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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스크랩] 고대 이집트의생활의특징과역사적사건문화재(사진!!)

작성자예수제자|작성시간10.07.16|조회수55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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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의생활의특징과역사적사건문화재(사진!!)

이집트의 자연환경
이집트의 지형은 국토의 면적에 비해 단순하다. 나일강 하곡(河谷)과 그 유역의 삼각주평야, 수에즈 운하 연안, 이곳을 제외한 넓은 사막지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하천 유수량의 조절이 어려웠던 옛날에는 하천 유수량의 연변화(年變化)가 하안의 충적지에서 살고 있는 이집트인들에게 많은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1년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로 그 위협은 사라졌다. 아스완 남쪽으로 인공호인 나세르호가 생겨 이 인공호의 물을 이용하여 사막지방의 관개를 통한 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나일강은 농경을 하는 농부뿐 아니라 이집트인들의 생명선이 되는 젖줄이다. 나일강 동쪽에 마자 고원과 갈랠라·키블리아 산지 등이 발달해 있다.

이 곳은 결정질(結晶質)의 암석과 석회암으로 된 단조로운 고원과 대지가 남쪽의 에티오피아 고원으로 연이어 발달해 있다. 이 고원의 남부에 하마타 산지(1,977m)가 남서쪽을 향해서 점차로 높아져 해발고도 1,900m 정도에 이른다. 홍해안 쪽은 바다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해안을 따라서 가느다란 해안평야가 발달해 있다. 홍해의 수에즈만(灣)과 아카바만 사이에 삼각형 모양의 시나이 반도가 있다. 이 반도는 남으로 갈수록 높아져서 카트리나산(2,637m)에 이르러 최고점이 된다.

사막과 암산으로 된 불모의 지역이기는 하나 석유자원의 매장으로 이집트 경제에 큰 역할을 한다. 시나이 반도와 본토 사이의 수에즈 지협의 저지대에는 한무리의 호소들이 발달해 있다. 수에즈 운하는 이 호소들을 연결해서 굴착하여 만든 것이다. 나일강의 서쪽은 인간이 살기에는 어려운 사막이다. 파이윰 저지·카타라 저지 등에 분포한 오아시스들을 제외하면 거의 인간의 거주가 불가능하다.

이들 저지에서는 석회암의 틈을 따라서 곳곳에 지하수가 용출하여 오아시스를 형성한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물 이외에도 샘을 파서 오아시스 관개농업에 이용한다. 집약적인 농경지가 발달하여 인구밀도가 높다. 바하리야·파라피라·다흘라·하르가·시와 등 5개의 오아시스가 유명하며 1600년경부터 이집트인에 의해 농경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집트의 기후는 대부분의 지역이 건조기후에 속한다. 북회귀선이 이 나라의 남부를 지나고, 북부의 지중해연안은 대체로 북위 31°30'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나일강 계곡과 지중해 연안의 좁은 해안지방을 제외하면 전국이 사막기후가 된다. 내륙으로 갈수록 건조가 심해지고 기온이 높아진다. 서부나 남부지방에서는 수년간 비가 오지 않은 지역도 있다. 지중해 연안에서는 겨울에 약간의 비가 내리는 지중해성기후를 나타내며 기온도 1년을 여름과 겨울의 두 계절로 나누고 있다. 4~10월은 고온이며 공기가 건조한 하계(夏季)이고, 11~3월의 동계(冬季)에는 낮에는 덥고 야간에는 서늘하다.

또한 환절기에는 남쪽에서 저기압이 진행되어 모래를 동반한 열풍이 내습해온다. 이것이 유명한 캄신이라는 바람이며 때로는 40℃ 이상의 고온을 몰고오는 남서의 열풍이다. 동계에는 지중해 방면에서 불어오는 북풍이 비를 다소 내리며 그 영향은 대체로 나일강 삼각주와 해안의 좁은 범위에 미치는 데 불과하다. 연강수량 100mm 이상이 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거의 비가 없는 지대로서 나일강의 혜택으로 관개 용수의 편의를 얻을 수 없는 곳은 곧 불모의 사막인 것이다. 기온의 교차가 매우 심하고 여름에는 사막에서 낮에 50℃ 이상의 극단적인 고온현상이 나타난다.


이집트의 생활모습
이집트 주민은 대부분 코카서스 인종인 함족에 속한다. 총인구의 대부분은 고대(古代)이집트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콥트인 및 누비아인으로 약 60%가 펠라라고 불리는 농민으로 구성된 농촌인구이다. 그 밖에는 수도 카이로를 포함한 도시지구의 거주민으로 아라비아 반도 및 팔레스타인의 아랍혈통을 받은 자와 투르크·아르메니아의 피를 이어받은 자 등이 이주한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함어계의 언어가 사용되어 문서 등에 상형문자 및 그의 초서체(草書體)가 사용되었으나 고대 이집트의 멸망과 더불어 그 언어는 콥트어로서 국지적으로 존속해 왔다. 9세기경에 아라비아가 정복한 이래 이집트 전국에 아랍어가 급속히 전파되어 마침내 국어가 되었다. 1964년 헌법에서도 이슬람교가 국교임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슬람을 문호의 기반으로서 더욱 강조한다. 국민의 93.7%가 이슬람교도인데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하고 나머지 6.3%는 콥트파(東方敎會系諸派의 하나)의 그리스도교도이다. 그 외 유대교도 등이 약간 있다.

