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종교에 대해
* 종교의 중요성
종교는 고대 이집트인의 생활에서 거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정도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예술은 종교적 상징의 표현이 대부분일 정도다. 문학과 철학은 종교적 가르침으로 채워졌고, 고왕국의 통치 형태는 신전 정치였으며, 심지어 제국 시대의 군사적 파라오들조차도 신의 이름으로 통치한다고 공헌할 정도였다. 이집트의 물적 자원은 그 상당량이 정교한 무덤을 만들고, 사제들을 지원하는데 소모되었다.
* 초기의 종교 발전
고대 이집트의 종교는 여러 단계를 거쳤다. 소박한 다신교에서 유일신교의 초기 형태로 발전하다가 다시 다신교로 되돌아갔다. 처음에는 각 도시나 지역이 제각기 지방신을 섬긴 것으로 보이며, 그 신들은 각 지방의 수호신이거나 또는 자연적 힘을 의인화한 존재들이었다. 이집트의 통일은 영토의 통합뿐 아니라 이러한 여러 신들의 통합까지도 초래했다. 모든 수호신들은 위대한 태양신 "라" 로 통합되었다. 이 신은 중왕국 시대에 테베 왕조의 지배권 장악과 더불어 흔히 "아몬" , 혹은 " 아몬-라" 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 이름은 테베의 최고신 이름에서 온 것이다. 자연의 생장력을 의인화한 신들은 나일 강의 신인 오시리스 로 통합되었다. 그후 우주를 지배하는 이들 두 신, 즉 아몬과 오시리스가 서로 주도권을 놓고 다투었다. 다른 신들도 인정되었지만 나중에 보듯이 그들은 종속적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 고대이집트태양신 RA신앙
고왕국 시대에는 라 신 숭배로 구체화된 태양 신앙이 압도적인 신앙 체계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공인된 종교로서 기능했으며, 주된 기능은 국가와 인민들에게 집단적인 불멸성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파라오는 지상에서 이 신앙의 살아 있는 대리인이었으며, 그의 지배를 통해 신의 지배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라 신은 단순한 수호신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그밖에도 정의, 정직, 진리의 신이자,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는 신이기도 했다. 라 신은 인민 개개인에게 영적 축복이나 물질적 보상을 주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결코 대중을 위한 종교는 아니었다.
-오벨리스크 (obelisk)=석각부조 고대 이집트 왕조 때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
방첨탑(方尖塔)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거대한 석재로 만들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 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이다. 태양신 신앙과 관계가 있고, 고왕국(古王國)시대에 아브시르에 있는 제5왕조의 네우세르라 왕묘의 태양피라미드 신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분묘의 기념비로 건립되었다. 중(中)왕국시대 이후로는, 국왕의 통치 기념제 때에 신전탑문 앞에 한쌍이 건립되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것은 헬리오폴리스(태양의 도시라는뜻)에 있는, 제12왕조의 세누세르 1세가 건립한 것으로 높이 20.7m이다. 제18왕조의 투트모세 1세 이후로 제왕(諸王)이 명문(銘文)을 4면에 새긴, 애스원의 화강석제의 오벨리스크를 카르나크의 아몬 신전 앞에 세웠는데 대부분 유럽에 반출되어, 현재는 투트모세 1세(23.2 m, 143 t)와 하트솁수트 여왕(29.6 m, 325 t)의 것이 하나씩 남아 있을 뿐이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 불리는 투트모세 3세의 것은 19세기에 워싱턴 D.C.와 런던으로 각각 가져갔다. 아스완의 채석장에는 길이 41.7 m의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하나 있다.
-헬리오폴리스 (Heliopolis) 태양신앙의 중심지이며 고대 그리스어로 ‘태양의 폴리스’라는 뜻이다. 고대 이집트 이름은 이우누이며, 성서지명(聖書地名)의 온(On)에 해당한다. 태양신(아툼 및 라)을 우주창조신으로 만드는 헬리오폴리스 신학(神學)은 오시리스 신화까지도 끌어넣어 이집트의 종교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른 대신(大神)은 라(Ra)와 교리(敎理)를 절충함으로써 태양신, 창조 신의 권위를 주장하였고 아크나톤(아멘호테프 4세의 별명)의 아톤신앙의 원천을 이루기도 하였다. 신역(神域)에 봉납한 태양신의 상징 오벨리스크는 1개만 남고 모두 해외로 유출되어 로마, 뉴욕, 런던의 광장에 있다. 또한, 레바논의 고대도시유적 발베크도 헬리오폴리스라고 불렸다.
