨어지고 까마귀만 대여섯 칸 밖에 나가떨어지며 킥―하고 뻐들적거렸다. 다시 쫓아가 발길을 들었으나 그때는 벌써 까마귀는 적을 볼 줄도 모르고 덮어 누르는 죽음과 싸울 뿐이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 검은 새의 죽음의 고민을 내려다보며 그 병든 처녀의 임종을 상상해 보았다. 슬픈 일이었다. 그는 이내 자기 방으로 돌아왔고 나중에 정자지기를 시켜 그 죽은 까마귀를 목을 매어 어느 나뭇가지에 걸게 하였다. 그리고 어서 그 아가씨가 나타나면 곧 훌륭한 외과의(外科醫)나처럼 그 검은 시체를 해부하여 까마귀의 뱃속에도 다른 날짐승과 똑같이 단순한 조류(鳥類)의 내장이 있을 뿐, 결코 그런 무슨 부적이거나 칼이거나 푸른 불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날씨는 추워 가기만 하고 열흘에 한 번도 따뜻한 해가 비치지 않았다. 달포(한 달 이상이 되는 동안)가 지나도록 그 아가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날씨는 다시 풀어져 연당(연못)에 눈이 녹고 단풍나무 가지에 걸린 까마귀의 시체도 해부하기 알맞게 녹았지만 그 아가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는 다시 추워져 싸락눈이 사륵사륵 길에 떨어져 구르는 날 오후이다. 그는 어느 잡지사에 들어가 곤작(困作-글을 애써 가며 더디 지음) 한 편을 팔아 가지고 약간의 식료를 사들고 다 나온 길인데 개울 건너 넓은 마당에는 두어 대의 검은 자동차와 함께 금빛 영구차(결국 그 아가씨가 죽음) 한 대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는 가슴이 섬뜩하였다. 별장 쪽을 올려다보니 전나무 꼭대기에서는 진작부터 서너 마리의 까마귀가 이 광경을 내려다보며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여자가 죽은 거나 아닌가?’
영구차 안에는 이미 검은 포장에 덮인 관이 실려 있었다. 둘러 서 있는 동네 사람 속에서 정자지기가 나타나더니 가까이 와 일러 주었다.
“우리 정자루 늘 오던 색시가 갔답니다.” / “……”
그는 고요히 영구차를 향하여 모자를 벗었다.
“저 뒤에 자동차에 지금 오르는 사람이 그 색시하구 정혼(定婚-혼인을 정함)했던 남자랩니다.”
그는 잠자코 그 대학 도서실에 다니며 학위 얻을 연구를 한다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 청년은 자동차 안에 들어앉아, 이내 하―얀 손수건을 내어 얼굴에 대었다. 그러나 자동차들은 영구차가 앞을 서며 고요히 굴러 떠나갔다. 눈은 함박눈이 되면서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 자동차들이 굴러간 자리도 얼마 안 있어 덮어 버리고 말았다.
까마귀들은 이날 저녁에도 별다른 소리는 없이 그저 까악― 까악― 거리다가 이따금씩 까르르― 하고 그 아래로 한없이 붙은 발음을 내곤 하였다. <끝>
[확인 문제]
1. 이 소설에서 주제의 표출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요소는?
① 이념 ② 인물간의 갈등 ③ 배경적 분위기 ④ 등장인물의 개성 ⑤ 극적 구성
2.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한 편의 수필과 같은 문체로 담담하게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허구적으로 창작된 글이라는 점에서 수필과 엄연히 다르다. 그러한 소설적 요소가 표면적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난 바는?
① 내면적 갈등 ② 작중 화자의 시점 ③ 결말의 비극성 ④ 주제 ⑤ 배경 묘사
3. 이 소설의 등장인물 ‘그'와 ‘그녀'의 인물 유형상의 공통점은?
