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도 채무 면제 시책을 시행하는 데에 정치 엘리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적절한 증거를 보여 준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자료와는 달리, 가장 잘 자료화된 증거는 왕의 지도력이 아니라 BCE 6세기 초 십여 년간의 집정관이었던 솔론의 집행력(archonship)에서 나타난다. 솔론 이전 시대까지 아테네는 부채 위기 상태였다. 부유한 소수는 더 부유해지고 소유지도 넓어지는 반면 아티카(Attica)의 소농장들은 급속하게 저당 잡히고 있었다. 결국 많은 수의 소지주들은 자기 땅을 잃었고, 땅이 없는 노동자인 헥트모로이(hektmoroi)들은 생존을 위해 진 빚을 갚지 못해서 노예로 (가끔 외국으로도) 팔리는 예가 많아졌고, 혹자는 이런 비운을 피하기 위하여 유랑하였다. 대중은 안정을 줄 독재자를 희구했고, 토지 재분배를 촉구하였다.
귀족 정치의 온건주의자였던 솔론은 독재와 토지 재분배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를 모두 반대하였는데, 대신 그는 일련의 채무 면제로 계급간의 갈등을 조정하려고 노력하였다. BCE 594년에 그는 이례적으로 입법권을 가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고, 비록 아테네에 한했지만, 당연히 경제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현존하던 모든 부채를 취소했고, 그 이후의 부채 노예 제도 및 채무자의 신체를 담보로 하는 모든 형태의 저당이나 부채를 금지하였다. 가능한 그는 외국으로 팔린 모든 아테네의 채무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한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땅의 한계를 책정하였다. 국제 생필품 가격이 오르면 지방 인구에게 식량 공급을 원활하게 할 수 없으므로 올리브유를 제외한 모든 농산물을 아티카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경제 개혁에 대한 자신의 온건한 시도에 대해 솔론은 공공 여론을 형성하고 합의를 얻고자 팜플렛을 쓰고 살포했다. 그 시대의 기준에 따라 시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일부는 채무 면제의 양태들과 그들이 가진 강력한 정치적 대표성에 대한 이례적인 그리스의 변증의 용례로서 전래되었다.
솔론의 개혁은 큰 분쟁을 초래했다. 온건주의자인 그는 극소수의 아테네인만을 만족시켰을 뿐이다. 타격을 입은 부자들은 분노했고, 더 급진적 개혁을 바란 가난한 사람들은 만족할 수 없었다. 솔론이 집정관을 물러난 뒤, 곧 그의 노선을 찬동하는 해안당(the party of the Coast)과 그에 반대하는 평지당(the party of the Plain)으로 분열되어 실권을 쥔 정치 지도자들간의 당파 분쟁이 터져 나왔다. 이 분열은 단순히 계급적 노선만이 아니라 솔론의 시책 집행 상의 사소한 문제들 때문이기도 해서, 어떤 결정에 손해를 본 이들은 그 결정에 도움을 받은 자들과 대립하였다.
출처: http://kr.blog.yahoo.com/pleamore/6633
귀족세력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은 드라콘(Dracon) 입법을 계기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BC 621) 이 법은 그리스 최초의 성문법으로 내용면에서 가혹한 점이 있으나 귀족 출신 재판관의 권한을 제한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에선 농민 생활 상태가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고, 도시 중산층은 좀 더 가시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BC 594년경 아르콘으로 선출된 솔론(Solon)이 개혁을 단행하였다. 솔론은 가난한 농민의 채무를 탕감하고 채무노예를 금하며 토지소유의 상한을 결정하는 긴급조치를 취하였다. 정치개혁은 귀족의 권한 남용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었는데, 첫째 4백인회를 창설하여 중산층의 정치참여를 허용했고, 둘째 하층계급에게 민회 참여권을 주었고, 셋째 전체 남자시민의 선거에 의한 최고법정을 설치하는 한편 배심원 제도를 수립하였다. 정치개혁이 귀족정치를 근본적으로 청산한 것은 아니었으나, 귀족계급이 독점한 정치적 지배권을 축소하고 국가적 정책결정에서 시민 발언권을 상대적으로 확대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시민계층을 재산소유 정도에 따라 4계급으로 나누어 정치적 위상을 규정하였다. 이 사회구분은 가족적 유대관계를 완화하고 씨족집단의 사회적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나 재산소유에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금권정치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솔론개혁은 사회적 긴장을 해소하는 근본적인 정책이 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하나의 계기가 되긴 했지만 미봉책에 불과했으므로 도리어 사화각층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파당으로 나뉘어 정권 싸움을 하였다. 소농계층은 자유를 얻은 대가로 땅을 잃는 한편 새로운 영농방식에는 적응하지 못하였다. 한마디로 솔론의 개혁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마침내 여러 불만 요소들이 결합하여 참주정치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출처: http://history.wonkwang.ac.kr/school/west/ancient/atenagig.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