*오시리스 숭배(나일강신 &악어신)
-오시리스 (Osiris) 오시리스는 그리스식 발음이고, 이집트어로는 우시르(Usire)이다. 오시리스는 땅의 신 게브와 하늘의 신 누트의 아들로 누이동생 이시스와 결혼하였는데, 후에 형의 지위를 노린 아우 세토에게 살해되어 몸이 갈기갈기 찢겨졌다. 이시스는 이 몸조각을 모아 매장하였는데 부활한 오시리스는 저승에 가서 왕이 되었다. 이 신화는 그리스 작가 플루타르코스의 《이시스와 오시리스에 관하여》(XII∼XX)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죽은 신을 애도하고 그 재생을 기원하는 오시리스 신앙은 예로부터 성행하였는데, 제5왕조(BC 2400?)부터는 파라오(왕)도 죽은 후에는 오시리스로 간주되었고, 또 사람이 죽은 후에는 모두 오시리스가 된다고 여겨졌다. 오시리스, 이시스는 로마 등지에서도 신봉되었다.
-오시리스신화 오시리스는 이시스와 근친결혼을 하여 이집트를 28년간 통치하였으나, 동 생인 세트(그리스식 이름으로는 튜폰)에게 살해당하여 시체는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버려졌다. 상자는 델타를 지나서 지중해로 흘러들어가 시리아 해안의 비블로스에 닿았다. 비탄에 잠긴 이시스는 이 상자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비블로스에 당도하였다. 오시리스를 담은 상자는 비블로스에 도착한 후 무화과나무가 이를 에워싸 크게 되었다. 비블로스의 왕은 이 나무로 궁전의 기둥을 만들었으나 이시스가 이를 알고 그 상자를 되찾았다. 이 사실을 안 세트는 오시리스의 시체를 14토막으로 토막내어 온 나라에 뿌렸다. 이시스는 다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흩어진 오시리스의 시체를 모아다가, 누이동생 네프티스의 도움을 받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켰다. 그리고 생명을 되살리는 의식(儀式)을 행하였으나 오시리스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살 수 없게 되어 있어 사자(死者)의 나라의 왕이 되었다. 남편의 시체와 상관하여 이시스가 낳은 호루스는 세트와 싸워 마침내 이겨 상, 하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좋아하였고, 오시리스 신앙은 농경의례(農耕儀禮)와 결부되어 성행하였다.
오시리스 숭배는 자연 종교로서 출발했다. 오시리스는 식물의 성장과 나일 강이 가져다 주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오시리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자세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집트인의 신앙에 의하면, 오시리스는 아득히 오랜 옛날에 자기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과 그 밖의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쳐 주고 법률을 가져다 준 자비로운 지배자였다. 얼마 후 그는 그의 사악한 동생인 세트의 모반에 의해 살해당했고, 그의 시신은 갈갈이 찢겨졌다. 오시리스의 누이 동생이자 부인인 이시스는 그의 시신 조각들을 일일이 찾아내어 그것들을 다시 한데 모은 다음 그를 기적적으로 소생시켰다. 부활한 오시리스 신은 그의 왕국을 되찾고 얼마 동안 자비로운 통치를 하다가 결국에는 지하 세계로 내려가 죽은 자들의 재판관이 되었다. 그의 유복자인 호루스는 장성하여 세트를 살해함으로써 부친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다.
- 오시리스 신화의 중요성
이 신화는 본래 자연 신화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은 나일 강이 가을에 마르고 봄에 홍수가 닥치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시리스의 전설은 좀더 심오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신들과 연관된 인간적 특성들- 오시리스가 그의 신민을 향해 쏟은 아버지와 같은 심려, 그리고 그의 부인과 아들의 충직한 헌신- 은 평범한 이집트인의 정서에 호소력을 갖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신들의 삶 속에 투영된 자신들의 고난과 승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이 개인적 영생의 약속을 전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이다. 신이 죽음과 무덤에 대해 승리를 거둔 만큼 그를 충실하게 따르는 개인들도 영원한 삶을 조장받을 수 있었다. 끝으로 세트에 대한 호루스의 승리는 악에 대한 선의 궁극적 승리를 예시해 주는 것이었다.
