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고대 1) 선사시대 이집트가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금석병용시대를 경유하여 역사시대(왕조시대)로 이행된 것은 확실하다. 이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플라이스토세(世)는 자연경관(自然景觀)도 왕조시대와는 차이가 있었다. 유럽 빙하기(氷河期)의 영향으로 우기(雨期)와 건기(乾期)가 교대로 왔으나 그 무렵의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은 현재의 하곡지대가 아니라 주로 서방의 대지(臺地)였다. 아슈르기(期) ·무스티에기 ·솔뤼트레기 등에 속하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은 나일강에 형성된 단구(段丘) 위나 파이윰호(湖), 하르가 등의 오아시스 주변의 높은 지점에서 발견된다. 중기까지의 문화가 이집트 전토(全土)에 걸쳐 동일한 데 대하여 후기에 이르러서는 파이윰 지방에 에피 르발루아 문화, 하르가 오아시스의 아테리안 문화 등의 지방색이 나타났다. 이 시대의 북아프리카는 다우습윤(多雨濕潤)에서 건조(乾燥)로의 이행기(移行期)에 해당한다. 중석기시대(中石器時代)를 거쳐 신석기시대로 접어들 무렵에는 건조화가 진전되어 나일강의 수위(水位)도 내려가고 자연환경도 현재와 비슷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차차 나일하곡에 모여 정주하였으며, 농경 ·목축을 영위하면서 왕조시대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대체로 BC 5000년경의 일이다. 이 시대의 유적은 카이로 서남 80 km에 있는 파이윰(A) 문화, 중부 이집트 동안(東岸)의 델 타사 문화가 알려져 있는데 반정주(半定住)의 상태이며, 농경과 수렵이 반반이었다. 토기 ·석기 ·골각아기(骨角牙器) ·바구니세공[籠細工] ·직물 ·피혁제품 ·팔레트(화장접시) ·꾸미개[裝身具] 등을 가지며, 이미 상 ·하 이집트에서 각각 그 특징이 나타나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신석기시대의 후기에 속한다. 이에 뒤따르는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는, 상(上)이집트에서는 바다리 문화, 하(下)이집트에서는 메림데 문화가 알려져 있다. 바다리에서는 고타(敲打)에 의한 것이고, 주조법(鑄造法)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최초의 구리제품이 발견되었으며, 토기가 현저히 발달했다. 경제는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시나이 ·누비아산(産)의 공작석(孔雀石)이나 홍해산(紅海産)의 조개, 시리아산의 삼목재(杉木材) 등이 수입되었다. 2) 선왕조시대 이집트의 선왕조시대(BC 3600?∼BC 3100?)는 국가의 형성에 직접 연결되는 중요한 시대이며, 암라(나카다 Ⅰ)문화 ·마아디(Maadi)문화 ·게르제(나카다 Ⅱ)문화 등이 있다. 인공관개(灌漑)가 도입되고, 인구는 증가하고, 촌락은 도시 규모로 되었다. 왕조시대의 노모스[州]의 기초가 이루어진 것도 이 시기이다. 외국과의 교역도 더욱 왕성해졌는데, 특히 아시아산(産) 은 ·연(鉛) ·자수정 ·흑요석(黑曜石) ·청금석(靑金石)이나 메소포타미아산 원통인장(圓筒印章) 등이 수입되었다. 토기나 호부(護符)에 토템을 나타내는 동물이 그려져 있는데, 후세의 하트호르와 닮은 우두(牛頭)의 여성도 보인다. 무덤에는 우샤브티를 연상시키는 인형이 부장되었으며, 후장(厚葬)의 풍습이 엿보인다. 게르제기(期)에는 노동의 분화와 신분의 차가 보이며, 파상 파수토기(波狀把手土器) ·유문토기(有文土器), 프린트제(製)의 정교한 손칼(刀子)이 한창 만들어졌다. 게르제기의 히에라콘폴리스의 무덤에는 석회칠이 되어 있고, 그 위에 갖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어, 왕조시대에 성행한 벽화의 조형(祖型)을 이룬다. 3) 초기왕조시대 이집트의 초기 왕조시대는 제1~제2왕조(BC 3100?∼BC 2686?)시대를 말한다. 국토의 통일과 건설의 시대인 게르제기(期)의 말에 상 ·하 이집트의 각 노모스는 차차 통합되었고 곧이어 남북으로 서로 적대하는 두 개의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쌍방이 함께 왕가와 같은 종족의 귀족에 의하여 지배되었는데 처음에 하이집트는 부토, 상이집트는 히에라콘폴리스를 수도로 하였다. 그 뒤 북은 사이스, 남은 티니스(티스)로 옮겼다. 한때 북왕국이 남왕국을 지배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남왕국이 전국토를 지배하였다. 