이집트는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과밀한 나라 중 하나이다. 농촌의 잠재실업자와 도시의 실업자는 상당한 수에 이른다. 각지에 이슬람 사원이 건립되었고, 하루 5회의 예배와 단식월(斷食月:라마단)의 준수 등 주민의 일상생활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이집트인들의 생활양식과 풍습에 이슬람 문화의 종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남녀격리의 습관·남존여비의 경향 등이 있으며 일부다처제가 인정되었으나 국민생활의 근대화와 더불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농촌지역에는 고대의 가족제도가 있고, 메카 순례자를 존경하는 등 아직도 이슬람의 계율이 충실히 지켜진다.

이집트는 아랍세계의 교육·문화의 중심으로 아즈하르대학과 같은 10세기 이래의 이슬람학술의 본거지와 가장 새로운 교육·문화시설도 있다. 6∼12세까지는 의무교육이고 학비는 국가가 부담하지만 문맹률은 40%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학은 아즈하르대학 외에 카이로·알렉산드리아·아일샴 대학 등이 있고, 카이로에 미국계의 아메리칸대학이 있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유물을 보존·관리하는 박물관과 연구기관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이집트는 카이로 부근 룩소르 및 아스완 부근의 유적보호와 관광자원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유적 중 유명한 것은 피라미드이다. 이집트인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자의 분리는 죽음이지만, 사자(死者)는 영혼이 머무는 곳인 시체가 멸하지 않고 공물(供物)을 받을 수 있다면 죽은 자도 저승에서 계속 산다고 믿어 피라미드를 건조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든 이유라든가, 또는 사자의 영원한 집인 분묘를 정비한 이유가 모두 이러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피라미드는 초기왕조시대의 마스타바에서 발전된 것이다.최성기는 제3∼5왕조로 '피라미드시대’라 부른다. 최고(最古)의 피라미드는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 피라미드’로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이다. 피라미드를 건조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또 오벨리스크(obelisk)는 고대 이집트 왕조 때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로 방첨탑(方尖塔)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거대한 석재로 만들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이며 태양신 신앙과 관계 있다. 문화의 꽃은 언어라 할 수 있는데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들 수 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서기전 3,000년을 전후하여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기록되었는데 최근의 발견으로 이집트에서 먼저 상형문자가 발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내용은 다름 아닌 세금에 관계된 것이어서 최초의 문자는 역시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사용되기시작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고대문화의 발달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고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의 발달도 아랍 세계에서 가장 앞서며 문학·미술·무용·연극·영화 등의 분야에서도 전통적인 것과 현대작품이 공존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3. 종교

이슬람교 90%, 콥트교회 9%

 

4. 문화유산 및 특징

ㅇ 대피라밋


- 크기 및 방향
. 높이 146M, 밑변 길이 230M
. 피라밋 입구 방향은 정확하게 정북을 지향
. 피라밋 경사각 약 52도

- 구 조
. 무게 2톤 - 20톤의 석회암 내장석 약 230만개를 쌓아 올렸으며, 과거에는 피라밋 전체가 백색 외장석으로 덮여있었다고 함. 피라밋 내부는 왕의 방, 왕비의 방, 대회랑, 내려가는 통로, 올라가는 통로, 수평통로, 환기통 등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음
. 내려가는 통로는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발견되었으나, 올라가는 통로는 9세기 Abbas 왕조의 Mamun 왕이 처음 발견하였다고 함

 

- 건 축
. 그리스의 역자학자는 약 10만명의 인원이 약 10년간에 걸쳐 건축하였다고 추산함.
. 현대 일부 건축학자들은 피라밋 건축의 정밀도 등을 감안 4-5 천명의 숙련되고 조직된 기능인들이 건축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건축방식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해명되지 않고 있음.

 

 

 

ㅇ Khafre왕과 Memdaure왕의 피라밋


- Khafre왕은 Khufu왕의 아들이며, Memdaure왕은 Khufu왕의 손자로서 각 피라밋 높이는 Khufu왕(146m), Khafre왕(137m), Memdaure왕(69m)순임.

- Khafre왕의 내부 현실은 지면과 동일한 높이에 있으며, Memdaure왕의 현실은 지하에 있음.

- Khafre왕의 피라밋 상부에는 외장석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음.