*이집트인의 내세관
이집트인의 내세관은 중왕국 후기로 들어서면서 원숙하게 발전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인간이 지상에 남긴 시신의 소멸을 방지하기 위한 정교한 준비가 행해져야만 했다. 시신이 미라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부자들은 자신들의 미라에 음식물과 기타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남겼다. 그러나 종교가 성숙하면서 사후 세계에 대한 이와 같은 소박한 생각은 줄어들게 되었다. 이제 죽은 자는 생전의 그의 행실에 대한 심판을 받기 위해 오시리스 앞에 서게 된다고 믿어졌다. 이러한 심판 체계에 포함된 시험을 통과한 모든 죽은 자들은 물질적 기쁨과 소박한 즐거움이 있는 천상으로 들어간다. 백합과 망우수가 우거진 이곳의 늪지대에서 그들은 기러기와 메추리 사냥에 끝없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또는 그들은 맛 좋은 과일이 끊임없이 열리는 동산 한가운데 집을 지을 수도 있다. 그들은 뱃놀이를 할 수 있는 백합의 호수, 목욕을 할 수 있는 연못, 그리고, 노래하는 새와 온갖 온순한 동물이 살고 있는 그늘진 숲을 발견한다. 반면에 그의 심장이 사악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불운한 희생자들은 철저한 파멸을 당한다.
-미이라(Mummy) 고대 이집트에서의 매장 양식은 죽은 자와 관련된 오시리스 신화, 육체와 영혼 분리를 명확 하게 규명하는 독특한 인간관, 그리고 육체를 보존하기 위한 미이라로 인해 좀 더 구체적으 로 조명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누구 든지 죽은 후 오시리스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시신을 미이라(Mummy)로 보존 처리해야 한다는 장례 풍습은 이집트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되었다. 미이라는 그 종류에 따라서 땅속에 묻히거나 건조되어 보존된 자연적 미이라와 의도적인 절차에 따라 만들어진 인위적 미이라로 양분된다. 시베리아, 유럽, 남미의 고원지대에서 발견되는 자연적 미이라들은 주로 추운 지역에서 냉동된 상태로 보존된 것들이다. 그 외에 탄광, 늪지대 등에서 시신이 묻힌 후 산소가 빠져나가 썩지 않고 보존된 경우도 있고, 사막 지대 의 건조함 때문에 자연적인 미이라가 되는 경우도 있다. 미이라의 제작 과정은 고대 이집트의 단편적인 문서들과 특히 서기전 5세기 헤로도투스의 기록을 통하여 구체적인 과정들이 알려졌다. 먼저 "이부(ibw)" 즉 "정결의 장소"라 불리는 천막에서 시신을 천연 탄산소다(natron) 물로 씻은 다음, "아름다움의 집"이라는 의미의 " 페르 네페르(per nefer)" 천막에서 본격적인 미이라 작업이 진행된다. 시신에서부터 뇌와 내장들을 제거한 다음 간, 허파, 위장, 창자 등은 특별히 제작된 네 개의 케노푸스 단지(canopic jars)에 담아서 미이라와 함께 보존한다. 내장 중에서 심장을 시신으로부터 제거하지 않는 이유는 이 곳에 인간의 모든 정신이 담겼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신은 70일간 천연 탄산소다에 덮어두어서 수분을 완전히 제거한 다음 아마포로 전신을 감싸게 된다.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 미이라는 이집트의 초기 왕조시대(서기전2920-2575)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고왕국 시대(서기전 2575-2134)인 제 4왕조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신에서 내장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고 탄산소다를 내장들을 보존하는데 사용하였다. 중왕국 시대(서기전 2040-1650) 부터는 시신 자체를 보존하는데 탄산소다를 사용하였고 시신이 마르게 되면 아마포로 감싸고, 향수와 송진을 그 위에 부었다. 신왕국 시대(서기 전 1550-1070)에 들어와 미이라 제작 기술이 절정을 이루었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왕들의 미이라가 대부분 이 시대의 것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오시리스숭배와 내세관의 대중화
이집트의 역사가 발달하여 장례 의식, 특히 미이라 제작이 왕족 및 귀족들에게만 국한되던 것이 일반인들에게까지 퍼져나가면서 소위 "내세관의 대중화(Democratization of the After Life)"가 이루어졌다. 즉 누구든지 죽은 다음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미이라로 만들고 내세 여행에 필요한 장례 문서 및 부장품들을 갖추기만 하면 그 당사자의 영혼은 신들과 함께 영 생을 누리게 된다는 신앙이 확산되게 된 것이다. 또한 미이라 제작 기술과 전문인들의 양성으로 누구든지 죽은 후에 저승에서의 영생이 가능하게 되었다. 장례 문서들의 발전을 통해 볼 때 고왕국 시대의 피라미드 문서가 왕족들의 영생을 위한 것이었지만 중왕국 시대의 관문서는 내세관이 중산층에까지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나아가 신왕국 시대에는 왕족들에게는 무덤 벽화와 기록을 통하여 내세로의 안내가 이루어졌다면 파피루스에 기록된 죽은 자의 책을 통하여 일반인들도 영생을 얻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장례 의식에 따른 내세관에 기초한 고대 이집트의 죽은 자의 종교는 왕궁이나 신전에서만 국한된 특권층으로부터 출발하였지만 시대적 변화에 따라 차츰 대중에게 퍼져나가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 한 내세관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계기가 바로 오시리스 신화이며, 이와 관련된 매 장 양식의 보전과 전승을 통하여 고대 이집트 종교의 특성 중의 하나인 오시리스교의 전통 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윤리적 종교의 등장
