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라야누스 [ Trajanus Optimus Augustus]황제의 기념주 |
트라야 누스는 외부 이탈리아 출신으로는 최초의 황제이며 고대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였던 5현제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던 인물이다.
5현제가 출현하기 이전 로마는 티베리우스, 칼라쿨라, 네로로 이어지는 제1제정 말기의 독재와 폭정이 시대였다.
하지만 네로가 반란에 의해 로마에서 탈출하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서기 69년 로마의 제2 제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제2제정 초기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황제가 원로원과 대립하며 밀고와 반역죄 처형이 연속되는 공포정치 속에서 암살되었다.
그 뒤 네르바가 원로원의 지지아래 제위에 올랐는데, 그는 군대의 통제에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후계 황제로 군부 출신의 트라야누스를 지명하고 양자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트라야누스와 그 뒤를 이은 3명의 황제도 아들이 없어서 후계 황제를 양자로 대신 이었으므로, 네르바(재위 96∼98)·트라야누스(재위 98∼117)·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138∼161)·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의 5대까지 양자 황제시대가 이어졌다. 이것을 안토니누스왕조라고 하며, 영국의 E. 기번이 <인류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찬양한 <오현제(五賢帝)>였다.
트라야누스는 내정면에서 로마의 안정을 추구하였지만 뚜렸한 치적은 없었다. 하지만 군부 출신이었던 만큼 대외원정은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101년부터 실시한 다뉴브강유역의 다카이원정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다키아는 그곳의 용맹한 왕 데케발루스 때문에 도미티아누스가 할 수 없이 포기한 곳이었다. 2차례의 원정(101~102, 105~106)에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의 수도 사르미제게투사를 점령했고 데케발루스는 포로가 되지 않으려고 자살했다. 그리고 트라야누스 황제는 이 원정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에스퀼린스 언덕을 기념 공원화 하였다.
에스퀼린스 언덕에는 화려한 공중목욕탕이 들어섰으며 건축가인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가 웅장한 공회장(公會場)을 새로 설계했다. 거기에는 주랑(柱廊) 현관이 딸린 광장이 있었고 그 중앙에 황제의 거대한 기마상 즉 트라야누스 기념주가 세워졌다.
높이 약 38m, 지름 약 3.9m로 만들어진 기념주는 세운 도리스식의 대리석 으로 만들어졌다. 기둥 표면을 나선모양으로 회전시키고 그 위에 황제가 다키아를 정복하기 위해 벌인 2차례 전쟁의 장면들을 이야기체로 표현한 약 2500명의 사람과 말, 건축물·요새·주변풍경 등을 매우 섬세하고 사실감 있게 표현하여 미술사적으로는 물론 역사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여기서 원정을 그치지 않고 동방에 있는 로마의 오랜 적대세력인 파르티아인을 상대로 2차 대원정을 실시하였다. 105~ 106년에 원정준비를 위해 그의 휘하 장군 한 사람이 유대의 동쪽과 남쪽에 면해 있는 아라비아의 나바테아 왕국을 합병했다.
그런데 110년경에 파르티아인들은 로마에 우호적인 아르메니아의 왕을 폐위시키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113~ 114년에 트라야누스는 그를 복위시키기 위한 원정을 다시 벌였다.
이듬해에 그는 상(上)메소포타미아를 합병하고 같은 해 또는 그 다음해에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점령하기 위해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내려갔다. 그는 페르시아 만에 당도한 뒤 자신이 너무 늙어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정벌 위업을 재연할 수 없는 것을 한탄하여 울었다고 한다.
현재 트라야누스 기념주 위에는 트라야 누스 황제의 기마상이 아니라 1588년 바뀐 성 베드로상(像)이 있다. 하지만 주춧대 속에는 황제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고 하니 당시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았던 역사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