① 미신을 믿는 인물 ② 무기력하고 심신이 병약한 인물
③ 인생의 달관을 추구하는 인물 ④ 현실에서 소외된 인물
⑤ 이상향 추구에 집착하는 인물
<정답> 1③ 2② 3④
[심화 문제]
※ 다음은 이태준의 '까마귀'의 일부이다. 잘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가) 여기는 그의 어느 친구네 별장이다. 늘 괴벽한 문체를 고집하여 독자를 널리 갖지 못하는 그는 한 달에 이십 원 남짓하면 독방을 차지할 수 있는 학생층의 하숙 생활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궁여의 일책으로 이렇게 임시로나마 겨우내 그냥 비워 두는 친구네 별장 방 하나를 빌린 것이다. 내년 칠월까지는 어느 방이든지 마음대로 쓰라고 해서 정자지기가 방마다 문을 열어 보이는 대로 구경하였으나, 모두 여름철에나 좋을 북향들이라 너무 음습하고 너무 넓고 문들이 많아서 결국은 바깥채로 나와 상노들이나 자는 방이라는 작은사랑을 치우게 한 것이다.
(나) 상노들이나 자는 방이라 하나 별장 전체를 그리 손색 있게 하는 방은 아니었다. 동향이어서 여름에는 늦잠을 자지 못할 것이 흠일까. 겨울에는 어느 방보다 밝고 따뜻할 수 있고, 미닫이와 들창도 다 갑창까지 들인데다 벽장문과 두껍닫이에는 유명한 화가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낙관이 있는 사군자며 기명절지(器皿折枝)가 붙어 있다. 밖으로도 문 위에는 추성각(秋聲閣)이라 추사체의 현판이 걸려 있고, 양쪽 처마끝에는 파랗게 녹슨 풍경이 창연히 달려 있다. 또, 미닫이를 열면 눈 아래 깔리는 경치도 큰사랑만 못한 것 같지 않으니, 산기슭에 나붓이 섰는 수각(水閣)과 그 밑으로 마른 연잎과 단풍이 잠긴 연당이며, 그리고 그 연당 언덕으로 올라오면서 무룡석으로 석가산을 모으고 잔디밭 새에 길을 돌린 것은 이 방에서 내려다보기가 그중 제일일 듯싶었다.
(다) 오래간만에 켜 보는 남폿불이다. 펄럭하고 성냥불이 심지에 옮기더니 좁은 등피 속은 자욱하게 연기와 김이 서리었다가 차츰차츰 밝아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차츰차츰 밝아지는 남폿불에 삥 둘러앉았던 옛날 집안사람들의 얼굴이 생각나게, 그렇게 남폿불은 추억 많은 불이다.
그는 누워 너무나 고요함에 귀를 빼앗기면서 옛사람들의 얼굴을 그려 보다가 너무나 가까운 데서 까악까악하는 까마귀 소리에 얼른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바깥은 아주아주 어둡지 않았다. 또, 까악까악하는 소리에 쳐다보니 지나가면서 우는 소리가 아니라 바로 그 전나무 삭정가지에 시커먼 세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그러는 것이었다. / “까마귀!"
까치나 비둘기를 본 것만은 못하였다. 그러나 자연이 준 그의 검음과 그의 탁한 음성을 까닭 없이 저주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라) 어수선한 꿈자리를 떨쳐 버리는 홀가분한 기분과 여기 나와서는 처음 일찍 깨어 보는 호기심에서 그는 머리를 흔들고 미닫이부터 쫙 밀어 놓았다. 문턱을 넘어드는 바깥 공기는 체온에 부딪치는 것이 찬물 같았다. 여윈 손으로 눈을 비비며, 얼마나 아름다운 아침일까를 내다보았다. 해는 역광선이어서 부신 눈으로 수각을 더듬고 연당을 더듬고 잔디밭 길을 더듬다가, 그 실뱀 같은 잔디밭 길에서다. 그는 문득 어떤 여자의 그림자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1. 이 글의 시간적 배경은 늦가을이다. 그럼에도 그가 여름 별장에서 겨울을 나게 된 현실적 이유를 40자(띄어쓰기 포함) 내외로 쓰라. ▷한 달에 이십 원 남짓하는 하숙 독방을 쓸 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2. 흔히 까마귀는 불길한 새라고 한다. 이 글에서 ‘까마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 문장을 찾아 쓰라. ▷(그러나) 자연이 준 그의 검음과 그의 탁한 음성을 까닭 없이 저주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3. 이 글의 전반적인 문체는 수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소설'이 되게 한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 이상을 밝혀 항목화해서 답하라. ▷‘그'라고 하는 등장인물의 설정. ‘어떤 여자의 그림자'의 등장으로 인한 새로운 사건과 갈등의 징후.