이집트의 종교 발전은 중왕국 말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태양 신앙과 오시리스 숭배는 이 무렵에 두 신앙의 최선의 국면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통합되었다. 살아 있는 자들의 신이며 현세에서 선의 옹호자인 아몬의 직분은, 인간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고 죽은 자를 심판하는 오시리스의 기능과 거의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받았다. 이제 종교는 명백히 윤리적인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정의를 행하고자 하는 그들의 염원을 거듭해서 고백했는데, 이는 그러한 행위가 위대한 태양신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었다.
* 종교의 타락
제국이 수립되자마자 이집트인의 종교는 심각한 타락을 겪게 되었다. 종교에서 윤리적 중요성은 파괴되고 미신과 주술이 득세했다. 주된 원인은 힉소스인을 몰아내기 위해 오랜 동안 격렬한 전쟁을 치르면서 비합리적인 태도가 몸에 익숙해지고, 그에 따리 지성을 경시하게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사제들의 세력이 증대되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두려움을 이용했다. 그들은 죽은 자의 심장이 그의 본성을 폭로하지 않게 해 준다는 주술적 부적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제문을 판매했는데,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적힌 이 제문을 무덤에 함께 묻으면 죽은 자들이 천상계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문을 모아 놓은 것이 "사자의 서"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자의 서는 이집트인의 경전으로 인식하지만, 중왕국 이후에는 사자의 부장품, 즉 제문들을 모아 놓은 것일 뿐이다.
-사자의 서 死者-書 (Book of the Dead) 파피루스, 가죽 등에 성각문자(聖刻文字:히에로글리프), 신관문자(神官文字: 히에라틱문자), 민중문자(民衆文字:데모틱문자) 등으로 적어, 제18왕조 이후에 매장되었다. 사자(死者)는 사후의 세계에서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친다고 하는데, 그 경우에 외는 주문(呪文)이나, 신(神)들에 대한 서약에 대하 여 적혀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세관(來世觀)을 아는 데에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지만, 그 중에서도 사자의 심판을 취급한 대목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 기원은 매우 오래되어, 이와 비슷한 문장은 고(古)왕국 시대의 피라미드텍스트나, 중(中)왕국시대의 코핀 텍스트 등에서 볼 수 있다.
* 아케나톤의 종교혁명
이렇듯 사제들에 의해 종교가 주술적 체계로 전락하자 마침내 거대한 종교 혁명이 초래되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신왕국 시대 제18왕조의 왕인 아멘호텝 4세였다. 그는 가장 극악한 종교 타락을 시정하고자 시도했다가 실패를 맛보자, 그 후로는 아예 그 종교 체계를 절명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사제들을 신전에서 몰아내고, 전통적 신들의 이름을 공공 기념물들에서 삭제해 버렸으며, "아톤" (태양의 옛 명칭)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신을 섬기도록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멘호텝에서 아케나톤으로 바꾸고, 또 그의 부인 네페르티티도 네페르-네프루-아톤으로 바꾸었다. 아케나톤은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려는 생각에서 수도를 새로 엘- 아마르나 에 건설하고 이 도시를 새로운 신에게 바쳤다.
-아톤 (Aton) 아톤 숭배는 아크나톤(아멘호테프 4세)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기존의 국가 신 아몬을 대신하여 적극 추진되었는데, 얼마 안 가서 아톤 신앙으로 정착되었다. 아톤 신앙의 중심지는 현재의 텔엘아마르나로, 그곳에 있는 한 묘능(墓陵)에서 발견된 '아톤찬가(讚歌)'는 그 격조가 높기로 유명하다.