이 통일에는 스코르피온, 나르미아 두 왕이 활약하였는데 그 기록은 히에라콘폴리스에서 발견된 석회암제(石灰岩製)의 곤봉두(棍棒頭)와 봉납용(奉納用)의 팔레트에서 볼 수 있다. BC 280년경 이집트의 신관(神官) 마네토는 상 ·하 이집트를 처음으로 통일하였고, 새로이 멤피스를 축조한 제1왕조 초대의 왕은 메네스였다고 하나, 그것은 나르미아와 동일인물인 것 같다. 이 통일은 BC 3100년경에 이루어졌다고 짐작된다. 마네토에 의하면 제1왕조는 8명의 왕, 제2왕조는 9명의 왕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400년에 걸친 초기 왕조시대에 관하여는 채광(採鑛)을 위한 시나이 원정과 누비아 토벌 이외에는 거의 분명하지 않다. 국왕과 그 가족은 아비도스와 사카라에 매장되었는데 그곳에서의 출토품이 당시 문화의 한 면을 나타낸다. 왕묘는 마스타바의 형태를 취하였다. ‘신(神)이 되는 왕’에 의한 통치사상이 널리 퍼졌으며, 국가의 조직이나 토목 ·건축의 기술도 크게 진보하였다. 문자도 이 시대에 크게 발전하였으며, 석제용기 ·동제품(銅製品) ·귀금속 ·보석 가공 등의 공예도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4) 고왕국시대 이집트의 고왕국시대는 제3~제6왕조(BC 2686?∼BC 2181?)시대를 말한다. 이집트 최초의 융성기로서 각 방면으로 이집트 문명이 가진 여러 특징이 나타난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특징있는 피라미드가 건설된 시대로 피라미드시대라고도 불린다. 수도는 멤피스로 옮겨졌다. 제3왕조의 조세르왕은 카이로의 남서쪽 30 km 사카라에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에 묻혔다. 이것은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으로서 처음으로 돌을 사용하였고, 외관(外觀)은 마스타바를 6단으로 쌓아올린 형태이다. 이것은 피라미드의 과도적(過渡的)인 것으로서 높이 62 m, 북쪽의 장제전(葬祭殿)을 비롯하여 부근에는 의식용 건물과 열주랑(列柱廊) ·광장 등이 있으며, 이것을 높이 약 10 m, 전장(全長) 1,600여 m의 주벽(周壁)이 남북으로 직사각형으로 둘러싼 피라미드 복합체를 구성한다. 제4왕조의 왕 스네프루는 3개의 피라미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다슈르의 북쪽 피라미드는 저변 213 m, 높이 97.5 m의 각추형(角錐形)으로 된 최고(最古)의 피라미드이다. 기제에는 3개의 큰 피라미드가 솟아 있다. 모두 제4왕조의 것으로, 북쪽에서부터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의 것이다. 그 중 가장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저변 230 m, 높이 146.5 m이고 2.5 t의 큰 돌을 230만 개 쌓아올린 것이다. 북쪽으로 난 입구에서는 길고 복잡한 통랑(通廊)을 통하여 매장실에 이르는데 도굴(盜掘)을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카프레왕의 피라미드에는 장제전 이외에 하곡(河谷)신전과 그곳으로 통하는 참배길이 부수되어 있다. 또한 유명한 스핑크스는 국왕의 얼굴형을 닮았다고 한다. 피라미드는 제5∼제6왕조에서도 계속 축조되었다. 그러나 규모는 작아졌으며, 그에 대신하여 태양신 라를 제사하는 대규모 신전이 건설되었다. 제5왕조 최후의 왕 우나스의 피라미드 내부에는 최초로 피라미드 텍스트(매장용의 呪文)가 새겨져 있다. 각 왕의 업적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시나이 반도의 구리 광산이나 누비아 지방의 채석장을 확보하고 때에 따라서는 양재(良材)를 구하기 위해 시리아로, 또한 향료를 구하기 위하여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제5왕조에는 영토가 제2폭포 와디할파까지 넓혀졌다. 그러나 제6왕조에 접어들자 왕권은 약체화되고 각 노모스의 지사(知事)가 그 직위를 세습하게 됨으로써 왕명은 힘을 잃고 노모스는 반독립국과 같이 되었다. 고왕국시대에 국왕은 파라오라 불리고 절대적 전제군주로서 신으로 숭배되었으며 재판관 ·군인 ·신관 등의 모든 면에서 최고위의 존재로서 백성 위에 군림하였다. 왕은 왕족 중에서 고급관리를 선임하여 중앙집권정치를 하였다. 소수의 도시 생활자 이외의 국민의 대다수는 농민이며 그 밖에 전쟁노예가 있었다. 