※ 다음은 이태준의 ‘까마귀'의 일부이다. 잘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가) 날은 이미 황혼에 가까웠다. 연당지 아래 전나무 꼭대기에서는 아직, 그 탁한 소리로 울지는 않으나 그 우악스런 주둥이로 그 검은 새들이 삭정가지를 쪼는 소리가 딱―딱― 울려 왔다. / “까마귀가 온 게지요?" / “그렇게 그게 싫으십니까?"
“싫어요. 그것 뱃속에 아마 별별 구신 딱지가 다 든 것처럼 무서워요. 한번은 꿈을 꾸었는데 까마귀 뱃속에 무슨 부적이 들구 칼이 들구 시퍼런 불이 들구 한 걸 봤어요. 웃지 마세요. ㉠상식은 절 떠난 지 벌써 오래예요……." / “허허……."
그러나 그는 웃고 속으로 이제 까마귀를 한 마리 잡으리라 하였다.
(나) 그는 슬그머니 겁이 나기도 했으나, 뭉어리돌을 집어 공중의 놈들을 위협하며 도랑에서 다시 덥풀 울려 솟는 놈을 쫓아 들어가 곧은 발길로 멱투시를 차 내던졌다. 화살은 빠져 떨어지고 까마귀만 대여섯 간 밖에 나가떨어지며 킥 하고 뻐르적거렸다. 다시 쫓아가 발길을 들었으나 그때는 벌써 까마귀는 적을 볼 줄도 모르고 덮어 누르는 죽음과 싸울 뿐이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 검은 새의 죽음의 고민을 내려다보며 그 병든 처녀의 임종을 상상해 보았다. 술픈 일이었다. 그는 이내 자기 방으로 돌아왔고, 나중에 정자지기를 시켜 그 죽은 까마귀를 목을 매어 언 나뭇가지에 걸게 하였다. 그리고 어서 그 아가씨가 나타나면 곧 훌륭한 외과의(外科醫)나처럼 그 검은 시체를 해부하여, 까마귀의 뱃속에도 다른 날짐승과 똑같은 단순한 조류의 내장이 있을 뿐, 결코 그런 무슨 부적이거나 칼이거나 푸른 불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리라 하였다.
(다) 그는 가슴이 섬뜩하였다. ㉡별장 쪽을 올려다보니 전나무 꼭대기에는 진작부터 서너 마리의 까마귀가 이 광경을 내려다보며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여자가 죽은 거나 아닌가?'
영구차 안에는 이미 검은 포장에 덮인 관이 실려 있었다. 둘러섰는 동네 사람 속에서 정자지기가 나타나더니 가까이 와 일러주었다.
“우리 정자루 늘 오던 색시가 갔답니다." / “……."
그는 고요히 영구차를 향하여 모자를 벗었다.
“저 뒤의 자동차에 지금 오르는 사람이 그 색시하구 정혼했던 남자랩니다."
그는 잠자코 그 대학 도서실에 다니며 학위 얻을 연구를 한다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 청년은 자동차 안에 들어앉아 이내 하얀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댔다. 그러자 자동차들은 영구차가 앞을 서며 고요히 굴러 떠나갔다. 눈은 함박눈이 되면서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 자동차들이 굴러간 자리도 얼마 안 있어 덮여 버리고 말았다.
까마귀들은 이날 저녁에도 별다른 소리는 없이 그저 까악까악 거리다가 이따금씩 까르르 하고 그 ? 아래 ?이 한없이 붙은 발음을 내곤 하였다.
4. (다)에 나타난 상황으로 미루어 ㉠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녀는'을 주어로 하여 한 문장으로 답하라. ▷그녀는 삶의 의욕을 상실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
5. ㉡에 의하면 까마귀는 ‘불길(不吉)함', 또는 ‘죽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에 그려진 ’그'의 행위의 의도는 무엇인지 20자(띄어쓰기 포함) 내외로 답하라.
▷그녀에게서 죽음의 공포(불안감)를 없애(덜어) 주려 함.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여자는 잊어버린 듯 오래도록 햇볕만 쏘이고 서 있다가 어디선지 산새 한 마리가 날아와 가까운 나뭇가지에 앉는 것을 보더니 그제야 사뿐 발을 떼어놓았다. 머리는 틀어 올리었고 저고리는 노르스름한 명주빛인데 고동색 스웨터를, 아이 업듯, 두 소매는 앞으로 늘어뜨리고 등에만 걸치었을 뿐, 꽤 날씬한 허리 아래엔 옥색 치맛자락이 부드러운 물결처럼 가벼운 주름살을 일으켰다. 빨간 단풍잎 하나를 들었을 뿐, 고요한 아침 산보인 듯하다. / ‘누굴까?’