* 종교의 윤리성 회복
이러한 물리적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련의 새로운 교리가 개혁 파라오에 의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일정한 한계는 있지만 최초로 유일신교를 가르쳤다. 현존하는 신이라고는 오직 아톤과 아케나톤이 있을 뿐이었다. 과거의 신들과는 달리, 아톤은 인간이나 동물의 형상을 갖지 않았으며 생명을 주는 따뜻한 태양 광선으로 간주되었다. 아케나톤은 스스로를 아톤의 후계자이자 공동 통치자라고 생각했다. 파라오와 그의 부인은 아톤 신에게 예배를 드린 반면, 여타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신인 아케나톤에게 예배를 드려야 했다. 아케나톤은 아톤 신이 세계의 도덕적 질서의 창시자이며, 고결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보상을 베푸는 존재라고 주장함으로써 이집트 종교의 윤리성을 회복시켰다. 그는 새로운 신을 인간성에 유익한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존재로서, 그리고, 그의 모든 피조물을 자비로운 눈길로 굽어보는 하늘의 아버지로 묘사했다. 이러한 신의 일관성, 정직, 자비 등의 개념은 그로부터 600여년 후 히브리의 예언자들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등장했다.
* 종교혁명의 실패
종교 혁명에 대한 아케나톤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아톤 종교는 대중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대중은 여전히 과거의 신들에게 헌신적이었기 때문이다. 새 종교는 그들에게는 너무도 낯설었던 데다가 종전의 종교가 지녔던 매력, 즉 내세에 대한 약속을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아케나톤 이후의 파라오들은 아몬신의 사제들과 결탁함으로써 과거의 신앙을 회복시켰다. 아케나톤의 계승자로서 "투트왕" 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파라오는 그의 이름을 투탕카톤에서 투탕카멘으로 바꾸었고, 수도도 엘- 아마르나에서 옛 수도인 테베로 다시 천도하면서 과거로의 복귀를 주도했다. 그의 무덤 역시 옛 의식과 사후 세계에 대한 집착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였다. 그 후 이집트 종교에서는 의식주의와 주술에 대한 믿음이 커졌다. 사제들은 신들을 속여서 구원을 얻도록 해 준다는 제문과 부적을 팔았다. 그 결과 오시리스 숭배마저도 고매한 도덕성을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고대 이집트의 지배자; 파라오에 대해
1.파라오의 의미
이집트 사상과 역사, 사회의 중심에는 왕이 있다. 바이에의 표현에 따르면, 파라오는 "이집트라는 집단 존재의 심장이다."
파라오는 하늘에서 땅을 지배하는 신들의 후손이다. 파라오가 영광된 조상들에게서 유산을 받는 것은 바로 신으로서 이다. 신적인 자격으로 파라오는 지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인 이집트를 보호하는 것이다. 파라오는 --태양신 라(RA&RE)--에 의해 점지
되며, 지명된다.
이러한 태양의 연금술은 빛의 존재를 창조하고자 한다. 신의 계보를 이야기하는 신화들 에 따르면, 빛의 존재, 즉 파라오는 신과 여인의 결합의 산물이라고 한다. 따라서, 결코, 우리는 파라오의 행동들을 세속적인 각도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그 자리를 수행하는 사람의 품성이 어떠하든 간에, 파라오는 권력의 특수한 개념에 따라 만들어진다.
무엇보다 종교적 역할이 으뜸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전과 궁정 사이의 구별이 없으며, 종교와 국가를 따로 논할 수 없다. 종교활동은 국가의 근본적인 임무이며, 종교적인 국시가 정치, 사회, 경제 구조들을 결정한다. 그들에게 종교는 결코 개인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고대 큰 가문들의 사원에서 보듯이, 종교는 개인적, 국가적 삶의 구조였으며, 그 방향은 왕의 손 안에 달려 있었다. 파라오와 우주의 관계는 중요하다. '인간-태양' 으로서, 파라오의빛은 도처를 관통한다. '파라오-태양' 은 수백만 개의 귀를 지니기 때문에 모든 말을 듣는다.
파라오의 시각은 태양보다 더 날카롭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본다. 생명력을 위임 받은 파라오는 신의 의지를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러한 힘은 파라오에게 독재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왕국의 물질적, 정신적 삶의 책임자로 만든다.