당시의 생활은 분묘의 벽면에 새겨진 부조(浮彫) 등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종교는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국가의 행사나 예술에까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의 종교는 원래 수목 ·암석 ·동물 등 자연물이나 생물에게 초인간적인 힘을 인정하는 주물(呪物)숭배였다. 그것이 곧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서, 왕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신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화신(化身)하였다. 예를 들어 호루스 신은 매, 하트호르 신은 암소, 아누비스 신은 늑대였다. 원래 이것들은 각 부족의 토템이었으나 이 무렵에는 지방신으로서 받들어졌고 성수(聖獸)로서 신전에서 사육되었으며 죽은 뒤에는 후장(厚葬)되었다. 이러한 신 가운데에서 태양신 라는, 전 우주의 창조자로서 점차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집트인은 태양의 운행이나 수목의 번식에서 생명의 불사(不死) ·부활을 믿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보존하거나, 내세의 생활을 위하여 특히 왕이나 귀족이 훌륭한 분묘를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건축기술과 기하학이 진보하였고, 또 농업과 관련하여 토지 측량과 점성술이 발달하였으며, 달력이 만들어졌다. 피라미드 텍스트는 종교적 주문(呪文)이나 신화의 단편(斷片)으로 되어 있어, 이 시대의 신앙을 아는 데 귀중한 사료(史料)이다. 5) 제1중간기 제7~제10왕조(BC 2181?∼BC 2050?) 제6왕조 말부터 왕권은 쇠미하였고, 노모스의 지사는 세습화되어 봉건군주와 같이 되었다. 한편 관료정치에 강한 반감을 품어오던 민중이 봉기하여, 사회는 혼란하였다. 이와 같은 국내의 분열과 혼란에 편승하여 사막으로부터는 이민족(異民族)이 침입하였다. 일시적으로 질서가 회복되기도 하였으나 오래 가지 않았으며, 헤라클레오폴리스에서 문학이 번성했던 것밖에는 일반적으로 학문 ·미술이 모두 쇠퇴한 불모의 시대였다. 제13~제17왕조(BC 1750?∼BC 1567?) BC 1750년경 제12왕조는 붕괴되고 이집트는 또다시 혼란의 시대로 들어갔다. 많은 왕이 교대로 즉위하였고, 때로는 병립하기도 하였다. 이 혼란을 틈타 아시아에서 힉소스인이 침입하여, 삼각주지대의 아바리스에 성채를 구축하고 약 100년 동안 주로 하(下)이집트를 지배하였다. 이것은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에 의한 지배이다. 힉소스의 침입은 당시의 서아시아에 일어난 민족이동의 일환이었고 문화 정도는 이집트에 비해 훨씬 낮았으나, 그들은 말과 전차를 도입하여, 그 이후의 전술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BC 1600년경이 되자 테베를 중심으로 하여 제17왕조의 제왕(諸王)에 의한 반항이 기도되어 장기간의 항쟁 끝에 카흐모스왕의 아우 아모세가 아바리스를 함락하고 결국 힉소스를 아시아로 추방하였다. 그는 귀국 후, 아모세 1세로서 제18왕조를 일으켰다. 6) 중왕국시대 이집트의 중왕국시대는 제11~제12왕조(BC 2050?∼BC 1750?)시대를 말한다. 제1중간기의 말, 북의 헤라클레오폴리스에 웅거한 제10왕조에 대하여 테베에 웅거하는 안테프의 제11왕조가 독립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오랜 항쟁 후에 이집트는 멘투호테프 2세 치하에서 다시 통일되었다. 이후 테베는 약 1,000년 동안 이집트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왕은 또한 장기간 방치되었던 누비아에 원정하여 콥토스에서 와디 함마마트에 이르는 도로를 정비하고 시나이 반도와 푼트 지방에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는 테베의 서쪽 교외 델 엘 부하리의 벼랑에 붙은 새로운 양식의 장제전(葬祭殿)을 건설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은 통일을 유지할 힘이 없어 국내는 한때 혼란하였으나 최후의 왕 때의 재상 아메넴헤트 1세가 제12왕조를 열었다. 이 무렵부터 테베의 시신(市神)인 아몬신(神)이 유력해졌다. 아메넴헤트 1세의 아들 세소스트리스 1세는 제3폭포까지 군대를 파견하여 금광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세력은 여전히 강하였다. 노모스의 세력을 장악하고 참된 의미에서 국토통일을 완성한 것은 세소스트리스 3세의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는 북상하는 니그로를 토벌하여 누비아를 지배하였고 각처에 성채(城砦)를 설치하고, 팔레스티나에 원정하였다. 