그는 장정(裝幀) 고운 신간서(新刊書)에처럼 호기심이 일어났다. 가까이 축대 아래로 지나가는 것을 보니 새 양봉투 같은 깨끗한 이마에 눈결은 뉘어 쓴 영어 글씨같이 차근하다. 꼭 다문 입술, 그리고 뾰로통한 콧봉오리에는 여간치 않은 프라이드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 ‘웬 여잔데?’
이튿날 아침에도 비교적 이르게 잠이 깨었다. 살며시 연당 쪽을 내어다보니 연당 앞에도 잔디밭 길에도 아무도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런지 붙들었던 새를 날려 보낸 듯 그는 서운하였다.
이날 오후이다. 그는 낙엽을 긁어다가 불을 때고 있었다. 누군지 축대 아래에서 인기척이 났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내려다보니 어제 아침의 그 여자다. 어제 그 옷, 그 모양, 그 고요함으로 약간 발그레해진 얼굴을 쳐들고 사뭇 아는 사람을 보듯 얼굴을 돌리려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서 있는 것이다. 이쪽은 당황하여 다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어섰다. / “×× 선생님 아니세요?” / 여자가 거의 자신을 가지고 먼저 묻는다.
“네, ×××입니다.” / “……”
여자는 먼저 물어 놓고 더 말이 없이 귀밑까지 발그레해지는 얼굴을 푹 수그렸다. ㉠한참이나 아궁에서 낙엽 타는 소리뿐이었다.
“절 아십니까?” / “……”
여자는 다시 얼굴을 들 뿐 말은 없다가 ⓐ수줍은 웃음을 머금고 옆에 있는 돌층계를 히뜩히뜩 올라왔다. 이쪽에서는 낙엽 한 무더기를 또 아궁에 쓸어 넣고 손을 털었다.
“문간에 명함 붙이신 걸루 알았에요.” / “네……”
“저두 선생님 독자예요. 꽤 충실한……” / “그러십니까? 부끄럽습니다.”
그는 손을 비비며 여자의 눈을 보았다. 잦아든 가을 호수와 같이 약간 꺼진 듯한 피곤한 눈이면서도 겨울 별 같은 찬 광채가 일어났다. ( 중략 )
폐병! 그는 온전한 남의 일 같지 않게 마음이 쓰였다. 그렇게 예모(禮貌) 있고 상냥스러운 대화를 지껄일 수 있는 아름다운 입술이 악마 같은 병균을 발산하리라는 사실은 상상만 하기에도 우울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부터는 정원에서 그 여자를 만나 인사할 수 있는 것이 즐거웠고, 될 수만 있으면 그를 위로해 주고 그와 더불어 자기의 빈한한 예술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자기의 방문 앞으로 왔을 때는 몇 번이나,
“바람이 찹니다.” / 하여 보았다. 그러나 번번이,
“여기가 좋아요.” / 하고 여자는 툇마루에 걸터앉았고 손수건으로 자주 입과 코를 막기를 잊지 않았다. 하루는,
“글쎄 괜찮으니 좀 들어오십시오.”
하고 괜찮다는 말에 힘을 주었더니 여자는 약간 상기가 되면서 그래도 이쪽에 밝히 따지려는 듯이, / “전 전염병 환자예요.” / 하고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글쎄 그런 줄 압니다. 괜찮으니 들어오십시오.”
하니 그제야 가벼운 감격이 마음속에 파동 치는 듯, 잠깐 멀―리 하늘가에 눈을 던지었다가 살며시 들어왔다. 황혼이었다. 동향 방의 황혼이라 말할 때의 그 여자의 맑은 눈 속과 흰 잇속만이 별로 또렷또렷 빛이 났다.
“저처럼 죽음에 대면해 있는 처녀를 작품 속에서 생각해 보신 적 계세요, 선생님?”
“없습니다! 그리고 그만 정도에 왜 죽음을 생각허십니까?”
“그래두 자꾸 생각하게 되어요.”
하고 여자는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으로 천장을 쳐다보았다. 한참 침묵 뒤에,
“전 병을 퍽 행복스럽다 했어요. 처음엔……” / 하고 또 ⓓ가벼이 웃었다.