제식을 조직하면서, 파라오는 계절이 우주의 법칙에 순환하고,
강물이 이집트를 풍요롭게 만들며, 태양이 떠오르도록 허락한다. 즉 고대 이집트에서는, 정신 영역과 물질 영역 사이에 결코 구별이 없었다는 점이다. 왕은 사제일 뿐 아니라 국가의 책임자였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고 그나라의 경우, 실제적인 힘을 지닌 파라오에 의해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결정적이다. 그래서 왕들의 힘이 쇠약해지거나 파라오의 권위가 흔들릴 때면, 이집트는 어둠의 시기를 맞는다. 신들이 돌보아 주지 않으며 경제는 쇠퇴한다.
신적 에너지를 물질 에너지로 조직하고, 집중시키며, 조정하기 위해서, 안정되고 강력한 중앙권력은 필수 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2.파라오의 대관식
파라오의 대관식은 서양 중세 시대의 '신비성사' 에 비견할 만큼 어마어마한 예식이었다. 제신, 여신, 그리고 모든 이집트인들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행사였다. 그들의 왕은 아버지 오시리스 성좌의 유산을 물려받는 호루스 신의 생생한 화신이기 때문이다. 왕좌에 오르는 동안, 파라오는 성정에 모셔져 예식을 굽어보는 신성한 조상들에게 절을 올린다. 대관식의 하이라이트는 왕관을 쓰는 것이다. 왕은 하 이집트를 상징하는 붉은 왕관과 상 이집트를 상징하는 흰색 왕관, 즉 두 개의 왕관을 받는다. 그것은 두 대지의 주신인 '호루스'와 '세트' 가 왕에게 왕관을 씌워주면서 생명르 전수한다는 의미이다. 그 순간 국가의 두 지역을 결합하고,남과 북을 새롭게 통일하며, 전왕 파라오의 죽음과 더불어 부서졌던 통일성을 복구하는 의식이 실천된다. 예식이 신전의 비밀 속에서 완수되는 동안, 밖에서는 환희에 찬 백성들의 축제가 벌어졌다. 본래 축제를 좋아하는 민족인 만큼 대관식 동안에는 향연과 잔치가 벌어지곤 했는데, 포도재배가 번창했던 나라였음을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축복받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왕이 아니라, 원칙이었다. 백성들은 군주의 역할을 하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파라오가 다시 옥좌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파라오가 대관식을 치르고 나면 커다란 네 마리의 기러기를 날림으로써 파라오의 대관식이 끝났으며, 이제 만가가 정의롭고 완벽하게 수행?것이라는 소식을 나라 전체에 알린다. 실무를 담당하는 행정부는 서기들이 준비하고 파라오가 직접 서명한 메시지를 통해 새로운 군주의 도래를 알린다. 그리고 즉위 첫해에 파라오는 왕국을 순례한다.
3.파라오의 삶
"왕들은 그들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공적인 생활뿐 아니라 사생활과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파라오의 시중을 드는 이들은, 팔려온 사람들이나 노예들이 아니라 20살 이상의, 교육을 잘 받은 최고 사제의 아들들이었다. 왕이 임무를 수행하는 시간은 법에 의해 정해져 있었고, 왕이라 할지라도 법을 마음대로 고칠 수는 없었다."
-시실리의 디오도르- 파라오의 옷 입기 역시 제식행위다. 왕관, 목걸이, 인조 수염은 신적힘을 지닌다. 그러한 신적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사제들의 본질적인 임무이다. 가발, 왕관, 신발을 만드는 사람들은 신성한 직무를 수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거리까지 왕에게로 다가 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궁전의 호루스 신으로서, 파라오는 일상적으로는 총리대신과 왕국의 일들을 의논한다. 수많은 알현을 받고 대신들의 청원을 받아야 한다. 신하들은 왕 앞이 아닌, 그가 구현하는 신적 원칙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그의 위엄은 너무 빛나는 것이어서, 어떤 이들은 파라오 앞에서 정신을 잃고, 또 어떤 일이든 왕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삼간다. 그가 발산하는 힘에 의해 감전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파라오의 삶에는 일상적인 것과 신적이 것이 불가분하게 섞여 있다.
Ⅱ.