이 시대의 교역은 시리아 ·크레타에까지 미쳤다. 다음의 아메넴헤트 3세는 국내의 정치에만 힘썼는데, 특히 댐과 관개용수로를 만들었고, 파이윰 지방을 개척하여 경지의 증대에 성공하였다. 제12왕조의 왕들은 파이윰의 북동에 있는 리셰트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리셰트 ·하와라 등지에 피라미드나 신전이 조영되었다. 이 시대는 민중이 귀족에 대신하여 힘을 얻어 관리에 등용되었고 농노에서 자유민으로 되는 길도 열리는 등 이집트의 역사 가운데서 비교적 민중의 힘이 인정되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경향은 신앙상에도 나타나 사후의 세계는 왕이나 귀족들의 독점물이 아니고, 민중들도 미라가 되어 공동묘지에 매장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었다. 종교 ·문학면에서도 피라미드 텍스트에 대신하여 관(棺)의 주위에 표시된 코핀 텍스트는 일반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중왕국시대는 일반 문학(산문)이 가장 발달한 시대이기도 하다. 세계 최고(最古)의 모험기행이라고 할 수 있는 《시누에의 이야기》는 이집트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며 그 밖에 푼트 교역을 취급한 《난파선 이야기》와 사회적 관심을 나타낸 《능변의 농부 이야기》 등이 있다. 이것은 시대를 반영하고 서사(書寫) 재료로서 파피루스의 두루마리가 사용되었고, 서체도 쓰기 쉬운 행서체로 옮겨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밖에 파피루스는 《기하학서》(린도 파피루스) 《외과서》(에드윈스미스 파피루스) 《치병(治病)의 서》(에베루스 파피루스) 등 학술적인 것에까지 미치고 있다. 7) 신왕국시대 이집트의 신왕국시대는 제18~제20왕조(BC 1567?∼BC 1085?)를 말한다. 이 시대는 이집트 역사상 고왕국 ·중왕국에 이어지는 세 번째의 융성기로, 영토도 아시아까지 확대되어 제국시대라고도 불렸다. 제18왕조 초기의 국왕들은 힉소스를 추방한 후에도 계속하여 팔레스티나 방면으로 파병하였는데 그것은 곧이어 전리품을 목적으로 한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변하였다. 당시의 서아시아 정세는 각 민족이 분립 ·항쟁하는 시대였다. 곧 이집트도 그와 같은 국제정세 속으로 말려들어갔다. 한편 투트모세 1세는 제3폭포까지 파병하는 등 남방(南方) 경영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트솁수트 여왕은 내정에 힘쓰고 광산을 개발하였으며, 푼트 지방에 배를 보내어 향료(香料) ·상아(象牙) ·목재 등을 수입하였다. 또한 테베 서쪽 교외의 델 엘 부하리에 거대한 장제전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여왕과 공동통치를 하였던 투트모세 3세는 여왕의 사후,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카데시의 왕이 지휘하는 동맹군과 메깃도에서 싸웠는데 그 승리가 이집트 번영의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 왕의 출병은 20년간 전후 17회에 이르렀고 북은 유프라테스강(江) 연안에서 남은 제4폭포까지 지배하에 두게 되어 이집트의 영토는 사상 최대가 되었다. 방대한 전리품과 많은 노예를 얻게 되었고 각지에서 물자가 집결되었으며, 미탄니 ·아시리아 ·크레타 등이 조공하였다. 따라서 테베에는 웅장한 신전 ·왕궁, 귀족의 저택 ·상점 등이 들어서 번화하였다. 귀족은 충실한 가신(家臣)으로서 왕을 받들었으며, 그들을 고급관리로 하는 관료조직이 정비되었다. 투트모세 3세는 이제까지 한 사람이었던 재상을 두 사람으로 하여 상 ·하 이집트의 내정에 전념시켰다. 원정으로 획득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강력한 상비군(常備軍)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직업군인이 출현하였고 곧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 용병의 수가 많아지자 그들의 생활을 유지하는 일이 큰 문제로 되어, 이것은 국력을 피폐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승리는 신의 힘에 의한 것이고 그것은 신 자신의 승리이며, 국가의 번영은 아몬신의 번영이라고 생각되었다. 국왕이나 귀족은 신에게 토지를 기증하고 신전을 잇달아 건립하였다. 