“……” / “모두 날 위해 주구 친구들이 꽃을 가지구 찾어와 주구, 그리구 건강했을 때보다 여간 희망이 많지 않어요. 인제 병이 나으면 누구헌테 제일 먼저 편지를 쓰겠다, 누구헌테 전에 잘못한 걸 사과하리라 참 벨벨 희망이 다 끓어올랐에요……병든 걸 참 감사했어요. 그땐.……” / “지금은요?”
“무서워졌에요. 죽음두 첨에는 퍽 아름다운 걸루 알었드랬어요. 언제든지 살다 귀찮으면 꽃밭에 뛰어들 듯 언제나 아름다운 죽음에 뛰어들 수 있는 걸 기뻐했에요. 그런데 이렇게 맞닥뜨리고 보니 겁이 자꾸 나요. 꿈을 꿔두……”
하는데 까악― 까악― 하는 소리가 바로 그 전나무 삭정가지에서인 듯, 언제나 똑같은 거리에서 울려 왔다. / “여기 나와선 까마귀가 내 친굽니다.”
하고 그는 억지로 그 불길스러운 소리를 ⓔ웃음으로 덮어 버리려 하였다.
“선생님은 친구라구꺼정! 전 이 동네가 모두 좋은데 저게 싫어요. 죽음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구 자꾸 깨쳐 주는 것 같어요.”
“건 괜한 관념인 줄 압니다. 흰 새가 있듯 검은 새도 있는 거요. 소리 맑은 새가 있듯 소리 탁한 새도 있는 거죠. 취미에 따라 까마귀도 사랑할 수 있는 샌 줄 압니다.”
“건 죽음을 아직 남의 걸로만 아는 건강한 사람들의 두개골을 사랑하는 것 같은 악취미겠지요. 지금 저헌텐 무서운 짐승이에요. 무슨 음모를 가지고 복면허구 내 뒤를 쫓아다니는 무슨 음흉한 사내같이 소름이 끼쳐요. 아마 내가 죽으면 저 새가 덥석 날러와 앞을 설 것만 같이……” / “……”
“죽음이 아름답게 생각될 때 죽는 것처럼 행복은 없을 것 같어요.”
하고 여자는 너무 길게 지껄였다는 듯이 수건으로 입을 코까지 싸서 막고 멀―거니 어두워 들어오는 미닫이를 바라보았다.
1. <보기>를 참고하여 위 글을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문학 작품에서 질병은 은유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앓는 ‘결핵(폐병)’은 곧 죽음과 연관되는데, 이는 죽음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미학적 시선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까마귀는 효성이나 장수 등 긍정적인 상징이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악, 악마, 죽음, 불운, 부패의 상징이기도 하다.
① ‘여자’는 ‘까마귀’에 대한 부정적 상징에 사로잡혀 죽음의 공포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어.
② ‘그’는 ‘까마귀’에 대한 긍정적 상징을 취하여 ‘여자’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는 치유자의 역할을 하고 있어.
③ ‘예모 있고’ 아름다운 여자가 ‘폐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죽음을 바라보는 미학적 시선을 위한 설정일 거야.
④ ‘아름다운 입술’을 가졌지만 ‘악마 같은 병균’을 발산하는 ‘여자’의 ‘폐병’은 질병에 대한 문학적 은유와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어.
⑤ 죽음이 ‘까마귀’와 ‘꽃밭’의 이미지로 표현된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그것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미학적 시선과 관련이 있을 거야.
2. 장정(裝幀) 고운 신간서(新刊書)와 관련된 <보기>의 설명을 바탕으로 위 글에 대해 논의해 보았다.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장정’은 표지, 커버, 케이스 등에서부터 제본 재료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책의 형식을 조화롭게 꾸미는 것이다. 그것은 책의 형식이지만 동시에 그 책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과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그’는 작가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신간서’에 해당하는 작품 속 인물에 대한 ‘읽기’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쓰기’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① ‘여자’의 외양은 ‘신간서’의 ‘장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② ‘그’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③ ‘그’의 작가적 관심은 ‘신간서’의 내용보다는 형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④ ‘그’의 ‘신간서’의 내용 읽기가 이야기 전개의 중심이 된다고 할 수 있다.
⑤ ‘여자’는 ‘그’라는 작가의 ‘쓰기’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라 할 수 있다.