1. 람세스 1세
제 19왕조는 나중에 유명한 파라오들을 많이 배출했지만 그 시작은 조용했다. 람세스 1세(이 왕조의 많은 왕들이 람세스라는 이름을 썼다)는 거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파라오가 되었다. 그는 호렘헤브의 제상이자 가까운 친구였는데, 호렘헤브는 상속자를 낳지 못하자 친구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 때 람세스는 쉰 살이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군 사령관인 세티의 아들로 직업군인 출신이었으며, 물론 왕족의 혈통은 아니었다, 이 집안의 고향은 델타 북동부의 아바리스인데, 이 곳은 400년 전 이집트를 침략했던 힉소스족이 수도로 삼았던 곳이었다. 람세스는 아주 짧은 기간 통치했기 때문에(약 2년 정도로 보임)역사에 거의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2. 람세스 2세
25세에 즉위한 람세스 2세는 흔히 그를 일컫는 "람세스 대왕"이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업적을 남겼다. 67년이라는 긴 재위기간 동안에 그는 모든 일을 대규모로 벌였다. 그렇게 많은 신전, 거상, 오벨리스크를 세운 파라오는 달리 없었다. 그렇게 많은 자식을 둔 파라오도 달리 없었다. 람세스 2세는 이집트 땅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겨놓고 90세가 넘어서 죽었다.
① 건축가 람세스 람세스 2세는 기념물 건축가로서 이집트의 파라오들 가운데 단연 우뚝하다. 그가 직접 건설한 구조물들은 그 규모가 엄청나다. 그는 카르나크와 룩소르에 커다란 신전들을 보탰으며, 구르나에 있는 아버지 세티의 무덤 신전과 아비도스 신전을 완성했고,
아비도스 근처에 자신의 신전을 건설했다. 그는 테베의 서쪽 강변에는 거대한 무덤 신전인 라메세움을 세웠다. 게벨 알-실실라의 사암 채석장에 새겨진 비문을 보면
라메세움을 짓기 위한 돌을 자르는데에만 적어도 3천명의 일꾼이 고용되었다.
그러나 람세스의 가장 위대한 건축사업은 이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누비아의 아부심벨 산기슭에 만들어놓은 두 신전이다. 두 신전 가운데 큰 쪽인 '대신전'의 위용은 엄청나다.
입구 양쪽에 둘씩 짝을 지은 높이 18미터이 왕의 좌상들 때문에
그 웅장함은 더욱 돋보인다. 이런 건축사업들을 벌이면서 람세스는 그 비용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는 금이 많이 필요했는데, 람세스는 이 귀금속을 제 18, 19왕조 테베 귀족들의 수많은 무덤에서 "공물"로 가져왔다고 한다. 토리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세티 1세 치세의 한 파피루스에는 실제로 동부 사막의 금광 지도가 그려져 있다.
② 죽음과 매장 람세스 2세는 재위 67년, 92세쯤에 서쪽으로 부름을 받아 신들과 합류했다. 그의 무덤은 오래전부터 왕들의 골짜기에 마련되었으며,
장식은 훌륭하지 않지만 세티 1세의 무덤과 규모가 비슷하다. 그러나 현재는 심하게 손상되어 거의 접근할 수가 없다. 단명한 투탕카멘의 무덤을 고려할 때,
람세스 2세의 무덤의 내용물의 화려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매장과 관련된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3. 람세스 3세
람세스 3세는 이집트의 마지막 위대한 파라오였다. 그는 지중해 세계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을 때 이집트를 통치했다. (지중해 세계에서는 트로이 전쟁이 벌어지고,
미케네가 몰락했으며,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나서 람세스 3세 치세에 이집트 해안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람세스 치세의 첫 4년은 조용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지위를 강화하고, 세트나크테의 유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남쪽 누비아는 조용한 식민지 비슷한 땅이 되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재위 5년 서쪽으로부터 침략을 받으면서 일이 터지기 시작했다.
① 람세스 3세와 해양민족들 해양민족들은 여러 부족의 연합체로 그들은 시리아에서 한동안 머물렀다가 육로를 통해서 이집트를 공격했다. 이것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이집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정착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적은 이집트 군이 본격 공세에 나서기도 전에 무너졌으며, 람세스는 테베의 신인 아멘의 은총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② 왕의 암살음모 람세스 3세 치세에 나온 또 하나의중요한 파피루스에는 독특한 사건을 통하여 궁중의 구조와 움직임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하렘 음모 파피루스'
라고 알려진 이 파피루스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왕을 암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집단의 재판을 다루고 있다. 왕으로서는 다행히도 이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으며,
음모자들은 체포당했다.
4. 람세스 4세
람세스 4세는 기원전 1151년경에 왕위를 계승했다. 새로운 왕의 첫 번째 임무는 아버지를 왕들의 골짜기에 매장하는 것이었다. 다이르 알-마디나의 일꾼들의 마을에서 나온 도편들을 보면, 의식이 시작되고 나서 4일이 안 되어 관례적인 선물들이
그곳에 도착했고 일꾼들은 일을 완전히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그는 6년밖에 다스리지 못했다. 람세스 4세의 무덤은 왕들의 골짜기 동쪽 이전의 무덤들이 모여 있는 곳 바로 너머에 자리 잡고 있다.