 

 

 

ㅇ 스핑크스

- Khafre왕의 피라밋 동쪽에 피라밋의 수호신으로 알려진 스핑크스상이 있음.
 . 거대한 자연석을 깎아 만든 것으로서 길이 75m, 높이 22m
 . 얼굴에 채색 흔적이 아직 남아 있으며, 턱수염은 대영 박물관에 전시중

- 스핑크스의 건축 연대는 기자 피라밋 건축연대와 비슷한 시기로 보고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스핑크스상에 물에 침식된 흔적이 남아있는 점 등을 근거로 약 BC 10,000년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

- 18왕조 Tuthmosis 4세(BC 1425 - 1417간 재위)가 꿈에 계시를 받아 당시 모래속에 파묻혀 있던 스핑크스를 발굴하고 스핑크스 앞에 기념비를 세웠다고 함.
. Tuthmosis 4세는 원래 차남이었으나, 후에 왕이 되었는 바, 이를 출애굽기의 모세의 재앙(장자 사멸)과 관련짓기도 함.

 

 

 

ㅇHatshepsut 신전

 
- 18왕조 Hatshepsut 여왕(BC 1503 - 1482간 재위)이 8년에 걸쳐 건축한 신전으로서 왕들의 계곡 뒤편에 위치
 . 여왕 자신과 여왕의 부친인 Tuthmosis 1세를 기념하기 위한 신전
 . 여왕의 시신이 동 신전 지하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짐.

- Hatshepsut 여왕은 원래 Tuthmosis 2세의 왕비였으나, Tuthmosis 2세가 요절하자 첩 소생 아들인 Tuthmosis 3세를 대신하여 왕위에 즉위하였는 바, Hatshepsut 여왕 때문에 20여년간 억압된 생활을 강요받은 Tuthmosis 3세는 여왕 사후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여왕에 대한 복수로 신전의 많은 부분을 파손

 

 

 

Karnak 신전

 

- 태양신 Amun 신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Mut 신전, Montu 신전, Khonsu 신전 등 Luxor의 수호신들을 모신 신전들이 기본 신전들로 배치되어 있으며, Tuthmosis 3세의 신전, Amenhotep 2세 및 3세의 신전, Ramses 3세의 신전 등 다수의 소규모 신전들도 복합적으로 배치되어 있음.

- 고대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제 12왕조(BC 20세기)때부터 건축되기 시작하여 Ptolemies 왕가(BC 1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2000년에 걸쳐 계속 증축되어 왔으나, 기본 구조는 제 1 탑문(Pylon)이 건설된 제 25왕조(BC 7세기)때 완성된 것으로 알려짐.

- 전체 신전 배치는 남북으로 되어 있으나, Amun 신전은 동서로 배치
. 전체 신전 규모는 남북으로 2km, 동서로 500-600m 정도 크기임.

 

 

 

 

ㅇ왕들의 계곡

 

 -Luxor 지역 나일강 서안에 위치한 석회암 계곡으로서 고대 이집트 신왕조(18 - 20 왕조, BC 1567 - 1085)시대 왕들의 무덤 62개소가 발굴됨.
. 무덤 일련번호는 발굴된 순서를 의미

- 자연 석회암 계곡에 토굴을 파고, 토굴 벽면에 사자의 서(고대 이집트 종교와 관련된 내용) 등을 기록한 뒤 시체 및 유물을 안장
. 고왕조시대 왕들의 무덤인 피라밋과는 달리 외부 노출을 피함으로써 도굴 방지를 기도하였으나, 대부분의 유물이 도굴됨.

 

5. 우리나라와의 관계

 

이집트는 1963년 8월에 북한과 수교하였고, 한국과는 1995년 4월에 수교하였다. 1967년, 1975년 중동전쟁 때 북한의 군사지원으로 친북한 외교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며 1970년 중반 이후 이집트의 문호개방정책으로 외교관계로 발전, 1980년대 이후 실질 협력 관계를 수립하였다. 1999년 2월 총리 김종필의 이집트 방문 후 4월에는 대통령 무바라크의 방한으로 양국관계가 더욱 진전되었다.

1994년 이중과세방지협정, 1988년 항공협정, 1989년 문화·과학·기술협력협정, 1997년 투자보장협정, 1998년 무역협정, 1998년 사증면제협정을 체결하였다. 1999년에는 과학기술양해각서, 외교연구원간 협력의정서에 서명하고 원자력협력의정서에 가서명하였다. 2000년 현재 대한수입 5억 1590만 달러, 대한수출 2억 597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납사, 동 및 합금, 원유 등이며 수입품은 자동차 및 부품, 일반기계, 직물 등이다

 

6. 특산물

 

이집트의 특산물로는 낙타 가죽제품, 은세공, 파피루스 등이 있으며...
또한 이집트는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높으며, 경제작물로는 목화재배가 중심이고, 식량작물로는 옥수수, 밀, 보리, 쌀, 콩, 과실, 사탕수수 등이 재배되고 기타 오아시스의 관개농업지대에서 대추야자·기름야자 등을 생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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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서울강남총회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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