3. ㉠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지속되는 침묵과 내면의 긴장을 청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② 인물들이 고조된 감정이 소멸하는 순간을 청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③ 사건의 경과 속에서 인물들의 심리가 변화하는 과정을 시각화하고 있다.
④ 정적 이미지와 동적 이미지의 혼용으로 내면 갈등의 심화를 보여 주고 있다.
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상황의 복잡함을 나타내고 있다.
4. ⓐ∼ⓔ의 ‘웃음’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 : ‘그’에게 다가가면서도 부끄러워하는 ‘여자’의 내면이 드러난 웃음이다.
② ⓑ : ‘그’의 요청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를 의식한 웃음이다.
③ ⓒ : ‘그’의 위로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데서 오는 웃음이다.
④ ⓓ :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보는 데서 비롯된 웃음이다.
⑤ ⓔ : ‘여자’의 심리를 의식하여 일부러 웃는 억지웃음이다.
<정답> 1②-‘그’는 까마귀 소리에서 환기하는 ‘여자’의 공포를 없애주기 위해 그것이 ‘괜한 관념’임을 말하고 있다. 까마귀의 긍정적 상징을 활용하고 있지 않다.
2③-여자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묘사가 ‘여자’라는 ‘신간서’의 ‘장정’이라면, 작가인 그의 관심은 곱게 장정된 ‘신간서’ 속에 들어 있는 내용 읽기로 이어지고 있다.
3① 4③-‘그’의 위로로 ‘여자’가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고 볼 수 없다.
※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저처럼 죽음에 대면해 있는 처녀를 작품 속에서 생각해 보신 적 계세요, 선생님?"
“없습니다! 그리구 그만 정도에 왜 죽음을 생각허십니까?"
“그래두 자꾸 생각하게 되어요."
하고 여자는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으로 ⓐ 천장을 쳐다보았다. 한참 침묵 뒤에,
“전 병을 퍽 행복스럽다 했어요. 처음엔……." / 하고 또 가벼이 웃었다.
“……" / “모두 날 위해 주구 친구들이 ⓑ 꽃을 가지구 찾어와 주구, 그리구 건강했을 때보다 여간 희망이 많지 않어요. 인제 병이 나으면 누구헌테 제일 먼저 편지를 쓰겠다, 누구헌테 전에 잘못한 걸 사과하리라 참 벨벨 희망이 다 끓어올랐에요…… 병든 걸 참 감사했에요. 그땐……."
“지금은요?" / “무서워졌에요. 죽음두 첨에는 퍽 아름다운 걸루 알었드랬에요. 언제든지 살다 귀찮으면 꽃밭에 뛰어들듯 언제나 아름다운 죽음에 뛰어들 수 있는 걸 기뻐했에요. 그런데 이렇게 닥뜨리고 보니 겁이 자꾸 나요. 꿈을 꿔두……."
하는데 까악― 까악― 하는 소리가 바로 그 전나무 ⓒ 삭정가지에서인 듯, 언제나 똑같은 거리에서 울려 왔다. / “여기 나와선 ⓓ 까마귀가 내 친굽니다."
하고 그는 억지로 그 불길스러운 소리를 웃음으로 덮어 버리려 하였다.
“선생님은 친구라구꺼정! 전 이 동네가 모두 좋은데 ㉠ 저게 싫어요. 죽음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구 자꾸 깨쳐 주는 것 같어요."
"건 괜한 관념인 줄 압니다. 흰 새가 있듯 검은 새도 있는 거요. 소리 맑은 새가 있듯 소리 탁한 새도 있는 거죠. 취미에 따라 까마귀도 사랑할 수 있는 샌 줄 압니다."
“건 죽음을 아직 남의 걸로만 아는 건강한 사람들의 두개골을 사랑하는 것 같은 악취미겠지요. 지금 저헌텐 무서운 짐승이에요. 무슨 음모를 가지구 복면허구 내 뒤를 쫓아다니는 무슨 음흉한 사내같이 소름이 끼쳐요. 아마 내가 죽으면 저 새가 덥석 날러와 앞을 설 것만 같이……."
“……" / “죽음이 아름답게 생각될 때 죽는 것처럼 행복은 없을 것 같어요."
하고 여자는 너무 길게 지껄였다는 듯이 수건으로 입을 코까지 싸서 막고 멀―거니 어두워 들어오는 ⓔ 미닫이를 바라보았다.