현실에는 커다란 석관 상자와 뚜껑이 거의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5. 람세스 5세와 람세스 6세
람세스 5세의 미라는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이 미라는 옆구리에 미라 처리를 위해서 내장을 꺼내려고 짼 자국이 다른 미라보다 훨씬 크다. 또 얼굴의 상태로 보건대 천연두를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람세스 6세는 8년의 치세를 누렸는데,
이것은 그의 두 형제의 경우보다는 길었다. 이 기간동안 근동의 넓은 지역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권은 급격히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람세스 6세는 왕들의 골짜기에 있는 그의 전임자의 무덤을 찬탈한 다음 크게 확장했다. 이 무덤의 중심은 둥근 지붕을 가진 커다란 채색 현실이다. 람세스 6세의 심하게 훼손된 미라는 1998년에 KV 35호에서 발견되었다.
6. 람세스 7세와 람세스 8세
람세스 7세는 기원전 1133년에 부친 람세스 6세를 승계했다. 그의 7년여의 치세느 SRJ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이르 알-마디나의 일꾼들의 마을에서
나온 파피루스나 도편의 기록을 보면, 이 시기에 이집트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했고 물가는 치솟았다.
람세스 7세의 무덤은 왕들의 골짜기 안에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골짜기 동쪽의 핵심부나, 람세스 6세의 무덤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무덤은 고대에 열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미라는 발견되지 않았다. 람세스 3세의 아들 람세스 8세는 불과 1년을 다스렸다.
그가 람세스 6세의 아들에게 승계해준 것은 왕위 계승에 계속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무덤이나 미라도 발견되지 않았다.
7. 람세스 9세와 람세스 10세
람세스 9세 즉위와 더불어 이집트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으며, 왕도 18년 정도의 치세를 누렸다. 그러나 기념물이나 기록 면에서는 별로 볼 만한 것이 없다.
람세스 9세의 무덤은 제 19왕조 후기와 제 20왕조의 "주사기형"터널들의 전통에 따라 만들어진 긴 무덤이다. 람세스 10세의 무덤은 제대로 조사된 적이 없으며, 그의 미라도 확인된 적이 없다.
8.람세스 11세
람세스 11세의 28년에 이르는 긴 치세와 더불어 제 20왕조는 막을 내렸다. 람세스 11세는 왕들의 골짜기 동쪽의 중심부 바로 외각, 아멘호테프 3세의 장인 부부인 유야와 투야의 무덤 너머에 있는 좁은 와디를 따라 약간 올라간 곳에 무덤을 팠다.
무덤은 고대에 이미 개봉되었지만, 1980년에 브루클린 박물관이 과학적 조사를 담당했다. 조사결과는 뜻밖이었다. 람세스 11세는 이 무덤에 매장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무덤은 다른 무덤들처럼 미완성이었다. 그러나 이 무덤에 있는 파편들 중에서 그 이전의 왕들의 매장과 관련된 많은 유물 조각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건대, 이 무덤은 버려진 뒤 왕의 미라들 가운데 일부를 다른 곳에 감추기 위해서 옮기는 과정에서.....
이집트의 쇠퇴하는 경제에 보탬이 될 만한 귀중품을 제거하는 작업장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투트모세 3세의 관에서는 황금 잎을 깍아 내기도 했다.
람세스 11세의 미라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다른 행방불명된 미아들과 함께 제 3의 보관소에가 있는지도 모른다.
Ⅲ.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는 지상에서신왕이었으며, 죽으면 자동으로 신이 되었다. 그들은 실제로 삶과 죽음의 권한을 손에 쥐고 있었다. 왕의 상징인 구부러진 지팡이와 도리깨가 이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자원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는데, 이것은 현대 국가에서는 흉내 내기 힘든 것이다. 기적적으로 도굴꾼들의 손길을 피한 귀중한 금속과 장신구등 방대한 보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투탕카멘의 순금 내관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예술품이다.
이것의 무게만 따져 현재의 금괴가격으로 환산해보더라도 거의 150만 달러에 육박하며, 매장용 황금가면은 15만 5천 달러에 달한다.
투탕카멘은 큰 업적을 찾아볼 수 없는 작은 군주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람세스 2세와 같은 더 위대한 파라오들의 부는 이와 비교할 때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결론적으로 아직 이집트 파라오의 묻혀진 역사는 앞으로도 더 발굴 발견 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