따라서 신관단(神官團)은 관료 ·군인에 못지 않은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방대한 신전령(神殿領)은 신관의 사복을 채웠고 곧이어 왕위계승에도 간섭하였다. 투트모세 3세의 사후 시리아에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아멘호테프 2세는 미탄니를 토벌하였고 다음의 투트모세 4세는 미탄니와 동맹하여 그 왕녀를 왕비로 맞았다. 이 무렵부터 아시아에서는 히타이트의 세력이 신장하였는데, 이집트도 그 동향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시대는 표면상으로 이집트가 가장 안정되고 융성한 시대였다. 왕은 거의 외정(外征)을 하지 않고 다만 신전 등의 건축공사에 부(富)와 힘을 쏟았다. 왕은 아시아제국과 서한 및 기증물을 교환하여 친교를 맺었기 때문에 여기에 일종의 국제주의시대가 도래하였다(아마르나시대). 아멘호테프 4세는 절대 세력을 갖게 된 테베의 아몬신관단에게 반발하여, 태양신 아톤을 시신(市神)으로 하는 신도(新都)를 오늘날의 텔 엘 아마르나의 땅에 조영하여 아케타톤(아톤의 지평선이라는 뜻)으로 명명(命名)하고 스스로도 이크나톤이라고 개명하였다. 왕은 아톤찬가(讚歌)의 제작과 예술활동에 전념하고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아시아에서는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고 정정(政情)이 불안하게 되었다. 결국 왕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아 사후에 아몬신앙은 부활되었으며 신도(新都)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예술면에서는 고정화된 종래의 전통이 타파되고 개방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외국과의 문화교류도 행하여져서, 사실적이고 밝은 성격의 아마르나 예술을 낳았다. 이것은 투탕카멘 왕묘의 출토품에서 엿볼 수 있다. 투탕카멘 왕은 18세 때 죽고 군인출신의 호렘헤브가 왕위에 즉위하여, 제18왕조는 끝났다. 제19왕조의 초대는 호렘헤브가 선택한 군인 출신의 람세스 1세이고, 그의 아들 세티 1세는 재차 아시아에서의 이집트의 우위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그의 아들 람세스 2세는 전형적인 파라오로 67년 동안의 오랜 치세에, 각지에 다수의 신전을 건축하였고 북쪽 또는 남쪽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아시아 경영 때문에 신도를 삼각주지대의 타니스에 건설하였다. 건축 사업 중에는 테베의 서쪽 교외에 세운 장제전 라메세움이나, 누비아의 아부심벨의 대소 2신전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남하하는 히타이트를 카데시전투(BC 1286)에서 막아냈고, 곧이어 아시리아의 세력에 대처하기 위하여 하투실리시 3세와의 사이에 우호조약을 맺었다. 왕은 그 후 아시아 진출을 단념하였다. 다음의 메르엔프타흐왕 시대부터 아시아는 또다시 민족이동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고 제20왕조의 람세스 3세 때 이미 히타이트는 멸망하여 없어졌고 이 무렵부터 삼각주지대는 자주 리비아인 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또한 신관단의 세력에 대하여, 왕실의 세력은 쇠퇴하여 왕위는 신관(神官) 헤리호르에게 찬탈되었다. 신왕국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테베에 조영된 카르나크 ·룩소르 등의 많은 신전과 여러 왕의 장제전, 그리고 테베 서쪽 교외의 벼랑을 뚫고 매장한 국왕과 귀족 ·고관의 연도분(羨道墳)이다. 이것은 모두 엄청난 부와 권력, 그리고 풍부한 노예노동력에 의한 것이지만 높은 수준의 건축기술과 벽면의 부조(浮彫)에서 볼 수 있는 뛰어난 예술상의 재능은 오늘날에도 그 유적을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다. 문학은 구어체(口語體)를 사용하여 민중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농민의 생활을 묘사한 《두 형제 이야기》, 교훈적인 작품 《정의와 허위의 이야기》 등이 있고 이외에도 고관의 분묘에 남겨진 자전적(自傳的)인 묘비명(墓碑銘) ·전승가, 아몬신 ·아톤신의 찬가, 격언(格言) ·연가(戀歌)도 남아 있다. 또 《사자(死者)의 서》를 비롯한 종교적인 작품도 있다. 8) 후기왕국시대 이집트의 후기 왕조시대는 제21~제30왕조(BC 1085?∼BC 332)시대를 말한다. 