이 병든 처녀가 처음으로 방에 들어와 얼마 안 되는 이야기를 그의 체온과 그의 병균과 함께 남기고 간 날 밤, 그는 몹시 우울하였다.
‘무슨 말을 하여야 그 여자를 위로할 수 있을까?'
‘과연 그 여자의 병은 구할 수 없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 여자에게 죽음이 다시 한 번 꽃밭으로 보일 수 있을까?'
< 중략 >
‘무슨 말을 하여 주면 그 여자에게 새 희망이 생길까?'
그는 다시 이런 궁리에 잠기었고 그랬다가 문득, ‘내가 사랑하리라!'
< 중략 >
“그간 두어 번이나 몹시 각혈을 했어요." / 하였다.
“그러나……." / “의사는 기관에서 터진 피래지만, 전 가슴에서 나온 줄 모르지 않어요."
“그래두 의사가 더 잘 알지 않겠어요?"
“의사가 절 속여요. 의사만 아니라 사람들이 다 날 속이려구만 들어요. 돌아서선 뻔―히 내가 죽을 걸 이야기허다가두 나보군 아닌 체들 해요. 그래서 벌써부터 난 딴 세상 사람처럼 따돌리는 게 저는 슬퍼요. 죽음이 그렇게 외로운 거란 걸 날 죽기 전부터 맛보게들 해요."
아가씨의 말소리는 떨리었다.
“그래두…… 만일 지금이라두, 만일…… 진정으루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말만은 곧이들으시겠습니까?" / “……"
눈을 고요히 감고 뜨지 않았다.
“앓으시는 병을 조곰도 싫어하지 않고 정말 운명을 같이 따라 하려는 사람만 있다면?"
“그럼 그건 아마 사람이 아니겠지요. 저헌테 사랑하는 사람이 있긴 있어요…… 절 열렬히 사랑해 주어요. 요즘두 자주 저헌테 와요." / “……"
“그는 정말 날 사랑하는 표루 내가 이런, 모두 싫어허는 병이 걸린 걸 자기만은 싫어허지 않는단 표루 하루는 내 가슴에서 나온 피를 반 컵이나 되는 걸 먹기까지 한 사람이야요. 그렇지만 그게 내게 위로가 되는 줄 아세요?" / “……" / 그는 우울할 뿐이었다.
“내 피까지 먹구 나허구 그렇게 가깝게 해두 그는 저대로 건강하구 저대루 살아가야 할 준비를 하니까요. 머리가 조흐면 이발소에 가고, 신이 해지면 새 구둘 맞추구, 날마다 대학 도서관에 다니면서 학위 받을 연구만 하구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저허군 길이 달러요? 전 머릿속에 상여, 무덤 그런 생각뿐인데……." / “왜 그런 생각만 자꾸 하십니까?"
“사람끼린 동정하구퍼두 동정이 안 되는 거 같어요." / “왜요?"
“병자에겐 같은 병자가 되는 것 아니곤 동정이 못 될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맘대루 같은 병자가 되며 같은 정도로 앓다, 같은 시각에 죽습니까? 뻔―히 죽을 사람을 말로만 괜찮다, 괜찮다 하구 속이는 건 이쪽을 더 빨리 외롭게만 만드는 거예요." / “어떤 상여를 생각하십니까?"
그는 대담하게 이런 것을 물어 주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아가씨의 세계에 접근하는 것이 될까 하였다. -이태준, 까마귀
1. 위 글로 미루어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것은?
① ‘그’는 ‘아가씨’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다.
② ‘아가씨’는 ‘의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다.
③ ‘아가씨’는 ‘까마귀’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④ ‘그’는 ‘아가씨’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 넣고자 한다.
⑤ ‘그’는 까마귀에 대해 친근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2. <보기>의 관점에서 ㉠을 해석한다고 가정할 때, ㉠과 가장 유사한 형식의 대화는?
<보기>금기담은 조건절과 귀결절로 되어 있다. 귀결 내용을 예고함으로써 특정 생각이나 행위를 금하는 것이 금기담이다.
|
조건 |
귀결 |
|
~ 하면 까마귀를 보면 |
~ 불길하다 죽음이 떠올라 재수 없다 |
① 어머니 : 시험 잘 봤니?
아들 : 아니요. 미역국 먹었어요.
② 여자 : 이 세상의 별이 모두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남자 : 별 볼일 없겠지.
③ 딸 : 엄마, 꼭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야 해?
어머니 : 세상엔 공짜로 얻는 게 없어. 뿌려야 거둘 수 있지.
④ 조카 : 이모, 언제 결혼 해?
이모 : 이모가 결혼하면 너와 헤어져 살아야 되는데 괜찮니?
⑤ 친구1 : 야, 우리집 내일 이사가.
친구2 : 오호, 이사간 첫날은 거꾸로 자야 한 대. 그래야 귀신이 들어오지 않는다더군.
3. <보기>와 같이 위 글의 작가와 대담을 한다고 할 때, 밑줄 친 부분에 들어갈 말로 가장 적절한 것은?
<보기> 사회자 : ‘죽음’이라는 문제를 다룬 인상 깊은 작품이었습니다. 작품을 통해 어떤 것을 표현하고자 하신건가요?
작가 :
① ‘죽음’이 두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준비하는 자세가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② ‘죽음’이라는 삶의 비극성을 표현한 작품을 통해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인간의 죽음, 즉 근원적인 고독의 문제를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③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언제 생을 마감할 지 모르는 우리 인생이기에 현재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표현했습니다.
④ ‘죽음’은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섣불리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⑤ 사람들은 살면서 많은 것에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기 전에 누구나 가치 있는 것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제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4. ⓐ~ⓔ 중, <보기>의 설명과 관계가 깊은 것은?
<보기> ‘아폴로 13’이라는 영화에는 대기권 돌입을 앞두고 있는 승무원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면서 가족 곁에 친구들이 모여 있는 장면이 있다. 걱정스러워 식사도 못하고 있는 가족을 위해 친구들이 요리를 만드는데, 샐러드를 담은 식기가 마룻바닥에 ‘쨍그랑’하고 떨어진다. 식기 파손은 승무원의 귀환과 관련하여 중요한 암시를 던져 준다.
① ⓐ ② ⓑ ③ ⓒ ④ ⓓ ⑤ ⓔ
5. < 보기>의 시적 화자가 위 글의 ‘아가씨’에게 해 줄 수 있는 말로 적절한 것은?
<보기>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 조지훈, 병에게 {사상계}, 1968.)
① 병의 쾌유를 위해 주변 사람의 권유를 받아들이십시오.
② 현세가 고통스러울수록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③ 병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초탈한 삶의 자세를 가지십시오.
④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를 위할 줄 아는 친구를 찾으십시오.
⑤ 마음이 흔들릴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종교를 찾으십시오.
<해설 및 정답>
1⑤ - “여기 나와선 까마귀가 내 친굽니다.”라는 그의 말은 ‘불길스러운 소리를 웃음으로 덮어버리려’ 한 말이며, “건 괜한 관념인 줄 압니다. 흰 새가 있듯 검은 새도 있는 거요. 소리 맑은 새가 있듯 소리 탁한 새도 있는 거죠. 취미에 따라 까마귀도 사랑할 수 있는 샌 줄 압니다.”에서 볼 수 있듯이 까마귀에 대한 그의 감정은 가치중립적이다. ①, ④는 병든 여인이 돌아가고 난 밤 ‘그’의 생각에서 알 수 있다. ②는 ‘의사’의 진단에 대한 ‘병든 여인’의 생각을 통해 알 수 있다. ③은 까마귀에 대한 그와의 대화에서 직접 드러나고 있다.
2⑤ -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하게 되면 어떤 재앙이 예상되어 불길하다는 것이 금기담이다. ㉠은 까마귀를 보게 되는 행위를 하게 되면 죽음이 떠올라 재수가 없다는 내용이다. ⑤ 역시 이사 첫날 거꾸로 자지 않으면 귀신이 출현하는 불길한 일이 발생한다는 금기담의 구조이다.
3② - 작가는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독한 죽음을 통해 삶의 비극성을 표현하여 일종의 ‘소멸의 미학, 죽음의 미학’을 그려 내고 있다.
4④ - ‘시기 파손’은 아폴로 13호가 당할 불행한 사건을 암시하는 복선이다. ‘까마귀’는 등장 인물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 역할을 한다.
5③ - <보기>의 화자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 병을 언제든지 친한 벗으로 대하며, 언제라도 다시 찾아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화자의 태도에서 병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초탈한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병을 고통스러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아가씨에게 <보기>의 화자는 ③과 같은 말을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