테베에서 헤리호르가 왕위를 찬탈할 무렵, 북부에서는 네지바다두트(스멘데스)가 타니스에 제21왕조를 열어 이집트는 양분되었다. 그후 리비아 출신의 일족이 중부 이집트의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중심으로 세력을 폈으며 곧이어 시샤크(셰숑크)는 삼각주지대의 부바스티스를 근거로 제22왕조를 일으켰다. 그 후의 제23 ·24왕조는 리비아인이 지배하였는데 분립의 기운은 삼각주지대까지 미쳐, 제22 ·제23왕조는 병립하였다. 제25왕조는 나파타에서 일어난 에티오피아인의 왕조이다. BC 671∼BC 664년 이집트는 세 번에 걸쳐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아 테베는 두 번 점령되었다. BC 664년 프삼티크 1세가 삼각주지대의 사이스에 제26왕조를 열었다. 그는 그리스인의 힘을 빌려 아시리아인을 추방하고 삼각주지대를 통일, 곧 남부에까지 손을 뻗쳤다. 왕은 그리스인들의 삼각주지대에서의 식민(植民)을 허용하였으므로 곧 나우크라티스가 번영하였다. 왕은 또한 고왕국시대를 본보기로 하여 일종의 복고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사이스왕조는 한때 예술면에서도 우수한 복고적 작품이 나왔다. 그러나 네코 2세는 카르케미시에서 신바빌로니아에 대패하여 세력을 잃었다. BC 525년 페르시아의 캄비세스에 의하여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한 속주가 되었다(제27왕조). 그 후 한때 이집트는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모두 짧은 기간으로 재차 페르시아의 세력하에 놓여졌으며 결국 BC 332년 정복되어 이집트인에 의한 왕조시대는 끝났다. * 둘째로 노예제도에 관한 중요한 키 포인트~! 노예는 인격이 부인되고 타인에게 소유되어, 권리와 자유의 태반 또는 전부가 박탈된 자이다. 법적으로는 개인재산을 뜻하며 양도 ·매매가 가능한 물건으로 생각되었다. ‘생명 있는 도구, 말할 줄 아는 도구’라 하여 가축과 같이 생각되었으며, 소유자는 어떤 종류의 노동도 시킬 수 있었고, 원칙적으로는 그 생명도 빼앗을 수 있었다. 노예제 안에는 각양각색의 사회적 신분을 가진 자가 포함된다. 가령 고대 로마의 노예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대개의 경우 자유를 매수할 재력(財力)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 남북전쟁 전의 남부 흑인노예는 법률로써 그런 것이 명확히 금지되었기 때문에, 자유를 매수하기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노예제의 극단적인 형태의 예로는 나치스 독일의 강제노동자를 들 수 있는데, 이 경우 유대인·슬라브인, 기타 피정복민족은 일반적인 노예개념과는 달리 귀중한 자본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 정식으로 이집트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을까? . - 우선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예제도는 분명 이집트에 선행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첫번째 이유는 "Prince of Egypt" 영화에 나와있듯이 유대인들의 조상은 정복, 노예로 삶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당시 고대 이집트는 세계 문명이자, 강대국이었던 만큼 태양의 아들 파라오 및에 분명 노예가 있었을 것입니다. - 둘째로 네이버 통합검색 에서 '이집트 노예제도'를 치시면 웹문서 첫번째인 한글 문서에 간략하게 나와있습니다. 주소는 http://deer.sangmyung.ac.kr/%7Esoju/Images/datafile5.hwp입니다. - 셋째로 근거가 될만한 사실은 바로 이집트의 영원한 발전 속도에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감히 해봅니다. 당시 신분제도는 분명이 있고, 피라미드 건설 스핑크스 건축을 위해서 분명 노예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분명 잘난 이집트인들이 하지는 않을뿐더라 매질과 함께 감독이나 하였겠지요. - 기회가 되시면 "Prince of Egypt"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Hebrew들의 탄압을 통해 이집트에 노예제도가 선행 했음을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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